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길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저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시작한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 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ㅡ 월간 《시인동네》 2017년 8월호 중
이번 회부터 제 코너에 약간의 변화를 줄 계획입니다. 20회까지 글을 썼으니,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큰 변화는 아니고, 앞으로(잠정적입니다) 소개해 드리는 제 산문은 월간 《시인동네》에서 소개된 시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특히 특집으로 다뤄지는 시인들을 꼭 다루고자 하는데요, 《시인동네》에서 소개되는 해설과 제 산문을 비교하면서 읽으시면, 훨씬 다채롭게 시를 접하실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인동네》의 신작시 중 제가 좋게 읽었던 시들을 산문과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편은 《시인동네》 8월호의 특집 ‘문정희 시인’ 편입니다.
월간 《시인동네》 8월호
화자의 사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고. 신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누는 것이 쉽습니다. 하나는 ‘신는 신’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기도하는 神(신)’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이라는 단어의 음(音)은 같지만,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어가 가진 어쩔 수 없는 난점(難點)입니다. 소리 문자(표음문자)라서 같은 ‘아’라고 하더라도 의미의 관점에선 아버지의 ‘아’와 아가씨의 ‘아’가 완전히 다른 문자처럼 보입니다, 한자와 같은 뜻 문자(표의문자)가 살짝 부러워지기도 하지만, 원론적으로 소리문자인 ‘한글’이 더 자랑스럽습니다.
이 시에서 화자가 말하는 ‘신’은 ‘신는 신’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원리입니다. ‘신도 신을 신는다’는 것. 먼저 말한 신은 ‘발’을 말하는 것이요, 다음에 말한 신은 ‘우리가 신는 신’입니다. 그러므로 신 안[內]에 신(발)이 있습니다. 만약 신을 벗으면(맨발이 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신속의 신이 아닌 그냥 신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안에 신(발)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들도,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 속에 신이 있다 = 발(신)이 신을 신는다
어떤 사물 속에 또 다른 사물이 있거나, 영혼 속에 또 다른 영혼이 웅크리고 있는 것은 그렇게 특별한 사유가 아닙니다. 어찌 보면 특별한 사유란, 보이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을 보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저는 시의 내용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 산문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신 중의 하나를 ‘기도하는 신(神)’ 으로 읽겠습니다. 이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신 속에 신이 있다 = 신(인간) 속에 神이 있었다
神의 강림이 있은 후 2000년이나 지났기에 말뿐인 믿음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낮은 자리로 온 神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날 모습의 神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神은 이천 년 전의 ‘신속의 神’이 아닌 모든 神(이방의 모든 神)을 지배하는 神입니다. 왜 우리는 神을 강력한 존재로만 생각합니까. 우리가 상상하는 神이란 인간과는 다른 존재,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 ‘인간의 실체’와는 상반됩니다. 神이 깨끗하고 완전무결하다면, 인간은 나약하고 더러우며, 사악하고 어리석습니다.
인간과 神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神이 모두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神은 인간이 만들어낸 ‘환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템처럼 굳어져 믿음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거부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국가의 모습을 닮은 ‘신정일치국(神政一致國)’은 아직 지구 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국가, 神의 법이 곧 국가의 법이며, 행동의 기준이 됩니다. 요 몇 년간 국제사회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이슬람 국가(IS)가 표방한 것이 ‘신정일치’입니다. 神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인간이 神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IS가 표방한 것이 神의 뜻이지만, 그것은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神의 의지를 인간의 뜻대로 해석한 것은 오랜 전통이자 관습입니까. 중세시대를 암흑기로 몰아간 것은 ‘神을 이용한 인간의 의지’입니다. 십자군 원정의 출발은 순수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욕망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것은 약탈과 살인, 강간 등 神이 정한 율법에서 가장 악하다고 순서 지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정복의 땅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잠깐 샛길로 빠지면, 그러한 참극이 가능했던 까닭은 이슬람이나 가톨릭이 이방(異邦)을 ‘인간이 아닌 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대의 관습입니다. 노예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노예란 도구일 뿐,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성은 없는 가축과도 같은 동물입니다. 중세에 종교는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나침반이자 북극성이었습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다른 나침반과 북극성을 가진 것보다 더 이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내 神 이외의 神은 악(惡)으로 갈음됩니다.
2000년 전의 예수가 우리를 본다면 눈물만 흘릴까요?
인간을 대신해서 손과 발에 못 박힌 神은, 입을 닫았습니다. 이제 神은 그의 일을 할 뿐입니다. 神은 인간의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명석한 인간은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神의 신을 신고 권력을 남용합니다. 神을 위해 神을 모독한 인간을 죽이거나 체벌했습니다. 이 체벌의 순수만 있었을까요.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된 ‘탐심(貪心)’은 인간의 순수한 의지입니다. 그것은 권력을 향한 욕심을 만들어냅니다. 동일한 인간이지만, 타자를 구속하고 무릎 꿇게 하는 힘. 그러므로 세속적인 사제는 어느 인간보다 탐욕스러운 자입니다. 이것은 神의 탐욕입니까. 인간의 탐욕입니까.
탐욕스러운 사제의 모습에도 神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물과 불로 세상을 벌하는 일은 수천 년 동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말했습니다. “神은 죽었다”고. 세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神이 죽었다고 선언될 수 있습니까. 인간은 神의 의지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神과 관련하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습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이미지와 상징』입니다. 이 책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인도의 神인 ‘인드라’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인드라는 우리에게 박노해 시인의 시 「인드라의 구슬」로 잘 알려진 神이기도 합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이미지와 상징』
어느 날 인드라는 그의 왕궁에서 누더기를 걸친 소년의 방문을 받는다. 비슈누가 신들의
왕을 모욕하기 위해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그는 왕에게
“내 자식아”라고 부르면서 그 순간에 이르기를 무한한 우주를 채우고 있던 무한한 인드라에게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인드라 한 명의 생명과 왕위는 71아이온(1주기, 1마하유가는 1만2000성년, 즉
432만년을 포함한다) 동안 지속되며, 브라마의 하루는 인드라 28명의 수명에 해당된다네. 하지만
브라마의 밤낮으로 계산해보면, 브라마 한 명의 수명은108년밖에 안 되지… 오 인드라여, 긴 행렬을
이루며 줄지어 가는 개미를 보았다네, 옛날에 이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는 모두 인드라였지. 지금 당신처럼,
이 개미들도 신앙심 덕으로 옛날에는 신들의 왕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야. 그런데 지금은
수많은 윤회를 거쳐, 모두 다 개미가 되었으니, 이 개미 군대는 옛날 인드라들의 군대일세…
ㅡ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재실 옮김, 『이미지와 상징』,까치, p.70~72.
이 글을 읽으면서, 神이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까닭이 ‘무가치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미에게도 악한 개미와 선한 개미가 있겠지만, 우리가 개미의 일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입니다. 피조물이면서도 神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神의 권력’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정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휘두를 때에는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神의 신’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모래 알갱이보다도 못한 힘일 것입니다. 그 더러운 작은 알갱이로 힘을 과시하는 것이지요.
신 속에 신이 있다 = 신(인간)이 神이 되려 하다
다수의 인간들이 ‘神의 신’을 신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소망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일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다양한 과학적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 연장의 꿈이 실현된다고 해도 神의 신을 신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神의 신을 신어도, 神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신 神 노릇은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시뮬라크르(simulacre), 또 다른 인드라일 뿐입니다. 수많은 인드라가 지구 위에서 구더기처럼 우글거릴 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구는 구더기의 세상이 될 뿐입니다.
주영헌 ㅣ
충북 보은 출생. 2009년 《시인동네》 등단.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7년 8월
#주영헌시인#詩詩한시절#문정희시인#연재#공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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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文貞姬, 1947년 5월 25일 ~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 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삶의 생명력과 의미에 대한 관찰 및 통찰을 시로 나타냈으며, 최근에는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1973),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 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 주세요”(1990), “찔레”(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