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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北漢山
- 위치 :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 높이 : 비봉 560m
1. 일 시 : 2012. 3. 29. 08:00 ~
2. 장 소 : 북한산(사모바위코스 - 비봉코스)
3. 참석인원 : 35명 (새내기 3명)
4. 탐방코스 : 구기탐방지원센터 - 문수사 - 대남문 - 문수봉 - 청수동암문 -
사모바위 - 비봉 - 승가사. 금선사 - 비봉탐방지원센터
5. 다녀온길 : 서울.춘천고속도로 - 서울외곡순환도로 구리IC - 국민대입구 -
북악터널 - 신영동삼거리 - 비봉길 - 구기분소
6. 오늘활동 상황
○ 08:00 --- KBS앞 출발(가평휴게소)
○ 09:45 --- 구기주차장(사설)도착
○ 10:00 --- 구기분소
○ 10:05 --- 일정안내 및 단체기념사진촬영
○ 10:10 --- 들머리진입
○ 10:22 --- 승가사갈림길
○ 10:59 --- 문수사갈림길
○ 11:08 --- 대남문
○ 11:32 --- 문수봉
○ 12:16 --- 문수봉하단 우회로갈림길
○ 12:17 --- 점심식사
○ 13:02 --- 통천문
○ 13:28 --- 사모바위
○ 13:57 --- 무장공비 은신장소
○ 14:03 --- 비봉
○ 14:43 --- 승가사
○ 15:06 --- 승가사갈림길 원점회귀
○ 15:16 --- 구기분소 원점회귀
○ 15:24 --- 주차장 도착
○ 15:40 --- 주차장 출발
○ 17:25 --- KBS앞 도착(가평휴게소 경유)
7. 북산산 사모바위코스, 비봉코스 살펴보기
□ 개관
- 사모바위코스는 구기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다. 구기계곡은 1998년 12월 실시 이후 현재까지 계곡휴식년제로 지정되어 있어 계곡으로 들어가지 못하나 계곡을 끼고 오르는 탐방로가 있고 매년 10만명의 탐방객이 찾고 있는 북한산의 인기있는 탐방코스이다. 전체적으로 구기계곡에서 대남문, 사모바위까지 소요시간은 편도 약 2시간이고, 거리는 4.3㎞이다. 그리고 구기매표소에서 대남문까지 올라가는 길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초보가 올라가기에는 평이한 코스라고 할 수 있다.
- 구기계곡 탐방코스는 특히 1급수에만 서식하는 버들치가 있는 구기계곡을 따라 15분정도 걸어 올라가면 좌측은 승가사, 우측은 대남문으로 가는 갈림길인 삼거리가 나온다. 산행하단부의 휴식처로서 많은 탐방객들이 여기서 쉬어간다. 40여분쯤 올라가는 해발 683미터고지 까지 걸어 정면에 북한산성의 성문 중 남쪽을 상징하는 대남문이 있으며 구기계곡, 비봉능선, 의상봉능선이 갈리는 탐방로의 분기점이다. 대남문 문루에 올라가 전경을 보며 땀을 식히며 북한산의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비봉능선을 따라 사모바위로 가는 길목에 청수동암문을 지나게 된다.
- 비봉코스는 비봉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다. 비봉을 향하는 탐방로는 작고 아담한 오솔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좌우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홀로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코스이다. 약 4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왼편으로 금선사를 볼 수 있다. 금선사를 지나 약간 오르면 양갈래길이 나타나며 왼편으로 오르는 길은 향로봉(535m)으로 향하고 오른편으로 오르는 길은 비봉(560m)으로 향한다. 향로봉으로 가도 좋고, 비봉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진흥왕순수비(사적 228호)를 만날 수 있다.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에 세워졌던 신라 진흥왕비의 옛 자리이다. 북한산비는 비석을 세운 이래 1,200여 년 동안 잊혀 오다가 19세기 전반에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8.등산기행
□ 산행안내준비
<북한산국립공원안내도>
- 최근 몇 년 동안 서울의 3대 명산으로 꼽히는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을 비롯하여 수도권에 소재한 명소를 두로 거쳐 왔다. 북한산의 수많은 코스 중 비봉능선과 의상능선은 가장 수려한 능선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북한산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감회가 새로웠던 것은 2010. 3. 18 북한산 탐방코스 중 백미로 꼽히는 북한산12산성종주코스를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대서문 - 의상능선 - 산성주능선 - 백운대 - 대서문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12산성 종주코스를 다녀오면서 때늦은 춘설이란 의외의 복병을 만나는 바람에 의상능선구간을 경유하면서 동행하신 분들께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예정된 일정을 모두가 소화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었다.
- 금년 3월 마지막 주 정기산행지를 선정하면서도 봄철 입산통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보고자 비교적 입산이 자유로운 국립공원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북한산 역시 아무 때 아무 곳이나 가리지 않고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산 중 하나로 꼽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부담 없이 그 이름을 일정에 올렸다. 지난주 지리산 원거리, 장거리 산행을 강행한 다음 쉬어가는 코스로 본 것이 바로 북한산국립공원 지정탐방로 10곳 중 아직까지 체험하지 못한 사모바위코스와 비봉코스였다. 비봉능선의 백미로 꼽히는 사모바위코스와 신라진흥왕순수비가 있던 비봉코스를 연계하여 북한산 지정탐방로 10곳 중 2곳을 하루 일정으로 엮어 안내준비를 하였다.
- 주간날씨예보에 따르면 지난 3. 27. 19:00기준 서울 종로일원 날씨는 5℃ 내지 16℃ 분포를 보이고 구름이 많이 낄 것으로 예보하였고, 하루 전날은 5℃에서 17℃ 분포를 보이면서 오후 밤늦은 시간대에 흐리고 한때 비가 내리는 것으로 기상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난주에 이어 금주에도 오락가락하는 날씨 변동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관계로 내내 주눅이 들었다.
- 수도권에 속하는 산을 탐방하면서 매번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바로 나들목 접근이 수월하지 아니하다는 사실이다. 이번에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빠른 길 찾기 정보를 얻고자 북한산국립공원구기분소, 구기탐방지원센터, 비봉탐방지원센터, 구기계곡, 관음사, 대남문입구 등으로 검색해 보았지만 검색정보 없음으로 나타났다. 마지막 수단으로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구기분소 전화번호(02-379-7043)를 확인한 후 구기분소에 전화를 통하여 구기분소 주소지가 종로구 구기동 산 3-20번지(종로구 비봉2길 90)에 소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구기분소까지 101,6km / 1시간46분 소요정보를 확보하였다. 이정도의 제원이면 10:00경 입산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안내준비를 마쳤다.
- 여기서 북한산국립공원을 살펴보고 넘어간다. 북한산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드문 도심 속의 자연 공원으로, 수려한 자연경관과 문화자원을 온전히 보전하고 쾌적한 탐방 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걸쳐 약 79.916㎢의 면적으로 우이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된다. 공원 전체가 도시 지역으로 둘러싸여 생태적으로는 고립된 "섬" 이지만, 도시지역에 대한 "녹색허파"로서의 역할 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며, 수도권 이천만 주민들의 자연휴식처로 크게 애용되고 있다. 수도권 어디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교통 체계와 거대한 배후도시로 연평균 탐방객이 865만명(2009년 기준)에 이르고 있어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과도한 탐방 압력이 북한산의 자연 생태계를 점차 약화시키고 있어 자연휴식년제 구간, 산불조심기간 중 통제구간, 수많은 샛길 안전사고 위험지역 등 출입금지구역에 대한 탐방객 스스로의 출입금지가 필요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맑고 깨끗한 계곡이 형성되어 산과 물의 아름다운 조화를 빚어내고 있으며, 그 속에 1,3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 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과거 2,000년의 역사가 담겨진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역사, 문화유적 과 100여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산재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 문화, 역사 학습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북한산등산지도>
- 비봉능선은 백운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주능선이 문수봉에서 오른쪽 의상능선과 왼쪽 비봉능선으로 갈라진다. 비봉능선은 문수봉에서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까지 이어지고, 의상능선은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으로 이어진다. 이중 의상능선은 2010. 3. 18 이미 다녀왔고 그 당시 비봉능선을 점지해 두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금년 봄 입산통제기간을 맞아 탐방기회를 만들었다.
- 사모바위와 비봉을 오르는 코스는 북한산국립공원 지정탐방로인 사모바위코스와 비봉코스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불광역에서 비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코스 등이 있지만 지정코스 외에 비지정코스가 거미줄처럼 얽혀있기 때문에 공원에서 지정한 사모바위코스와 비봉코스를 연계하여 이를 기본코스로 보고 안내준비를 마무리하였다. 그밖에 예기치 못한 우발상황에 대하여는 현장의 상황을 봐가면서 융통성있게 운영할 요량이었다.
□ 산행안내
<단체기념사진>
- 지난주 산행환경이 여의치 않아 지리산 정기산행 일정이 취소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인지 참여율이 의외로 저조하여 그 일정을 취소하고 탐방기회를 막연하게 다음으로 순연하기는 하였지만 일주일 내내 찝찝하였다. 일주일을 건너뛰고 나니 산행 감각과 계절 감각이 무뎌졌는지 아니면 생활리듬이 깨져서인지 배낭 소품을 챙기는 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 춘천에서 접근성이 좋고 북한산국립공원 지정탐방로 10개중 인기도가 높은 비봉능선에 자리한 사모바위코스와 비봉코스를 연계한 관계로 모두님들의 관심과 성원이 눈에 보였다. 오랜만에 신청인원이 40여명을 넘긴 상항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포기하신 분들이 있어 아쉬움을 남긴 채 춘천을 출발하였다.
- 서울.춘천고속도로를 접어들면서 나들목 주차장이나 주정차상황을 챙기지 못한 점이 찝찝하였다. 북한산국립공원 구기분소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남양주IC를 지나 공무원 출근시간인 09:00가 넘어가면서 통화를 해본 결과 구기분소나 비봉탐방지원센터 인근에는 공용주차장이 없을 뿐 아니라 대형버스 접근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수도권에 소재한 산들을 탐방하면서 경험한 바 있어 예측하기는 하였지만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대안을 강구하기 위해 구기분소에 SOS를 보내 자문을 구해본 결과 뻔 한 답이 나왔다. 비봉길로 접어들면서 구기분소 약600여m 전방에 사설주차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3. 8 삼성산-관악산 탐방 당시 시간당 5,400원씩 징수하는 주차요금 때문에 속을 끊였던 악몽이 되살아났지만 특별한 대안을 강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접수하였다.
- 산행안내준비를 하면서 예상했던 시간대에 비봉사설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요금은 산행소요시간을 4시간으로 잡고 2만원에 흥정하기는 하였지만 시간당 5,000원으로 이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물이 상당량 흐르고 있는 구기계곡을 따라 15분 남짓 오르면서 구기분소에 도착하였다. 구기분소까지 오는 동안 구기계곡 양안으로 등산용품점이 입점하여 문을 연 것을 보면 주말의 상황이 짐작되었다. 북한산국립공원 안내도에 그려진 등산로를 기준으로 오늘일정안내와 더불어 단체기념을 남기고 들머리에 들었다.
<구기계곡>
- 구기계곡은 비봉길로 접어들면서 도심 속에 묻혀버린 계곡으로 보였다. 비봉, 문수봉, 보현봉이 있는 사자능선 협곡에서 발원한 수계가 주차장까지 흘러내리다가 포장길로 접어들면서 그 흔적을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구기분소에 이르기까지 도심 속의 별천지로 여겨질 정도로 한적하였다. 좌우측 절벽 암반지대에 터를 닦고 자리한 고티 나는 주택은 돈푼께나 있을 법 하였지만 간간히 눈에 들어오는 상가는 개점 휴업상태였다. 아마도 평일이거나 이른 시간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 구기분소에서 출발하여 0,7km / 10여분 남짓 오르면서 승가사갈림길이 나왔다. 진행방향 왼쪽으로 0,7km 지점에 승가사가 위치하고, 1,8km 직진하면 대남문에 이른다. 산행일정을 짤 당시 비봉에서 하산길을 선정면서 비봉코스와 승가사코스를 놓고 저울질 하다가 공원 지정코스에 후한 점수를 줬던 것이다. 또한 승가사 보다는 금선사쪽으로 마음이 당겼던 것은 금선사 목정굴이 유혹하였기 때문이다.
- 대남문에 오르는 탐방로는 수도권의 중심에 위치한 탐방로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빈틈없이 잘 정비된 돌계단을 비롯하여 협곡을 이어주는 목재교량이 구기계곡 요소요소에 놓여 있었다. 공원을 훼손하지 아니하고 자연그대로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한 공원 측의 깊은 배려가 두드러졌다.
- 구기분소에서 출발하여 2,2km / 30여분 남짓 오르면서 문수사갈림길이 나왔다. 진행방향 왼쪽 0,2km 지점에 문수사가 위치하고, 0,3km 계단 길을 힘겹게 오르면 대남문에 이른다. 문수사 역시 오늘 일정에 포함되지 아니한 곳이다. 당초 탐방코스를 선정하면서 산행일정 운영시간을 4시간으로 잡으면서 문수사 경유코스를 조정하였던 것이다. 대남문에 이르면서 샛길로 150m만 가면 문수사 경내를 둘러볼 수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선두로 올라왔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다녀오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였지만 진로선도에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수사>
- 오늘 선두팀과 중간팀은 문수사를 경유하지 아니하고 대남문으로 직행하였다. 그러나 총무님과 팬더곰님이 선도하는 후미팀은 문수사를 경유하였다. 역시 오늘도 후미다운 기질이 예외 없이 기능하였다. 운영일정에 없는 번외 경기였지만 문수사 유래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 문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1109년(고려 예종 4) 묵암(默庵) 탄연(坦然)이 창건하였다. 탄연은 고려 때 신품사현(神品四賢)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서예가(書藝家)로, 이곳의 암굴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목격하고 문수암(文殊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양양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고성(固城) 문수사와 함께 우리 나라 문수보살 3대 성지로 널리 알려졌다. 1451년(조선 문종 1)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한 뒤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특히 오백나한을 모시고 있어 나한도량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어머니가 이 절에서 나한에게 백일기도를 한 뒤 이승만을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1960년경 이승만이 이곳에 들러 참배하였고, 이 때 이승만이 쓴 문수암이라는 현판이 요사에 걸려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나한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의 문수보살상은 고종의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모신 것이고, 석가모니불은 영친왕 이은(李垠)의 비인 이방자(李方子: 1901∼1989)가 모신 것이다. 대남문 옆 남장대 벼랑 밑 문수봉(文殊峰)에 있어 북한산에서는 전망이 뛰어난 사찰이다. 이런 까닭에 늘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사찰에서는 매주 일요일 등산객을 위해 불교교리 일요법회를 열고 있다.
<北漢山城 由來>
- 대남문에 이르면서 북한산성과 대남문의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을 살펴보았다. 북한산성은 서울을 지키는 천년요새였다. 이 성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로 원래는 백제시대에 쌓은 토축산성이었다. 고려 고종 19년 (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겨온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 (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조선 영조 21년(1745) 스님(僧) 성능(聖能)이 지은『북한지 (北漢誌)』라는 문헌에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東將臺)· 남장대· 북장대와 행궁· 군창(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백여 만평으로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 보수·복원하였다.
- 이 성벽에는 정문이 되는 서쪽의 대서문을 비롯해 대남문, 대동문 등 누각을 갖춘 큰 문과 보국, 용암 등 누각이 없는 암문(暗門)을 합해 14개 성문이 요소요소 여러 곳에 있었다. 성 안에는 또 하나의 성을 쌓고 만약을 대비했다. 성을 쌓는 작업은 놀랍게도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북한산은 그만큼 천연적 요새로서의 기막힌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세워진 북한산성은 안타깝게 한번도 써먹지 못하고 나라를 일본에 빼앗겨 버리는 굴욕의 역사를 겪게 된다. 북한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차린 일본은 한일합병 뒤 북한산성에 일본 헌병대를 곧바로 주둔시켰고 산성안의 시설물 대부분을 불태웠다. 그렇게 북한산은 한민족 역사의 조락에 휩싸여 폐허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자연재해와 뒤이은 분단시대의 비극은 산성계곡에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을 홍수로 휩쓸려 보냈고, 산사태에 묻혔고 폭격으로 모조리 초토화시켜 버렸다. 지금은 그 슬픈 역사의 쓸쓸한 잔해들만 풀숲에 나뒹군다.
- 지금의 북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부터였다. 서울 도성 배후에 있는 북한산의 전략적 가치를 새삼 인정하고 산성의 수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 숙종 57년(1711년) 서울백성들과 삼군문(三軍門)의 군사들이 놀랍게도 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완공 한 것으로, 수축 당시 13개의 크고 작은 성문과 여장 2,807첩을 축조하였으며 성의 총연장은 7,620보(약 9,500m)에 높이는 3~5m에 가까운 방대한 규모이다. 또한 북한산성 축성 후 수비 보완책으로 성내 계곡에 중성)을 축조하였고, 숙종 말년에는 북한산성과 도성 중간지역인 세검정 서편에 홍지문을 비롯한 탕춘대성을 축조함으로써 도성(都城)을 모성으로 하고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하는 이 일대 전략개념에 완벽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위급 시 왕과 백성이 함께 들어가고자 했던 북한산성은 이후 전란이나 우환이 없어 산성을 이용한 경우는 없다고 한다.
- 북한산성 성문은 북한산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어김없이 성문을 만나게 된다. 숙종 37년 축성 당시 수문, 서암문, 북문, 백운봉암문, 용암암문, 소동문, 동암문, 대동문, 소남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대서문 등 13개의 문을 완성하였으며, 숙종 40년에는 중성 축조때 중성문, 시구문, 수문 등 3개의 문을 추가로 만들어 모두 16개에 이르렀다. 이중 오늘 탐방코스 경유 지점에 있는 대남문과 청수동암문을 살펴본다.
<대남문(大南門)>
- 11:08 대남문 경유
- 대남문은 보현봉과 문수봉 사이 해발 663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앞뒤로 넓은 터를 갖고 있어 마치 평창동 일대를 긴팔로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대남문은 백운대쪽에서 바라보면 성문이 보일 듯 말 듯 아득하게 보인다. 보현봉에서 백운대를 배경으로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라고 알고 왔었지만 전체 운영일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거리였기 때문에 이 또한 접고 말았다.
- 대남문은 북한산성 성문 중 남쪽을 대표하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암문(文殊峯暗門)으로 불리던 성문이다. 해발 715m 의 보현봉과 해발 727m의 문수봉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에 위치한다. 대남문을 나가면 구기동이 나오며 북한산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산성마을로 경유해 산성주차장으로 가거나 의상능선방향으로 연결되는 곳으로 언제나 등산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 대남문 안쪽으로 비봉 2,2km, 대성문 0,3km, 구기분소 2,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대남문루 안부에는 대남문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노적봉, 동장대와 도봉산오 주봉, 자운봉, 신선봉, 오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수봉>
- 11:32 문수봉 경유
- 대남문에서 문수봉으로 향하면서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가면 우회하는 길이고, 직진하면 능선길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능선으로 진로를 잡았다. 문수봉은 북한산에서 백운대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정상 암봉에 서면 발아래로 문수사가 내려다보이고 비봉능선 자락에 위치한 승가사 경내가 시야에 잡힌다. 맞은편으로 보현봉에서 사자능선을 타고 구기계곡으로 장쾌하게 흘렀고, 문수봉 727m 정상을 알리는 표주 뒤편으로는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멀리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보현봉 사자능선에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2010. 3. 18 다녀온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 의상봉으로 힘차게 이어진 의상능선과 오늘일정에 잡혀있는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으로 이어진 비봉능선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 문수봉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조망을 즐기면서 중간팀과 합류하기 위해 대기하는 과정에서 선도의 진로가 바뀌고 말았다. 앞서가는 일행 분들께서 청수동암문을 경유하여 문수봉 하단으로 이어지는 우회탐방로로 접어들지 아니하고 암벽코스로 직행했던 것이다. 이 코스는 북한산 탐방코스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코스로 정평이 나있는 코스이기 때문에 당초 코스를 선정하면서 난이도가 평이한 우회탐방로를 기본코스로 잡았었다. 위험구간은 안전하게 비켜가기 위한 심산이었다. 문수봉의 백미로 꼽히는 암벽코스를 비켜서 일정을 잡으면서도 아쉬움을 남겼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선도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선발팀에서 자연스럽게 암벽 코스로 진입하고 말았다. 내친김에 그냥 죽어도 GO! 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오랴! 하는 심정으로 중간팀까지 암벽코스로 안내하였다. 그 바람에 선발팀과 중간팀은 일정에 잡혀있던 청수동암문에 눈도장과 발도장을 찍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단매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는 법, 부담 없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실보다는 득이 많아 쾌재를 불렀다.
<청수동암문(靑水洞暗門)>
- 당초일정에 잡혀있던 청수동암문 경유는 문수봉에서 암릉코스로 직행한 관계로 그냥 지나쳤다. 위험구간에는 철제난간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암벽을 내려오느라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그 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의 아찔한 스릴은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증간팀과 함께 문수봉 암벽 중간쯤에 이를 즈음 후미팀의 팀장인 팬더곰님으로부터 호출신호가 떨어졌다. 대남문에서 진행방향을 묻는 내용이었다. 비봉방향으로 진로를 안내한 다음 문수봉하단우회로 갈림길에 도착하여 후미팀의 진로를 확인해본 즉 청수동암문 도착! 진로 이상 없음! 이란 명쾌한 응답이 왔다. 아하! 오름구간에서는 일정에 없는 문수사를 경유하는 반칙을 범하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오셨구먼! 알았다 오바!로 교신을 마쳤다.
다.
- 청수동암문은 문수봉과 나한봉 사이의 해발 694m지점에 위치하여 승가사 뒷산 능선에 있는 비봉과 연결되며 대남문과 부왕동 암문 방향으로 갈라지는 요충지인데 이문도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네모난 출입구를 갖추고 있으며 문짝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성 주능선과 의상능선과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 있고 청수동암문은 1999년에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점심식사>
- 오늘 예정된 식사장소는 사모바위 인근이었다. 그렇지만 문수봉하단 우회로 갈림길 능선안부에 이를 즈음 아미 점심시간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먼저 출발했던 분들께서 이곳에 식사장소를 잡아 놓고 점심식사 준비 중이었다. 점심식사가 한창 진행중일 때 후미 일행 분들과 합류하여 오늘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움을 나눴다.
<사모바위>
- 13:28 사모바위 경유
- 비봉능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바위가 사모바위이다. 능선의 중앙쯤에 있는 사모바위는 모양이 사모(紗帽·옛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처럼 생긴 데서 유래됐다고 서울지명사전에 나와 있다. 사모바위는 일명 장군바위라고도 한다. 네모난 바위가 큰 바위 위에 얹혀져있어 생겨난 이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얽힌 가슴 아픈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 조선 인조 임금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자가 전쟁터로 갔다가 다행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오니 사랑하는 여인이 청나라로 갔다. 남자는 여인이 풀려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여인들은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산 자락 지금의 홍은동 지역에 모여 살았다. 남자는 여인을 찾으려고 그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북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고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구기동 쪽에서 사모바위를 보면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이곳에는 문수봉 1,3km, 비봉 0,4km, 삼천탐방지원센터 4km를 알리는 이정표. 비봉능선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안내판, 1, 21사태 무장공비 은신장소 안내판, 1,21사태 발생 개요도 등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다.
<김신조 은거지>
- 13:57 김신조 은거지 경유
- 사모바위는 김신조 바위로도 불린다. 1968년 1·21사태 때 무장공비들이 이곳을 1차 목표 지점으로 삼아 바위 옆 동굴에 은거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최근에 당시 상황을 소개하는 푯말과 함께 동굴 안에는 공비의 밀랍인형까지 만들어 놓았다. 사모바위 뒤편 계단을 내려가 앉은걸음으로 동굴을 빠져 나가면 볼 수 있다.
- 김신조 은거지를 빠져 나오면서 총무님으로부터 손소리통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현 위치가 어디냐는 물음이었다. 총무님과 동행한 일행 분들이 아직까지 사모바위를 경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아뿔싸! 이미 비봉 코앞에서 대장이 보이지 않는다고 난리 부르스였다. 이를 어찌하랴! 대장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후미 중 후미 신세가 되었다.
<비봉>
- 14:03 비봉 도착
- 비봉은 오늘 일정 중 사모바위와 함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비봉은 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가 있던 바위봉우리라 하여 비봉이라 불린다. 비봉 능선은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폐쇄되었다가 개방된 코스이다. 비봉능선은 백운대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주능선이 문수봉에서 의상능선과 갈라지는데 문수봉에서 향로봉까지 이어지는 비봉능선의 명소 중 명소로 불린다. 진흥왕순수비가 자리할 정도의 봉우리라면 가히 짐작이 가리라 본다.
- 승가사갈림길을 지나 비봉을 코앞에 둔 지점에서 비봉 정상을 선점하고 하산하는 선발팀을 만났다. 어찌하여 비봉탐방센터방향으로 하산하지 않고 여기까지 되돌아 오셨느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승가사방향으로 하산한다는 답변이 나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차피 비봉에서 하산길은 이리가나 저리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빠이빠이를 외치고 비봉으로 향했다. 다만, 오늘 일정 중 마지막 경유지로 금선사를 찜했었는데 마지막 구간에서 하산길이 승가사와 금선사로 갈라진 셈이다.
- 비봉 정상은 전체가 흙 한 점 없는 바위덩어리였다. 오르는 길은 오로지 착지에 도움을 줄 정도로 바위를 움푹하게 파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 흔한 로프 한토막이나 철제 난간시설이 없기 때문에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야만 정상 등정이 가능하였다.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올랐다가 전면 바위협곡으로 내려오는 길이 안전하다는 선구자의 안내에 따라 비봉정상에 발도장을 꽉 누를 수 있었다.
- 비봉정상에서는 서울시내 종로구, 은평구, 양주시 일원, 문수봉에서 나한봉, 나월봉등으로 이어지는 의상능선, 북한산 정상부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일원, 보현봉이 뻗어 내린 사자능선, 향로봉 끝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 비봉 정상에서 후미일행 분들과 합류하여 비봉탐방지원센터방향 탐방로로 들어서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장이 진로를 선도하여 앞서 내려가는데도 불구하고 뒤에 따라오는 일행 분들이 한 분도 없었다. 산상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선두일행 분들께서 승가사 방향으로 하산하였으니 우리도 승가사방향으로 하산해야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승가사 방향이 조금 가깝다는 것이었다. 이미 하산예정시간을 넘긴 시간대였기 때문에 고집을 피울 상황은 아니었다. 안내준비를 하면서도 현장의 상황을 봐가면서 융통성 있게 운영할 요량이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승가사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꿩 대신 닭이라고 금선사 대신 승가사로 땜빵 할 심산이었다.
<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순수(巡狩)”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로 순행(巡行)이라고도 한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진흥왕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진흥왕은 가야 소국의 완전병합, 한강 유역의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활발한 대외정복사업을 수행하여 광범한 지역을 새로 영토에 편입한 뒤 척경(拓境)과 순수를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 모두 4기로, 당시의 삼국관계와 신라의 정치상·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진흥왕순수비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문 중에 나오는 짐(朕)· 제왕건호 등의 용어는 신라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 일본인들은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고려시대 윤관의 9성 축조 때나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 때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견해이다. 고려 고종 때의 승려 천인(天因)의〈고석정기 孤石亭記〉에서 진흥왕의 비석이 철원 남쪽 30리 지점인 고석정 부근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도 진흥왕의 또 다른 비가 철원 근방에 있었을 가능성을 말할 뿐 비가 옮겨졌다는 견해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진흥왕대에는 활발한 영토 확장과 함께 많은 비가 세워졌는데 단양신라적성비도 그중 하나이다. 또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신라 관직과 왕의 근시집단의 직명이 새겨진 비석이 조선 숙종 때 지금의 동래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진흥왕의 또 다른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
- 북한산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진흥왕 568년에 세웠다. 비석 높이는 155.5cm에 이른다.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 위치에는 복제비가 세워져 사적으로서 장소적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다.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 확장사업을 성공리에 마친 뒤 561년에는 창녕에 척경비(拓境碑)를 세우고 뒤이어 새로 편입된 한강 이북의 땅을 순수(巡狩)하면서 북한산과 함경도의 황초령, 마운령에 비를 세웠다.
- 진흥왕순수비의 비문은 대개 비슷한 내용이라고 한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펴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제왕은 왕위를 계승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이 왔다. 이에 관경(管境)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펴서 백성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며 충성과 신의를 갖추고 재주를 다해 나라에 충절한 공을 세운 자가 있다면 벼슬을 올려주고 공훈을 표창코자 한다. 이때 왕의 수레를 따른 이는 법장(法藏) 혜인(慧忍)등이었다." 라는 내용이다.
- 문장은 대단히 유려하고, 글씨는 해서체로 질박하면서도 굳센 느낌을 준다.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는<광예주쌍집 廣藝舟雙輯>에서 역대의 서품(書品)을 논하면서 이 비를 신품(神品)의 반열에 넣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세월의 흐름 속에 마모되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엉뚱하게도 무학대사비라는 전설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1816년, 당대의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는 31세 때 벗 김경연과 함께 이 비를 탁본해 연구한 결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듬해에는 벗 조인영과 다시 확인하고서 이 사실을 비 측면에 기록해 두었다.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지붕돌까지 갖춘 격식 있는 비석이었다. 2007년, 복제비를 세울 때 지붕돌의 깨진 조각이라도 수습하려고 샅샅이 조사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
<승가사전경>
- 14:43 승가사 경내 경유
- 승가사는 오늘일정에 없던 곳이다. 비봉에서 진로를 바꿨기 때문에 금선사 대신 경유지점이 되었다. 후미팀 중 앞서 내려가신 분들과 승가사 경내에서 합류하였다.승가사 일주문앞 도로에서 승가사를 경유하지 않으신 몇몇 분들은 도로를 따라 비봉탐방지원센터를 경유하여 주자장까지 하산하였고 승가사를 경유하신 분들은 계곡을 따라 내려와 대남문갈림길까지 원점회귀하여 하산하였다.
- 승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조계사에 속한 사찰로, 북한산 비봉 동쪽에 있다. 756년(경덕왕 15)에 낭적사의 승려 수태(秀台)가 창건하고 당나라 고종 때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가르쳤던 승가(僧伽)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고 이름지었다. 1024년(현종 15)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수하고, 1090년(선종 7)에 영현(領賢)이 중수하였다. 1099년(숙종 4)에는 의천(義天)이 불당을 고쳐 지었다. 1422년(세종 4)에 7종을 합하여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선종에 속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불교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크게 고쳤으나 6·25전쟁으로 불에 타 크게 망가진 것을 1957년에 도명(道明)이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산신각·향로각·동정각(動靜閣)·범종각·대방(大房)·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절 뒤편 자연 입석에 부조로 새긴 마애석불석가여래좌상(보물 215)이 전하고, 석굴 안에는 고려 현종 때 조성된 승가사석조승가대사상(보물 1000)이 남아 있다.
- 석조승가대사상은 승가사에 있는 1024년(고려 현종 15)에 제작된 초상조각으로1989년 4월 10일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86.5cm이다.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전도하여 관음보살로까지 칭송받았던 고승 승가의 모습을 새긴 것이다. 결가부좌한 등신대(等身大)의 상으로, 두건을 쓴 머리, 넓적하면서 광대뼈가 나온 얼굴, 평판적인 체구 등의 특징에서 사자빈신사지석탑(獅子頻迅寺址石塔:보물 94)의 석상 등 고려 초기의 석조승상(石造僧像)과 비슷한 면이 있다. 또, 긴 상체나 넓은 무릎 등은 고려 초기 철불(鐵佛)과 유사하다. 광배(光背)는 승상에 비해서 넓고 큼직한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이며, 특히 신광부(身光部)는 둥근 모양으로 신라의 광배와는 다른 모양이다. 광배 뒷면에는 “태평(太平) 4년, 즉 1024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어 광유(光儒) 등이 조각하였다”는 명문(銘文)이 있어 확실한 연대를 지닌 고려 초기의 초상조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삼각산 금선사 일주문>
- 비봉 정상에서 오늘 기본코스인 비봉탐방지원센터방향으로 제대로 진로를 잡아 금선사를 경유하신 분은 자전거님 미시님, 오늘 우리 모두산악회와 소중한 첫 인연을 맺어 주신 서만근님, 김옥녀님 네 분뿐이다. 네 분께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비록 모든 분들이 승가사방향을 선택한 관계로 경유하지 못하였지만 금선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관련 자료를 챙겨 보았다.
- 금선사는 종로구 구기동 196-2번지에 소재한다. 금선사(金仙寺)에서 금선(金仙)이란 부처님의 다른 이름이다. 부처님을 이르는 칭호는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하여 열 가지가 있지만 이중 능인(能仁), 천중천(天中天), 금선(金仙)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금선(金仙)과 같은 말로는 대선(大仙)과 금선(金僊)이다.
- 금선사는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고승이자 조선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자초(무학자초,1327~1405)대사가 조선왕조의 도읍을 정하고자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을 살피던 중, 지금의 금산사터에 삼각산의 정기가 서려있음을 보고 절을 세운것이 금선사라 전한다. 창건이래로 많은 선지식들이 주석하셨으며, 조선중후기 정조대왕의 원찰로서 수행자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찰이었으나, 일제의 강점기에 소실되었던 것을 불기 2529년(서기 1955년) 도공(道空)스님께서 중건하시고,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현 주지 법안(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이래 적묵당, 미타전, 연화당, 삼성각, 대적광전, 반야전, 홍예교, 일주문, 해우소 등을 중창하였다.
- 부처님께서 상주하시는 기도처인 이곳에서 수행시던 농산(聾山)스님이 조선 정조대왕의 왕세자인 순조대왕으로 환생하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등 정조대왕의 원찰인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도량의 전각은 법회를 보는 반야전을 지나서 2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소나무를 지나서 108계단을 오르면 금선사의 주불이 모셔진 대적광전이 사찰의 가장 중심부이면서 가장 높은 곳에 그 위용을 과시하고, 우측으로는 삼성각(殿閣)이 있고, 북한산의 일급수가 모였다가 흘러내리는 홍예교가 자리를 하고 있다. 대적광전 아래에 있는 미타전과 연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콘크리트 2층 건물로, 2004년 법안스님이 신축했다. 1층은 연화당이라는 편액이 붙은 건물로, 영가들의 유골(영옥 처리)과 위패를 봉안하는 추모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 금선사대웅전은 금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 법당으로 목정굴 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로, 연화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익공을 얹은 모습이다. 건물 외부는 전면 4분합의 교살창호로 마감하고 어칸에는 편액 1기와 주련 4기를 걸었으며, 외벽에 단청은 물론 용두와 봉황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주법당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준다. 내부는 우물마루 위로 중앙 감실형 불단을 가설하고, 좌우로 지장단과 진영단, 신중단을 봉안하였다. 특히 중앙 불단 위로는 석조관음보살상을 주불로 뒷 편에 붉은 바탕에 금선으로 채색한 석가모니후불탱을 봉안하였는데, 후불탱은 1980년에 주지 비구니 대원스님과 금어 조정간이 조성한 것이다.
- 이외 불단 좌측으로는 지장단이 있으며, 불단 위로 금동지장보살좌상과 1992년에 주지 석원욱이 조성한 지장시왕탱이 걸려 있다. 또 우측에는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61호로 지정된 화고 128㎝, 화폭 81㎝의 신중탱과 1966년에 조성된 신중탱 2구가 봉안되어 있다. 특히 금선사 신중탱은 광서 13년(1887)에 제작된 것으로, 북한산 지역의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화기에는 '금선사봉안 신중탱'이라는 기록이 있어 19세기 초 금선사의 역사를 살 필 수 있다.
- 신중탱은 전반적으로 붉은 색조가 강하고 도상은 단순한편이나, 상단에 제석천이, 하단에는 위태천이 배치된 특이한 구조이다. 특히 제석이 위치한 천부(天部)가 축소되고, 하단에 위태천이 중앙에 모셔져 강조되는데, 팔부중 이외에 산신이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는 19세기 신중탱에서 일반적으로 산신과 조왕신이 짝을 이루어 묘사되지만, 금선사 신중탱에서는 산신과 호법신장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경우로, 산신과 조왕신이 같은 토속신으로서 19세기 이후 서울ㆍ경기지역 불화에 보이는 특징이다. 이는 신중신앙이 대중화되면서 민간신앙과 결합한 사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외 대웅전 내부에는 중창주 도공스님과 철우스님의 진영이 있으며, 1968년에 조성된 높이 81㎝, 구경 45㎝의 범종이 전해진다.
- 금선사의 대표적 이야기가 바로 조선 순조의 탄생에 얽힌 영험담이다. 조선 정조 시대 대구 팔공산 파계사에 계시던 용파 스님은 정조를 알현하고 불교 탄압에 대해 시정해 줄 것을 아뢰었다. 마침 슬하에 자식이 없던 정조는 왕자 잉태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용파 스님은 이를 받아들여 금선사 농산 스님께 이야기했다. 이내 용파 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 스님은 이곳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정진에 들어갔다. 기도가 익어갈 무렵, 용파 스님이 선정에 들어서 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어날 만한 사람이 농산 스님 밖에 없었다. 이에 농산 스님에게 왕자로 환생할 것을 아뢰니, 농산 스님은 이를 수락하고 수빈 박 씨의 꿈에 현몽해 환생할 뜻을 밝혔다. 농산 스님은 기도를 마치고 상서로운 징후를 보이며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서 받은 봉서에는 ‘경술 6월 18일 세자 탄강’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순조가 태어난 날 왕실의 서북쪽에서 맑고 붉은 기운이 나와 산실을 휘감았는데, 그 진원이 바로 목정굴이었다. 굴 안에는 앉은 채로 열반에 든 농산 스님이 있었다.
<목정굴(木精窟)>
- 목정굴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에 있는 불교 수행 굴로서 금선사와 한곳에 있다. 이곳 초입에 들어서면 입석사각형의 돌기둥에 금선사 기도성지 목정굴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무무문(無無門)을 들어서면 협소한 계곡 암석에 목정굴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수월관세음보살좌상을 모셔 놓고 비구니스님과 불자들이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 목정굴은 협소한 계곡 암반석 위에서 낙수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물의 세계를 관장 할 수 있는 이치를 형상화하여 수월관세음보살상을 모셔 놓게 되었다고 한다.
□ 산행을 마치고
- 오늘은 후미일행 10여명이 일정에 잡혀있지 않은 문수사를 다녀오면서 의외의 보너스를 얻었고, 선발팀이 문수봉에서 진로를 바꿔 우회탐방로 대신 암릉으로 직행한 관계로 청수동암문을 간과한 대신 북한산에서 제일 난코스로 꼽히는 문수봉 암릉구간을 체험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비봉에서 하산하면서 금선사와 승가사로 팀이 분열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였지만 이해득실을 따질 것 없이 총체적인 종합의견으로 요약해서 보면 기대성과를 초과달성하는 개가를 올렸다고 평가한다.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사모바위코스와 비봉코스 어간에 있는 모든 명소를 빠짐없이 두루 섭렵하였기 때문이다.
- 오늘도 북한산을 대표하는 능선 중 한 곳인 비봉능선을 탐방하면서 북한산에 대한 새로운 맛을 만끽하였다. 한마디로 북한산에 이런 곳도 있었던가? 였다. 수도권에 소재한 명산을 정기산행지로 선정하여 운영해오면서 지정탐방로와 비지정탐방로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키어 일정운영에 말로서 표현하지 못할 어려움을 여러 차례 겪어왔다. 또한 주정차시설이 여의치 않아 매번 마음고생을 했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죽어도 이 지역은 또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다져 먹었었다. 그러면서도 그 다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수도권에 속산 산을 정기산행일정에 잡아 놓는 진정한 이유를 아직도 본인은 모른다. 아마도 오늘 동행하신 모든 분들께서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줄 믿는다. 오늘은 어떤 일이 터질까? 라는 궁금증을 안고 예기치 못한 우발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가도 안전사고 없이 일정운영을 마무리하고 나면 어! 오늘도 역시 좋았어! 이만하면 걍 평년작 수준은 되겠지? 라고 위안을 삼아왔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본인이 느끼는 심신의 한계임이 분명할 것이라고 자평해 본다.
- 오늘 일정을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고 안전산행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석룡산에서부터 후미팀장을 자청하여 후미리더로 활약해 주신 팬더곰님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북한산 사모바위코스와 비봉코스에서의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