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추억
추석을 맞이하여 예쁜 손녀들과 함께 딸네 가족이 찾아왔다. 늦은 밤 아들까지 온다고 하니 갑자기 널널해 보이던 집안이 비좁아졌다. 모처럼 찾아온 딸인데 하룻밤이라도 편히 지내라고 ‘별이 빛나는 밤에’ 펜션에다 방 하나를 잡아주었다. 별밤지기(金永植 권사)는 생각지 않은 귀한 손님의 방문이라면서 특별 이벤트를 준비하여 별밤을 더욱 기억나게 했다. 늦은 밤에 벌어질 작은 파티다. 금당산 자락에 걸쳐있던 어둠이 점점 우리 곁으로 깊숙이 다가올 즈음 별밤 펜션 위를 덮고 있던 밤하늘에는 그동안 감춰있던 작은 얼굴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딱히 별을 쳐다볼 기회가 없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이런 체험은 그 자체가 힐링의 순간이다. 별자리는 사계절이 다 다르다. 한 여름밤을 수놓는 별자리는 거문고, 독수리, 화살, 방패, 돌고래, 헤르쿨레스, 전갈, 뱀주인, 뱀, 궁수 등이 있다. 은하수(銀河水)는 우주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고 백조가 그 위를 날며 양쪽 은하수 강변에선 견우와 직녀가 만날 칠석날을 기다리듯이 헤아리지 못할 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견우와 직녀 및 데네브는 거대한 삼각형을 이룬다. 데네브(Deneb)는 백조자리에 있는 태양의 20배 이상 큰 별, 알파성(星)을 말한다. 이것이 ‘여름의 대삼각형’ 별자리이다. 여름철 별자리를 찾는 길잡이가 된다는데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냥 아름다운 별밤이다. 별밤지기와 22년 동안 밤하늘을 쳐다보았던 그의 아내는 전갈자리만은 확실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만 천체에 문외한에게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밤을 밝히는 가로등, 휘황찬란한 불야성의 간판등 불빛으로 존재감이 사라진 지 오래된 밤하늘의 별빛이 금당산 자락에서는 또렷하게 빛나는 어둠 속 희망의 등불이 된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젊은 날 불러보던 포크송 가사가 정말 오랜만에 추억 여행길에 오르게 했다. ‘별이 지면 꿈도 지고’를 부르면서 작은 불빛으로 큰 꿈을 품게 했던 별밤의 추억은 일상의 수고와 피곤함까지 온몸에서 떨구어내는 듯하다. 별밤 펜션의 주제가로 삼았다고 해서 한 번 더 입가에 담가보았다.
별밤지기의 야심작 특별 파티가 앞마당에 마련되었다. 작은 장작더미가 쌓여있고 그 위로 모닥불이 점화되면서 파티의 시작을 알린다. 성큼 가까이 온 어둠, 산장이라 내려간 기온의 쌀쌀함까지 물리쳐 주는 그 불빛을 보면서 40여 년 전 기억의 저장고에 고이고이 쌓아두었던 학창 시절의 추억이 빠끔히 고개를 내민다. 그 시절 수련회의 마지막 고정 순서가 바로 모닥불이었다. 점화의 임팩트를 위하여 기름을 끼얹은 장작에 불을 댕긴다. 순간 모든 것을 삼킬 듯이 성난 기세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는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자는 다짐이 그 불과 함께 타오른다. 우리의 죄목을 적은 종이를 그 불에 태워버리고 회개의 눈물을 짓는다. 이런 거룩한 예식에 마음이 숭고해지는 찰나, “우리 죄는 불로 태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씻는 거야”라고 성경의 교훈을 일갈하는 믿은 좋은(?) 선배 때문에 흐르던 눈물이 다시 쏙 들어갔던 기억도 이제는 추억의 저편에서 만나는 소중한 이야기가 되었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朴麟姬)의 대표곡 ‘모닥불 피워놓고’의 통기타 반주가 검은빛으로 변한 평창강과 함께 잔잔히 흐른다. 과수원길, 오빠생각, 퐁당퐁당 등등의 동요 메들리로 꼬리를 물더니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몬’을 부르시던 복음성가로 이어지며 이내 모닥불처럼 찬양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활활 타는 모닥불에 둘러앉은 모두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순간을 되돌려 보며 가슴 벅찬 간증을 꺼낸다. 누구나 고단했던 삶의 여정이 아니던가? 넘어지고 자빠질 수밖에 없었던 굴곡진 삶의 고개를 넘을 때 그 순간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도 잊지 못한다. 서로는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내밀며 성도의 교제를 나눈다. 점점 꺼져가는 모닥불은 화부(火夫)가 된 별밤지기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소생한다. 그러더니 하늘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빌어보자면서 풍등(風燈) 하나가 등장했다. 한때 화재의 소지가 있다 하여 통제하던 풍등이 오랜만에 임자를 만났다. 촛불이 꺼질 때까지 하늘 높이 날아가는 풍등에 마음의 소원을 담았다. 어두움을 뚫고 높이 올라가는 풍등은 보름달에게 이 소원을 전달하려는 듯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연기까지 연출하자 소원이 성취된 기분에 흥이 돋았다. 이내 불이 꺼진 풍등은 어둠 속에서 사라지고 눈에 담은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며 하늘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다.
그러는 사이 모닥불이 꺼지고 숯으로 변하더니 한 줌의 재로 남았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활활 타던 장작이 숯이 되고 재로 변하는 과정에는 인생의 교훈이 고스란히 담겼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몸의 소재가 된 땅의 흙이 바로 재가 아니던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무의미를 깨달으며 예수님 안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상념이 가슴에 꽂힌다. 어둠이 더욱 깊어간다. 별밤의 제왕처럼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보름달이 오롯이 제 존재감을 뽐내며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한다. 이상기온 온난화 탓에 한 여름밤이 된 추석의 밤하늘에다 또 하나의 추억을 새기면서 각자 총총걸음으로 제 처소로 향한다. 세월이 지나면 이날이 또 하나의 추억이 되겠거니 싶으니 새 날에 거는 기대가 커진다. 망국의 한을 품고 별을 헤던 시인(尹東柱)처럼 별밤의 그 별을 바라보면서 모두는 내 자손과 조국의 미래를 꿈꾸는 시인이 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다니엘 12:3).
모닥불 피어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꺼져가는 모닥불이 화부의 손길에 다시 소생하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펜션을 뒤로 하고 지난밤 재로 변한 모닥불 자리에서
듬직한 아들과 예쁜 손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