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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람과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몇 번 해보셨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시작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옆사람을 사랑하시라니까요.
설교 제목을 정하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제목이 내용을 다 담기가 어렵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목대로만 설교하다가 보면 내용이 단순해져서 설교의 풍성함이 풍성함을 잃게 되기도 합니다. 저는 수백 개의 기도 제목들 설교 제목들이 제 컴퓨터와 또 제 이제 핸드폰에 다 저장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이 설교 제목들을 한 번씩 다 읽어보고 또 그중에 맞는 것이 있으면 선택을 하고 없으면 다시 고민을 통해서 설교 제목을 정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교한 설교 중에 보통 설교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안 지워지고 계속해서 저의 머리에 강력하게 남아 있는 설교 조목이 있습니다. 2012년쯤에 제가 한 설교인데요. 나는 아간 실패의 원인이다라는 설교 제목입니다. 100% 제 개인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어떻든 수시로 이 설교 제목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요. 그리고 제 마음을 찌르기도 합니다.
아간의 범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작은 성인 아이성 전투에서 대패했던 거예요. 이길 수밖에 없는 이겨야 하는 전투였어요. 그런데 졌어요. 성경은 이 원인이 아간에게 있다고 분명하게 지목합니다. 그러니까 원수가 강력해서 이스라엘이 전쟁에 진 것이 아니라 아간의 범죄로 인해서 아이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패의 원인이 이스라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었어요. 원수 때문에 원래 전쟁은 원수 때문에 져야 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원수 때문에 전쟁을 진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요나가 타고 있는 배는 점점 더 요동을 쳤어요. 왜냐하면 바다의 파도가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타고 있는 배가 건너고 있는 바다는 점점 더 거세졌고 사나워졌고 폭풍우가 세졌습니다. 당연히 배도 이 파도와 폭풍에 의해서 크게 요동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다가 사나워지고 배가 바다로 인해서 요란하게 된 것은 성경은 명확하게 요나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원인을 정확하게 지목해냅니다. 요나도 처음에는 이 파도가 자신 때문에 일게 된 것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웬만하면 알 텐데 그래도 우리가 양심적이라서 내 삶에 너무 어려운 문제가 많으면 혹시 내가 죄가 많아서 그런가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런가 내가 예배를 잘 드리지 않아서 그런가 내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아서 그런가라고 생각하게 되잖아요.
근데 요나는 제비를 뽑아서 자신이 뽑힌 후에야 이 파도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많은 성도들은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여러 차례 지목을 당하고 나서야 그때서야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우리는 신앙이 조금만 있어도 자신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신앙이 좋아도 자신 때문에 교회가 문제가 있고, 자신 때문에 가정에 문제가 있고 자기 때문에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였다는 것은 그가 신앙이 있었다는 의미예요. 이런 것을 모를 정도로 모를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요나 정도이면 쉽게 이 풍랑의 원인이 이 파도의 원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유나는 제비에 뽑힐 때까지 자신이 이 파도와 이 난리와 이 손해의 원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5절 하반절에 보면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이 부분을 70인역이라는 성경에서 보면 이렇게 번역을 해놨어요. 70인역은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이렇게 헬라어로 번역해 놓은 성경이에요. 잠이 들었고 코까지 골았다. 이게 이제 72년의 번역이에요.
그러니까 요나가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잠이 들었는데 코까지 골면서 잤다는 거예요. 이 말은 완전히 골아떨어졌다는 겁니다. 만약에 유나가 이 파도의 원인이 자기라면 이렇게 곯아 떨어져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그럴 수 없었을 거예요.
여러분 오래된 뱃사공들이 혼란에 이를 만큼 파도가 컸어요. 여러분 뱃사공들은 기본적으로 여러분과 저와는 이 심장 자체가 달라요. 웬만한 파도에는 요동치지는 않아요. 근데 이 사람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할 정도이면 어마어마한 파도가 쳤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요나는 이 난리의 원인이 자기인 줄 몰랐기 때문에 배 밑층에 내려가서 잠이 들었는데 너무 깊이 잠이 들어서 코를 골면서까지 잠을 잤습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서 잤다 뭐 이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본문으로 보여지는 측면만 보면 요나는 이 원인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요약하면 지금 파도가 거센 것, 지금 뱃사공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손해를 겪고 있는 것은 요나 때문이었습니다. 뱃사공이 잘못하거나 승객들이 잘못해서 잘못하고 범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었어요.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한번 적용해 보면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성도들의 죄 때문이라는 거죠. 우리는 항상 세상에서 교회의 문제를 찾아요. 세상에 죄가 많아서 교회가 어렵다 세상이 어찌어찌해서 교회가 힘들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오늘 본문에서만 그냥 충실히 잘 우리가 해석을 하면 교회 때문에 세상이 어려운 거예요. 교회가 어려운 것도 성도들의 죄 때문인 것이고요. 그러니까 세상 때문이 아니고 이단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세상도 이단도 여러분과 저를 교회를 얼마든지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러므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범죄 때문에 교회가 힘든 거예요.
교회가 힘들면 세상을 핑계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사악해서 세상에 안티기독교인들이 많아서 세상에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반기독교적이어서 교회가 힘들다. 아니요. 교회가 진짜 힘든 이유는 교회 내부에 있어요. 교회가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교회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목사가 교회일까요? 아니요. 목사만 교회는 아니에요. 성도가 곧 교회이니까 목사, 성도 모두가 다 곧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와 성도가 범죄했기 때문에 교회가 힘든 것이지 세상 때문에 교회가 힘든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회개했던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이 옳은 거였어요. 세상이 힘들 때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더욱 본인들이 회개를 한 거예요. 교회의 죄를 가지고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가지고 회개를 했어요.
이 모든 소란은 요나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나 때문에 풍랑이 임했던 거예요. 뱃사공들과 승객들의 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요나의 죄 때문에 풍랑이 잃었고 큰 손실을 입게 된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요나 때문에 이 풍랑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공들은 요나의 목숨을 살리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13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하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룡함으로 능이 못한지라
요나를 살리려고 했지만 문제는 파도가 점점 더 강력해져 갔습니다. 이 상태로 두면 모두가 죽게 되는 상황을 맞을 것이 뻔했습니다. 결국 이제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바다에 던지자마자 파도와 바람이 다 멈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풍랑은 정확하게 뱃사공들이나 승객들의 범죄 때문이 아니라 요나의 죄 때문에 이 풍랑이 이루었던 거예요.
교회가 어려운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 때문인 거예요. 더 나아가서 세상이 어려운 것도 성도 때문인 거죠. 요나 때문에 뱃사공이 고통을 겪었잖아요. 요나 때문에 승객들이 고통을 당했잖아요. 요나 때문에 많은 물건들을 다 잃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교회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이 세상에 광풍을 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말 우리가 잘 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이렇게 이해하는 성도들도 많지 않고 이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대부분 아시긴 아시겠지만 설교하기 되게 어려운 내용이에요. 제가 요즘 마음에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나나 교회나 우리가 온전해질까 여러 생각을 했지만 그중에 하나가 말씀을 가감없이 한번 전해보자. 성도가 믿음이 약할 것을 미리 예상해서 좀 센 부분을 빼거나 이건 우리 교회의 아킬레게스 번 같은 거라서 말씀을 좀 제외시키거나 이 부분은 나와 관련된 것이라서 내가 설교를 빼거나 이런 작당은 내가 하지 말자 그냥 하나님 내게 주신 은혜대로 말씀을 전하자 이런 다짐을 한 번 했어요.
새벽에도 잠깐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이 세상을 어렵게 했다는 거예요. 성도가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반대로 생각해요. 세상 때문에 교회가 곤란을 당하고 세상 때문에 성도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교회 때문에 세상이 어려움을 당하고 성도 때문에 세상이 어려움을 당하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자연 재해가 일어나면 세상 사람들의 죄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 땅 사람의 사람들이 범죄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해서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여러분과 저에게 전혀 다른 진실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우리 죄 때문에 교회의 불순종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당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재앙이 일어날 때마다 회개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인 거죠. 만약에 세상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너무 감사한 일이고 1차적으로는 세상에 재앙이 있고 세상에 환란이 있고 세상에 어려움이 있으면 교회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맞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예배를 회복해야 될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아니요. 여러분과 저가 우리가 예배를 회복하면 세상이 평안해지기 때문인 거예요.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세상이 평안해져요.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도 멈춰지게 됩니다. 문제는 성도들의 불신앙과 성도들의 죄 때문에 이 땅의 재앙이 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제발 이 많은 원인을 세상에 찾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이 불순종해서 세상 사람들이 사악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못돼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우리 때문에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15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짐에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강풍의 원인이 요나였던 거예요.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마자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강풍의 원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뱃사공들의 범죄 때문도 아니었고요. 짐을 싣고 배를 타고 다니는 상인들의 범죄 때문에도 아니었어요. 요나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세상에서 찾지 말아야 돼요. 물론 세상이 약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결론적으로 심판하기는 하셔요. 그렇지만 교회가 어렵고 또 삶이 어려울 때 그 원인을 세상이 아닌 우리는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돼요. 세상이 어려운 것도 교회의 잘못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 바른 신앙이고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회사가 어려움이 오면 경제가 어려워서 거래처가 갑질을 해서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주변에 경쟁자가 많이 늘어나서 회사가 어렵다고 핑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죄 때문에 우리 회사가 어려운 건 아닐까라고 한번 살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다니는 우리 회사의 어려움은 우리 직장의 어려움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살지 않아서 나 때문에 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내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내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가 아닌 내가 속해 있는 세상 공동체에 하나님의 심판과 장은 내릴 수 있다는 것이 요나의 삶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운 것은 성도들의 죄 때문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나라가 어려운 것과 그것은 또 나와 무관한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나라가 어려운 건 여러분과 저의 죄 때문에 나라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죄를 타인에게 전가시켜요. 그게 나의 죄인데 타인의 죄인 것처럼 말하고 하나님이 나의 죄를 지적하셨는데 타인의 죄를 지적한 것처럼 말해요.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신다면 누구의 죄를 먼저 지적하실까요? 저의 죄를 먼저 지적하시죠. 그리고 난 이후에 제 주변의 죄도 포기 하시겠죠. 제 주변의 죄를 먼저 지적하고 막 그 사람들을 책망하고 한 후에 제 죄를 돌이켜보게 할까요? 순서는 틀렸어요. 먼저 저의 죄를 보게 할 겁니다. 지금 사회가 어려운 곳은 교회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책임이라는 것은 대사회적인 책임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많은 물질을 보태서 세상을 도와야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된다. 이걸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그렇게 해야 되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감사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 사회가 어려운 것은 교회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교회가 구제를 하지 않아서 세상이 어려운 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께 범죄해서 세상이 어려운 거예요.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사랑을 더 많이 베풀지 않아서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교회가 범죄해서 세상에 세상이 어려운 거예요.
이 사실을 우리가 마음에 꼭 새겨야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교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 항상 그렇죠 교회 안 다니는 누구 때문에 내 남편 때문에 우리 집이 이렇게 어렵다. 교회 안 다니는 누구 때문에 우리 가정이 이렇게 어렵다. 가정이 하나로 일치가 되지 않는다. 연합이 되지 않는다. 100%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에 반드시 한 번 생각해야 될 게 있어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우리 집안이 어려울 수도 있는 거예요. 예수 안 믿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 때문에 우리 이것 항상 망각하고 살아가더라고요.
그러니까 원래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닮아서 핑계를 자라잖아요. 교인들은 기본적으로 핑계에 재능이 있어요. 그래서 잘 핑계를 대요. 조금 생각해보면 가정이 어려운 건 자기 때문인데 굳이 교회 안 다니는 누구를 들먹여가면서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 가정이 어렵다고 교회가 거역하고 불순종의 길을 걷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어려운 것입니다.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기준입니다.
할렐루야 성도의 삶은 세상과 무관한 게 아니에요. 교회도 세상과 무관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중세 시대만 봐도 교회의 부패는 그리고 수도원의 부패는 성직자들의 부패는 부패가 중세의 부패를 가져온 거예요. 사회의 부패를 가져온 거예요. 교회가 부패해서 중세 시대가 부패했던 것이고 수도원이 부패해서 성직자들이 부패해서 중세 시대가 부패했던 거죠. 세상이 부패해서 성직자들이 부패한 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를 보고 심판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내용에 보면 뭐가 없어서 심판한 거예요? 의인 열명이 없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거예요.
그럼 누구 때문에 망한 거예요? 의인이 없어서 망한 거잖아요. 의인이 없기 때문에 망한 거예요. 그럼 그 의인이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성을 불로 또 유황으로 심판하셨고 소금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곧 세상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여러분 이 사실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려야 하는 것, 예배를 더 영광스럽게 드려야 하는 것, 예배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세상을 위한 길이기도 하기 때문인 거죠. 교회가 예배를 잘 드리면 교회가 예배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면 성도가 예배자의 삶을 살면 교회 때문에 세상이 평안해질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회에 충성을 해요. 내가 교회를 충성하면 곧 세상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해요. 실제로 의식의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성도가 삶의 예배도 온전히 드려요. 의식적인 예배 지금 여러분 의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죠. 이 예배를 진심으로 온전히 참되게 드리는 사람이 삶의 예배도 온전하고 참되게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참되게 사랑하는 사람이 직장도 참되게 사랑해요. 여러분 교회 사랑하고 직장 사랑의 차이가 난다면 이게 문제가 있는 거죠. 교회를 사랑하는 만큼 직장도 사랑하는 게 정상인 거예요. 세상과 교회는 분리된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분리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결국 한 공동체라는 거예요.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면 세상이 평안해지고 성도가 성도의 삶을 잘 살면 세상도 안전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도시에 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어렵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져야 될 사명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회피했어요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서 있으면서 주변에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들이 여러분과 제 눈에 얼마나 많이 들어왔어요 저부터도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다 순종하지 않았잖아요. 결국 이것이 이것이 교회의 어려움을 가져오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알 때가 되었습니다. 마치 요나가 자신 때문에 풍랑이 온 것을 안 것처럼 이제 교회도 성도들도 우리의 잘못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우리의 책임도 알 때가 되었습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풍랑이 온 것을 알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져 던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질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고 교회 때문에 세상이 은혜를 누리게 되는 거예요.
교회는 세상의 기준이고 성도도 세상의 기준이에요. 우리는 항상 세상을 기준 삼아 살아가요. 그래서 세상이 자라면 교회도 평안하고 세상이 안전하면 교회도 안전하고 세상이 어떤 문제가 있으니까 교회가 문제가 많다 이렇게 생각하죠. 아니요. 우리가 기준이에요. 우리가 바로 하면 우리가 바로 서면 세상이 우리 때문에 복을 받고, 세상이 우리 때문에 은혜를 누리고 세상에 우리 때문에 평안해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원하는 삶인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사람들은 주님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주님께 희생 재물을 바치고서 주님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
이제 스스로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를 보고, 그리고 풍랑이 그치는 것을 보고 배에 있던 사람들이 두 가지를 해요. 하나는 하나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요.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거예요. 서원했단 말이 여러 가지로 이렇게 번역이 되는데 그냥 오늘 맥락과 잘 살펴서 번역을 하면 믿기로 작정한 거죠.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작정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기로도 작정한 거예요. 기준이 바로 서니까 세상이 바로 세워진 거죠. 요나라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삶이 바로 세워지니까 뒤에 있는 뱃사공과 승객들의 삶도 바로 세워진 거예요.
세상의 규제는 우리 교회가 바로 서면 세상이 바로 서고요. 세상의 기준인 여러분과 제가 바로 서면 세상도 바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온전히 섬기면 섬길수록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불신 가족이 돌아오고 불신 이웃이 돌아와요.
우리는 항상 교회 다니지 않는 불신 가족들 때문에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 아닙니다. 여러분 때문에 우리 때문에 우리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 거예요. 내가 온전한 예배자가 되지 않아서 내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지 않아서, 내가 온전히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 서지 않아서 내가 기준이 되지 않아서 나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거지 그들 때문에 내가 고통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요나의 교훈을 따르면 교회가 교회 다닌 성도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아서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준이고 성도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초등학교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면 요즘은 운동장 조회가 거의 없잖아요. 저희 때는 아직 이걸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런 일제시대의 의례들이 초등학교에 저는 초등학교죠. 국민학교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거의 매일 모여서 거의 매일 모여서 이렇게 조례를 했던 것 같아요.
운동장에서 근데 선생님이 딱 한 명만 잡아요. 누구냐 하면 기준을 세운 친구 그 친구만 딱 세워서 기준 하고 하면 이 친구가 기준을 하고 손을 들고 딱 자리를 쓰면 순식간에 줄이 착착착착 이렇게 맞춰져요.
여러분 어린 애들도 기준이 잡히니까요. 줄을 바로 서더라고요. 우리가 1학년 2학년 때 어렸잖아요. 그 어릴 때도 기준이 6학년 5 6학년 형들이 기준을 바로 서니까 1 2학년 우리도 줄을 바로 서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서는 것이지 세상이 바로 서서 우리가 바로 서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세상을 탓하지 말고 내 안에 불순종이 있는지 범죄가 있는지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로 온전히 서는 날들을 우리가 함께 기도합시다. 저도 연약하고 여러분도 연약한 사람이잖아요. 저 말씀 이렇게 전하지만 제가 과연 세상의 기준 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이렇게 막 핏대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막 핏대 세워서 말씀은 전하지만 과연 제가 기준되는 그런 삶을 살 만큼의 사람일까요? 저도 부족이 많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알고 최소한 성도가 기준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되는 거죠.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기준이다. 교회 다니는 내가 바로 예배하면, 우리 가정이 교회 다니는 내가 바로 신앙생활하면 우리 회사가 교회 안에 내가 바로 서면 내 주변의 이웃들이 교회가 바로 서면 그 교회가 있는 동네가 안전해지는 거예요.
성도가 성도로 온전히 세워지고 교회가 교회로 온전히 서는 날들을 우리 함께 기도하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부흥이 우리 목장 교회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주변이 복받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목장 교회가 여기 있는 것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랑이 되는 교회가 저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의 다짐을 하는 세상의 기준이 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