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나고 사흘째 되던 날 이었나 보다. “선생님 잠 자면 안 된다니까요?” 자꾸 눈이 감긴다는 나에게 문병 온 지인은 안타까워하며 간호사를 찾았다. 머리가 아프고 토기(吐氣)가 있다며 병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할 때도 의구심 어린 눈으로 살피더니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사고 당일 몇 가지 검사는 하였으나 단순한 뇌진탕 진단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교통사고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사흘 정도 지나 봐야 진짜 문제가 드러난다는 것이어서 일부러 입원했었고 마지막 날 여러 가지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가 이튿날 아침 부산하게 검사해보니 뇌출혈이 진행 중이라며 큰 병원을 권하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전남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캐나다 연수를 떠나려던 남편은 출국을 하루 앞두고 짐을 풀었다. 그 해 혹독한 여름을 보내고 기회를 만들어 캐나다에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당신은 멀리 여행하는 것이 싫다며 나를 안심시키는지라 지금까지 모른 체 하고 있다.
목포에서 출발하여 광주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이상은 못 느꼈으나 불안하였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간단한 질문을 받고 검사를 위한 이동 침대에 몸을 옮겼다. 여름방학을 하루 앞둔 2010년 7월 19일의 일이다. 조선대학교 병원에서는 아스피린이 처방된 혈압약을 복용 중이라서 당장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수면 상태로 지혈이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스피린이 피돌기를 매끄럽게 하여 고혈압 환자들에겐 많이 처방되는 약이지만 수술할 때는 피가 멈추지 않는 어려움 때문에 약 기운이 가시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연이 깊었던 친지와 지인, 동무들이 오가며 환자와 가족에게 용기를 주고 갔다고 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이 전하는 그들의 응원이 매우 힘이 되고 고마웠다. 긴 잠에서 깨지 않는지라 어떤 이는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말을 옮기고 더러는 죽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다고도 하는 있을 수 있는 씁쓸한 이야기도 전했다.
간호사의 조용하고 부산한 움직임과 가족들의 안타까운 응원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나의 주변을 살피기를 한 달여가 되어갔다. 중환자실에 있는 중에 나는 자주 꿈 속을 헤맸는데 높은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숱한 사람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하였다. 간간이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지혈되기 전, 그러니까 수술 전 일주일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혼수 상황 중에도 고통스러워 보이더니 수술 후에는 의식은 없어도 평온해 보이더라는 이야기에 늘 곁에서 살펴주는 이들의 힘으로 사는구나 싶었다. 초등학교 친구는 새벽기도와 금식기도로 나의 회생을 기원하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오빠 내외는 새벽 불공으로 나의 쾌유를 간구하였다.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혼자 계시던 아버지는 내가 멀리 출장 간 것으로 알고 계셨으니 새벽잠이 깨면 분명 불경을 외우셨을 것이다. 또 머리가 커져서 만난 대학 친구는 간절히 기도하며 남편에게 깨어나면 꼭 같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다른 답이 없던 때라 남편은 깨어나기만 하면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정작 나는 하느님보다는 부처님과 정서가 맞아 고맙지만 모른 체 하였다.
뇌수술 후 다시 들어간 중환자실에서 깨어나 일반병실로 옮기는 데 한 달여가 걸렸다.
머리는 깨질 것만 같았고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으며 발진이 생겼다. 붕대로 칭칭 감은 머리 이곳저곳에서 느끼는 통증이 살아있는 증거였다. 자가 호흡을 할 수 없어서 목을 절개하고 삽관을 하였다. 간병인 이모는(나이 든 간병인은 병원 측에서 간병인보다는 이모라고 하면 피붙이라 생각하여 더 친절하게 대해 준다며 이모라고 불러 달라고 하였다.) 썩션기(suction)로 가래를 뽑고 냉찜질과 온찜질을 번갈아 하며 “나는 이렇게 염증도 심하고 열이 많은 사람은 처음이네” 한다. 잠 못 자고 괴로워하는 환자와 밤 새 지켜야 하는 간병인의 처지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과학의 힘은 위대하고 의학의 발달은 경이로우며 기도의 힘은 의료진의 노고를 더욱 빛나게 했다. 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병실을 오가며 온 정성을 다한 가족의 사랑이야 말하여 무엇할까마는 흐르는 시간은 나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붕대를 벗겼으며 까까머리의 아주머니에게 웃음을 찾아 주었다. 몸이 조금씩 호전될 때마다 ‘그동안 내가 두루두루 잘못한 일이 있거든 이 큰 사고가 준 벌로 가름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앞으로 선행에 인색하지 않아야지’ 했다. 또 살짝 기분이 좋을 때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에서 트랩대령과 마리아수녀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부르던 썸씽굿(Something Good)의 노래 말처럼 ‘어쩌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순간이라도 나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한 게 아닐까?’하며 ‘그래서 살았을까?‘ 하고 남 모르게 웃기도 했다.
나의 병명은 사고 당시엔 뇌진탕이었는데 대학병원에서는 수술 후 지주막하출혈이라고 하였다. 뇌혈관의 기형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 지주막하출혈은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 혈관이 충격을 받아 터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뇌수술 중에 다른 부위에서 또 동맥류를 발견하여 클립으로 묶었다며 의사선생님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가족들도 사고로 뇌출혈을 일으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거니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기형적인 뇌혈관을 묶어 놓았으니 천만다행이며 화가 복이 되었다고 위로했다. 나도 뇌의 이곳저곳이 찍힌 사진 여러장을 보면서 ‘참 좋은 세상이야, 의사는 돈을 많이 벌어도 마땅해, 절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지’하며 혼잣말을 했다.
사실 혼잣말은 1년의 병 휴직을 끝내고 운전을 시작하면서 차 속에서 일상이 되었다. 한동안 운전대를 잡고 소리 지르는 일이 계속 되었으며 알 수 없는 상대에게 짜증을 내거나 진저리를 치는 일이 많았다. 해가 거듭되면서 사고의 후유증도 희미해지고 혼잣말도 사라지고 있지만 운전에 대한 경각심도 느슨해져서 소스라칠 때가 있다. 운전은 나 혼자서만 잘해서도 안 되고 주변 상황을 잘 살피며 방어운전도 해야 하는 데 말이다.
보통 시외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동료들끼리 돌아가며 운전을 한다. 혼자서 장거리 운전을 하면 지루하기도 하고 교통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일정한 시각에 정한 장소에서 차를 타야 하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겠으나 오고 가며 차 안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재미나기 짝이 없다. 퇴근길에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뀔라치면 포장마차 아저씨가 정지된 차 사이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도너츠를 팔기도 하는데 짐작대로 꿀맛이다. 하루의 피곤도 함께 목으로 넘어간다.
그날은 내가 운전하는 날이 아니었다. 출근 팀에게는 따로 가겠다고 했다. 당번일 경우에야 어쩔 수 없이 모여서 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조금 더 일찍 출근하여 일을 더 하고 싶은 욕심에서다. 학교는 중국으로 차를 수출하는 통로가 되는 목포 신외항으로 가는 길에 있었다. 따라서 출근길에 대형 트럭과 차를 운반하는 트레일러를 많이 보게 되는데 나란히 가는 승용차는 늘 경계하게 된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차로 30여분이 소요되는데 교문 가까이 다가가서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나는 좌회전 방향등을 켜고 천천히 다가가서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쾅 소리가 났다. 몸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119에 신고를 했느니, 큰 일이 났다느니 하며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차는 진행하는 쪽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앉았고 반 토막이 났다. 그러나 나는 보기에는 멀쩡했으며 혼자 타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잠깐 안도 하였다. 승용차 여섯 대를 실은 트레일러가 들이받았다고 했다. 1차선에서 방향등을 켜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젊은 운전기사는 내가 바로 방향을 바꾸리라 예상하고 3차선에서 2차선을 건너 바로 1차선으로 진행하며 멈춰있는 차로 돌진한 것이다. 사고 직후 안위를 묻는 기사에게 뒷일은 생각지도 못한 체 “아저씨, 나 다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하며 농담을 하였지만 그 일로 직장을 1년 쉬었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쪽으로 가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대형차 주변으로 운전하지도 않는다. 운전은 늘 미숙하고 자유롭지 않다. 운전이 주는 혜택을 만끽하리라 했던 포부는 출퇴근용으로 만족한다. 가끔 범칙금 고지서도 받는다. 그러나 한정된 호사를 누리는 것도 뜨거웠던 여름날 우연한 사고로 생사를 가늠할 수 없을 때 기술과 마음과 인내로 나의 오늘을 만들어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의 오늘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다.
첫댓글 곽주현님의 조언으로 원고 살펴 다시 올렸습니다. 어쩌다 같은 내용이 두 번이나 올라갔는지, 앞으로도 회원님들의 도움 말씀 부탁 드립니다. 꽃 향기를 담은 바람이 좋습니다. 기분 좋은 4월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네. 저도 어제 봤는데 한밤중이라 연락은 드리지 못했답니다.
전화위복이 되었네요.
제가 모시던 교장 선생님도 퇴직 기념으로 종합건강검진에서 머리에 꽈리가 있는 걸 발견했다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폭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기 천만다행입니다.
하하 보통 일요일 저녁은 다음날 출근을 위해 일찍 쉬는데 올해는 월요일 보다 막강한 일요일을 만났습니다. 일요일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올려야지 하는 마음이 잦은 실수를 만듭니다.
남편도 뇌동맥류 수술을 받았습니다. 혈압 때문에 한 쪽 시력의 반을 잃었지요. 선생님 글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오늘의 삶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날마다 아침을 맞는 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에 감사로 답하려 하는데 자주 잊네요. 기적을 만들어준 모든 상황에 배은망덕이지요.
작은미소님의 사랑이 남편분께는 기적의 원동력이 되겠습니다.
큰 수술 받고 회복하실 때까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이렇게 다시 일상을 되찾아 글도 쓰고 가까운 분들의 은혜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네요.
이번 글감을 기회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보은을 다시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글쓰기만 시키는 게 아닙니다.
오만해져가는 자신에게 하심(下心)을 갖게 하는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