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라이머 김세준 (발췌 : ER 홈피에서 한상섭씨의 글)
클라이머 김세준
작성자 : 게슈타포 추천 : 0 조회 : 518 작성일 : 2009/12/29 13:30:01
메루피크 정상에서, 하늘의 길을 열었다는 성취감에 눈물을 흘리다
지난해 7월 김세준은 인도 히말라야의 메루피크 북벽을 등반했다. 메루피크는 에베레스트(8,848m)나 K2(8,611m)처럼 이름난 8천 미터급 고봉은 아니지만, 높이 600m 높이의 북벽은 당시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험난한 벽이었다. 메루피크 북벽에 도전한 김세준과 왕준호, 김태만 세 클라이머는 벽 등반 기점까지 장비와 식량을 올리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북벽은 먹구름 속에 얼굴을 감춘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며칠간 기다리다 식량이 아슬아슬해지자 김세준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단 한번의 시도로 정상까지 밀어붙이자는 계획이었다. 세 대원은 7월 5일 C2(6,150m)를 출발한 이래 13일까지 자벌레 같은 오름짓을 매일 매일 거듭했다. 바위틈에 박힌 눈과 얼음을 파내며 암벽을 오르는 것만도 고통스런 일이건만 총알 날아가는 소리를 내며 퍼붓는 낙석과 스노 샤워(snow shower, 눈가루가 퍼붓는 현상)는 툭하면 긴장케 하고, 어렵사리 설치한 확보물이 빠질 때는 1,000m 아래 빙하로 처박히는 듯해 심장이 콩알만해지곤 했다. 추락의 공포로 인한 극도의 긴장은 몸을 마비시켰다.
빙하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암벽에서 하룻밤을 지내려면 허공침대를 설치해야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친 뒤 드러눕는 허공침대는 따스한 방 이상으로 안락했다. 하지만 쇠못 두세 개에 매단 허공침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대도 기우뚱거려 가슴 졸이게 했고, 눈보라가 치면 침낭뿐 아니라 얼굴마저 허옇게 덮어 온몸이 얼어붙게 했다. 매일 새벽 첫 등반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두 사람이 허공침대에서 짐을 정리하는 사이에 한 사람이 등반에 나섰다. 어느 날 김세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졸음이 덜 깬 상태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느 순간 로프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김세준은 미사일이 발사되는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선등에 나선 왕준호가 추락하면서 로프가 딸려나가는 상황이었다. 곧 로프가 팽팽해지면서 왕준호는 줄에 거꾸로 매달렸다. 왕준호는 한 시간 반이나 오른 게 허사가 됐다며 욕 한번 해대는 것으로 추락의 충격을 떨쳐 버렸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온 몸에서 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등반을 해야 하는 것 또한 고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반 8일째, 모든 식량이 떨어지고 말았다. 1주일로 예상하고 나선 등반이 뜻밖에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굶주림은 익숙해질 수 없는 고통이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것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헛구역질은 속을 또 다시 뒤집어놓았다. 그래도 김세준 대장과 왕준호, 김태만 대원의 머릿속에 포기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한 치 한 치 내 손으로 잡는 바위는 태초이래 처음 잡는 미지의 세계이기에 흥분이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정상에 서게 되리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김세준은 후배 두 명과 함께 북벽 세계 첫 등반이란 기록을 세우며 메루피크 정상에 올라섰다. 후배들과 부둥켜안자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서 벌인 사투였지만 또 하나의 길을 완성시켰다는 성취감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늦게 시작한 등반, 그러나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김세준은 짧은 기간에 거벽 클라이머의 반열에 오른 산악인이다. 그가 산에 입문한 것은 이제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1969년 여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경북 기계공고를 나온 김세준은 군 복무를 마친 뒤 1991년부터 서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 속에서 성장해온 그는 큰돈을 벌고 싶었다. 유통업에 종사하며 몇 년간 일을 배운 뒤 작게나마 사무실을 차려 직접 납품을 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10년쯤 애를 쓰자 자리가 잡혔다. 한데 몸은 말이 아니었다. 거래처 사람들과의 만남은 으레 술자리로 이어졌고, 횟수가 잦아질수록 몸은 엉망이 되어갔다. 5년쯤 헬스에 열중해 몸에 대해 자신감이 생길 즈음인 1998년 1월, 스포츠 신문에 실린 클라이머 부부 최승철(98년 탈라이사가르에서 추락사)-김점숙씨의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의정부 부대고기 골목에 위치한 건물 지하 실내암장에 들어서자 몇몇 사람이 난로에 둘러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시간 까먹고 있는 곳이다 싶었다. 당시 샤모니 실내암장의 회원들은 스포츠 클라이밍뿐만 아니라 암빙벽과 인공등반 등 등반의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지닌 클라이머들이었다. 그 날 이후 김세준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배우다가 한밤중에 의정부 근교의 폭포로 이동해 자동차 라이트 불빛 아래 빙벽등반을 하는가 하면, 주말이면 고난도 암벽을 찾아 다니는, 도깨비 같은 등반 세계 속에 빠져들었다.
“해외 거벽등반의 기회도 매우 빨리 찾아왔어요. 등반을 배운 지 1년만인 1999년 캐나다 부가부를 찾았죠. 하지만 기껏 해야 100여m 높이의 암벽을 오르던 제가 600~700m의 대암벽을 마주했으니 결과는 빤했죠.” 그는 귀국 후 이미지트레이닝에 열중하면서 대암벽에서 짐을 끌어올리는 법, 좁은 공간에서 자일을 처리하는 법, 그리고 대상지를 선정하고 원정을 꾸리는 법 등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 그러다 2000년 당시 여성 최고의 클라이머로 손꼽히던 김점숙, 채미선씨와 함께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대암벽 엘 캐피탄에 도전하고, 이듬해 2001년 히말라야로 눈길을 돌렸다. 파키스탄 밴타브락 산군의 오거 섬(5,600m)에 새 루트를 낼 욕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드러나고 말았다. “엘 캐피탄은 이미 만들어진 루트를 따르면 되지만, 오거 섬은 처음부터 길을 찾아야 했기에 어려웠어요. 어마어마한 낙석에 간을 콩알만하게 위축되기도 했고요. 정말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로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고소증이 힘겹게 했어요."
또다시 새로운 스타일의 훈련에 들어갔다. 모래를 20kg 넘게 집어넣은 배낭을 메고 동네 뒷산인 수락산을 뛰어다녔다. 숨이 더욱 가빠지게 하려고 마스크를 쓰고 달렸다. 고소를 이겨내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런데 운동이 과했던지 2001년 봄 인공암장에서 다친 허리 상태가 더욱 나빠지더니 결국 허리에 칼을 대야 했다. 2002년 2월 디스크 수술을 받은 지 한 달쯤 지나 허리가 괜찮아진 것 같자, 그는 몸 상태를 테스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너무도 엉뚱한 계획이었다. “앞으로 계속 산에 다닐 수 있을까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엘 캐피탄의 로스트 인 아메리카(Lost in America) 단독 등반에 나섰어요. 9일이나 걸렸어요. 말 한마디 나눌 상대 없이 1,000m 수직 암벽을 오르자니 정말 외롭더군요. 10m를 추락한 적도 있어요. 허리에 통증이 오지 않자 오히려 기뻤어요. 계속 등반해도 된다는 진단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메루피크 북벽에서 ‘아무도 오르지 못한 거벽에 길 내는 등반가의 꿈’을 이뤄내다
엘 캐피탄 등반을 마치고 선후배들과 함께 유럽 알프스의 침봉을 등반한 그는 2003년 다시 파키스탄을 방문해 나와즈브락(5,800m)에 익스트림 투게더(A5)라는 신 루트를 개척하고, 2004년에는 캐나다의 배핀 섬(Baffin Island) 원정에 나섰다. 2004년 당시 김세준이 이끈 배핀 섬 등반은 히말라야 고산등반 이상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히말라야나 알프스, 요세미티 정도에 머물던 한국 산악인이 신선한 대상지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세준 대장과 왕준호․김팔봉 세 산악인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원정대는 세계의 최고 오지에서 100일간 버티며 표고 차 1,000m의 키구티(Kiguti)와 600m의 핀(The Fin) 거벽에 초등루트 2개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배핀 섬 등반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김세준은 이듬해 2005년 눈을 파키스탄 히말라야로 돌려 메루피크 중앙봉(샥스핀, 6,450m) 등반에 나섰다. 그러나 연이은 악천후 속에서도 40일간 버티며 전진캠프와 고정로프를 설치한 다음 벽 등반에 나섰으나 등반 사흘째 퍼붓기 시작한 폭설에 이틀간 갇혀 있다 끝내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김세준은 꺾이지 않고 2006년 중국 쁘딸라피크, 2007년 파키스탄 투이줌 등반을 통해 기량과 경험을 한층 높인 뒤 지난해 메루피크 주봉 북벽 등반에 나섰던 것이다. 메루피크 주봉 북벽 원정은 아무도 오르지 못한 거벽에 길을 내보자는 등반가의 꿈이었다. 거기서 그는 북벽을 타고 마침내 하늘로 오르는 길을 열고 말았다.
지난 10년간 익스트림 라이더 등산학교 강사로서 인공등반과 고산거벽 등반 기술 전수에 애써온 김세준은 인공등반의 매력은 맨손으로 행하는 자유등반으로는 불가능한 구간을 첨단의 확보장비를 써가면서 등반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배핀 섬 등반 때 500m 높이의 암벽에서 구멍 8개를 연속으로 파내며 올랐어요. 지름 10mm 구멍에 장비를 걸어봤자 얼마나 큰 힘을 받겠습니까. 체중이나 겨우 견뎌줄 정도죠. 그렇게 아슬아슬한 동작을 여덟 번 연속으로 하다 보면 정말 긴장됩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옮기고,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다음 구멍을 파내고, 또 한 발 옮기고. 정말 살 떨림의 연속이지요. 하지만 쾌감은 대단합니다.” 등산학교 강사로서 김세준은 2006년 여름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인제 한계리 수해 때, 동료 강사들과 함께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급류에 휩쓸릴 위기에 몰린 주민 수십 명을 로프를 이용해 구해내기도 했다. 이 역시 여러 해 동안 갈고 닦은 등반 기술이 큰 몫을 해냈다
대한민국 산악대상에 빛나는 김세준, 아직도 그가 도전할 벽은 남아있다
메루피크 주봉 북벽 등반의 가치를 높게 인정받아 지난 9월 국내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산악상인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수상한 김세준은 그 스스로 ‘살 떨림의 연속’이라 표현하는 험난한 등반을 앞으로 4년쯤 더할 생각이다. 4년간 그린란드 오지의 대암벽을 오르고, 파키스탄과 인도 히말라야의 험난한 고봉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우선 내년 봄 파키스탄의 미등봉(未登峰) 라톡1봉(7,145m)에 도전한다. 이를 위해 지난 7월 정찰 등반을 다녀왔다. “라톡1봉은 1978년 미국의 제프 로우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등반가들이 30년 동안 도전해온 난봉이에요. 정면으로 보는 순간 어마어마한 거벽에 몸이 굳어 버렸어요. 암벽의 표고 차만 2,500m에 이르거든요. 히말라야 거벽과 영적으로 통하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겉모습에 두려워하지 않고 다가서는 걸 보면 사이코 기질을 가진 안전 불감증 환자인가 봐요. 4년 간 계획한 등반을 마치고 나면 즐기는 산행을 할 거예요. 솔직히 그 후 어떻게 먹고 살까 걱정이 되요. 그렇다고 생각을 멈추고 먹고 사는 일에 만 매달리면 나중에 더 후회할 것 같아요. 어쩌면 극한과 위험을 갈구할 때 생기는 아드레날린이 배고픔을 채워주는 식량인지도 모르겠어요.”
글 한필석 / 월간 <山> 기자
1990년 월간 <山>에 입사한 후 국내외 오지와 산, 산악인 소개에 힘써왔다. 탐험과 고산등반을 좋아한다. 2006년부터 세계 5대륙 최고봉에 도전해 유럽 엘브루즈, 남미 아콩카구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북미 매킨리를 등정했다. 2007년 에베레스트 실버 원장대를 동행 취재했으며,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해발 8,000m)까지 등반했다.
사진 제공 김세준, 월간 산
클라이머 탐구 김세준
작성자 : 게슈타포 추천 : 0 조회 : 450 작성일 : 2010/01/26 18:31:34
그 동안 클라이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글을 몇 번 썼었다. 주로 내가 아는 주위의 사람들을 내가 느끼는 감정으로 썼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익스트림라이더 강사진들에 대한 글이 많았는데 그걸 감안하면 김세준에 대한 글은 아무래도 많이 늦은 감이 있다.
김세준에 대한 글을 쓰려니 일단 난감하다.
그에 대한 글과 기사는 이미 산 잡지와 여러 매체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새삼 내가 그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해도 새삼스러울 것이나 새로울 게 있냐 싶은 생각에서다.
그럼에도 이런 수준 낮은 글을 쓰려는 이유는 첫 째는 그가 원해서이고 ^__^; 둘 째는 앞서 말했듯이 아무 부담없이 낙서하듯이 쓸 수 있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그는 한 해도 빼놓지 않고 해외원정을 나갔다.
내가 그를 알게 된 해부터 말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2001년 가을 그러니까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 9기 교육때이다.
그 보다 1년 전인 2000년에 교육을 받으려 했으나 나의 후배이자 자일파트너였던 (김)팔봉의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함께 교육을 받으려 1년을 기다렸다.
세준의 첫 인상은 부드럽지 않다. 오히려 날카롭다할 정도다.
아니 날카롭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겠다. '강하다' 라는 표현이 맞겠다.
이 것은 여성이 보고 느끼는 이미지와 남성이 느끼는 이미지에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실 쉽게 다가서기 힘든 얼굴을 가진 것은 사실이니까...
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닭's 모임의 실질적인 총무역할을 하고 있는 김지영은 '남경호와 더불어 가장 말 놓기가 힘든 얼굴을 가진 닭띠 남자' 라고 말한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을 표현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좋은 얼굴을 가지기 힘들고, 악한 사람이 온화한 얼굴을 가지기 힘들다고 한다.
어릴 때는 모르겠으나 40대 50대를 지나면서 사람의 얼굴은 '고착'되어진다.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 걸어온 길, 경험, 분위기, 마음 씀씀이, 자기성찰에 따라서 얼굴이 변형되어 고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것은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연륜이 쌓이면 얼굴만 봐도 어떤 성격,성향을 가진 사람인지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것은 '나이값'을 하며 나이먹기가 쉽지 않다는 평소 내 지론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어쨌든 관상쟁이도 아닌 내가 이런 얼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김세준을 말하기 위함이다.
김세준이 위에 언급한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성격이 강하다 라고 하면 약간은 남과 융화하기 힘든, 아집이 강한 부정적인 인식이 높은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강하게 몰아치는 그리고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그런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세준의 이러한 얼굴을 잘 생겼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더 많은 것같다.
아마 Macho-ism 때문은 아닐까…
세준은 자존심이 엄청 강하다.
한편으로는 우스개말로 ‘가오’를 무지하게 잡는다는 표현이 맞다고 할 수 있을정도다.
자기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이미지에 대해서 완벽할 만큼 철저하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평범하게 직장다니는 사람을 표현하는 자기관리와는 약간 느낌이 다르다)
한 예로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남자들은 머리관리가 쉽지 않고 또한 자유스런 성향, 분위기 때문에 머리를 길게 기른다.
Rock 을 하는 사람들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그림, 음악, 도예 등) 그리고 우리 주변의 전문산악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
세준도 머리를 길게 기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런 그의 모습(머리기른 강인한 모습)을 보고 마운틴의 이영준은 ‘켄타우르스’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별명을 지어줬다기 보다는 그가 쓴 ‘산악인 탐험’이라는 코너에서 그렇게 인용했는데 세준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별명으로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왼쪽 등에는 창을 든 켄타우르스의 문신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하루 종일 고생하며 새긴 그의 문신은 그의 상징과도 같다.
어쨌든, Anyway, 세준은 자신의 머리를 관리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쏟아 붓는다.
최고급 트리트먼트제품의 사용은 기본이고 정기적으로 미용실에서 관리도 받는다.
예전에 한 TV 프로그램에서 원로 코미디언인 남보원씨가 후세인 때문이었는지 자신의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을 말끔히 밀고 나와서 배철수, 김흥국을 빗대어 한 말이 있다.
“나 같은 밍크(콧수염)도 밀었는데 배철수나 김흥국 같은 돼지털은 여태 안 깍고뭐햐냐” 라고 일갈을 날린 것.
물론 일류 코미디언다운 농담이었지만, 세준의 긴머리 역시 그런 식으로 본다면 다른 남자들의 그것과는 격을 달리한다.
흔히 말하는 ‘때깔’ 과 ‘질감’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1920년 1월4일.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베이브 루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뉴욕 양키스로 옮기게 된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 기원전 BC (Before Christ)과 기원 후 AD(Anno Domini)가 있다면, 양키스의 역사에는 루스 전(Before Ruth)과 루스 후(Anno Bambino)가 있다.
이는 메이저리그가 '홈런의 시대'와 그 이전으로 나뉘는 기점이기도 하다.
야구 칼럼니스트가 쓴 야구의 신 ‘베이브 루스’ 레전드 스토리 중 일부이다.
우리가 우리가 사는 년도를 표현할 때 기원전 즉 BC로 표시한다. 지금은 B.C 2010년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탄생한 해에서 2,010년이 지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서울기점 몇 킬로미터 할 때 기준점이 광화문이듯이, 년도의 기준점이 되는 해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세준의 일생을 두 시기로 나누어 본다면 샤모니 암장을 다니기 시작하기 전(Before 샤모니)과 다니기 시작한 후(Anno 샤모니) 로 구분할 수 있겠다.
평범한 직업을 가진 그가 샤모니 암장에서 운동을 시작하여 전문 산악인의 길로 접어들어 우리나라 거벽등반의 역사(Career)를 새로 써나가고 있으므로…
그에게 등반이력을 보면 남들과 다른 점들이 있다.
특히 그의 거벽등반의 행보는 남들이 다닌 길과 궤적을 달리하는데 다른 산악인들이 간 흔적을 답습하지 않는데서 그 특이함을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 등반계의 14좌 완등자 혹은 등정레이스를 벌이는 산악인들이 일반인이 아닌 전문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진정한 영웅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이미 지난간 길을 똑같이 걸어갔기 때문은 아닐까.
청출어람 이라는 말은 후배 혹은 뒷세대가 선배, 앞세대보다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2위가 1위를 넘보려면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 결과가 같다면 과정을 달리해서라도…
쿠크츠카가 그랬고, 로레탕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Rock 의 진행과정에도 프로그레시브 락(Progressive Rock)이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는가
프로그레시브 락은 비틀즈(Beetles)를 시작으로 롤링 스톤즈(Rollind Stones), 퀸(Quee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딥 퍼플(Deep Purple) 쥬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핑크 플로이드 등으로 이어진다.
프로그레시브 락이란 기존의 대중음악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보(progressive)”한 형태를 가진 Rock의 한 장르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기존의 틀’과 ‘한계’를 뛰어넘는다는데 있다.
의정부에 샤모니암장을 만들고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를 설립한 초대강사 최승철 김형진은 우리나라 거벽등반에서의 기존의 틀과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고 국내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그 첫 시도는 엘캡에서 그리고 캐나다 부가부에서 행해졌고 1997년 트랑고타워에서 ‘코리아 환타지’라는 신루트를 탄생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중장기 플랜으로 해외 고난도 거벽등반을 하나씩 등반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첫 시작이 인도 히말라야의 탈레이사가르였었고 거기에서 불꽃처럼 산화했지만…
세준은 본격적으로 거벽등반의 세계로 뛰어들고 또 거기에서 하나씩 성과를 이루어냈음에도 탈레이사가르 등반은 하지않았다.
주위에서는 익스트림라이더 등산학교의 2대 강사진들(조우령, 김점숙, 김세준, 김형일)이 초대강사들의 유지를 이어서 등산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후에도 수차례 탈레이사가르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당시 절정에 달해있던 세준의 거벽등반 궤도에 탈레이사가르가 당연히 들어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왜 등정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었다.
하지만 세준은 끝내 탈레이사가를 등반을 하지 않았다.
탈레이사가를 등반을 하지 않는 이유에 답을 하는 대신 그는 히말라야의 미지의 거벽을 찾아 신루트를 개척하는데 힘을 썼다.
(사실 그에 대한 대답은 산잡지에 나와 있음)
2001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오우거 썸’ 신루트 등반이나 2002년 엘캡 ‘로스트 인 아메리카’ 단독등반, 2003년 파키스탄 히말라야 ‘나와즈부락’ 신루트 등정(익스트림 투게더) , 2004년에는 한국 최초의 배핀 아일랜드 원정에서 신루트 두 개를 개척등반한 것이다.
이런 그의 등반 궤적을 보면, 우리나라 산악계 前輩들의 그것들과 비교했을 때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배(前輩)라고 표현한 것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故양주동 박사의 글이 생각나 인용했음. 당시 필자의 국어선생님은 자신을 국보급이라고 표현했던 양주동박사의 글 – 선배라 하지 않고 전배라고 쓴 – 은 그의 강한 지적 자존심의 표현이라고 해석하심)
또한 수많은 원정대가 겪었던 크고 작은 내홍조차도 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는데, 대원들간의 사소한 문제로 야기될 수 있는 그 어떤 갈등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즉 문제나 이슈들을 사전에 없애고 해결함으로써 리더로써의 출중한 자격을 보여줬는데 왕준호 김태만 대원과 함께 한 2008년 메루피크 주봉 북벽등정에서 그의 리더십이 한껏 나타내어진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김태만대원은 말이 없고 성격이 유순하지만 왕준호대원은 괴팍하고 엉뚱해서 통제하기 쉬운 스타일이 아니다 ^^ )
여기서 그는 대한민국에서 유례없는 히말라야 미지의 거벽을 등정하게 되는데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을 왜 하지 않고 거벽등반(Aid Climbing)으로 올랐냐는 질문에 “오버행으로 이루어진 메루피크의 거대한 북벽에는 손으로 잡고 오를 크랙도, 자유등반으로 오를만한 그 어떤 흔적도 가능성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김세준의 하드프리 역량은 5.12를 넘어서는 수준이고, 제1회 에델바이스배 빙벽대회의 우승 경력이 있을 정도의 수준급 멀티 클라이머이다.
그리고 왕준호와 김태만 역시 어느 클라이머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국가대표급 클라이머의 의 역량을 갖췄다.
이 메루피크 주봉북벽 등정의 결과로 원정대는 2008년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 2008년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수상한다.
그가 큰 수입도 없는 상황에서 원정대를 꾸리기 위해 준비하고, 또 원정에서 돌아온 후의 정산,정리나 이런저런 수상자리에서 자신보다 대원들을 먼저 챙기고 합리적은 결정을 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리더로서의 좋은 Role Model을 볼 수 있다.
남에게 쉽게 손 벌리기 싫어하고 신세지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강한 성격이 사람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쉽다고 볼 수 도 있으나 앞서 말한 철저한 ‘자기관리’로 이러한 것들을 극복해가고 있다.
‘자기관리’는 다른 말로 하면 쉬이 넘어갈 수 있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며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힘든 것보다는 ‘쾌락’과 ‘편함’을 추구하고‘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하는 존재이므로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많은 뒷담화와 오해와 편견을 야기시킨다.
- 2부에서 계속...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