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와선
선(禪)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누워서 하는 선, 즉 와선(臥禪)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선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면서도 이 누워서 하는 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내 딴으로 해석하면서 혼자 좋아하고 있다. 내 딴으로 생각한 와선이란,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다. 이런 무례한 수용의 창작 태도로 시를 쓴 사람의 비근한 예까 릴케다. 우리나라에 수입된 릴케는 소녀 릴케는 많았지만 이런 깡패적인 릴케의 일면을 살려서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에 그리스마스를 전후해서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헨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이 와선의 미에 한층 더 강한 자신을 가졌다. 헨델은 베토벤처럼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겨주지 않는다. 그의 음은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이다. 그의 음악을 낙천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소름이 끼치는 낙천주의다. 나는 그의 평화로운 「메시아」를 들으면서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본, 마약을 먹고 적진에 쳐들어와 몰살을 당하는 베트콩의 게릴라의 처절한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고는 했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피카소가 헨델의 계열이고 고흐가 베토벤의 계열. 그리고 릴케의 안티테제가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자기의 시체는 남겨놓는데 릴케는 자기의 시체마저 미리 잡아먹는다. 그런데 릴케의 시체에는 적어도 머리카락 정도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헨델의 시체에는 손톱도 발톱도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다. 완전무결한 망각이다.
선에 있어서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까맣게 안 들렸다가 다시 또 들릴 때 부처가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음이 바로 헨델의 망각의 음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작품을 잊어버릴 것이다. 자기의 작품이 남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하고 골백번씩 운산(運算)을 해보지 않아도 되는 그의 현명만이라도 나 같은 우둔파 시인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메시아>인지 모르겠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유일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은 화자가 이르고자 하는 시의 경지를 선(禪)의 삼매(三昧)의 경지에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선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누워서 하는 선, 즉 와선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선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면서도 이 누워서 하는 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내 딴으로 해석하면서 혼자 좋아하고 있다.’는 추측하건데 화자가 방안에서 누워서 빈둥거리면서 시를 생각하고 있는 중에 이렇게 시를 쓰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하면서 선(禪)의 일종인 ‘와선(臥禪)’에 대비하여 자신의 시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와선이 ‘선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누워서 하는 선’이라고 남에게 들을 일을 떠올리며 ‘와선’이 자신이 시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해석이 괜찮은 것 같다고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 딴으로 생각한 와선이란,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다.’에서 ‘부처’는 인간 부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화자가 생각하는 ‘와선’은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인데, 진리란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란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거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와선의 자세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다.’로 보일 것이라고 화자는 생각한다. 이를 시로 말하면 가장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시는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골똘하게 시(詩)를 생각하면 시가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처럼 떠오르거나 천천히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선(禪)’은 ‘돈오(頓悟: 소승에서 대승에 이르는 얕고 깊은 차례를 거치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바로 대승의 깊고 묘한 교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와 ‘돈오점수(頓悟漸修: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름을 이르는 말)’로 온다고 하는데 시의 경지도 ‘돈오’ 또는 ‘돈오점수’로 이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무례한 수용의 창작 태도로 시를 쓴 사람의 비근한 예가 릴케다. 우리나라에 수입된 릴케는 소녀 릴케는 많았지만 이런 깡패적인 릴케의 일면을 살려서 받아들인 사람은 것의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는 화자의 생각으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릴케가 소녀의 감성으로 시를 썼다고 생각하지만 화자는 릴케가 ‘와선’과 같은 ‘깡패적’인 방법으로 시를 썼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헨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이 와선의 미에 한층 더 강한 자신을 가졌다. 헨델은 베토벤처럼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겨주지 않는다.’는 라디오를 통해 들은 헨델의 음악이 ‘와선의 미’에 대한 화자의 생각에 강한 확신을 준다는 말로 ‘와선의 미’는 ‘삼매(三昧)에 이른 경지’를 말한다. 화자는 헨델의 음악이 ‘와선의 미’인 삼매에 이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헨델의 음악이 듣는 이에게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음은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이다.’는 헨델의 음악이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이유는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으로 이루어진 헨델의 음악은 음악이 끝나면 모든 음이 잡아먹혔기 때문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않는다.
‘그의 음악을 낙천주의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소름이 끼치는 낙천주의다. 나는 그의 평화로운 「메시아」를 들으면서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본, 마약을 먹고 적진에 쳐들어와 몰살을 당하는 베트콩의 게릴라 처절한 모습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고는 했다.’는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낙천주의적이라 하지만 화자는 소름이 끼치는 낙천주의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의 음악- <메시아>-이 세상이 마침내 메시아에 의해 구원될 것이라는 낙천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뉴스에 보도되는 현실의 세상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에 보도된 전쟁터인 베트남에서 ‘마약을 먹고 적진에 쳐들어와 몰살을 당하는 베트콩의 게릴라 처절한 모습’을 보면 도저히 낙천적일 수 없는 처절한 현실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이 구원될 것이라는 헨델의 음악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낙천적인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림으로 말하자면 피카소가 헨델의 계열이고 고흐가 베토벤의 계열, 그리고 릴케의 안티테제가 보들레르, 보들레르는 자기의 시체는 남겨놓는데 릴케는 자기의 시체마저 미리 잡아먹는다.’에서 시체는 ‘시 작품’과 시가 읽는 이에게 주는 ‘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화자가 피카소의 그림은 보고 나면 ‘인상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헨델의 계열이라 생각하고 고흐의 그림은 인상이 남기 때문에 베토벤의 음악과 같은 계열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릴케의 안티테제는 보들레르가 이르지 못한 선(禪)의 경지에 이른 시라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작품(시체)은 읽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 릴케의 안티테제는 읽는 이에게 인상(시체)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릴케의 시체는 적어도 머리카락 정도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헨델의 시체에는 손톱도 발톱도 머리카락도 남아 있지 않다. 완전무결한 망각이다.’는 릴케의 작품은 아주 적지만 인상을 완전하게 없애지는 못했고, 헨델의 음악은 완전무결하게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헨델의 음악은, 선(禪)의 삼매(三昧)의 경지에 이르러 선을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식마저 잊는 것과 같은 경지인 ‘완전무결한 망각’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선에 있어서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까맣게 안 들렸다가 다시 또 들릴 때 부처가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음이 바로 헨델의 망가의 음일 것이다.’는 화자가 헨델의 음악을 선(禪)에 비유하여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까맣게 안 들’리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헨델의 음악이 음의 궁극적인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음의 궁극적인 경지는 선(禪)처럼 ‘소리가 까맣게 안 들렸다가 다시 또 들릴 때’에 이르는 것이다. 화자는 헨델의 음악이 선(禪)의 삼매(三昧)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것을 망각하는 것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작품을 잊어버릴 것이다. 자기의 작품이 남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하고 골백번씩 운산을 해보지 않아도 되는 그의 현명만이라도 나 같은 은둔파 시인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메시아〉인지 모르겠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유일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화자는 시를 쓰면서 자신의 작품이 남의 귀에 어떻게 들리까하고 골백번씩 계산하며 시를 쓰는데, 헨델은 자기의 작품을 잊어버릴 정도의 경지에 이른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은 ‘자기의 작품이 남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를 벗어나야 만들 수 있다. 외부의 모든 것에 의식을 두지 않고 자기 자신마저 잊어야만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화자는 시를 찾아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지 않고 ‘골방’에 은둔하여 시를 쓰며 남들의 귀에 어떻게 들리까하고 시를 쓰면서 남도 망각 못하고 자신도 망각 못하는 는 자칭 은둔파 시인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러한 화자는 릴케나 헨델과 같은 작품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도 잊고 자신이 쓴 작품을 남들이 어떻게 들을까도 잊고 자신의 음악마저도 망각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되는 헨델의 음악을 통하여 희망을 갖는다. 그런 경지의 작품을 작곡한 헨델의 현명함을 통하여 희망을 갖는다. 화자도 헨델처럼 남을 의식하지 않는, 모든 것을 망각한 시를 쓸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선의 삼매의 경지에 이른 것과 같은 경지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이것이 헨델의 음악이 화자에게 준 구원이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20150324화후0947전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