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전성기를 고대하며 / 이정화
1986년 늦은 여름 밤. 한적한 시골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한 소녀가 엄마를 기다리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노란 달맞이꽃을 어루만지며 노래를 부른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에 홀로 슬피 피어 끝없이 끝없이 야위어가는 그 이름 달맞이꽃” 이라는 가사였던 것 같다. 11살 소녀가 즐겨 부르기에는 구슬픈 멜로디와 가사다. 지금은 그 노래를 듣기 어렵지만 당시 유행했던 어느 남자 가수의 노래였다.
늦은 여름밤이지만 30여 년 전 내가 살던 여수의 산골 시골 밤길은 지금처럼 흉흉한 사건이 벌어지는 밤길이 아니라 달이 밝고 개구리와 밤새와 풀벌레 울음소리가 친구가 되어주고 간간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냇가의 물소리는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시골 밤길에서 보기 힘든 버스 불빛이 저 멀리서 보인다. 저 버스에 엄마가 타고 오기를 고대하지만 이번에도 엄마는 내리지 않는다. 외로움을 혼자 달래고 엄마 걱정에 조금 마음이 슬프다.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또 긴 기다림이 시작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버스 불빛이 캄캄한 시골 밤길을 비춘다. 브레이크 굉음이 소녀의 귀에 울린다. 버스 안이 훤히 보인다. 드디어 엄마가 보인다. 엄마를 외치며 뛰어가 엄마를 반긴다. 엄마는 나에게 “뭐 하러 나왔냐, 언니랑 오빠랑 있지” 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아준다.
어린 나이였지만 항상 늦게 오는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그 시간 소녀는 다짐을 한다. 지금은 내가 어려서 엄마를 도와주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성공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리라.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나의 유년 시절은 항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어른이 되면 꼭 성공을 해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곤 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쁜 길로 빠진 친구들과 어울릴 뻔 한 유혹이 있었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학 시절 졸업하면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엄마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었다. 영포자여서 명문대를 다니지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본어를 독학으로 노력해서 일어일문학과 교수가 되고 싶었다. 일본어를 좋아하고 독서를 즐겨하는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 생각했고 여자이지만 전문 직업을 가져야 평생 그럴사한 삶을 살 것 같아 일본어 공부에 더욱 빠지게 되었다.
대학 4년간 일본어를 독학으로 열심히 해서 일본어능력시험 1급에 합격했다.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하여 일본에 있는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낮에는 유학 자금 마련을 위해 강북대성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서울 종로에 있는 유명한 동시통역학원에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점점 꿈에 다가가는 듯 했다. 그 시절에는 꿈도 일본어로 꿀 정도로 하루종일 일본어에 빠져 있었다. 책 살 돈이 아까워 주말에는 영풍문고에 가서 일본어 서적이 꽂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하루종일 일본어 원문 소설을 읽곤 했다.
97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IMF 바람은 나에게도 타격을 주었다. 주경야독하며 열심히 꿈을 향해 달렸지만 내가 벌어 유학을 갈 수 없을 정도로 엔화는 급상승 했다. 유학의 달콤한 꿈도 무너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경찰 모집 광고를 보니 합격자 처우에 국비로 유학도 보내 준다는 문구가 있었다. 물론 그 내용이 거짓은 아니었으나 조직 생활을 해 보니 쉬운 일은 아니란 것을 지금은 잘 안다. 그러다 당시 그 모집 광고는 일본 유학에 목 말라하던 내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 없이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합격하면 직업도 생기고 유학도 갈 수 있으니 두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라 판단했다. 밀레니엄 축제로 온 도시가 폭죽을 터트리고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즐길 때에도 묵묵히 수험생 생활에 충실했다. 운이 좋게도 1년만에 경기청, 전남청, 해경청 3곳에 합격했다. 최종 내가 선택한 곳은 바다와 친근한 해양경찰청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스물다섯 예쁘고 화려한 생활을 즐길 나이었는데 꿈을 향해 달리느라 참 고단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던 원동력은 엄마의 힘 이었던 것 같다. 최종 합격자 발표날 엄마는 너에게 해 준 것도 하나 없는데 혼자 힘으로 장하다며 눈물을 머금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일어일문학과 3학년에 편입하고 계속 꿈을 놓지 않았는데 낯설게만 느껴지던 제복이 어느덧 교복처럼 익숙해질 무렵 일어일문학과 교수의 꿈도 사글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점 그 꿈은 멀어져만 갔다. 아이를 낳아 키워 보니 나의 꿈을 이어나가는 노력 보다는 아이들을 잘 키우고 같은 직종에 있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우선 순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삶이 행복했다.
10대 때는 엄마를 생각하며 언젠가는 꼭 성공하리라는 미지의 꿈의 씨앗을 마음에 품었고 20대 때는 일어일문학과 교수가 되고 싶어 미친듯이 일본어에 빠져 공부했고 30대 때는 교수가 되리라는 꿈과는 전혀 다른 세아이의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전념하며 나를 잊고 살았다. 40대가 된 지금 나는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여든 살의 런어웨이 모델인 Deshun Wang은 쉰살에 피트니트센터에서 운동을 시작하고 일흔살이 되어서야 모델로서의 몸을 제대로 만들어 일흔아홉살에 드디어 런어웨이 모델이 되었다. 그는 여든이 된 지금도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 꿈이 많다고 한다. 아무도 그 꿈을 막을 수 없다고 얘기하고 지금이 자신의 전성기라고 한다. Deshun Wang처럼 나이를 잠시 잊고 이루고 싶은 꿈에 도전을 해야겠다. 지금 나는 충분히 젊다. 내 인생의 화려한 전성기를 고대하며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쭉 꿈을 쫒아 힘차게 살고 싶다.
경찰관이라는 직업이 있고 바느질이라는 고상한 취미를 즐기고 유화를 그리고 기타도 배우기 시작한 지금의 내 모습이 참 좋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뒤늦게 찾아왔던 40대의 사춘기를 현명하게 극복한 내 자신에게 토닥토닥 해 주고 싶다. 무엇보다 더없이 행복한 것은 목포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이훈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이제 첫 발걸음을 뗀 글쓰기이지만 나의 자화상을 멋찌게 일궈 나가리라 조심스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