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뒷모습
정경순
1
사진 속 여인이 수줍은 듯 웃고 있다. 촘촘히 앉은 성가대원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은은히 빛났었고, 우연히 마주칠 때면 반갑다며 앞니가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두 아들의 기도 제목을 이야기하면서 겸연쩍다는 듯 싱긋 웃을 때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어느 해던가, 송구영신 예배가 끝날 무렵 뒤쪽에 앉아있던 나를 향해 온몸을 돌려 바라보면서 새해 덕담을 해주었다.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지만 함박 웃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면 언제나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서로 다른 소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어느 날, 멀찍이서 스치듯 잠깐 보았는데 무척 수척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흔들며 밝게 웃기에 그저 야위었다고 생각했건만, 폐암과 싸우는 중이라는 것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녀는 황급히 떠났다.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는 소식이 날아와 내 가슴 한편에 깊숙이 꽂혔다.
웃으며 빈소를 내려다보는 그녀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빈 공간에는 적막만 가득하다. 장례예배는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떠나간 이를 기리며 영혼의 평안을 구하는 기도와 찬송. 그러나 이 땅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에는 무척 아쉬운 시간이었다. 짧은 의식이 못내 서운하다. 한 생명이 이렇게 스러지는구나, 허무하고 애통하다.
조문을 다녀온 후 여러 날 동안 나는 우울함을 떨치지 못했다. 환한 미소에 야윈 얼굴이 겹쳐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과 홀로 싸웠을 것이다. 둘째 아들의 결혼을 그토록 기원했는데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남편과 함께 여행하며 여생을 보내겠다더니, 죽음이 걷어간 그녀의 이야기로 내내 마음이 아팠다. 침잠으로 나를 아득하게 몰아간 것은 그것뿐이었을까.
훌륭하게 성장한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고, 열심히 뒷바라지해 온 그녀에게 감사의 편지 한 장 읽어주었더라면. 굽이굽이 넘었던 고갯길, 이만큼 살아낸 것은 아내 덕분이었다고 예배의 말미에 감사와 애도의 인사라도 한마디 해주었더라면…. 어쩌면 그것은 언젠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더니 그녀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인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몇 걸음 나에게 다가오더니 여느 때처럼 살포시 안아준다.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있다. 남편의 그림자로, 자식의 거름으로 살았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며, 괜찮아, 괜찮아, 내 등을 토닥인다.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노라, 도리어 인사를 전하고 있다.
2
얼마 전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해 쓴 어느 작가의 글을 읽었다. 노부부가 미국에 사는 딸네 집에 갔다가 남편이 낙상을 당하여 결국 몸져누웠다고 한다. 투병하는 내내 아내와 딸의 가족이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부부는 평소 죽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는데,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류도 이미 써 놓았고 천국에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세상을 뜨기 몇 달 전, 어떤 장례식을 원하느냐고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너의 결혼식 때처럼 해달라고, 그때 정말 행복했었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으며 식구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즐겁게 식사하고, 집안의 전통을 따랐던 소박한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결혼식은 기쁨과 축하의 마당이 아니던가.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이 축제 같기를 원했던 그의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가족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육신의 고통이 끝나면 평안한 곳으로 간다는 확신으로 희망에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 남겨진 사람들…. 어찌 헤어짐의 슬픔이 없겠는가. 그러나 멍에처럼 짊어졌던 인생의 숙제를 마치고 나면 가는 길이 홀가분해질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면, 자신의 일부처럼 여기던 혈육마저도 집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떠나는 심정이 좀 가벼워질는지 모르겠다.
장례식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치러졌다. 잠자듯 평온히 떠났고 남은 이들도 편안하게 고인을 보냈다고 작가는 더듬었다. 온전히 아버지를 추억하고 기리며 애도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3
오늘 아침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가족만 모여 장례를 모두 마친 후 뒤늦게 부고를 낸 것이다. 고인의 뜻이었다고 한다. 타산이 맞지 않아 남들이 주저해도, 꼭 필요하다면 어려움을 자신이 감당하며 책을 냈던 출판인에 관한 기사다. 병세가 나빠져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서도 평소처럼 흐트러짐 없이 지내다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살아왔던 모습과 이 땅과 결별하는 모습이 한결같구나, 생각했다.
살았던 모습대로 떠나고 있다. 죽음으로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기까지가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몫의 인생인가 보다.
정경순
≪에세이21≫로 등단(2015)
산영수필문학회 회원
이학박사(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생물학과)
전 국립보건원, 함춘여성크리닉 근무
에세이 『한여름의 영국 산책』
에세이(3인 공저) 『홍콩, 몽중인』
수필집(공저) 『깊은 소리 세월의 향기』 『따뜻한 사람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