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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서 여승무원이 기차표와 플라스틱 카드를 바꿔준다. 자리를 찾아가니 우루무치에서 온 승객이 두 사람 있다. 모자(母子)간인 줄 알았더니 아니다. 젊은 남자의 이름은 정쟝(曽江), 네이멍구(內蒙古) 후허하오트(呼和浩特-몽골말로는 호호트)에서 니싼자동차 일을 한단다. 아주머니와는 인사만 하고 이름은 물어보지 않았다.
지도를 꺼내보니 북쪽으로 치달아 후이주즈츠취(回族自治区)인 닝시아(宁夏)를 통과하여 네이멍구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가다 남으로 진로를 바꾸어 산시, 베이징에 이른다. 란저우에서 오후 3시에 출발해 17개 역에 정차하고 내일 오후 7시에 베이징역에 도착하는 28시간 여정이다. 와하하(娃哈哈), 엄청나다. 2004년 친구와 손윗동서 만나러 솔렉에서 시애틀로 그레이하운드 타고 간 시간이다. 오로지 인내만이 살 길이다.
아차, 어제 오후 베이징의 민박에 전화해 내일 바이리샤(百里峽) 경치구경 가자고 한 것이 날짜 착오임을 깨닫고 다시 전화했다. 민박주인 말이 바이리샤는 도로공사중이라 진입이 안된단다. 모레 5월 6일에 차라리 열하일기의 현장인 청더(承德) 가기로 정했다.
란저우를 떠나며 황허를 마지막으로 내려다 본다. 란저우 교외는 황무지에 집을 지어 부락을 이루고 결코 옥토로 보이지 않는 밭을 가꾸고 있다.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한 비닐이 설치되어 있고 비닐하우스도 더러 보인다. 언뜻 보기에는 메말라보인다. 산은 돌산인지 나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자연환경을 이기고 삶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축복을....물론 더 큰 축복은 황허의 물이겠지만.
저녁으로 정과 우리는 허판(盒饭), 허판 하며 밀고 다니는 카트에서 20위안짜리 도시락을 사먹었다. 우리 KTX 도시락이나 별 차이 없다. 아주머니는 컵라면을 먹고. 컵라면은 큰 것이 6위안이고(슈퍼에서는 더 싸겠지만) 궁위안 매점 같은 곳에서는 물값, 식탁값을 포함해서 10위안 받는다. 공항이나 기차는 뜨거운 물이 공급된다.
정과 메모지에 글을 써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도 와 봤고 제주도의 자연경관이 아주 좋았단다. 키가 큰 젊은 여성일수록 더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이 인상에 남는단다. 내가 타먼상셩가오건시에잔(她们上升高跟鞋站 그녀들은 높은 구두에 올라서 있는 거죠) 이라니 그렇단다. 네이멍구 석탄 이야기가 나왔는데 멍구 석탄이 더 싸게 들어와 네이멍구 석탄이 안팔려 죽을 쑨단다. 그가 휴대용 와이파이 기계를 가지고 있어 그의 호의로 암호를 받아 집사람이랑 몇몇 친구와 카카오 톡으로 안부를 나눌 수 있었다.
밤 열시에 멀미에 강한 내가 윗자리(上铺 상푸라 한다)로 올랐다. 란저우로 오며 상푸에 자리해서 한 멀미에다 빙링스 가느라 한 뱃멀미를 더한 아들을 위해서다. 아들이나 나나 집에서는 코골이를 좀 하는데 기차에서는 안한 것 같아 다행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실내등을 끄고 머리맡의 등을 켰다. 일지를 쓰고 나니, 둔황에서 반병짜리 45위안 주고 산 바이저우(白酒)를 두어잔 마신 것이 효과가 있는지 스르르 눈이 감긴다.
화장실이 불러 잠을 깼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5월 5일 새벽 3시다. 이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고양이 걸음으로 발판을 딛고 내려왔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창의 커텐을 조금 열었다. 어제 본 바이타산 아래 회교사원 칭전스(淸真寺) 첨탑에 걸린 것 같은 그믐달이 하늘에 걸려있다. 기차는 모든 사람의 밤을 싣고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줄기차게 달린다.
란저우를 떠나기 전에 마련한 빵과 라면, 살구와 토마토로 아침을 해결했다. 아주머니는 파오터우(包头)에서 이미 내렸고 그 세시간 뒤 정은 후허하오터에서 내리니 그 방에는 우리 둘 뿐이다.
淸은 소수민족으로서 어떻게 대륙을 260여년 동안 휘어잡았을까 하는 화두로 아들과 토론도 벌였다. 아들이 책을 많이 읽어 역사 지식이 쎄다. 팔기군이 강하다고 하나 숫적으로는 한계가 있고 무력으로 휘어잡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텐데. 1644년 도르곤이 베이징을 장악한 후 明의 신료들을 회유했죠, 吴三桂를 왕으로 봉한 것도 한 예고. 잔존세력이 南明을 칭하며 끊임없이 저향했거든, 우산구이가 나중에는 산판(三藩)의 난으로 대들었고. 무력과 회유를 번갈아 쓰며 안정을 도모한 측면도 있지만 결국은 백성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염원에 부응하는 정치를 한 땨문이죠. 그렇지. 순즈(順治), 캉시(康熙), 췐룽(乾隆)을 거치는 100여년간 지속적으로 선정을 펼쳐 중국인의 마음을 열었겠지. 그렇게 결론 맺었다. 민족과의 화합을 중시한 결과 통일을 이뤘지만 한편으로는 만주로서의의 정체성을 잃고 결국은 중화속에 녹아들어갔다.
그 변방국인 우리는? 반도에 웅크려 이름 보존하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만주를 아우르는 다민족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여운으로 늘 남아있다. 대학 초년시절에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역사"와 그때 유행하던 민족주의에 흥분하던 생각도 난다. 최문환 선생님의 "민족주의의 전개과정"도 꽤 인기였지. 지금 보면 다민족국가와 민족주의는 이율배반적이네. 오늘날 한국기업의 중국투자 성패는 중국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여느냐, 그러자면 현지화를 얼마나 하느냐 하다가, 결국은 청나라 꼴이 되지 않을까? 망상이 망상을 부르는 결론 없는 화두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김에 에라 픽션이나 한판 꾸며보자.
할아버지의 부마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정사로 삼아 중국으로 떠나보내고, 이산(李祘)은 침소에 머문채 이틀을 꼬박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내가 직접 나설까? 영상을 비롯한 대신들이 난리겠지. 만고에 전례가 없던 일이옵니다. 아니되옵니다. 열성조에 누가 될까? 삼전도에 꿇어 앉은 종(倧) 할아버지의 핏발선 눈길이 쏘아본다. 네, 이놈. 정축의 치욕을 잊었느냐? 나라의 체통이 어찌 되겠느냐. 아니 될 일이지? 하지만 이때가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이성계(李成桂) 할아버지면 이럴 때 어떤 판단일까? 여진(女眞)은 나와 형제나 진배 없는 사이, 함께 변방을 말 달리며 장부의 꿈을 키웠노라. 강한 자가 왕이 되고 더 강한 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천하의 이치, 어찌 홍타시를 탓하리. 그럼 이 소손(小孫)은 어찌 합니까? 뜻을 세우면 행할 지어다. 네가 앉은 그 자리가 이 할애비가 행하지 않고 얻은 자리냐? 최영이 나만 못하더냐? 조민수가 나만 못하더냐? 하나 행하지 않은 자는 자리가 없는 법. 알겠사옵니다.
사흘날 아침, 이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회를 연다. 과인이 이번 만수절에 친히 북경으로 가서 건륭제를 알현하고 축수하려 하노라. 입조한 영상 이하 대신들이 파격선언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영상이 수염을 떨며 아뢴다. 만수절 축수는 전례에 따라 이미 보낸 사신으로 충분하옵고...과인이 뜻이 있어 행하니 여러 대신들은 두말 말라. 시일이 촉박하니 도승지와 어영대장만 대동하고 경장으로 금성위를 따라 잡을 터이니 마필을 준비하게 하라. 과인이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한필의 준마로 족하도다. 강희제나 건륭제는 과인보다 높은 연치에도 갑주입고 전장을 누볐거늘 거기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과인이 없는 사이 영상 이하 대신들은 각자 맡은 일에 소임을 다하여 국정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백관의 환송을 받으며 도성을 떠나 홍제원을 넘은 이산 일행은 평양에서 박명원과 합류하여 의주에 닿는다. 장마비에 열흘을 의주관에 머물다 비가 뜸한 틈을 타서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수를 건넌다. 1780년 6월 24일이다. 부윤이 가마를 내놓으며 가마타기를 권하지만 이산의 대답은 단호하다. 여기까지 겪은 풍찬노숙은 조선백성의 고초를 함께 하는 것이요, 앞으로 겪을 풍찬노숙은 짚신발로 걸으며 따르는 종자들과 고초를 함께 하는 것이로다.
압록수를 건넌지 보름만에 심양에 닿아 심양태수의 영접을 받는다. 연통은 받았사오나 조선국왕의 직접 행차는 어인 일이신지요? 황상의 만수절 축수행차에 과인의 어인 까닭이 있겠소. 지나온 길이 옛날 옛적의 조선땅이라 감회가 깊고 귀국 관원들이 잘 대해주어 고맙소.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태수가 잠깐 눈섶을 찌푸리다 정중한 태도로 돌아간다. 한혈마를 띄워 조선국왕의 행차를 기별하여 답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여기서 묵으시며 잠깐 지체하시옵소서. 갈 길이 멀고 시일이 촉박하니 내 어찌 지체할 수가 있으랴. 가는 도중에 답을 만나도 되니 그대는 지체없이 길을 열라. 때 맞춰 황상을 뵈오면 그대의 성심을 아뢰리다.
그리하여 또 다른 보름을 지나자 멀리 산해관문이 보인다. 명이 동이의 침범을 막으려 성을 쌓고 관문을 지었다지. 박명원이 아뢴다. 누루하치도 홍타시도 끝내 여기를 넘지 못했사옵니다. 하나 지킬 의지를 잃으면 제풀에 열리는 법. 이 점을 명심해야지. 밝으신 살핌이시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관문 좌우에 팔기군이 늘어서고 장수 하나가 달려나와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춘다. 조선국왕을 모시라는 황명을 받자옵니다. 황상께서는? 관문안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런 황송할데가. 이산이 황급히 말을 내리고 박명원을 비롯한 말탄 수하들도 모두 말을 내린다. 백여명의 종자를 밖에 두고 박명원, 도승지, 어영대장과 역관 한 사람만 거느리고 이산은 관문을 지나 마상 도열한 군사들이 연 길을 따라 수백보를 걷는다. 이윽고 황제의 어가가 보인다. 완수이, 완수이, 완완수이. 조선국왕 이산 황제를 뵈옵니다. 이산이 삼궤구고의 예를 갖추려 무릎을 꿇은 순간 우렁우렁 시종의 목소리가 들린다. 황명을 전하노라. 조선국왕은 일어서 다가오라. 멀리서 짐을 찾은 수고만으로도 충분한 즉 따로 예를 갖추는 번거로움은 짐의 스타일이 아니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어가에 다가가자 황제는 몸소 발을 헤치고 이산더러 오르란다. 내 십년만 젊어도 그대와 말머리를 나란히 할 터, 하지만 이젠 나이를 어쩔 수 없도다. 왜 그리 놀란 표정인가? 황상께서 여기 납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오라....그대가 짐의 조정을 놀래게 한 보답에다 여기를 와보고 싶은 염원을 더했도다. 9년전에 그대만한 나이의 몽골의 워바시를 친견한 전례도 있고. 여기가 어딘가. 156년 전에 도르곤 할아버지가 이 관을 열어 오늘의 짐도 있는 것이거늘. 하오나 황상의 은혜가 하도 우악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대가 사신을 보내도 될 일을 친히 온 것을 보면 뭔가 짐에게 할 말이 있을 듯 하니 천천이 이야기나 나누며 가세.
그날은 관영에서 베푼 만찬에 참석하고 다음날부터 어가에 함께 올라 청더로 향한다. 그래, 조선의 사정은 어떤가? 백성은 부지런하오나 강토가 협소하고 물산이 박하여....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언성이 높아진다. 일찌기 너희가 육진을 설하고 방책을 세운 것은 그 넘어 땅에 뜻이 없음이라, 밍이 쟈위관과 산하이관에 스스로를 가두고 서역과 만주를 포기한 것과 다름이 무엇인가. 이산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다. 그래서 신은 말갈, 숙신, 여진을 껴안지 못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렇게 폐하를 뵈러 온 참입니다. 하여 이 참에 만주를 저희에게 맡기시옵소서. 당돌하구나. 철령과 요동 이동의 땅은 고조선 이래로 저희 땅이온지라 아뢰는 것이옵니다. 조선의 사대부가 아직도 충전(崇禎) 운운의 밍 연호를 쓰고 있다고 듣고 있도다. 남한산성의 맹약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사라진지 156년이나 되는 밍을 그리는 조선의 무얼 믿고 만주를 맡기랴. 조선 사대부는 의를 중히 여겨 임진년 왜의 침입으로 고초를 겪는 조선을 국고를 털어 도와준 명의 은혜를 잊지않음이옵고 황제폐하의 은혜는 입은 바가 없는지라....병자년 거병에 조선을 멸하지 않은 것만도 큰 은혜이거늘. 그것은 힘에 의한 굴복이지 어찌 은혜라 하오리까. 만주를 맡기심은 그 첫째가 은혜을 베푸심이고. 둘째는? 훗날 대청(大淸)이 쇠하여 중국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의탁할 땅을 마련하는 것이옵니다. 그대는 시쳇말로 간이 배밖으로 나왔도다. 짐의 면전에서 이러고도 살아 돌아가길 바라느냐. 조선을 떠나올 때 이미 죽을 각오도 한 몸이옵니다. 배포 한번 두둑하구나. 그 배포를 내가 믿어 보겠노라. 그러하오시면....랴오뚱(遼東)과 쑹화쟝(松花江)을 경계로 이남의 땅을 시험삼아 맡길 터인즉 만전을 다해 지키도록 하라.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백만의 백성을 이주하여 강토를 보전하겠사옵고 폐하의 은혜를 방방곡곡에 두루 알려 폐하께 충성 또 충성하도록 하겠나이다. 이는 그대와 짐의 밀약이니 조정과 상의후 조처가 있을 때까지 언론에 행여 누설치 마라.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망상에서 깬다. 와하하, 한바탕의 꿈이로다. 그나마 찢어진 강토도 제대로 수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만주라니....삼강 벌을 임차하여 농사를 짓겠다고 나섰던 어느 장관 출신 인사가 생각난다. 고시로 대통령을 뽑는다면 그 자리가 당연히 자기 자리라던 분이다.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고, 운운의 중국을 자극하는 언사로 주현미를 앞세워 개업행사하려던 계획까지 무산되었지. 여기저기 친지들에게 금전적인 피해만 입히고 수백억의 부도로 끝장 났다. 원모가 있다면 속내를 함부로 들어내는 게 절대 아닌데 말이다.
한 사내가 빈자리로 들어선다. 창밖을 보니 펑전(丰镇)이라는 역의 팻말이 서있다. 네이멍구의 마지막 역이다. 다음역이 운강석굴로 유명한 산시(山西)의 따퉁(大同)이고 아직도 베이징까지는 8시간 가량 더 가야한다.
산시 들녘의 풍경은 여전히 이러하고 군데군데 양떼 방목과 아파트 건설현장도 보인다.
침대칸에 빈자리 좀 타고 갈 수 없나요? 안됩니다.
점심은 식당차에서, 저녁은 후허하오트에서 내리며 정쟝이 주고간 두 개의 컵라면으로 때웠다. 다시 졸며 깨며 가는 차창 밖의 풍경에는 어스럼이 찾아오고 기차는 어느덧 베이징역에 닿는다. 나의 대장정의 막은 내렸다.
그동안의 졸문을 참고 읽어준 오상회 여러 친구들과 댓글로 장단 맞춰준 牛亭과 逸幢 그리고 友堂, 특히 간체 찾기에 도움을 준 米田에게 감사드리며, 朋友 不曽孤单过 一声朋友 你会懂(친구여 외롭지 않을 거야, 친구라는 한마디로 알게 되지.) 친구라는 노래 한구절을 흥얼대며 중국친구에게서 배운 말로 인사드린다.
카이카이신신 궈메이이티엔(开开心心 过每一天 날마다 즐겁게 지내세요)!!!
첫댓글 참으로 대단합니다. 우리 오상회의 보석이니 우리 모두 잘 가꾸어서 나중에다시 한번 크게 쓰게 합시다.
덕분에 쉽지않은 광활한 중국 천지의 중국구경 잘 했습니다. 노래 '朋友'는 중국 가수 '周華健'이 불렀고
그 노래를 우리나라 '안재욱'이 번역하여 부른 것 아닌가?
朋友는 안재욱의 노래를 중국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周華健의 朋友를 안재욱이 리메이크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 정정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