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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5월 16 일 토요일 도봉산
산행코스 : 망월사역 – 망월사 – 포대능선 – 자운봉 – 석굴암 - 도봉산역
산행거리 : 약 10 km 산행시간 : 약 6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092409
거리 9.7 km
소요 시간 5h 30m 4s
이동 시간 5h 6m 22s
휴식 시간 23m 42s
평균 속도 1.9 km/h
최고점 725 m
총 획득고도 515 m
난이도 보통
보도블록
양산박
자동차 씽씽 달리는 도로 옆
아직 성한 보도블록 들어내고
구청 예산으로 또 새로 포장한다
보도블록 옆 오래된 지하방엔
작은 가족 네 식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쫄쫄 밥을 굶는다
이번 주말에는 토 일 양일간 원거리 산행을 계획했었다. 토요일에는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올라 상원사 북대암을 거쳐 두로령 두리봉으로 해서 동대산에서 다시 월정사로 가는 긴 산행 코스를 그리고 있었다. 북대암으로 가는 임도 변에 피어있을 등칡을 보고 두리봉에서 동대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에 피어있을 갖가지 봄꽃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밤 그리고 토요일까지 비가 이어질 거라는 예보가 있어 토요일 산행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요일에는 비가 그리 많이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새벽에 비가 그치고 나면 깨끗해진 공기를 마시면서 새벽같이 산에 올라 골짜기마다 하얗게 깔린 구름바다를 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북한산 백운대는 이렇게 비가 오고 난 뒤 하얀 구름이 일어나는 봉우리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운해를 보려면 백운대를 찾는 것이 제일 좋겠으나 집에서 북한산에 가는 것은 시간이 오래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도봉산이 적당하다.
도봉산도 북한산 국립공원에 들어있다. 그 코스도 다양하다. 제일 자주 걸었던 길은 다락능선을 타고 올라가서 포대능선을 따라 걷다가 오봉을 보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도봉산을 찾을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기왕 가는 것이니 좀 더 색다른 산행을 해보고 싶다.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집에서 7시나 되어서야 나설 수 있었다. 배낭에는 달랑 물 한 병 들었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도중 시장에 들러 김밥 한 줄 살 요량이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가니 버스가 금방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냥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향했다. 김밥이야 어디서든 살 수 있으니 망월사역에서 내려서 산으로 가는 중에 빵이든 김밥이든 사기로 했다.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뭐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 편하다.
망월사역에서 전철을 내려 산으로 향하는데 보슬비가 내린다. 안개비일지도 모른다. 가는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인가보다. 우산을 쓰고 산으로 들면서 상상을 해보았다. 발 아래 펼쳐진 운해가 도시를 덮어 버린 풍경은 정선의 진경산수화 같은 느낌을 그려낼 것이다. 멀리 떨어진 바위는 안개로 인해 더욱 신선하고 소나무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거기에 초여름의 푸르름이 더해진 풍경은 산수화의 느낌도 주겠지? 내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펼쳐진다.
이제 피기 시작한 아카시 꽃 향기가 은은하게 울린다. 쥐똥나무 꽃도 곧 피어날 것이다. 길 가에 제일 흔하게 자라는 국수나무꽃도 피고 있다. 아직도 남아있는 산괴불주머니는 여전히 밝은 빛깔로 주목을 받는다.
이 망월사로 오르는 코스는 내가 이제까지 어두울 때 여러 번 걸어내려오던 길이다. 능선에서 일몰을 보고 내려오다보면 망월사 부근에서 어두워지고 난 랜턴불에 의지해 내려와야 했다. 어둠속에 숨겨진 풍경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렇게 안개가 끼어있는 망월사의 주변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산길로 접어들기 전에 계곡 옆으로 늘어서 있는 식당가를 지난다. 한 때는 수 많은 등산객들이 막걸리 잔 너머로 주고받는 농담과 호언으로 시끌거렸을 식당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이 식당들은 태생부터 잘못이었다. 아직 정부의 행정력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시절에 목 좋은 계곡 옆으로 시멘트 블록으로 집을 짓고 가게을 열기만 하면 산행을 마친 산꾿들이 우르르 찾아와 밥먹고 술마시고 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 뒤 망월사 역 부근에 새로운 식당들이 속속 생겨나고부터 이 식당을 찾는 사람도 줄고 어짜피 불법 건축물이니 철거에 대한 압박도 있었으리라. 하나 둘 문닫는 식당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아직 남아있는 두 세개 식당에는 백숙이나 개고기 등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 메뉴가 눈에 잘 띄는 빨간 글씨로 손님을 부른다. 밤에 지나올 때는 어두컴컴한 이 식당가를 지나가는 낯선 산객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면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산길로 접어들어 위로 오를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다. 오늘도 안개속에서 헤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 주 연속 주말에 안개 속 산행을 한데다 모처럼 운해를 보려고 일찍 나선 산행길인데 또 다시 안개만 보다가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씨는 오직 조물주가 경제하는 것이니 은근히 그의 고마운 손길이 밝은 햇빛을 보여주고 맑은 운해를 띄워주길 기대해본다.
비가 내리는 날씨 탓인지 산으로 오르는 사람이 없다. 가끔 나처럼 운해를 보려고 일찍 산을 찾았던 사람들이니 둘 셋 무리지어 내려오는 산꾼들만 여러명 만났다. 망월사 신도인 듯 보살 한 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산길을 오른다.
전에 단풍들 때 걸었던 길이다. 지금은 비 맞은 단풍나무가 더욱 푸른 빛으로 빛난다. 산사나무와 팥배나무 꽃은 그새 다 져버리고 열매가 맺어 있다. 산딸나무도 하얀 빛깔 꽃받침이 벌써 녹색으로 변해간다. 산딸나무는 층층나무과 층층나무속의 낙엽활엽교목으로 꽃 모양이 십자(+)모양으로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하여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나무다. 꽃말은 ‘희생’이다. 꽃이 지고 8~9월에 붉게 익는 열매는 딸기처럼 취과(취과 : 한 개의 꽃받침 위에 다수의 씨앗이 모인 것)인데 모양이 딸기처럼 생겼다 하여 산딸나무라 부른다.
산악인 엄홍길 씨가 37년간 살았다는 생가터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왼편으로 무너져가는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입구에는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놓았는데 건물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허물어져가고 있다. 예전에 개인 재산의 개념이 희박한 시절 아무데나 집을 지어놓고 살다가 이 도봉산을 포함한 국립공원이 자리잡으면서 제대로 철거하지도 않은 채 버려둔 집인 모양이다.
극락교를 건너 녹음이 울창한 숲길을 걸어 오르니 안개속에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요즘은 독경도 스피커를 통해 증폭되니 멀리까지 그 소리가 전파된다. 어떤 절에서는 녹음한 것을 반복적으로 틀어놓아 식상한 것도 있는데 지금 들려오는 독경소리는 스님이 직접 부르는 노래소리다. 난 독경(讀經)을 노래소리라고 여긴다. 경전을 읽는데 음률이 있으니 음악이나 다름없다. 옛날 어렸을 때 아부지는 늘 큰 소리로 책을 읽으셨다. 춘향전이니 홍길동전이니 하는 이야기책인데 책 읽는 소리가 마치 스님들이 독경하는 소리처럼 운률이 있었다. 요즘에는 불교 사원에서 듣는 독경 말고 이처럼 운률에 맞춰서 큰 소리로 책을 읽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늘 어둠에 쫒겨 서둘러 하산하느라 살펴볼 겨를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망월사를 자세히 보기로 했다. 어짜피 지금 산에 올라가도 안개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런 풍경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절 앞에는 망월사의 연력(年歷)이 써 있다. 신라 선덕여왕 6년 (639년) 해호선사(海浩 禪師)가 절을 지었으며 선덕여왕의 사랑을 받은 해호선사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왕이 계신 경주(月城) 방향을 향하여 절을 짓고 월성을 바라보는 절이라는 뜻으로 망월사(望月寺)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 한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창을 거쳐 이어져 오다 1950년 한국전쟁때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6년 주지스님이었던 능엄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영산전과 천중선원 그리고 낙가보전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서기 639년 이 곳에 절을 짓고 월성의 선덕여왕을 그리워하며 지내던 해호 선사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진평왕의 세 딸중 맏이로서 왕위에 오른지 8년째 되는 해이다. 성골 중에서는 왕위를 물려받을 남자가 없어 여왕이 되었으나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침공으로 나라가 어려웠으며 군사적으로 의지하던 당나라 태종은 여자라며 업신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불교의 힘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고 백성의 안녕을 꾀하려 하였다. 황룡사 9층석탑을 세우고 많은 사원을 건설하였다. 이 시기 한성땅은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으로 웅진을 거쳐 사비로 수도를 옮겼고 신라는 고구려와 끊임없이 끊임없는 영토분쟁을 일으키던 때였다. 어쩌면 해호가 북한산에 망월사를 지은 것은 당시 엘리트 층인 승려가 적군을 염탐하거나 분쟁을 무마하는 역할도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해호 선사도 외부인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절벽에 사원을 짓고 어쩌면 신라군의 보급이나 군인들의 쉼터역할을 담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여 신라가 망하자 그의 아들이 이 곳 망월사에 은거하면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 한다. 마의태자의 발자취는 제천의 월악산을 거쳐 강원도 금강산으로 이어졌다 하나 금강산에 가기 전에 이처럼 잠시 머물렀던 절은 여러군데 있다. 당시의 불교사원은 단순한 수도정진의 장소뿐만아니라 지배계층의 휴양이나 전쟁시 군인들의 중요한 거점 그리고 피난장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 사원에서 요사채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지장전(地藏展)과 대웅전 역할을 하는 관음전(觀音殿)을 둘러보고 천중선원과 영산각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보니 스님들이 기도중이라며 출입문을 닫아놓았다. 지장전에는 무위당(無爲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고 여섯개의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써 있다.
시방동취회 十方同聚會 여러 곳에서 모여들어와
개개학무위 箇箇學無爲 각자 나름대로 무위를 배우는데
심공급제귀 心空及第歸 마음을 비운자는 급제하여 돌아가고
불타초연기 不墮悄然機 떨어지지 않은자들 근심만 가득한데
유문하경계 有問何境界 그 경계가 무엇이냐 물으니
소지백운비 笑指白雲飛 웃으면서 날아가는 흰 구름을 가리킨다.
또 관음전의 주련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이 관음전이 세워진 건물터에는 원래 낙가암(落痂庵)이라고 하는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1872년 대희대사가 보국 이경순의 시주로 지은 것인데 건물이 퇴락하자 1920년 송월스님이 중건하였고 이를 다시 1972년 도관스님이 건물을 헐고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던 것을 1993년 능엄스님이 지금의 건물로 짓고 낙가보전(落痂寶殿)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2층 팔작지붕의 윗층에는 적광전(寂光殿)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건물의 양쪽 벽에는 화가 이연욱이 1994년에 그린 팔상도가 남아있다.
증어관음여래회상 曾於觀音如來會上 일찍이 관음여래회상에서
문훈문수금강삼매 聞勳聞修金剛三昧 금강삼매를 깨우치고
잉호관음적거보타 仍號觀音跡居寶陀 관음이라 불리우며 보타산에 머무를 때
시현차토구화무방 示現此土漚和無方 이 땅 구석구석 화목함을 보고자 함이라
욕식대성감응유실 欲識大聖感應有實 큰 성인이 감응을 얻으셨나 알고자 하니
도봉산정추월춘화 道峯山頂秋月春花 도봉산 꼭대기에 가을달과 봄꽃이라
주련의 뜻을 알 듯 모를 듯 역시 한자는 어렵기만 하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이 어려운 한자를 어떻게 배웠길래 자신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정말 한자를 그렇게 잘 구사할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이유가 말과 글이 서로 달라서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한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을 염두에 둔 말이었을까? 가끔 옛 선인들이 지은 한시(漢詩)를 접할 때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오히려 중국의 두보나 이백의 시는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조선시대 쓰여진 시들은 난수표를 보는 것 같다.
나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함께 올라온 젊은 보살은 법당에 들어가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부처에게 절을 올린다. 아직도 안개에 덮힌 절 뒷편에는 노란 붓꽃과 매발톱꽃이 안개비에 더욱 청초한 모습이다.
망월사에서 가파른 계단길을 조금 올라가면 포대능선을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사패산이고 왼쪽으로 가면 자운봉으로 이어진다. 망월사가 신라 영토의 최전방 역할을 하였듯이 그 이후로도 한성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지키기 위한 경계가 이어졌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 연합사령부가 위치한 의정부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도봉산 아래에 미군부대가 있었고 망월사 주지스님이 절에서 가끔씩 들르는 미군들을 위해 잠자리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이 포대능선에 있던 포대(砲隊)는 아래 미군부대를 지키는 역할도 했으리라.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락능선 오른쪽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초소가 있어 등산객들이 넘어가는 것을 막았던 기억이 난다.
포대능선에서 운해가 깔린 멋진 풍경을 기대하고 올라왔으나 저 아래보다도 안개가 더 심해서 완전히 시야를 가려버렸다. 고도가 높아지니 아랫쪽에는 다 져버린 팥배나무꽃이 한창 피어있다. 능선 위로는 바위 틈새 척박한 땅이라서 그런지 나무가 작다. 아직 철쪽꽃도 남아있다. 대부분 졌지만 비를 맞아 땅에 후두둑 떨어지는 철쭉의 끝물도 볼만한 풍경이다.
더 이상 조망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능선에 오를 필요성이 없어졌다. 능선 뒤쪽으로 난 우회길을 따라 걷는다. 비가 내린 뒤의 초록빛 나뭇잎이 신선함을 더해준다. 그 동안 목말랐던 땅과 나무와 풀들이 어제 내린 비와 새벽의 안개비에 새 생명을 얻은 것 같다. 노랑제비꽃은 이미 지고 씨앗이 맺혀 있는 것도 있고 아직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것도 보인다. 이처럼 꽃들은 고도차에 따라서 그리고 그들끼리 정해놓은 순서에 따라 피고 지고 열매를 맺는다.
초록빛 나무 터널을 지나 다시 능선에 오르니 Y계곡 끝이고 곧바로 신선봉이 나타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이 도봉산의 모든 산길은 궁극적으로 이 자운봉 신선봉으로 이어진다. 여기저기 바위에 자리를 잡고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는다. 예전처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왁지지껄 소란스러운 모임은 보이지 않고 부부들이거나 친구들이거나 두 세 명씩 앉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또 나처럼 혼자서 김밥을 먹는 사람도 여럿 보인다.
나도 자리를 잡고 김밥을 꺼내 먹었다. 큰 배낭에 김밥 한 줄 그리고 물 한 병이 들어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그리 허기지지 않는다. 숨이 가쁘도록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은 것도 이유이겠으나 달리 내 몸이 등산에 잘 적응되어 가고 있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전에 내가 등산을 취미로 갖기 전에는 산을 오를 때 갈증을 자주 느꼈었는데 장거리 산행을 하면서부터 물을 아껴먹는 습관이 생겨났고 또 내 몸은 그것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노니는 고양이 세 마리가 내 곁에 다가와 앉아서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이미 등산객들이 던져주는 음식에 길들여진 호랑이 종족이다. 야생에서 생활하지만 인간을 겁내하지 안흔 족속이다. 육포라도 있으면 던져주겠으나 내가 가진건 김밥이 전부다. 김밥에 들어 있는 햄과 계란을 꺼내 발 아래 던져주니 행동이 빠른 놈은 재빨리 달려들어 바위에 굴러가는 햄 조각을 낚아챈다. 이 작은 베품도 마다하지 않고 맛있게 받아먹고 앞발로 입 주위를 문지르더니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다. 세 마리가 똑 같이 흰색과 검은색이 반반씩 섞인 것이 한 가족인 모양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신선대를 우회하여 가면 오봉능선을 보면서 보문능선으로 내려갈 수도 있으나 안개가 자욱하니 굳이 산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신선대에서 곧바로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나무로 만든 계단이 무척 가파르지만 그 만큼 빨리 내려갈 수 있다.
원래 도봉산이라 하면 내가 올라온 원도봉골을 의미했으니 지금은 도봉산역에서 올라오는 길이 도봉산의 주된 들머리가 되었다. 그만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고 길에도 풀 한 포기 날 수 없을만치 맨질맨질하게 닳았다. 도봉산 산악사고 구조대가 있는 도봉산 등산학교를 지나면 길은 평평한 오솔길이 된다.
도봉서원이 있던 곳을 지난다. 철망으로 가려놓고 한창 발굴작업을 벌이는 곳이다. 아마 몇 년 후면 번듯한 한옥으로 복원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서원자리 앞 계곡물에 반쯤 묻혀있는 돌에 고산앙지 (高山仰止)이라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여러가지 고증을 거쳐 그 글씨를 쓴 사람이 곡원 김수증이라고 밝혀졌다. 중국의 시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고산앙지 (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 는 높은 산처럼 우러러 보며 큰 길을 따라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오면 도봉동문(道峰洞門)이라고 새긴 큰 바위가 서 있다. 여기가 도봉동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알려는 글이다. 이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도봉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의 전당에 들어섬을 표시하기 위해 새겨놓은 것이라 한다.
이제 도봉동문을 나서 속세로 접어든다. 산으로 올라가고 또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속세로 나왔으니 마스크를 써야 한다. 여전히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식당 및 등산용품점을 지나면서 버너와 등산용 의자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지나친다. 그냥 아무생각없이 사도 좋겠지만 별로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김밥 한 줄로 속인 탓인지 배가 약간 고파오지만 기분은 좋다. 어떤 때는 가득 차 있는 것보다 이렇게 비어있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배에서 꼬로록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마치 그 것이 살빠지는 소리라는 착각이 들면서 상쾌하게 느껴진다.
도봉산 역에 들어가니 역사 안에서 도봉산을 바라보며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화가 한 분이 보인다. 산을 돌아보니 이제 안개가 신선들이 살고 있는 정상부위에만 조금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개었다. 화가가 그린 그림이 비맞은 도봉산을 잘 표현해 놓았다. 도봉산을 내려와 도봉산을 보며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