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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락티코스(Praktikos: 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Evagrius Ponticus, 345-399)
머리말
[1] 친애하는 형제 아나톨리우스여, 최근에 당신은 거룩한 산에서 스케테에 거주하고 있는 나에게 편지를 써서 이집트 수도승들의 의복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실 당신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의복과 다른 것은 이유 없이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거룩한 교부들로부터 우리가 배운 모든 바를 당신에게 알려주고자 합니다.
[2] 꾸꿀라는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때려서 상처를 입히려고 애쓰는 자들 때문에 영혼의 가장 중요한 핵심 기관인 이성을 보호하고, 그리스도 안에 어린이를 따뜻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머리 위에 이것을 걸치는 사람들은 힘껏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시편 127,1). 이러한 말들은 겸손을 낳고, 아침에 떠오르는 샛별(Lucifer)(이사 14,12 참조)을 땅에 떨어지게 한 근원적인 악인 교만을 뿌리 뽑습니다.
[3] 손의 노출은 그들 삶의 형태가 위선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헛된 영광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고 신앙을 몰아내면서 덕들을 숨기고 그늘지게 하는데 있어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당신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도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찾지 않으니 말입니다”(요한 5,44)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선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 자신을 위해서 선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선의 성취에로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행해진 선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는 어떤 것을 하느님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극단적인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4] 십자가의 형태로 그들의 어께를 덮는 스카풀라레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온순한 이들을 일으켜주시고(시편 147,6a 참조),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언제나 그들을 보호하시며, 방해받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 마련해 주십니다.
[5] 그들의 허리를 감싸는 띠는 모든 불결함을 몰아내고, “남자는 여자와 아예 접촉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1고린 7,1)라고 선언합니다.
[6] 그들은 멜로테를 걸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2고린 4,10), 육체의 비이성적인 모든 욕정들에 부리망을 씌우고, 선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의 악들을 제거하고, 가난을 사랑하며 우상숭배의 어머니인 탐욕(골로 3,5 참조)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7] 지팡이는 그것을 붙잡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나무이며, 주님에게서와 같이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확고한 지주(잠언 3,18 참조)입니다.
[8] 이상은 수도복이 상징하는 바들입니다. 교부들은 이 수도복을 수여할 때마다 젊은 수도승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오 아들들이여,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통해 강화되고, 고행은 이 두려움을 강화한다. 항구함과 희망을 통하여 고행은 흔들림이 없게 되고, 그것들로부터 ‘아파테이아’(apatheia)가 얻어지는데, ‘아파테이아’는 사랑(agape)이라 불리는 한 자녀를 갖고 있다. 사랑은 ‘자연학’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다음 ‘신학’이 그 뒤를 잇고 마지막으로 ‘지복’(至福)이 온다.”
[9] 거룩한 수도복의 의미와 원로들의 가르침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해두고, 이제 수행생활과 관상생활에 관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교부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수행적인 가르침은 100개의 장으로, 그리고 영지적인 가르침은 50개의 장과 다시 6백 개의 장으로 짧게 나누어 요약하였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거나 또는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않기 위하여’(마태 7,6 참조) 우리는 어떤 것들은 감추었고, 다른 것들은 모호하게 하여 잘 드러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같은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분명해질 것입니다.
수행에 관한 작품
100개의 장들
1. 그리스도교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프락티케’와 ‘프쉬케’, 그리고 ‘테올로지케’로 구성된다.
2. 하늘나라는 실재들에 대한 참된 인식과 함께 영혼의 ‘아파테이아’이다.
3. 하느님 나라는 정신의 능력으로 확대되며, 부패하지 않는 탁월한 능력을 정신에 부여하는 성삼위에 대한 인식이다.
4.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추구한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또한 분투한다. 만일 모든 쾌락이 그 갈망을 통하여 시작한다면, 갈망은 감각으로부터 생겨난다. 왜냐하면 감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은 욕정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5. 독수도승들을 거슬러 악령들은 노골적으로 싸운다. 반면, 수도원들이나 공동체들 안에서 완덕에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거슬러서 그들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부주의한 이들을 무기로 이용한다. 두 번째 전투는 첫 번째 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악령들보다 더 흉포한 사람들이나 혹은 그들의 모든 악한 행위를 동시에 지지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생각들에 관하여
6. 모든 생각들을 포함하는 발생론적 생각들은 모두 여덟 가지이다. 첫째는 탐식, 둘째는 음욕, 셋째는 탐욕, 넷째는 근심, 다섯째는 분노, 여섯째는 아케디아, 일곱째는 헛된 영광, 여덟째는 교만이다. 이 모든 생각들이 영혼을 괴롭히느냐 괴롭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 능력밖에 있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영혼 안에서 머물러 있느냐 머물러 있지 않느냐, 욕정들을 일으키느냐 일으키지 않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7. 탐식에 대한 생각은 위, 간, 비장, 수종과 오랜 질병, 생존 수단들의 결핍, 그리고 의사의 부재(不在)를 수도승에게 묘사하면서 그로 하여금 금욕적 수행을 즉시 포기하도록 유혹한다. 또한 자주 그에게 이 고통에 떨어진 어떤 형제들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이따금 이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의 불행을 드러내고 그들이 금욕적 수행으로 인해 그렇게 되어버린 것처럼 이야기 하도록 설득한다.
8. 음욕의 악령은 다양한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며, 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더욱 강하게 공격한다. 이는 그들이 그러한 고행을 통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중단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악령은 불순한 종류의 수행으로 영혼을 굴복시키고 영혼을 더럽히며, 마치 눈에 보이는 그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영혼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 듣게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9. 탐욕은 긴 노년과 손노동에의 무능력, 미래의 굶주림, 닥치게 될 질병들, 궁핍의 고통, 그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생필품을 받는데서 오는 수치심을 제시한다.
10. 근심은 때때로 갈망하는 것들을 얻지 못한데서 온다. 그것은 이따금 분노를 동반한다. 그것이 욕구의 결핍에서 생겨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발생한다. 먼저 어떤 생각들은 영혼을 가정과 부모에 대한 기억이나 혹은 이전의 삶에 대한 기억에로 이끈다.
이제 이런 생각들은 영혼이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따르며, 아직 본성상 단지 정신적인 쾌락들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을 보게 될 때, 영혼을 사로잡아 슬픔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는 영혼이 탐닉해 있던 이러한 생각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사실 그들은 영혼의 현재 삶의 방식 때문에 실재할 수 없다. 그래서 비참해진 그 불행한 영혼은 과거에 대한 생각들에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그만큼 더 의기소침해진다.
11. 분노는 가장 격렬한 욕정이다. 그것은 사실 우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불의를 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거스른 흥분과 영혼의 동요라 불린다. 그것은 영혼을 하루 종일 성나게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동안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우리에게 떠올리면서 정신을 빼앗는다. 이따금 오래 지속되고 격노로 바뀌면서 밤에 동요와 체력소모, 창백함과 위험한 야수들의 습격을 야기한다. 격노에서 나오는 이 네 가지 결과들은 아마도 많은 생각들을 동반하여 나타난다.
12. ‘정오의 악령’(시편 91,6b 참조)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아케디아’(ἀκηδια)의 악령은 모든 악령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 그는 제4시(오전 10시)경 수도승을 공격하여 제8시(오후 2시)까지 그의 영혼을 포위한다. 먼저 그는 마치 태양이 느리게 움직이거나 혹은 멈추어버린 것처럼, 그리고 하루가 50시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수도승으로 하여금 눈을 계속해서 창문을 향하도록, 독방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제9시(오후 3시)가 가까웠는지 알기 위해 태양을 주시하도록,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오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도록 강요한다. 그런 다음 다시 수도승에게 그가 머무는 장소와 그가 하고 있는 똑같은 종류의 생활, 그리고 손노동에 대한 염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사랑이 거의 사라졌고, 자신을 위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만일 이 시기에 누군가 그를 슬프게 한다면, 악령은 이 역시 그러한 염증을 증가하는 기회로 사용한다. 그 다음 악령은 필요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또 덜 힘들면서도 더 이익이 많은 노동을 할 수 있는 다른 장소들에 대한 갈망을 그 수도승 안에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사실상 성서에서 하느님은 모든 곳에서 경배될 수 있다(요한 4,21-24 참조)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장소에 달려있지 않다고 그를 부추긴다. 악령은 또한 이러한 생각들에 부모와 이전의 생활방식에 대한 기억을 결부시킨다. 그는 수도승의 머릿속에 인생은 오래 지속되고 영적 수행들은 매우 수고스럽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악령은 수도승으로 하여금 자기 독방을 떠나 소위 경기장(1고린 9,24 참조)에서 달아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이놈을 따라올 악령은 아무도 없다. 반면 영혼이 승리하면 영혼 안에 평화의 상태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1베드 1,8 참조)이 일어난다.
13.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은 덕스러운 사람에게 쉽게 숨어 있는 매우 미묘한 생각이다. 이것은 자신의 투쟁을 공적으로 드러내기를 갈망하고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게 한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울부짖는 악령들과 치유된 여성들과 그의 겉옷을 만지는 군중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그에게 사제직을 예언하고, 그를 만나려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만일 그가 그들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릇된 길로 빠져 포로가 될 것인지를 그에게 보여준다.
그가 이런 식으로 헛된 희망에 사로잡힐 때, 그 악령은 사라지고 그의 희망에 반대되는 생각들을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교만이나 근심의 악령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에 그를 내어준다. 때때로 그가 포로가 되고 거룩한 사제가 되기 직전에 그를 음욕의 악령에게 역시 넘긴다.
14.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끄는 자이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그 자신이 선행들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형제들 중 아무도 자신의 이러한 면모를 몰라주기 때문에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간주하며 그들을 거슬러 거만을 떨게 한다. 분노와 근심이 이 악령에 뒤따라온다. 그리고 악령들 중 마지막은 정신 착란으로서 이것은 허공에 있는 악령들의 무리를 보는 것이다.
여덟 가지 생각들을 거슬러
15. 독서와 밤샘, 그리고 기도는 산만한 정신을 안정시킨다. 굶주림과 수고와 고독은 불붙은 갈망을 잠재운다. 시편낭송과 인내와 자비는 흥분한 영혼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수행들은 적절한 때와 적당한 정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극단적으로 행해지거나 혹은 정도 없이 행해진 것은 잠시 동안 밖에 지속되지 못한다. 잠시 지속되는 것들은 오히려 해롭고 무익하다.
16. 우리 영혼이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빵과 물의 양을 감소할 것이다. 사실 포만함은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하며, 반대로 주림은 빵만으로 채우는 것을 복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17. 물의 제한된 섭취는 절제에 큰 도움을 준다.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을 정복했던 삼백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이에 대해 너를 납득시킨다(판관 7,5-7 참조).
18. 삶과 죽음이 같은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어떤 사람 안에 사랑과 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사랑은 재물의 파괴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 현세 생활 자체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19. 모든 세속적 쾌락으로부터 도피하는 사람은 근심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望樓)이다. 사실 근심은 실재하거나 바라는 쾌락의 결핍이다. 만일 우리가 지상 사물들 가운데 어떤 것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적을 몰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사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되면 바로 거기에 올가미를 놓아 근심을 만든다.
20. 분노와 미움은 증오심을 키운다. 동정과 온유는 존재하는 증오심조차 감소시킨다.
21. 밤에 악령들이 다가와 영혼을 공포에 떨게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다음날의 전투에서 정신을 더 소심하게 하지 못하도록 해가 질 때까지 분노를 품고 있지 말라(에페 4,26 참조). 사실 무시무시한 환상들은 영혼의 동요로부터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동요하는 영혼보다 정신을 더 도망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2. 우리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이 번번이 변명을 하면서 몹시 동요될 때, 바로 그때 악령들은 우리가 근심의 원인들을 해결하기 보다는 동요를 피하도록 우리에게 고독이 아름답다고까지 속삭인다. 그러나 욕망적인 부분이 달구어질 때, 악령들은 반대로 우리를 사교적이 되게 하고, 우리가 거칠고 사납게 되도록 부추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욕망을 느끼는 중에 육체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할 필요가 있다.
23. 너를 슬프게 한 사람과 마음속으로 다투면서 너 자신을 분노에 대한 생각에 넘기지 마라. 또한 계속해서 쾌락을 꿈꾸면서 음욕에 대한 생각에 넘기지도 마라. 그것은 한쪽으로는 영혼을 어둡게 하며, 또 다른 쪽으로는 욕정을 불붙이도록 영혼을 초대한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너의 정신을 오염시킨다. 그리고 기도의 순간에 환상들에 사로잡히고 하느님께 순수한 기도를 바치지 못하면서 너는 즉시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지게 된다. 이 악령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며, 하나의 개의 모습으로 새끼 사슴과도 같은 영혼을 갈기갈기 찢는다.
24. 정념적인 부분의 본성은 악령들과 교전하는 것이며, 어떠한 쾌락에 대해서도 거슬러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영적인 쾌락과 그것에 따라오는 지복(至福)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악령들을 거슬러 우리의 정념적인 부분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권고한다. 반면에 악령들은 우리를 세속적인 욕망에로 유인하면서 정념적인 부분에게 본성을 거슬러 사람들과 다투도록 강요한다. 이는 인식에서 혼미해지고 쇠퇴한 정신으로 하여금 덕들의 반역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25. 너 자신을 살펴라(신명 15,9 참조). 이는 네가 형제들 중 누군가를 화나게 하여 떠나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너 자신이 기도의 순간에 언제나 너에게 걸림돌이 될 근심의 악령으로 인해 네 삶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26. 선물은 화를 가라앉힌다. 이에 대해 야곱이 너를 납득시킨다. 그는 선물로써 사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를 만나러 왔던 에사오의 호의를 구하였다(창세 32,7 참조). 그러나 가난한 우리들은 식탁을 통하여 우리의 부족을 보충한다.
27. 우리가 ‘아케디아’의 악령에 떨어진다면, 그때 우리는 눈물과 더불어 우리 영혼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하나는 위로하는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위로받는 부분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좋은 희망을 심고(2데살 2,16 참조), 거룩한 다윗과 함께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나를 구해주신 분, 나의 하느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시편 42,5)고 노래한다.
28. 비록 꾸며대는 변명들이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유혹의 순간에 독방을 떠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독방 안에 앉아 항구하게 있으면서 용기 있게 모든 공격자들, 특히 ‘아케디아’의 악령을 맞아들여 대항할 필요가 있다. 이 놈은 모든 공격자들 가운데 가장 고약하며, 무엇보다도 영혼을 가장 괴롭힌다. 사실 이런 싸움에서 도피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정신에게 무능하고 비겁하며 겁쟁이가 되도록 가르친다.
29. 우리의 거룩하고 매우 실천적인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날 죽어야 하는 것처럼 늘 그렇게 준비할 필요가 있으며, 반대로 마치 여러 해 동안 육체와 동거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육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실제로 전자는 ‘아케디아’의 생각들을 잘라내고, 수도승을 보다 열심하게 하며, 후자는 그의 육체를 건강하게 지켜주고 언제나 한결같은 고행을 유지시킨다.”
30.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을 피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네가 행하는 바 자체가 너에게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올바른 생각들에 반대하는 것은 언제나 악령들만이 아니라, 종종 우리가 빠지는 악습들 역시 그렇다.
31. 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이 거의 모든 악령들에 의해서 쫓긴다는 것과 자신을 추적하는 악령들이 몰락할 때, 넉살스럽게 접근하여 수도승의 눈앞에 그의 덕행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32. 인식을 얻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모든 괘락을 그에게 제시하는 헛된 영광의 악령의 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무엇이 영적 관상보다 더 큰 것을 그에게 약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그 인식을 맛보지 않은 한, 하느님께 우리의 목표,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한다는 것을 보여드리면서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자.
33. 너의 과거의 삶과 너의 옛 잘못들, 그리고 네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하여 ‘아파테이아’로 건너갔는지, 또한 네가 버리고 떠나온 세상이 얼마나 자주 심하게 너를 비참하게 하였는지를 기억하라. 이것을 또한 생각하라: 누가 너를 사막에서 보호하였는가? 누가 너를 거슬러 이를 드러내는 악령들을 몰아냈는가? 사실 이러한 생각들은 겸손을 낳고 교만의 악령을 허용하지 않는다.
욕정들(passioni)에 관하여
34. 만일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욕정적인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이전에 그 대상들을 욕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우리가 욕정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대상들은 우리에게 욕정적인 기억들을 갖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악령들을 물리친 자만이 그들이 이용하는 것들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싸움이 물질적인 싸움 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35. 영혼의 욕정들은 사람들로부터 유래한다. 반대로 육체의 욕정들은 육체로부터 온다. 육체의 욕정들은 고행을 통하여 제거되고, 영혼의 욕정들은 영적인 사랑을 통하여 근절된다.
36. 영혼의 욕정들을 다스리는 악령들은 죽기까지 끈질기다. 반대로 육체의 욕정들을 다스리는 악령들은 더 빨리 물러선다. 뜨거나 지는 해와도 같은 다른 악령들은 영혼의 한 부분만을 붙잡는 반면, 정오의 악령(시편 91,6b 참조)은 보통 영혼 전체를 움켜쥐고 정신을 억압한다. 이 때문에 독수도승생활은 욕정들의 제거 이후에 감미롭다. 사실 그때 오로지 순수한 기억들만이 있으며, 이제부터 그 투쟁은 수도승을 더 이상 싸움이 아닌 싸움 자체에 대한 관상에 배치시키기 때문이다.
37. 욕정들을 일으키는 것은 그 표상인가, 아니면 그 표상을 일으키는 것이 욕정들인가? 이것은 숙고를 요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견해를 취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두 번째 견해를 취한다.
38. 욕정들은 감각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만일 사랑과 고행이 있다면, 욕정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을 때, 욕정들은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은 욕망적인 부분보다 더 많은 치료법들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사랑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다(1고린 13,13 참조). 왜냐하면 사랑은 정념적인 부분의 제동기(制動機)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위대한 성인 모세가 자연에 대해서 다루는 중에 ‘오피오마케스’(Ophiomakes)라고 상징적으로 부른 것이다.
39. 악령들에게서 악취가 나올 때, 영혼은 생각들을 거슬러 흥분하는 습관이 있다. 그때, 영혼을 괴롭히는 자의 욕정을 통해서 영향을 받은 영혼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가르침들
40. 모든 상황에서 일상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매순간에 주의하고, 가능한 한 받아들여진 계명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사실 악령들도 이러한 기회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가능성들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를 거스른 그들의 욕정으로 악령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것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행하도록 강요한다.
사실 그들은 병자들이 고통에 대해 감사하고 봉사자들을 향해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또한 악령들은 병자들이 비록 쇠약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고행을 실천하도록 권고하며, 그들이 비록 몸이 무겁다 하더라도, 선 채로 시편을 바치도록 권고한다.
41. 우리가 도시이나 마을에서 얼마간 머물러야 할 경우에 세속인들을 가까이 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절제를 유지하도록 하자. 이는 현재의 상황으로 인해 무뎌지고 평소의 주의를 못하게 된 우리 정신이 원하지 않은 무언가를 하게 되고, 악령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도망자가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42. 네가 유혹받을 때, 너를 괴롭힌 자에게 분노로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기도하지 말라. 사실 네 영혼은 생각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기도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일 네가 분노로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한다면, 너는 적들을 통해서 제시된 표상들을 깨뜨려 사라지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분노의 자연적인 효과이기 때문이다. 좋은 표상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43. 또한 악령들 간의 차이점들을 알고, 그들이 다가오는 순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대상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우리의 생각들로부터 우리는 이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악령들 가운데 어떤 놈들이 이따금씩 오면서도 보다 악질적인지, 어떤 놈들이 꾸준하면서도 보다 약한지, 그리고 어떤 놈들이 함께 동시에 들이닥쳐서 정신으로 하여금 신성모독을 하도록 유혹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생각들이 그들의 대상들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또 우리의 상태로부터 너무 멀리 빗나가게 되기 전에, 우리가 그것들을 거슬러 어떤 것을 말하고 또 누가 현존하는지를 알리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쉽게 진보할 것이며, 우리에 대해서 놀라 분개하게 된 그 녀석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44. 만일 악령들이 수도승들을 거슬러 싸우면서 무력해질 경우, 그때 그들은 약간 물러나서 덕들 가운데 어느 것이 소홀히 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거기를 통하여 갑자기 들이닥쳐 불행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45. 사악한 악령들은 자신들을 도우러 오도록 그들보다 더 사악한 악령들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성질에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그들은 오로지 영혼의 파멸을 위해서는 일치한다.
46. 우리는 정신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모독하고 금지된 것들 - 내가 감히 글로 적지 못했던 - 을 상상하도록 유혹하는 불순한 악령에 의해서 동요되지도 말고, 또 우리의 열정을 무디게 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는 분”(사도 1,24; 15,8 참조)이시며, 우리가 세상에 있었을 때조차도 그러한 광기로 미치지 않았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 악령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단념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주 우리 하느님 앞에 서 있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그분을 거슬러 그러한 생각을 했던 분을 향해 감히 손을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47. 발설된 어떤 말이건 혹은 어떤 돌발적인 육체의 움직임이건 간에 그것들은 영혼 안에 현존하는 욕정들의 표징이다. 이것을 통하여 원수들은 우리 안에 그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 또 우리가 그것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는지, 혹은 우리의 구원을 걱정하여 그것들을 쫓아 버렸는지를 감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정신을 아시며, 또한 그분은 마음 안에 감추어진 것을 알기 위하여 표징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48. 악령들은 세속인들과는 주로 사물들을 통해서 싸운다. 그러나 수도승들과는 더 자주 생각들을 통해서 싸운다. 사실 수도승들은 고독으로 인해 사물들이 별로 없다. 행동으로보다 내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더 쉬운 만큼, 그만큼 내적인 싸움이 사물들을 통해서 행해지는 싸움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정신은 움직이기 쉬운 어떤 것이며, 금지된 상상들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49. 우리는 일하고 철야하며, 계속해서 단식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도하라”(1데살 5,17)는 법이 있다. 사실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을 치유하는 앞의 명령들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을 또한 필요로 한다. 우리의 몸은 그 고유한 연약함으로 인해 그러한 노고들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기도는 싸움을 위해서 정신을 강하고 순수하게 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이 육체 없이도 기도하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졌고, 또한 영혼의 모든 능력들을 이용하여 악령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50. 만일 어떤 수도승이 경험을 통해 잔혹한 악령들을 알고 그들의 기교에 익숙해지고자 한다면, 그로 하여금 생각들에 주의하고, 그들의 격렬함, 그들의 느슨함, 그들의 교착, 그들의 순간들을 관찰하게 하라. 그리고 어느 악령들이 이것 혹은 저것을 하는지, 어떤 악령이 또 다른 악령 뒤에 오는지, 어느 악령이 다른 악령을 따르지 않는지를 주목하게 하라. 또한 이것들의 이유들을 그리스도에게서 찾게 하라. 사실 악령들은 보다 관상적인 방식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매우 못마땅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두운 곳에서 의인을 쏘려하기”(시편 10,2) 때문이다.
51. 이 관찰을 통하여 너는 악령들 가운데 둘이 매우 빠르며, 우리 정신의 움직임을 거의 앞지른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은 음욕의 악령과 하느님을 모독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악령이다. 그러나 두 번째 놈은 잠시 지체하는 반면, 첫 번째 놈은 만일 그가 일으키는 생각들이 욕정으로 자극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있어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52.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을 결합한 분에게만 속한다. 그러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는 것은 덕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역시 속한다. 사실 우리 교부들은 죽음에 대한 훈련과 육체로부터의 탈출을 ‘아나코레시스’(anachoresis) 라고 불렀다.
53. 자신의 육체를 너무 잘 키우는 우(愚)를 범하는 사람들과 육체를 돌보면서 육체의 욕망들을 자극하는 사람들은 육체가 아닌 그들 자신을 책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육체를 수단으로 하여 영혼의 ‘아파테이아’를 획득하였고, 어느 정도 존재들에 대한 관상을 지각하는 사람들은 창조주의 은총을 알기 때문이다.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54. 악령들이 수면 중의 환상들로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을 공격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친구들과의 만남, 친척들과의 연회, 여자들의 가무, 그리고 쾌락의 산물들인 비슷한 종류의 다른 모든 광경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 환영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면 이 부분에서 우리는 병들고, 욕정은 강해진다.
다른 한편, 악령들이 정념적인 부분을 괴롭힐 때, 그들은 우리에게 험한 길들을 따라 가도록 강요하며, 거기서 무장한 사람들과 독성이 있는 야수들과 육식성의 맹수들을 만나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짐승들과 사람들로 인해 놀라 달아날 때, 우리는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리고 철야 중에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약들을 사용한다.
55. 만일 수면 중에 육체의 자연적인 움직임들이 환상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영혼이 어느 정도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만일 환상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표지이다. 만일 그것들이 불명확한 모습들이라면, 옛 욕정의 표지로 간주하고, 만일 그것들이 분명한 모습을 띤다면, 최근의 공격의 징후라고 생각하라.
56. 우리는 낮에는 생각들을 통해서, 밤에는 꿈들을 통해서 ‘아파테이아’의 증거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파테이아’를 영혼의 건강이라고 말한다. 반면, 영혼의 양식은 인식인데, 이는 오직 이것만이 우리를 거룩한 능력들에 결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육체적인 존재들과의 결합은 어떤 유사한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다.
‘아파테이아’에 가까운 상태에 관하여
57. 영혼의 평화 상태가 둘 있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씨앗들로부터 유래하며, 다른 하나는 악령들이 물러감으로써 온다. 첫 번째 상태에는 겸손, 통회, 눈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열망, 그리고 노동을 향한 엄청난 열성이 따른다. 반면 두 번째 상태에는 허영심과 교만이 따르는데, 이는 수도승을 넘어뜨리려 하던 악령들이 사라질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상태의 영역에 항구한 수도승은 악령들의 습격을 보다 더 재빠르게 알아차릴 것이다.
58. 헛된 영광의 악령은 음욕의 악령에 반대한다. 그리고 둘 모두 동시에 영혼을 공격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영예를 약속하고, 후자는 불명예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둘 중에 하나가 접근하여 가까이서 너를 압박한다면, 그때 그것에 대립된 악령에 대한 생각들을 네 안에 생기게 하라.
만일 네가 격언처럼 못(걱정)으로 못(걱정)을 쫓아낼 수 있다면, 네가 ‘아파테이아’의 경계들에 가까이 있음을 알아라. 왜냐하면 너의 정신은 인간적인 생각들로 악령들의 생각들을 사라지게 할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을 통하여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거나 혹은 절제를 통하여 음욕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은 가장 심오한 ‘아파테이아’의 증거일 것이다.
서로 대립하는 모든 악령들에도 역시 이 방법을 적용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동시에 너는 어느 욕정에 의해서 네가 더 영향을 받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하느님께 두 번째 방법으로 적들을 쫓아달라고 청하여라.
59. 영혼이 더 진보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수의 적대자들이 영혼을 거슬러 일어난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동일한 악령들이 영혼 옆에 머무른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유혹들을 보다 빠르게 지각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획득한 ‘아파테이아’가 뒤이은 공격들로 인해 흔들린 것을 보게 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이것을 알 것이다.
60. 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수행에 반대되는 모든 악령들을 거슬러 승리한 이후에 영혼 안에 온다. 반면, 불완전한 ‘아파테이아’는 여전히 영혼과 싸우는 악령의 능력과 관련해서 언급된다.
61. 만일 정신이 그 내면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정신은 진보하지도 또 이 아름다운 이주(移住)를 완수하여 비육체적인 존재들의 영역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적인 동요는 정신으로 하여금 그가 남겨두고 떠나 온 것들에 습관적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62. 덕들이건 악들이건 간에 그것들은 정신을 눈멀게 한다. 덕들은 악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반대로 악들은 덕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아파테이아’의 징조들에 관하여
63. 정신이 분심 없이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 때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 주변에서 온갖 전투가 밤낮으로 일어난다.
64. 정신이 그 고유의 빛을 보기 시작하고, 잠자는 중에 나타나는 현시들 앞에서 고요히 머물며, 침착하게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파테이아’의 증거이다.
65. 정신은 기도의 순간에 이 세상 사물들 중 어떤 것에 관해서도 상상하지 않을 때, 활기에 가득 차게 된다.
66.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행을 잘 완수하여 인식에 가까워진 정신은 영혼의 비이성적인 부분을 거의 혹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은 정신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그것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67. ‘아파테이아’를 소유한 영혼은 단순히 변화하는 사건들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 영혼이 아니라,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 앞에서도 역시 동요되지 않는 영혼이다.
68. 완전한 사람은 고행을 실천하지 않고, 욕정에 초연한 사람은 인내를 훈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내는 욕정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것이고, 고행은 충동들로 고통 받는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69. 분심 없이 기도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분심 없이 시편을 낭송하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70. 자신 안에 덕들을 확립하고, 그것들에 완전히 혼합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 혹은 형벌에 대해서 기억하지 않고, 탁월한 상태가 그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말하고 행한다.
실천적인 고려들
71. 악령의 노래들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들 속으로 던져 넣는다. 시편들과 찬가들과 영가들(에페 5,19 참조)은 끓어오르는 우리의 정념을 식히고 우리의 욕망들을 끄면서 정신을 덕행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에로 초대한다.
72. 만일 공격을 하고 또 공격을 당하는 것이 싸움꾼들의 일이라면, 악령들 역시 우리를 거슬러서 싸울 경우, 우리를 공격하는 그들 역시 우리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사실 시편저자는 말하기를 “내가 때려눕히니, 원수들은 발밑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시편 18,38), 또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한 무리들 휘청거리고 쓰러지리라”(시편 27,2) 하신다.
73. 안식은 지혜에 연결되는 반면, 노고는 현명함에 연결된다. 왜냐하면 전투 없이 지혜를 얻을 수 없고, 현명함 없이 그 전투를 잘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영혼의 능력들이 본성에 따라 움직이도록 강요하면서, 그리고 지혜의 길을 준비하면서 악령들의 적의(敵意)에 대항하는 역할이 이 현명함에 맡겨졌다.
74. 수도승의 유혹은 정신을 어둡게 하는 생각인데, 이것은 영혼의 욕망적인 부분을 통해서 올라온다.
75. 수도승의 죄는 생각이 제시하는 금지된 쾌락에 동의하는 것이다.
76. 천사들은 악이 감소할 때 기뻐하고, 악령들은 덕이 감소할 때 기뻐한다. 사실 전자는 자비와 사랑에 봉사하고, 후자는 분노와 증오에 복종한다. 천사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를 영적인 관상으로 채우는 반면, 악령들은 가까이 다가와 영혼을 부끄러운 상상들 속으로 던져 넣는다.
77. 덕들은 악령들의 공격을 멈추게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무사하도록 지켜준다.
78. 수행은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정화하는 영적인 방법이다.
79. 계명들에 대한 단순한 실천은 만일 그것들에 부합하는 관상들이 정신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혼의 능력들을 완전하게 치유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80. 천사들에 의해서 우리 안에 불어 넣어진 모든 생각들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악령들에 의해서 불어 넣어진 모든 생각들을 거부하는 것은 가능하다. 앞의 생각들에는 평화의 상태가 따르고, 뒤의 생각들에는 동요의 상태가 따른다.
81. 사랑은 ‘아파테이아’의 자손이다. ‘아파테이아’는 수행의 꽃이다. 수행은 계명 준수로 이루어지며, 계명들의 파수꾼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고, 이는 참된 신앙에서 나온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의 내재적인 선으로서 이는 하느님을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도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82.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작용하면서 병든 지체들을 감지하는 것처럼, 정신 역시 마찬가지로 그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능력들을 알게 되고, 자기를 방해하는 것을 통하여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계명을 발견한다.
83. 정신은 욕정들을 거슬러 격렬하게 싸우기 때문에 그 싸움의 이유들을 숙고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정신은 밤에 싸우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정신이 ‘아파테이아’를 획득하게 되면, 적들의 술책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84. 수행의 목표는 사랑이고, 인식의 목표는 신학이다. 수행의 시작은 신앙이요, 인식의 시작은 자연에 대한 관상이다. 영혼의 욕정적인 부분을 공격하는 악령들은 수행에 반대된다고 말한다. 이성적인 부분을 괴롭히는 것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모든 진리의 적들이자 관상의 적대자들이라고 말한다.
85. 육체를 정화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육체가 정화된 후에 육체와 함께 남아 있지 않지만, 덕들은 모두 함께 영혼을 정화하며, 정화된 후에도 여전히 영혼 안에 머문다.
86. 이성적인 영혼은 그의 욕망적인 부분이 덕을 열망하고, 정념적인 부분이 덕을 위해 투쟁하며, 이성적인 부분이 존재들에 대한 관상을 지각할 때,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인다.
87. 수행에서 진보하는 자는 욕정들을 감소시킨다. 관상에서 진보하는 자는 무지를 감소시킨다. 그런데 욕정들의 경우, 어느 날 완전히 파괴될 때가 올 것이지만, 무지와 관련해서는 어떤 이는 거기에 끝이 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88. 그 사용 방법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사물들은 덕들이나 혹은 악들의 생산자들이다. 이 두 목적들 중 하나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사용하는 것은 현명함에 속한다.
89. 우리의 지혜로운 스승에 따르면, 이성적인 영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덕이 이성적인 부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현명함, 지성, 지혜로 불리고, 욕망적인 부분 안에 있을 때는 절제, 사랑, 극기로 불리며, 정념적인 부분 안에 있을 때는 용기와 인내로 불린다. 전체 영혼 안에 있을 때는 정의라 칭한다.
‘현명함’의 역할은 적대적인 힘들을 거스른 작전들을 지휘하고, 덕들을 보호하며, 악들을 거슬러 대항하고, 상황에 따라서 중립적인 것을 조절하는 것이다. ‘지성’의 역할은 우리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위해 공헌하는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지혜’의 역할은 육체적 존재들과 비육체적 존재들의 이유들을 관상하는 것이다.
‘절제’의 역할은 우리 안에 이치에 반하는 상상들을 일으키는 대상들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의 역할은 설사 악령들이 그를 타락시키려 노력할지라도 하느님의 모든 형상들에 대해 그 원형(原形)에게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극기’의 역할은 입의 모든 쾌락을 기꺼이 거절하는 것이다.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들 앞에서 용감하게 굳건히 머무는 것은 ‘인내’와 ‘용기’의 역할이다. ‘정의’의 역할은 영혼의 이 부분들 사이에 일종의 조화와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90. 씨앗들의 산물은 곡식단이고, 덕들의 산물은 인식이다. 씨 뿌리는 노고에 눈물이 따르는 것처럼, 곡식단에는 기쁨이 따라온다(시편 126,5-6 참조).
거룩한 수도승들의 금언들
91. 올바른 방법으로 우리를 앞서간 수도승들의 길들을 살펴보고, 그 길들을 참조하면서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언급된 혹은 행해진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가운데 다음의 말이 있는데, 이는 그들 가운데 하나가 말하는 바이다.
“사랑에 연결된 매우 엄격하고 규칙적인 식이요법은 수도승을 ‘아파테이아’의 문으로 보다 빠르게 인도한다.” 그 수도승은 밤에 고통을 당한 한 형제에게 환자들에 대한 봉사를 단식에 부가하라고 명령하면서 그를 환상들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욕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92. 당시의 현자들 가운데 하나가 의로운 안또니우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오 사부님, 책들의 위로가 없는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안또니우스가 대답했다. “철학자여, 나의 책은 창조된 존재들의 본성이오. 내가 하느님의 말씀들을 읽고 싶을 때, 그 책은 거기에 있소.”
93. “선택된 도구”(사도 9,15)인 이집트인 원로 마카리우스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사람들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하면서 영혼의 기억력을 사라지게 하고, 반면 악령들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간직하면서 무사합니까?” 나는 대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에는 정념적 부분의 본성에 반대되는 반면, 두 번째 경우에는 그 본성을 따르기 때문이오.”
94. 한 낮에 나는 거룩한 사부 마카리우스를 방문하였다. 매우 심한 갈증으로 목이 탄 나는 그에게 마실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늘로 만족하시오. 왜냐하면 지금 걷거나 항해 중인 많은 사람들 역시 물이 없기 때문이오.” 그러고 나서 내가 그에게 극기에 관해서 논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내 아들이여, 용기를 가지시오. 나는 20년 동안 꼬박 빵도 물도 잠도 충분히 취하지 않았소. 사실 나는 내가 먹은 빵을 달아 보았고, 내가 마신 물을 측량해 보았으며, 벽에 등을 기대면서 선잠을 피하였소.”
95. 어떤 수도승이 자기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고 자기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불경스러운 말을 하지 마시오. 내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계시오.”
96. 어떤 형제가 원로들 가운데 하나에게 그가 자기 집을 방문할 경우,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식사해도 좋은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원로가 대답하였다.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마시오.”
97. 어떤 형제가 오로지 복음성서 하나만을 소유하였다. 그는 이것을 팔아 그 돈을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내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기억할만한 말을 하였다. “나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마태 19,21)라고 나에게 말한 바로 그 책을 팔았소.”
98. 알렉산드리아 주변, 마리아(Maria)라고 부르는 호수의 북쪽 편에 위치한 섬이 하나 있다. 거기에 한 수도승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는 신비가들의 무리 가운데서 가장 경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수도승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하느님, 본성, 습관, 필요성, 손노동, 이 다섯 가지 이유 때문에 행해진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 덕은 본성상 하나이지만, 그것은 영혼의 능력들 각각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형태를 취한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실 태양 빛은 형태가 없지만, 그것이 들어오는 창문으로부터 자연적으로 그 형태를 취한다.”
99. 수도승들 가운데 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만일 내가 쾌락들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영혼의) 정념적인 부분의 모든 구실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사실 나는 정념적 부분이 언제나 쾌락들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과 내 정신을 혼란시키고 인식을 쫓아버린다는 것을 안다.”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사랑은 음식이나 돈 창고를 지키는 법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같은 문제로 두 번씩이나 악령들에 의해서 속았다는 것을 모른다.”
100. 모든 형제들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원한과 증오로부터 자유로워져 모두를 초연하게 만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사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거룩한 신비들을 통하여 우리를 정화하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원로들을 천사들처럼 공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투를 위해 우리에게 기름을 바르고, 들짐승들로부터 물린 상처들을 치유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맺음말
친애하는 형제 아나톨리우스여, 이것이 지금 수행에 관하여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무르 익어가는 포도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수확한 전부입니다. 그러나 “정의의 태양”(말라 3,20)이 우리 위에 강렬히 빛나고 그 포도송이가 익을 때, 나를 심었던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와 지금 나에게 물을 주는 거룩한 교부들의 기도와 중재를 통하여, 그리고 나를 자라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1고린 3,6-7 참조)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시편 104,15) 포도주를 또한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 영원히. 아멘(1베드 4,11; 묵시 1,6 참조).
* 출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