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 노산공원 길과 박재삼 시비(아래). 바다와 맞붙은 노산공원은 시인 박재삼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진=박정화 | |
돌계단 한 계단 돌계단 두 계단. 나무계단 한 계단 나무계단 두 계단. 삐걱댄다. 돌도 성하고 나무도 성한데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삐걱대는 소리는 계단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듣고 싶어서 나는 소리다. 내가 삐걱대서 나는 소리다.
삐걱대는 소리는 아귀가 맞지 않을 때 나는 소리다. 뭔가 짝이 맞지 않을 때 나는 소리다.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있지 않을 때 나는 소리다. 어긋날 때 나는 소리다. 내가 어긋날 때 나는 소리다. 불화의 소리다.
공원으로 가는 계단길은 삐걱대는 길이다. 내가 삐걱댈 때 찾던 길이다. 삐걱대던 나를 더 삐걱대게 하던 길이다. 공원길은 잘 지내던 사람과 어긋나면서 찾던 길이고 잘 지내던 나와 어긋나면서 찾던 길이다. 나를 어느 자리에 둘지 몰라서 찾던 길이다. 불화의 길이다.
"젊은 양반도 소주 한 잔 하소." 노인은 앞에 놓인 잔을 털고 나에게 건넨다. 낡은 넥타이를 혁대 대용으로 허리춤에 두른 내가 안돼 보이는지 노인은 술도 권하고 안주도 권한다. 공원매점에 앉아 낮술을 기울이던 노인에게 말 붙인 게 빌미가 돼 꼼짝없이 붙잡힌다. 나는 노인에게 붙잡히고 노인은 나에게 붙잡혀 술잔이 오고 간다. 안주는 삶은 갑오징어 새끼다.
낮술은 삐걱대는 술이다. 빨리 취하는 술이다. 자기를 빨리 놓아 버리는 술이다. 낮술은 낮술이라도 들이키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어서 들이키는 술이다. 나를 어디에 둘지 몰라서 들이키는 술이다. 불화의 술이다. 노인은 말을 맛깔스럽게 이어간다. 묵은 맛 감칠맛이 난다. '젊은 양반'을 오래 붙잡아 두려는 꿍꿍이 같기도 하고 배려 같기도 하다. 올해 일흔 여섯 김판식 노인. 제주도에서 신병훈련을 받던 얘기도 하고 육십 년 넘게 삼천포 고기판장에서 경매일을 보던 얘기도 한다. 고기판장이 뭐냐고 되묻자 어판장이라고 부연한다. 노인이 어판장에서 사는 오천 원어치가 일반인이 사는 삼만 원어치보다 많다는 자랑도 보탠다.
'풀밭에 바람이 날리듯이/남쪽바다에 햇살이 날리네.//바야흐로/갈매기 두어마리/無心끝에 날으고/돛단배 가물가물/먼나라로 갈 듯이 떴네.//오, 안스러운 것, 하얀 하얀 저것들,/어디까지 가서야 지치는 것이랴./지쳐서는 돌아오는 것이랴.' - 박재삼 시 '한 風致' 부분
노산공원의 계단길. | |
오십을 앞둔 나이는 애매하고 어중간한 나이다. 다시 시작하기도 애매하고 어중간하고 정리하기도 애매하고 어중간하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렁저렁 지내기도 애매하고 어중간하다. 고민이 깊어지는 나이이고 나와 나를 둘러싼 여건들이 불화를 겪기 십상인 나이이다. 사정은 다를망정 불화를 겪지 않는 나이대는 또 어디 있으랴. 내가 겪은 불화를 생각한다. 잘 지내던 사람과의 불화 잘 지내던 나와의 불화. 딱히 무어라고 집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나와 나 사이의 관계. 내 안에서 잘못일 때도 있고 내 밖에서 잘못일 때도 있지만 누누구 잘못을 떠나 불화는 사람과 사람을 격리시킨다. 나와 나를 격리시킨다.
"내야 알 수가 있나." 여기에 언제쯤 공원이 생겼냐고 노인에게 묻자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대답이다. 대답이 밋밋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한국전쟁 때 여기 공원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보도연맹 사람들을 즉결처분한 곳이 여기 공원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은 곳이 여기 노산공원 풀밭이란다.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구덩이를 파는 삽질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입을 틀어막고 울먹대는 곡소리 같기도 하다. 어느 소리나 하나 같이 불화의 소리다. 삐걱대는 소리다. 낮술에 취하는 듯 노인은 얼굴이 불콰하다. 목소리, 불콰하다.
낮술은 빨리 취한다. 빨리 자기를 놓아 버린다. 노인은 노인을 놓아 버리고 노인에게 붙들려 일행을 놓친 나는 에라 될 대로 돼라, 나를 놓아 버린다. 마음은 편하다. 노인도 나도 경계를 풀고 서로를 탐색하는 눈을 풀고 한 통속이 된다. 노인이 그렇제 하며 나는 그렇지요 화답한다.
불화의 술인 낮술은 불화를 다스리는 술이기도 하다. 자기를 놓아 버린 지점에서 네가 온전히 보이고 내가 온전히 보인다. 불화를 야기한 내 아집이 온전히 보인다. 낮술은 몸에 안 좋다는 처방도 이때만큼은 공염불이 된다. 불화를 거쳐서 네가 보이고 내가 보인다면 낮술도 괜찮은 술이지 않은가. 불화를 다스리고 나를 다스리는 미더운 술이지 않은가.
노산공원은 바다와 맞붙은 공원이다. 바닷물이 들이닥치고 바닷물이 빠져나가는 공원이다. 파도가 후려치는 공원이다. 나를 노산공원으로 이끈 끈은 박재삼이다. 박재삼은 어린 시절을 이 공원에서 이 바다에서 보낸 시인이다. 박재삼이 기거하던 집터엔 김밥집이 들어서고 박재삼이 물놀이하던 바다는 매립돼 모텔이 들어섰을망정 노산공원은 곳곳이 박재삼이다. 곳곳이 박재삼 얼룩이다.
생전에 평화롭던 시인 얼굴을 옮겨 놓은 듯 공원은 평화롭다. 남자의 등을 긁어 주는 여인이 보이고 족구를 하는 청춘남녀가 보인다. 얼른 오라고 재촉하는 일행 전화를 두 번이나 받고서야 공원을 내려간다. 나무계단 한 계단 나무계단 두 계단. 돌계단 한 계단 돌계단 두 계단. 삐걱대는 소리는 여전히 내 안에서 나지만 삐걱대면서 나는 제자리를 잡아가리라. 그러리라. 삐걱대면서 제자리를 잡아가는 가구처럼. 삐걱대면서 제자리를 잡아가는 부부처럼.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고 노래한 박재삼((1933-1997). 겨레의 정한과 삶의 애환을 고유한 가락으로 내보인 시인이다. 소월과 영랑의 맥을 이은 서정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어머니 고향인 삼천포에서 자란다.
삼천포는 박재삼의 시적 자산이다. 햇빛 바람 나무 바다 등 즐겨 쓴 시어가 삼천포 풍광과 무관하지 않다.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중 사환일을 보던 중 거기에서 교편을 잡던 김상옥 시인을 만나 시를 접하게 된다. 이후 삼천포중학을 거쳐 삼천포고교를 수석 졸업한다. 졸업 이듬해인 1954년 월간 '현대문학'에 들어가 창간을 준비한다. 당시 주간은 조연현, 편집장은 오영수다. 최종 학력은 고려대 국문과 3년 중퇴.
박재삼은 생활고에 허덕인 시인이다. 돈이 없어서 진학을 미루고 돈이 없어서 시집을 공책에 베껴 애송한 시인이다. 삼십대 중반부터 고혈압과 위궤양으로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며 백일장 심사 도중에 신부전증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맑고 건강하다. 가난하고 추운 마음을 덮어주는 시가 박재삼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