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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네 번째 교회, 두아디라 교회, 중세기 종교암흑시대
기간: AD 538~16세기초(중세기 종교암흑시대의 교회, 광야로 피신한 교회)
버가모 시대에 로마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부터 기독교회는 정치권력과 밀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기 538년에는 로마 천주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종교, 정치, 군사력에 관한 막강한 권세를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거절하는 성도들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동안 5천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당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서기 538년부터 시작해서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약 천 년 동안의 긴 기간인데 세계 역사는 이 기간을 “종교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 동안 로마 천주교회의 권세는 유럽의 국왕들을 지배하고 장악할 만큼 강력했다.
로마 천주교회는 자신들이 제시하는 교리와 명령을 거절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하게 핍박하였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이 시기 동안 가장 많은 진리가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을 거절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와 깊은 산으로 피신하여 진리를 간직하고 살았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럽의 대도시에 있던 교회가 큰 건물과 장엄하고 화려한 예식 그리고 거대한 조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인 줄 알고 거짓 교리들을 받아들였다.
<교회 이름의 의미>
두아디라의 이름이 가진 의미는 “통탄스러운 희생”인데, 이것은 이 시기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의미이다.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온 배도로 인하여 믿음의 단순성이 외적인 행함과 고행으로 대치되고 희생되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와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단순한 복음을 외적 행함과 화려하고 엄숙한 예식과 고행으로 변질되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가 참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시기였다. 교회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회개의 신앙을 저버리고 죽은 행위와 의식을 신앙의 기초로 만들어 나갔다.
<예수님의 모습>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계 2:18)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묘사한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은 여기뿐이다. 중세기의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중보자의 위치를 이 땅의 교회 사제들에 의해서 빼앗기셨다.
마리아라는 인간 중보자가 등장하고 고해성사가 나타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나가는 대신에 신부와 사제를 통하도록 가르침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말한다.
또한 두아디라 교회를 보살피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왜 그렇게 묘사했을까?
암흑으로 뒤덮인 시대에 예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당신의 백성을 보살피셨다. 중세기 천 년 동안 예수님은 핍박을 피하여 알프스 산 중에서 피곤한 발을 이끌고 살아가는 성도들과 동행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발과 눈이 묘사된 것이다.
<칭찬의 말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칭찬했는데, 첫째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이고, 둘째는 “나중 행위”였다. 먼저 나중 행위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예언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후기에 들어가면서 요한 위클리프가 1320년경에 개혁을 시작했고, 후에 후쓰와 제롬이 개혁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화형대에 오르는 순교를 당했다(1415년).
틴데일, 쯔빙글리 같은 사람들도 희생적인 개혁자로서 역사에 남아 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 후기에 있었던 이들의 피 묻은 개혁 사업 때문에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천 년의 핍박을 견딘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칭찬했는데, 종교암흑시대에 누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까? 중세기 천 년 동안 배도한 교회의 핍박을 피하여 광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 중 우리는 왈덴스인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알프스 깊은 산으로 피신하여 모여 살면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희생 정신으로 많은 사업을 해냈다. 두아디라 시대에는 교회 성직자와 사제들만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왈덴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왈덴스의 청년들은 목사가 되거나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2년 동안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들의 선교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을 갖고 다니다가 붙잡히면 처형당했기 때문에 왈덴스 선교사들은 많은 성경절들을 외워야만 했다.
진리를 찾는 영혼을 만나면 몰래 그들이 외운 성경절을 종이에 써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왈덴스의 청년들은 2년 동안 유럽의 각 도시로 흩어졌다. 아무에게나 말을 붙이고 전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점이나 가게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을 살피고 접촉하여 전도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렇게 2년이 지난 후에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복귀율이 50%도 되지 않았다. 매해 50%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왜 50% 밖에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50% 이상의 청년들이 붙잡혀서 감옥에 갇히거나 목이 잘리거나 화형대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께 바친 헌신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생존해서 돌아올 확률이 50%가 안되는 선교사업에 보낼 수 있을까? 이것이 알프스 산속에서 진리를 지키던 왈덴스인들의 희생이었다. 왈덴스 청년들의 목숨을 건 선교사업은 6백 년 동안 계속되었다. 왈덴스인들은 나중에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죽어서 가문이 끊어지는 가정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왈덴스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였다. 이러한 그들의 헌신은 후에 종교개혁 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들의 희생이 시발점에 되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개신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왈덴스인들의 역사는 오늘날 얄팍하게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을 뜨겁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하늘에는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불리우는 교리는 “세속적으로 살아서 부끄럽지만 하나님이 봐줘서 겨우 구원받게 된다.”라는 가르침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교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일곱 교회 예언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왈덴스인들의 피 묻은 생애 앞에서 어떻게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한 번 믿으면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죄를 버릴 수 없고,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왈덴스인들의 생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회개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책망의 말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 가운데 가장 길고 강력한 책망의 말씀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졌다. 세속화되고 이교의 교리를 받아들인 두아디라 교회, 오늘날의 로마가톨릭을 표상하기 위해서 이세벨만큼 적절한 표상은 없을 것이다.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여제사장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바알신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 놓았다. 이세벨은 결국 국가 권력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전체가 우상숭배를 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 앞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배도를 책망하면서 3년 반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아합 왕과 이세벨의 추종자들은 엘리야의 개혁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이런 역사가 두아디라 교회에 그대로 반복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네가 영적 간음과 우상숭배에 빠졌다.”라고 했다.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영적 간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배도에 빠지게 된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시대에 교회 지도자들은 태양신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간음에 빠졌고, 우상숭배를 받아들였다.
아합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이세벨이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서 각종 거짓교리와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버가모 교회 시대에 기독교회와 태양신교의 혼합으로 뒤섞여졌던 거짓 교리와 우상숭배가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서는 여러 차례의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교리화되어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적 진리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다음과 같은 본 모쉐임의 증언은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교회의 감독들은 이전에 희랍과 로마의 이방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자신의 신들에게 존경과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었던 종교 의식과 제도를 조금씩 고쳐서 기독교 교회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새로 개종한 이교도들은 조상 때부터 전래되어 온 의식들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고, 예수님과 성자들도 자신들이 섬기던 이방신과 같은 방법으로 숭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이교도들이 좀 더 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자, 곳곳에 태양신전과 유사한 거대한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교회마다 여러 가지 그림들과 조각된 우상들로 단장함으로써, 외관상으로나 내면적으로 이교도들의 신전과 흡사한 것이 되었다.” (J. L. Von Mosheim, Ecclesiastical History, I, 369).
실제로, 8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각종 성상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이것들에 입맞추고 기도하며, 분향하고, 절하는 일이 극에 달해서, 오히려 우상을 섬기지 않는 회교도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조롱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두아디라 시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신 종이었을까?
구약 시대 아합 왕과 이세벨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처럼, 두아디라 시대에도 엘리야와 같은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이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당신들이 이세벨과 행음했다.”라고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성서적 진리로 인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그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칼과 창 앞에서 거짓교리와 우상숭배를 곧바르게 지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이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진리를 말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양심의 음성을 죽이고 살았고, 그 결과 교회는 천 년 이상 동안 영적 대기근에 들어가게 되었다.
구약 성경의 이세벨 시대에 배도와 우상숭배 때문에 3년 반 동안 기근이 있었던 것처럼, 두아디라 교회에도 천 년 동안 길고 긴 말씀의 기근이 왔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과 백성들을 광야와 산으로 피신시켰기 때문에 유럽 대도시의 교회들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대도시의 교회에 남아있던 교인들은 심령의 부흥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극심한 영적 기근을 겪어야 했다.
구약 시대 아합 왕과 이세벨의 추종자들이 엘리야가 전한 회개의 기별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을 통해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회개하라는 말씀을 보내주셨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계 2:21).
<약속의 말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예수님)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iron rod, 철막대기)을 가지고 저희를(두라디라 교회의 악인들)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예수님)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26-29)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의인으로 묘사된 “이기는 자와 예수님의 일을 지키는 자”들은 누구일까? 이세벨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혁의 정신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바로 왈덴스인들과 개혁자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일을 하는데 사람들을 통해서 할까?
사실, 예수님의 일을 하는 데는 구태여 인간의 도움이 없어도 된다. 천사들이 성경을 번역하고, 책들을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들 수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이 예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실까?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예수님의 일을 해야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영적으로 깊은 체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해야만 사탄의 기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는 거짓 교리와 거짓 복음이 난무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왈덴스인들이 그 시대의 예수님의 일, 즉 복음과 진리를 지키고 고수하기 위해서 알프스 산속으로 들어가서 고생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대다수는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신앙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두아디라 교회의 배도에 가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위클립이나 허쓰나 제롬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시대의 예수님의 일, 즉 개혁사업을 하지 않았으면, 그들 역시 두아디라 교회의 수많은 성직자들 중 하나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계 2:28)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들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또 하나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새벽별”이다. 왜 예수께서는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까? 새벽별(morning star)은 한밤이 지났지만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이른 새벽에 보이는 별이다. 그래서 “새벽별” 이라는 표현에는 곧 어둠이 물러갈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칠흙같이 어두운 배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의인들을 위하여 종교 암흑의 밤이 아직 지나가지 않은 이른 새벽에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고 불리는 위클립, 후쓰, 제롬 같은 개혁자들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다.
중세기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타날 것이지만, 두아디라 교회에서 고통당하는 의인들을 위해서 일찍 개혁자들을 보내어 위로하시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