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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20. [역경의 열매] 이재훈 <1-17> 초등생 시절, 성경책 욕심 나 교회서 훔쳐 달아나
펴보려니 덜덜 떨려 다음날 제자리 반납… 그런 나를 의료선교사 되게 계획하셔
이재훈 선교사가 2011년 3월 마다가스카르 수도 안타나나리보에서 이동진료를 위해 오지 마을로 이동하기 전 찍은 사진.나는 의사이자 선교사다. 내가 있는 곳은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누군가에겐 애니메이션 영화나 바오밥 나무가 우뚝 서 있는 신비로운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땅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는 것이 일상인 ‘생의 전쟁터’다. 최근엔 흑사병으로 불리는 페스트가 창궐해 120여명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 곳이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 깊은 고민들이 제자리걸음에 머물 때가 있다.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도무지 내 맘대로 되는 게 한 톨도 없을 때 말이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적잖았다. 하염없이 고민하던 그때, ‘나의 하나님’은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돌이켜보니, 그 순간 그 일이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오늘날 나를 여기 오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프리카에서의 이동진료사역은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재훈’이란 제목으로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작전이었다.
“재훈아, 너 교회 다녀? 거기 가면 친구도 많고, 맛있는 것도 준대. 같이 갈래?”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건 네 살쯤이었다. 동네 형이 교회에서 빵을 준다기에 따라갔던 게 시작이었다. 우리 집은 동생과 형, 부모님은 물론 할머니와 친척 어른들까지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신앙 자체가 전무한 집안에서 그렇게 나 혼자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내가 다니던 전주침례교회에서는 출석은 물론, 전도와 헌금을 잘하는 학생에게 책갈피를 선물로 주곤 했다. 멋진 그림과 성경구절이 적혀 있는 책갈피였다. 그때 나는 성경책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였는지 내 눈엔 성경구절이 적힌 책갈피가 보물 제1호였다. 그 책갈피를 얻기 위해 전도를 매우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철제로 된 ‘고려인삼통’에 책갈피를 모았었는데 그 통이 꽉 찰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모아둔 책갈피를 바닥에 쭉 펼쳐놓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순서대로 보는 게 행복한 놀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그때 나는 평일에도 교회에 자주 가곤 했다. 문제의 그날도 학교를 마치고 교회에 갔던 날이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건너편 장의자에 성경책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평소 그렇게나 갖고 싶어 했던 성경책 말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예배당 안엔 나뿐이었다. 누가 볼 새라 얼른 성경책을 훔쳐 달아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려 터질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성경책을 꺼내는 내 손이 덜덜 떨렸다. 그렇게 읽고 싶던 성경이었는데, 막상 훔쳐온 성경책을 읽으려니 겁이 나서 볼 수가 없었다. 결국 한 자도 읽지 못한 채 책상 속에 넣어뒀다가 다음 날 다시 교회에 찾아갔다. 그리고 마치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듯,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올려뒀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경책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 초등생 시절, 성경책 욕심 나 교회서 훔쳐 달아나
* [역경의 열매] 이재훈 <2> "제사 때 절 안해" 어린 내 고집에 어른들 혼비백산
* [역경의 열매] 이재훈 <3> 하나님 앞에 '진짜' 되고자 나 자신을 드리기로
* [역경의 열매] 이재훈 <4> 하나님께 "의과대학 입학 못하면 교회 떠나겠다"
* [역경의 열매] 이재훈 <5> "아프리카 선교사 사모 될 분을 찾습니다"
* [역경의 열매] 이재훈 <6> 썰렁한 보건소… 마을로 찾아가니 환자 폭증
* [역경의 열매] 이재훈 <7> 갖은 환자 진료… 공중보건의 경험이 의료선교 큰 도움
* [역경의 열매] 이재훈 <8> 르완다 병원장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잘하게"
* [역경의 열매] 이재훈 <9> "지금 수술 안하면 환자 사망" 경고하자 수술 떠넘겨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0> 지루한 의대 공부에 비해 신학은 놀이처럼 재미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1> 오지 찾아 야외 수술로 '부시맨 닥터' 별명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2> 갑자기 끊긴 후원… 귀국할 항공료도 없어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4> 혀 종양 어린이 포기할 수 없어 한국 보내 수술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5> "당신 무당 아닙니까? 기도로 낫게 해보시오"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6> 무당에게 성경 건네자 사시나무 떨듯 손 떨어
* [역경의 열매] 이재훈 <17·끝> 12년째 매년 100일 오지 생활… 오늘도 떠납니다
약력 △1967년 전주 출생 △고려대 의과대(1986∼1993년) △연세대 의과대 외과학 석사(2001∼2003년) △아프리카오지선교회 의료선교사(2003∼2011) △FBDB(Fiainana Be Dia Be, 현지기독단체) 대표(2012∼현재) △밀알복지재단 마다가스카르 지부장(2013∼2017)
***[역경의 열매] 이재훈 <2> “제사 때 절 안해” 어린 내 고집에 어른들 혼비백산
“자식교육 잘 시켜라” 큰아버지 얘기에 아버지 발끈… 집안싸움 만든 문제아 돼
이재훈 선교사가 14세 때 한대희 전주침례교회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는 모습.“재훈아, 용돈이다.” 신기하게도 성경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다음 날부터 엄마가 경제관념을 심어주겠다며 나와 동생에게 용돈을 주시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가 성경책부터 샀다. 때마침 방학이라 학교도 가지 않을 때였다.
방학숙제는 제쳐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책을 읽었다. 읽다 보니 내가 책갈피로 읽던 구절들도 보였다. 거대한 성경의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꿰어졌다. 하지만 성경과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에 자꾸 걸리는 것이 생겼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무시해 왔던 성경구절이 있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당시 내가 생각하던 ‘너와 네 집’은 가족이었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던 나와 달리 부모님과 형, 동생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가족 구원’은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와 내 집’을 구해주세요.”
함께 교회를 다니던 친구 중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5학년 때 전도했던 친구인데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집안에서 자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을 전도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6개월 동안 주일마다 그 친구 집에 찾아가 교회에 가자며 졸랐지만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훈이 불쌍하니 교회 한 번 가 줘라.” 그런 나를 딱하게 여긴 친구 어머니의 말에 친구가 처음으로 교회에 가게 됐다. 그러더니 신기하게도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빠지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됐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그 친구와 내기를 하기로 했다. 종목은 ‘누가 먼저 더 많은 가족을 교회로 데려오는가’였다. 당연히 내가 이길 줄 알고 먼저 제안했던 내기였다. 내가 그 친구보다 교회에 다닌 시간도 훨씬 길고, 그동안 전도도 많이 했으며 성경지식도 해박했으니까. 더군다나 그 친구는 대대로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기에 나보다 전도하는 것이 힘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친구네는 할머니부터 줄줄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는데 우리 집만 변화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주일학교 선생님께 상의를 해보기도 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쉽사리 교회를 권유하지 못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나는 집안의 문제아였다. 교회 때문이었다. 문제아로 낙인찍히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명절에 일어났다. 온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던 중에 “저는 교회에 다니니 절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너 그렇게 광신도처럼 교회 다니면 안 돼!” 당연히 집안 어른들은 난리가 났다. 더 큰 문제는 제사가 끝난 후 식사 자리에서 터졌다. 큰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자식교육 잘 시켜라”라고 한마디 하신 것이다. 그러잖아도 나 때문에 화가 나있던 아버지의 감정이 폭발했다.
두 분은 크게 싸우셨고 아버지는 그 후로 명절 때 제사를 지내러 가지 않으셨다. 나 때문에 형제가 평생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집안에 갈등을 일으킨 장본인인 내가 부모님께 교회에 함께 가자고 하면 더 큰 사달이 날 터였다. 그래서 그나마 만만한 동생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동생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충격이었다.
“형 같은 사람이 다니는 게 교회라면, 난 죽어도 교회 안 간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3> 하나님 앞에 ‘진짜’ 되고자 나 자신을 드리기로
“내 신앙은 가짜인가” 오랜 고민 끝에 오지인 아프리카 의료 선교사 서원
아홉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동네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필자(오른쪽 두 번째)와 형제들.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사람만 아는 아픔이 있다. 바로 ‘끼인 자’로서의 설움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둘째였기 때문에 항상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형과 내가 싸우면 “왜 어린 것이 형에게 덤비느냐”고 혼났고, 동생하고 싸우면 “왜 큰 놈이 어린애를 괴롭히느냐”고 혼이 났다. 그래서 어느 날은 동생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덤비게 하고 “왜 어린 것이 형에게 덤비느냐”며 흠씬 패 준 일도 있었다. 그때 나는 마치 정의를 실현한 것처럼 통쾌했었다.
동생과 엿을 나눠 먹을 때 한쪽은 두껍게 뭉뚱그려 놓고 다른 쪽은 얇고 길게 늘인 후 동생에게 고르라고 내미는 속임수를 쓰기도 했다. 이기적이었고 조금의 손해도 안 보려 했다. 어렸던 나는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동생에게 나는 항상 못된 형이었고 피하고 싶은 형일 수밖에 없었다.
“형 같은 사람이 다니는 게 교회라면, 난 죽어도 교회 안 간다.”
동생의 한마디는 형으로서의 내 모습은 물론, 내 신앙까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생각해보면 ‘신앙이 진실되고 믿음이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도 불구하고 늘 내 마음속엔 욕심, 질투, 미움이 그득그득했다. 심지어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시간에도 죄악된 생각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올라오곤 했다.
그것을 깨닫고 난 후 벗어나고 싶어 수없이 기도하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기도했고,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하지만 죄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한때는 내 안에 사탄이 똬리를 틀고 존재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내 신앙은 가짜인 것인가.’ 시간이 갈수록 생각은 확신에 가까워졌다. 수련회 기도시간엔 방언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내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내 신앙이 가짜라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문득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떠올랐다. 예배 중 헌금시간에 헌금 바구니에 들어가 “돈은 없지만 하나님께 몸이라도 드리고 싶었다”고 했던 리빙스턴 선교사처럼 하나님께 내 자신을 다 드려버리면 나 스스로 풀 수 없는 죄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하나님께 일종의 ‘딜’을 던지기로 했다.
“하나님, 제가 ‘진짜’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는 거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제가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다면 저를 진짜로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진짜로 인정받으려면,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당시 내가 생각하던 아프리카는 ‘식인종이 사람을 잡아먹는 곳’ ‘죽음을 각오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내 머릿속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도 여전히 내 신앙이 가짜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 하나님께 약속을 하나 더 드리자. 하지만 이미 크리스천으로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하다 학생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 떠올랐다. 판사나 의사가 되는 것이다. 문득 아프리카에 가려면 판사보단 의사가 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아프리카 의료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저를 진짜로 여겨주세요.”
***[역경의 열매] 이재훈 <4> 하나님께 “의과대학 입학 못하면 교회 떠나겠다”
의대 다니며 인천 개척교회 출석… 공부할 시간 부족해 결국 낙제
1993년 고려대 의과대학 졸업식 모습. 왼쪽부터 아버지, 필자의 아내 박재연 선교사, 필자, 동생.대입 시험은 무난하게 잘 치렀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중 한 곳에 지원할 수 있을 만한 성적이었다. 당시 상대적으로 안정권이라고 생각한 고려대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상황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해 유독 고려대 의대에 학생이 몰려 경쟁률이 연세대 의대보다 높아진 것이다. 졸지에 뚜껑을 열기 전까지 합격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기도해 왔던 ‘아프리카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 이것이 가짜인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닐까.’ 그래서 막무가내로 이렇게 기도했다.
“좋습니다. 하나님! 만일 제가 의대에 떨어진다면 당신께서 저를 ‘진짜’로 인정해 주시지 않겠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나님께 엄포를 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을 오로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달려왔는데 하나님과 약속한 아프리카 의료선교사가 될 수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어쩜 그렇게 괘씸한 생각을 했나 싶다. 다행히 합격 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진짜로 여겨 주시기로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내 안엔 자유함이 없었다.
전주에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 처음 맞이하는 주일이었다. 교회를 아직 정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갈 교회가 없었다.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하다 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주일인데 갈 교회가 없어. 혹시 아는 곳 있어?” “야, 마침 잘됐다 재훈아. 전주침례교회 전도사님이 목사 안수 받으시고 인천에 교회를 개척했다고 들었어. 한번 전화해 봐.”
전화를 해보니 교회는 인천 백운역 근처였다. 학교가 위치한 서울 성북구와는 대중교통으로 왕복 4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잠시 고민했지만 당장 알아본 교회가 없으니 일단은 몇 주간만이라도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신앙생활은 졸업 후까지 내내 지속됐다. 다른 교회를 알아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목사님께서 개척교회를 일궈내기 위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발목을 잡았다. 수요예배와 금요철야예배, 토요일 청년부,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지휘까지. 일인 다역을 감당해야 하는 게 개척교회 교인의 삶이었다.
신앙생활에 시간을 많이 쏟다보니 신앙과 학업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을 봤는데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교회 활동을 줄여야 하나 고민하는데 묵직한 고민이 가슴을 눌렀다. ‘너 이거 실패하면, 네 신앙이 가짜인 거 드러나는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인정하지 않으실 거야.’
학교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1년 낙제를 하고 말았다. 공부에 관해선 늘 자신감이 있던 나였다. 의대 입학 전만 해도 ‘내가 공부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대 공부는 달랐다. 일단 양이 너무 방대했다. 더 큰 장벽은 영어였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동기들과 영어실력에서 큰 차이가 났다. 원서를 읽기 위해 나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친구들은 쓱 한 번 보곤 귀신같이 이해했다. 좌절을 맛봤다.
돌아보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낙제로 1년을 더 다니면서 생리학과 병리학, 외과책을 한 번 더 읽을 수 있었고 그렇게 한 번 더 머릿속에 넣었던 게 훗날 아프리카 의료현장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5> “아프리카 선교사 사모 될 분을 찾습니다”
이상형 상대를 찾았으나 결혼에 난관… “하나님께서 우리 만남 이어주실 것”
이재훈 박재연 선교사 부부가 아들과 함께 1995년 대둔산으로 가족여행을 떠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의료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나.’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배우자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늘었다. 예쁘고 명민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프리카 선교사가 될 남자를 따라나설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던 중 책 한 권을 읽다가 선교사 아내로서의 이상형을 발견했다.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의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이었다. 감옥 생활 중에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을 간증처럼 적은 책이다. 나는 책에 나온 범브란트 목사님의 사모님처럼 하나님을 위해 자기 남편을 사지로 보낼 수 있는 배우자를 꿈꿨다. 선교지에 함께 가는 것은 물론이요, 만약에 내가 먼저 죽더라도 선교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사람. 지금 생각해봐도 참 꿈같은 이상형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선교지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눈여겨본 몇몇 후배와 동기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사람은 아닌 듯했다.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자매라고 해도 막상 “아프리카 선교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어렵다”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을 사지로 보낼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땐 내가 찾고 있는 이상형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의 아내와는 예과 1년 때부터 알고 지냈다. 아내는 인기가 많았다. 같은 과 선배가 아내에게 반해 6년여를 열렬히 쫓아다닌 이야기는 의과대 사람이라면 다 알 정도로 유명했다. 그 선배가 거절당한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내와의 본격적인 인연은 졸업 몇 개월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 재밌는 사실은 아내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연결고리가 아내를 열렬히 쫓아다녔던 그 선배였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나와 아내를 지켜본 선배가 아내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고는 자기가 인연을 포기하면서 나와 연결해준 거다.
아내는 내가 찾던 이상형과 완벽히 들어맞았다. 아내는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죽도록 사랑해 줄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이별의 위기도 있었다. 만난 지 몇 달 되어갈 때쯤이었다. 아내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의 답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재훈씨. 저는 돈을 벌어서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해요. 지금은 결혼할 형편이 아닙니다.”
충격이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이라 믿었으니까. 크게 상심한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하나님, 재연씨가 결혼은 아니라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 찾겠습니다.’
그날 저녁,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고백만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후배가 와서 누가 도서관 밖에서 나를 찾는다고 했다. 나가보니 아내가 통닭 한 마리를 들고 서 있었다. 통닭은 후배들에게 맡겨놓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만남을 이어주실 거라고 했다. “그래,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도하며 기다릴게.” 그리고 오랜 기도는 결국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6> 썰렁한 보건소… 마을로 찾아가니 환자 폭증
군, 약품 많이 쓰자 감사 나왔다가 표창… 위암 말기 할아버지 돌봐드리며 전도
이재훈 선교사가 1993년 경북 예천군 호명면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시절 아내 박재연 선교사와 함께한 모습.때는 1993년. 공중보건의로 발령받은 지역은 경북 예천군 호명면이었다. 하루에 환자가 한두 명이면 많은 거였고 아예 없는 날도 많은 그야말로 오지였다. ‘아무리 오지라지만 이렇게 환자가 없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이상해 보건소 직원들에게 물었다.
“여긴 아픈 사람이 없습니까?”
“아픈 사람이 없긴요 많지예. 아침에 나오는 차 타고 보건소 오면 저녁에 가는 차 타고 가야 하는디 힘들게 보건소 와 봤자 의사선생님이 없어 다신 안 오는 거 아닝교.”
알고 보니 그동안 이 보건소에 근무했던 의사들은 오지 않는 환자를 기다리다 지루해 옆 보건소에 가서 노는 날이 많았고, 환자들은 어렵게 보건소에 왔는데 진료를 못 받고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거다. 과거 장부를 들춰보니 환자 수 20명이 채 되지 않은 달이 부지기수였다.
환자가 보건소에 오지 않으니 우리가 환자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호명면엔 몇 개의 ‘리’ 단위 마을이 있었다. 그중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로 환자를 보러 다녔다. 하루 한 명이 될까 말까 하던 환자 수가 이동진료를 시작하니 매달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하루는 갑자기 군에서 감사가 나왔다. “거짓말 하는 거 아니냐”며 장부를 확인하고 난리가 났다. 갑자기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에 따라 약품의 소모도 늘고 직원들의 출장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군에서는 수년간 변하지 않던 곳이 갑자기 변하니까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던 거다. 당연히 감사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오히려 ‘모범 보건소’로 군수 표창을 받았다.
한번은 위암에 걸린 할아버지를 만났다. 조상의 음덕(陰德)을 무척 강조하시던 분이셨다. 할아버지의 딸이 당시 호명교회 집사였는데 교회 나가는 일로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며 교회를 못 가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조상님들이 할아버지를 보살펴 주시는 것 믿으세요?”
“예 믿습니다.”
“그 조상님들이 할아버지를 가장 행복하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겠네요. 그렇죠?”
“예 그렇지요.”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필 할아버지 때에 할아버지 따님이 교회에 가게 되고, 조상님들 있는 곳으로 가시기 직전에 예수 믿는 의사가 와서 할아버지를 보살펴 드리게 된 것은 할아버지를 위한 조상님들의 배려 아닐까요? 그 조상님들이 죽어서 영혼이 되어 있다 보니 죽음 후에 삶을 좀 알게 됐는데 혹시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예수 믿는 게 자손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은 아닐까요?”
교회 얘기라면 미간부터 찌푸리던 할아버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신과 딸이 예수를 믿는 게 적어도 조상의 뜻을 배신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시게 된 것이다. 감사하게도 할아버지는 얼마 후 예수를 믿겠다고 했고, 당시 호명교회를 담임하던 김칠성 목사님이 댁까지 직접 찾아가 세례를 주셨다. 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수시로 수액과 영양제 주사를 놓아드리며 위암 말기로 먹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할아버지가 사시는 동안 많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돌봐드렸다.
할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어느 날, 한 남자가 박카스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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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신앙생활
***[역경의 열매] 이재훈 <7> 갖은 환자 진료… 공중보건의 경험이 의료선교 큰 도움
포경수술부터 산부인과 진료까지… 내 부족함 채우시려 현장에 던지신 것
이재훈 선교사가 1993년 영천 군의학교에서 군복을 입고 훈련 준비를 하고 있다.박카스를 들고 온 남자가 말했다.
“이재훈 선생님 되십니까?” “예, 제가 이재훈입니다.”
“선생님께서 돌봐주시던 위암 말기 환자 기억하시지요. 제가 그분의 아들입니다.”
그는 위암 말기로 수술도 포기하고 죽음만 기다리던 자신의 아버지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더니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고 나선 예의를 갖춰 인사하더니 돌아갔다. 다음 날, 갑자기 도청에서 연락이 왔다.
“이재훈 선생님 맞으시죠? 기사 보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신문을 보니 내 이야기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환자의 아들이 경남지역의 한 일간지 기자였던 거다. 의도치 않게 주목을 받게 됐다. 도청에서는 내게 무언가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기에 딱히 요청할 것도 없었다.
도청에서는 그 후에도 몇 번 더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도지사님께서 선생님 하신 일에 감동을 받아 무엇이라도 해 드리라고 하십니다.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말씀만 해 주십시오.” 간곡한 도청 직원의 목소리에 혹시 요청할 만한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당시 아내와 나는 신혼이었다. 아내도 당시 하고 있는 일이 있어 과천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아내가 혼자 있는 것이 무섭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내게 전화를 건 도청 직원에게 “혹시 아내와 가까운 곳에서 군복무를 마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정말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해본 얘기였다. 그런데 설마가 현실이 됐다. 군복무 규정상 근무지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나의 일화를 인상 깊게 여긴 도지사가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편지를 써준 덕분에 근무지를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예천 산골마을을 떠나 수원 가족계획협회에 새로운 둥지를 텄다.
가족계획협회에서도 ‘찾아가는 이동진료’는 멈추지 않았다. 경기도 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선천성심장질환검사도 했고, 포경수술이나 정관수술도 했다. 예비군들이나 민방위 훈련을 받는 사람들의 경우 포경수술이나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을 빼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하루 수십 명씩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빠른 시간 내에 수술을 끝내야 했기에 서너 명씩 수술대에 눕혀 놓고 기계처럼 수술을 했다. 간단한 수술이긴 했지만 마음속에 수술에 대한 두려움 대신 자신감이 자리 잡게 된 중요한 시기였다.
또 돈이 없는 환자를 위한 분만실도 있었는데 조산사들이 분만하는 것이나 산부인과 선생님이 제왕절개 하는 것을 보고 돕기도 했다. 경기도 내 직업여성들의 정기적인 성병 검진도 담당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런 일들이 외과의사인 내 커리어에 어떤 도움이 될지 상상도 못했다. 다만 내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 마다가스카르에서 오지 진료 때 가장 많이 보는 환자 중 하나가 성병 환자고, 산부인과 수술도 자주한다.
만약 그때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 지금 이 순간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선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겁 없이 서원했던 내 약속을 지키게 하시려고 이곳저곳으로 날 끌고 다니신 듯하다. 나의 모자람을 채우시려고 현장에 나를 던지신 거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8> 르완다 병원장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잘하게”
2001년 첫 아프리카 단기 의료선교, 동양인 의사 못 미더워하는 기색 역력
이재훈 선교사(왼쪽)가 2001년 르완다 르메르 루코마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나는 빠릿빠릿한 편은 아니었지만 고집스럽게 꾸준한 면은 있었다. 레지던트 시절, 동료들로부터 “재훈이는 로봇인가 봐”라는 얘길 듣곤 했다. 쉽진 않았다. 그래도 그때 나는 늘 ‘힘들어서 쓰러져 죽어도 좋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레지던트 1년차 시절엔 침대에 누워서 잔 시간이 일주일에 12시간이 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머리든 몸이든 어딘가 기댈 곳만 있으면 졸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병동 이리저리를 하도 많이 다녀서 끊임없이 진물이 난 발 뒤꿈치 부분이 딱딱해져 부러질 정도였다.
주일 성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외과 병동에는 채플실이 있었는데 아침에 커피 한잔 들고 채플실에 잠시 앉아 있는 것으로 부족한 신앙생활을 메운다고 합리화하며 지냈다. ‘상황이 이런데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하기엔 하나님이 ‘저 괘씸한 놈’ 하며 불호령이라도 내리겠다 싶었다. 이러다가 전문의 시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4년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속 좁은 분이 아니셨다.
2001년엔 르완다 내전 당시 현장에서 의료봉사를 했었던 세브란스병원 외과 선배님의 소개로 단기 의료선교를 다녀올 기회가 왔다. 르완다행 비행기 안에선 드디어 아프리카에 간다는 기대감에 나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르완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대감은 오싹함으로 바뀌었다. 총을 든 군인들의 날카롭고 살벌한 눈길,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검색과 검문. 게다가 마중 나오기로 했던 지인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다리는 제멋대로 후들후들 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한 지인을 따라 지옥구덩이 같던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일하게 된 르메르 루코마병원은 수도 키갈리와 제2도시 기타라마 중간 지점에 있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사건 당시 반군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병원 내 시설은 열악하다 못해 참혹했다. 환자를 수술하는 데 필요한 재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야말로 진료 자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할 판이었다.
나의 기대와 포부가 무안하다 싶을 만큼 현지 의사들은 한국에서 온 동양인 의사를 반기기는커녕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장도 환영 대신 다른 의사들 방해하지 말고 병원 구경 잘하라는 말을 건넸다. 일단은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가지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말씀을 묵상했다. 비록 무시당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주님께 잘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뇌며 그들 나름의 질서와 권위를 인정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환자가 들것에 실려 왔다. 응급실 당직 의사는 내게 X선 필름을 보여주며 환자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임마누엘은 장폐색 증세가 있었다. 시골에서 병원까지 오는 이틀 내내 아팠다고 했다.
“장이 심하게 막혔네요. 응급 수술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응급실 당직 의사에게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그런데 그 의사는 수술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퇴근 준비를 했다. 오후 4시에 전기가 나가기 때문에 수술할 수 없으니 내일 아침에 출근해 치료하겠다면서 말이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9> “지금 수술 안하면 환자 사망” 경고하자 수술 떠넘겨
여러 유형 환자 돌봐야 하는 현실 경험… 소아외과 등 5개 전문의 과정 마쳐
이재훈 선교사(오른쪽 첫 번째)가 2001년 르완다 단기선교 당시 루꼬마병원 스태프, 선교팀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응급 수술을 해야 할 환자를 내팽개치고 퇴근을 하려 하다니. 한국 같았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맡긴 것은 수술이 아닌 ‘옵저베이션(관찰)’이었다.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당직 의사에게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내일 당신이 출근했을 때 환자는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른다”며 소리를 질렀다.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의사는 갑자기 나를 수술실로 떠밀었다. 나한테 수술을 하라는 것이었다. 전기는 병원에 있는 발전기를 돌려 해결해주겠다면서 말이다.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상황이 위중한 환자를 앞에 두고 내가 수술을 안 할 이유는 없었다. 당장 임마누엘의 수술에 들어갔다.
임마누엘은 장폐색증에 복막염 증세까지 있었다. 배 속을 열어보니 탈장이 일어나 이곳저곳이 막혀있었고, 장이 꼬인 부분은 터져 배설물이 배 속에 가득했다. 당장 배 속을 세척할 셀라인(식염수) 20ℓ를 갖다 달라 요청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져온 건 500㎖ 짜리 4개. 그것이 병원에 있는 셀라인의 전부였다. 아뿔싸! 아프리카의 의료 현실을 새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곳곳을 수돗물로 씻어내고, 네 병의 셀라인으로 마무리했다. 썩은 장을 잘라내고 일차봉합을 하기엔 복강 내 오염도가 심해서 ‘소장피부루’(배안에 균이 자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장을 피부 밖으로 나오게 해서 장이 다 붙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방법)를 만들었다. 임마누엘은 다음날 새벽까지 목숨이 위태로웠다. 새벽 한 시가 돼서야 겨우 안정된 것을 보고 귀가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서둘러 병원에 오니 온 직원들이 임마누엘의 방에 와있었다. ‘아, 죽었나보다.’ 씁쓸해하며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웬일인가. 임마누엘은 침대에 멀쩡히 앉아있었다. 알고 보니 병원 사람들은 임마누엘이 살아난 것에 놀라 병실 앞으로 몰려든 거였다. 그런 증상을 가진 환자가 수술해서 살아난 경우가 처음이었던 거다. 병원장이 날 불렀다.
“닥터 리. 이제부터 당신이 하고 싶은 수술 맘대로 하세요.” 그 후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수술을 다했다. 현지 의사들에게는 의료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드러났다. 어떤 사람도 치료할 수 있는 ‘올 마이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외과 레지턴트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한국과 달리 전문과가 없어 만나는 모든 환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제왕절개도 했고, 다리 인대가 절단된 환자의 인대 접합 수술을 하기도 했다. 내 전문영역 이상을 뛰어넘는 환자들이 많았다.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의 르완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필요한 것이 확인되고 나니 목표도 확실해졌다. 다양한 분야의 의료지식과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후 강남과 신촌 세브란스에서 위장관, 대장항문, 간담도, 유방·갑상샘, 소아외과 등 5개 분야의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트레이닝 내내 아프리카 의료봉사활동을 하며 만나게 될 여러 유형의 질병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선교할 곳을 찾다가 한 나라를 만났다. 바로 마다가스카르.
***[역경의 열매] 이재훈 <10> 지루한 의대 공부에 비해 신학은 놀이처럼 재미
마다가스카르 장기선교사 파송 준비… 함께 배운 문화인류학 사역에 큰 도움
이재훈 선교사(둘째 줄 오른쪽 첫 번째)가 2006년 영국 아프리카오지선교회(AIM) 사무실 앞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아프리카오지선교회(AIM)를 통해 마다가스카르에 파송받기 위해 영국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어를 배우라고 해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본부에서 자꾸 물어왔다. 장기로 갈 건지, 단기로 갈 건지. 당연히 내 대답은 장기였다. 평생 있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본부에서 내게 단기로 가면 안 되겠느냐고 계속 요청했다. 알고 보니 나와 아내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AIM 규정상 장기 파견 선교사의 경우 신학을 전공하는 것이 필수였다. 장기 선교사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신학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신학을 공부하는 건 매우 재미난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다가스카르에 가기 위해 최단기로 과정을 마칠 수 있는 코스를 밟았지만 지루한 의대 공부에 비하면 신학 공부는 내게 놀이터처럼 느껴졌다. 도서관 불이 켜질 때 들어가 불이 꺼질 때 나오는 사람이 나였다. 방학엔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씩 성경을 읽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몇 번이나 통독한 나였지만 그 시기는 성경을 보다 깊고, 넓고,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 시간이었다.
신학과 함께 문화인류학을 배운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마다가스카르 사역을 하면서 ‘문화적 배경이 다른 지역과 사람에게 복음이 녹아들어가게 하려면?’이란 질문이 생길 때마다 당시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린다. 현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어 보호자에게 동의를 받기 위해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어머니, 우리가 아이를 깊이 잠들게 할 텐데 그러면 아이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수술이 끝난 후에 아이를 깨워 어머니께 보내드리겠습니다. 동의하겠습니까?”
내 설명을 들은 어머니가 별안간 아이를 안고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지역에선 ‘죽음’의 개념이 ‘통증 없는 깊은 잠’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내 이야기가 ‘닥터 리가 지금부터 이 아이를 죽이고, 수술한 다음에 다시 살려서 너에게 줄 거다’라는 식으로 들렸을 거다. 아이를 죽인다는 말에 겁을 먹고 도망을 간 거다. 그 소동으로 인해 수술이 3시간이나 지연됐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문화를 더 알고 싶었다. 지역마다 다른 모습이 엿보이는 장례식과 결혼식, 부족마다 내려오는 전통 등을 연구해 주민들 삶의 모태가 되는 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그에 맞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우리는 마취라고 설명했지만 현지인은 죽음으로 알아들었듯, 현지인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복음을 설명해야 그 본질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현지인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계속해서 마다가스카르의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문화연구센터도 설립했다. 지금은 사무실에 작은 방 하나뿐이지만, 우리의 사역이 지속되는 동안 문화연구센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마다가스카르에 온 선교사들이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에서 사역을 출발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거기서 나온 많은 연구 자료들이 마다가스카르의 모든 선교사에게 하나의 지침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꿈이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11> 오지 찾아 야외 수술로 ‘부시맨 닥터’ 별명
힘들지만 한 달에 일주일은 이동진료 2000여 물품 준비… 2000㎞ 이동도
2015년 6월 오지로 이동하던 이재훈 선교사와 이동진료팀의 차량이 옆으로 뒤집힌 모습.마다가스카르 이토시병원에서 일할 당시 내가 제시했던 조건이 하나 있었다. 한 달에 1주일은 병원에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다름 아닌 이동진료를 위해서였다. 2006년 말부터 병원에 나가지 않은 1주일간 수도 안타나나리보 근교부터 이동진료를 시작했다. 풀밭,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수술하는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이름 대신 별명으로 날 부르곤 했다. ‘부시맨 닥터’였다.
사역 초창기 때는 오지에 가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구입한 차는 1993년산 중고 SUV였다. 차는 튼튼했지만 고장이 나면 나 혼자 고칠 길이 없었다. 오지에서 차가 고장 나면 전화가 터지는 마을까지 찾아가 수도에 있는 기술자를 부르고, 그 기술자가 수도에서 오지로 내려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려야 했다.
2007년부터는 항로를 이용해 의료후송과 구제사역을 하는 MAF(Mission Aviation Fellowship)라는 단체의 협조로 오지에 가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지게 됐다. 2009년엔 처음으로 사륜구동 차량을 1대 사면서 자체적으로 오지까지 육로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이동진료 지역 선정은 마다가스카르 정부기관의 협조를 받고 있다. 의료접근성이 낮고, 긴급진료 수요가 많은 지역을 우선적으로 정한다. 이후 해당 지역 답사와 지역 기관장의 허가를 거쳐 최종적으로 지역을 선정한다.
오지 이동진료 준비는 보통 2주가 걸린다. 장소가 정해지면 사역에 필요한 물품 목록을 만들고, 의약품을 구입하고 수술용품을 소독하는 등의 준비를 시작한다. 함께 참여할 봉사자가 있을 경우 미리 연락해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먼저 제공하고 교육한다. 한 번 이동진료를 갈 때 준비하는 물품이 2000가지가 넘으니 짐을 싸는 데만 1주일이 걸린다. 외과의사 2명, 마취과의사 1명, 일반의사 1∼2명, 간호사 4∼5명, 운전사 2∼3명 등 15∼20명 정도 되는 인원이 한 팀을 이뤄 유목민처럼 이곳저곳을 이동한다.
우리가 찾아가는 지역들은 보통 가깝게는 300㎞, 멀게는 2000㎞ 이상 이동해야 하는 곳이다. 새벽에 출발해도 그날 안에 도착하면 지근거리에 속할 정도다. 대부분 비포장도로인 데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곳도 많다. 발전기가 고장 나 달리던 차가 멈추는 건 다반사였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차가 진흙에 빠져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땅이 마르고 나서야 차를 겨우 꺼내기도 했고 도로에서 미끄러진 차가 논을 향해 날아가 처박히기도 했다. 거친 길 때문에 덜컹거리는 충격으로 연료통이 떨어져 버리기도 했고, 차 앞유리가 깨져서 테이프로 임시방편을 한 채 1000㎞도 더 넘게 달려 온 일도 있었다.
이렇게 차에 문제가 생기면 예정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어 노숙을 해야 한다. 야간에는 강도단의 위험 때문에 경찰 초소에 몇 시간을 붙잡혀 있다가, 이동하는 차량이 많아지면 떠나야 했다. 폭우로 도로가 유실돼 우회도로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리가 무너져서 먼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실제 사역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난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2008년, 나는 마다가스카르 사역 중 최대 고비를 맞이하게 된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12> 갑자기 끊긴 후원… 귀국할 항공료도 없어
대학 친구들이 비행기값 보내줘… 후원교회 찾기 위해 백방 노력
이재훈 박재연 선교사 부부가 2008년 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세계선교부 선교사 업무교육을 받던 당시 예배 모습.우리 부부는 2003년 한 교회의 50주년 기념 파송선교사로 마다가스카르에 갔다. 교회는 당시 후원 모집에 몹시 서툴렀던 우리에게 사역에 필요한 전액을 후원해줬다. 그 후원으로 마다가스카르에 많은 열매가 열렸다. 그렇게 5년 정도 흘렀을까. 교회로부터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선교사님 죄송합니다. 교회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내년부터 마다가스카르 사역을 후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 수개월 안에 다른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사역이 바쁘다 보니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종결 시점에 이르게 됐다. 주위 사람들에겐 안식년을 위한 준비를 한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한국에 갈 항공료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대학시절 함께 의료선교를 꿈꾸며 활동했던 친구들이 비행기값을 보내줘 겨우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역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태어나 의사 한 번 보지 못한 채 질병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을 치료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지역에서 무당이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마치 패잔병 같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후원 교회를 찾기 위해 여러 교회에 지원서를 냈지만 “힘들다”는 대답뿐이었다. 이전 교회에서 왜 후원을 중단했느냐고 따져 물으며 우리 부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 아닌지 의심하는 교회도 있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 아프리카 의료선교사를 서원했던 어린 시절부터 현지에서 의료사역을 하며 고군분투했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만하겠습니다.’ 스스로에게 대답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응급실 당직 아르바이트나 대진의(대리 진료의사)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예전에 지원서를 넣었던 서울영동교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활동하시던 이재훈 선교사님 되십니까?”
협력선교사 등록을 위한 인터뷰가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이 인터뷰에서도 ‘왜 이전 교회에서 후원을 중단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마치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 전 교회에서 후원을 중단했는가’처럼 들렸다. 다른 말 대신 한마디를 남겼다.
“저희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에서 앞으로 후원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입니다.”
결국 교회는 협력교회로서 후원을 결정했다. 그러나 후원금액은 이전 교회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한 장로님께서 말했다. “선교사님, 우리는 그 전 교회처럼 많은 액수를 후원할 순 없을 겁니다. 하지만 후원금이 채워지지 않아 선교지로 못 가게 되는 일이 생기면, 꼭 다시 저희 교회에 돌아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선교사님이 어떻게 해서든지 선교지에 돌아가실 수 있도록 돕고 기도하겠습니다.”
후원금액보다 장로님 말씀에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는지 못 받고 있는지 고민하던 내게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너를 다시 선교지로 보낼 거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는 듯했다. 그 말씀이 없었다면, 병원 아르바이트 자리가 구해졌더라면 아마도 선교지에 다시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역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면, 나는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고 독하게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부부를 결코 그렇게 두지 않으셨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14> 혀 종양 어린이 포기할 수 없어 한국 보내 수술
출생신고조차 안돼 겨우 비자 취득… 무당이 치료 막아 많은 환자들 고통
2012년 8월 서울 고대안암병원에서 종양제거 수술을 앞둔 마나이(왼쪽)와 수술 한 달 뒤 회복 중인 마나이의 모습.2011년 ‘희망TV SBS’를 촬영하던 때다. 벤분드루(Benvondro) 지역으로 이동진료를 갔다. 마을에서 만난 한 아이가 열병에 걸려 치료를 해주고 있었다. 함께 촬영을 갔던 배우 이필모씨가 근처 마을에서 마나이를 보고 놀라서 데리고 왔다.
“선생님! 어떤 아이 혀가 엄청나게 커서 입을 다물지 못해요. 이 아이 좀 봐주세요.”
마나이를 보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수술할 때 피가 많이 날 것 같아 이런 오지에서 수술하기는 힘들겠다는 것이었다. 진찰하려 했을 때 마나이는 쉽게 자신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9세였던 마나이는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됐을 때부터 혀가 입 밖으로 나올 정도였다고 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혀가 컸는데 음식은 어떻게 먹는지 궁금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이가 무엇인가를 먹는 장면을 포착했는데 음식을 혀 위에 올려놓고 씹지도 않은 채 목으로 넘기고 있었다. 음식의 맛이나 알까?
이 아이를 수술해야 할지, 그냥 둘 건지 선택해야 했다. 그냥 둔다는 것은 음식을 씹지 못하는 상태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술을 한다면 과다출혈, 피가 목구멍으로 역류할 때의 대응 등 매우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의료장비조차 부족한 마다가스카르에서 진행하기엔 위험 수위가 너무 높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시설과 장비, 우수한 의료진이 갖춰진 한국으로 보내는 거였다. 하지만 당시 마다가스카르엔 한국대사관도 없어 비자를 받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심지어 마나이와 부모는 출생신고조차 돼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리가 사는 수도 타나에서 마나이네 집까진 1400㎞나 떨어져 있어 쉽게 도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결단을 해야 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린 마나이가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그려보며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첫 단추는 출생신고였다. 마나이 가족을 데리고 왕복 160㎞의 비포장도로를 수차례 왕복하며 겨우 서류를 만들었다. 신분증을 만든 후 남아공에 있는 대사관에 서류를 보내 여권을 신청하고, 여권이 나오면 비자를 신청할 수 있었다. 글을 알지 못하는 마나이의 부모에겐 이 모든 과정이 생소한 일이었다. 관공서를 찾아가 신청서를 작성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을 거다. 비자가 나오던 날 나는 의대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처럼 환호를 질렀다.
마나이는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얼굴의 거의 반을 가리고 있던 종양을 제거하자 가려져 있던 해맑은 미소가 드러났다. 마나이는 수술 후 빠르게 회복하면서 통닭을 한 번에 두 마리씩 먹을 정도로 식성도 좋아졌다. 이 아이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힘을 보탠 손길들이 열매를 맺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나이에겐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했을 질병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키가 부쩍 자란 마나이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 제법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턱관절의 움직임도 많이 돌아와 이제는 음식을 씹으며 먹을 수 있게 됐다.
마다가스카르엔 여전히 수많은 ‘마나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낫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타의에 의해 치료를 거부당한 채 생명을 잃기도 한다. 치료를 위해 오지로 찾아갔는데 환자들의 치료를 막는 무서운 사람들. 그들은 바로 ‘무당’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15> “당신 무당 아닙니까? 기도로 낫게 해보시오”
현지인 90%가 무당의 치료·점괘 믿어… 우리를 외국서 온 무당이라 여기기도
마다가스카르 오지에서 이동진료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재훈 선교사가 한 어린이의 머리를 치료하고 있다.마다가스카르에는 마을마다 그 마을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무당’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이들은 마을의 가장 지혜로운 어른으로 칭송받으며 개인의 고민이나 집안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주곤 한다. 그 중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무당처럼 쌀이나 돌을 땅에 뿌려 사람의 운명을 점치기도 한다. 또 질병을 신의 저주라 여기며 병든 이에게 약을 만들어 처방해주기도 하는데 아직도 인구의 90%가 치료 효과를 굳게 믿고 있다.
이런 문화가 마을마다 ‘전통’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이 겪었다. 하루는 환자 한 명이 거의 실신 상태로 나를 찾아왔다. 진료를 해보니 장이 막혀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한 상태였다. 환자와 보호자는 수술받기를 원했지만 무당이 문제였다. 환자가 사는 마을의 무당이 “수술을 받지 말라”고 한 것이다. 결국 그 환자는 감히 무당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수술을 받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루 전날 집으로 돌아간 환자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후에도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우리를 외국에서 온 무당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병을 치료하는 사람은 무당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 남서부에 망국키라는 큰 강이 있다. 강 근처 베루루하라는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이 지역 사람들 대부분은 평생 의사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나를 외국에서 온 무당이라 생각했다. 졸지에 현지 무당들과 우리 의료팀이 경쟁하는 관계가 돼버렸다. 갑자기 동네에 으스스한 소문이 났다. 우리가 환자의 간과 눈을 빼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 우리를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사역은 마치고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주겠다는 서류를 만들어 지역의 헌병대장과 경찰서장, 도지사, 시장, 마을 이장 등을 만나 도장을 받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보호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여러 마을과 사무실을 다니며 도장을 받고 캠프 장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어린아이와 그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다. 아이는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온몸에 고름이 차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포도상구균 피부병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간단한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인데 도장을 받기 위해 나선 길이었기에 수중에 가진 약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이를 치료해달라 부탁하며 울먹였다.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약이 없어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남자가 우리에게 물었다.
“기도로 치료를 하지 않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웠지만, 환자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는 있다고 말했다. 사실 기도로 환자가 나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런 능력이 내게 있지도 않을뿐더러 기도만으로 환자를 고치는 기적 같은 일을 현실에서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도해달라는 말에 ‘이 사람도 크리스천인가’ 싶어 그 남자에게 기독교인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교회 근처도 안 가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나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거요?”
“당신이 무당인데 기도로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치료하겠습니까.”
***[역경의 열매] 이재훈 <16> 무당에게 성경 건네자 사시나무 떨듯 손 떨어
무당들이 못 고쳤던 아이 낫자 소문 퍼져… 탈장으로 찾아온 무당에게도 복음 전해
이재훈 선교사(뒷줄 오른쪽 첫 번째)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진료를 받으러 찾아온 환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당신이 무당인데 기도로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치료하겠습니까?”
아이의 아버지는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아이가 3년 동안 이 병을 앓고 있었는데 주변의 용하다는 무당을 다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짠했다. 수중에 갖고 있는 약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 나와 팀원들은 남자의 바람대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부디 이 아이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기도가 끝나고 자리를 뜨며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뭔가 묵직한 게 손에 잡혔다. 슬며시 손에 쥔 걸 꺼냈을 때 나와 팀원들은 까무러칠 뻔했다. 내 손엔 물에 타먹는 항생제 한 병이 쥐어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놀란 채로 멍하니 있을 겨를이 없었다. 즉각 처방을 내렸다. 일주일 이상 계속 먹일 양은 아니었기에, 고용량 요법을 쓰기로 했다. 항생제 절반을 그 자리에서 먹이고 나머지 반은 내일 아침에 다 먹으라고 했다.
본부로 돌아와 머릿속 필름을 되감아보고서야 ‘항생제 사건’의 의문이 풀렸다. 한 교민 자녀의 편도가 좀 부어서 공항 가는 길에 들러 약을 전해주고 가겠노라고 약속하고 항생제를 주머니에 넣어 뒀다가 그 집에 들르는 걸 깜빡하고 비행기에 탑승한 것이다.
한 달 후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고름이 가득했던 아이의 피부는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동네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어딜 가든 “당신이 그 아이 피부병을 고친 의사냐”란 질문을 받았다. 우리 의료진이 더 이상 무당이 아니라 ‘의사’라고 불리게 된 계기였다. 동네에서 신망이 높던 무당들도 못 고친 병을 고쳤을 뿐더러 우리가 무척 강한 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감히 우리를 해하려는 시도도 더 이상 없었다.
어느 날 베루루하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당이 우릴 찾아왔다. 그는 탈장을 겪고 있었다. 국소마취로 수술을 했는데 아픈 내색 하나 없이 의연했다. 수술을 마치고 우리는 그에게 복음을 전하며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줬다. 그런데 그 의연하던 사람이 성경책을 받을 때 손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마을 전체 제사를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받는 순간 내가 해왔던 일에 대한 강한 두려움이 드는군요.”
함께 갔던 현지 목사님이 무당에게 말했다.
“아내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아내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당신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조주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이 다른 신을 따라간다면 창조주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떨던 손을 멈추고 성경을 받아들고 일어났다. 우리에게 자신의 마을에 와 달라고 정중하게 초청하고는 길을 떠났다.
그 마을을 다시 찾은 건 몇 년 후였다. “닥터 리, 무당이 지난달에 당신을 엄청 찾았습니다.” 나를 본 마을 주민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나를 찾는 걸까. 혹시 병이 재발해 나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무당이 왜 나를 찾았습니까?“
“그가 ‘닥터 리를 만나면 성경책을 좀 더 구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어요.”
걱정은 바로 허탈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사역팀에 연락해 성경책 한 박스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역경의 열매] 이재훈 <17·끝> 12년째 매년 100일 오지 생활… 오늘도 떠납니다
감사 전하러 70㎞ 거리를 찾아온 환자… 지금 헌신이 훗날 열매 맺는 밀알 되길
이동진료에 감사를 전하러 온 환자와 함께 한 이재훈 선교사(오른쪽).어느 날 한 13세 소녀가 많이 아파서 1000아리(약 350원)를 갖고 혼자 7㎞를 걸어왔다. 검사를 해보니 말라리아에 감염됐다. ‘이런 몸으로 먼 길을 홀로 왔다니.’ 수액 주사와 약을 처방하려 했더니 혼자 침대에서 주사를 맞는 게 겁이 났는지 도망가려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주사를 처방했다.
우리 막내가 말라리아를 앓을 때 옆에서 간호한 적이 있다. 아프고 힘들어서 엉엉 우는 아이를 힘들게 지켜보았었다. 이 소녀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화장실 가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을 텐데 도움을 받으려 수 ㎞를 혼자 걸어왔다. 도착해서도 뜨거운 햇볕을 얇은 천 조각 하나로 막으며 진료 순서가 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부디 잘 낫고 다시는 아프지 말기를….
이동진료가 끝나갈 때쯤 해가 지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허허벌판에 서서 오랜만에 아내와 통화를 했다. 우리 팀원들의 모습을 본다. 결혼한 간호사 세 명이 공교롭게 아들이 하나씩이다. 진료를 하면서 틈틈이 휴대폰에 저장된 아들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들은 거의 일 년에 100일 정도를 오지에서 보낸다. 환자들이 몰려들 때는 잠시 앉아서 쉴 틈도 없다.
환자로 온 아이를 안아주거나 자기 간식을 나눠 주며 아이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가끔 좋은 음식을 먹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반찬 한두 가지가 올려진 초라한 상차림을 대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도, 샤워 한 번을 하는 데도 불편함이 따를 텐데 지금껏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봉사하러 온 여교수의 화장품을 조금 빌려 쓰고 수줍어하며 예뻐진 자신들을 서로 보며 즐거워한다. 이들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네팔에서 지진이 났을 때 긴급구호팀으로 참가신청을 하려고 했다. 팀원들과 열심히 구호현장을 누빌 생각에 심장이 두근댔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네팔 정부에서 마다가스카르에서 오는 구호팀을 단호하게 사양했었다. 마다가스카르 전국 오지를 다니며 말라리아, 결핵, 한센병, 페스트 의심 환자를 만나면서 의료인을 위한 보호 장비를 국제보건기구에 요청했을 때도 우린 거절당해야만 했다. 사적인 단체라는 게 이유였다. 이런데도 우리는 왜 12년째 이런 일을 계속하는가.
처음 방문한 어느 마을에서 한 여인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마을 사람인줄 알고 인사를 했더니 “닥터 리, 마나호아나(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한다. 이 마을에도 우리 소문이 났는가 생각하는데 1년 전 아누시아리부 지역에 이동진료를 갔을 때 응급 제왕절개수술을 받은 적이 있단다.
“인사해 조시타. 이 분이 널 세상에 오게 도와준 사람이야.”
당시엔 내 눈앞에서 사경을 헤매던 여인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려 70㎞나 되는 거리를 아이를 업고 왔단다.
오늘도 나는 수백 ㎞를 달려야 하는 오지 마을로 떠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때마다 국제구호단체 웰인터내셔널의 명노철 이사장님께서 9년 전 베루루아에서 활동하던 당시 하신 말씀을 떠올린다.
“녹슬어 버려지지 말고 닳아서 없어지는 삶을 살자.”
언젠가 닳아서 못쓸 날이 오겠지. 그동안 열심히 몸뚱이를 쓰자. 썩어 없어질 것을 심었는데 신령한 것을 거둔다면 이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 있으랴. 그것이 곧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