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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렌즈에 잡힌 시조⑤>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관계 맺기
임채성(시조시인)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 서문에서 역사를 일컬어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에 관한 기록”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 ‘아’이고 그 이외는 ‘비아’다. 예컨대 조선 사람은 조선을 ‘아’라고 하고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국·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은 각기 자기 나라를 ‘아’라고 하고 조선을 ‘비아’라 한다는 것이다. 무산자는 스스로를 ‘아’라고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 등은 자신들을 ‘아’라고 하고 무산자를 ‘비아’라 한다. 이뿐만 아니라 학술·기술·직업·의견 표명이나 그 밖의 무엇에서나, 주관적인 ‘아’가 있으면 그와 대립하는 ‘비아’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아’ 속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속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래서 ‘아’에 대한 ‘비아’의 접근이 빈번해질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도 더욱 맹렬해진다. 그러니 인류사회의 활동이 쉴 틈이 없고 역사의 전진이 그칠 날이 없으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단재 선생의 말처럼 투쟁은 일상의 삶 그 자체이며, 인류와 자연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투쟁이란 호전적인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성미가 급하거나 과격한 사람들의 돌출행동도 아니다. 모든 존재들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존재양식일 뿐이다. 노루가 사냥꾼의 총을 피해 달아나는 것도, 바닷가 사람들이 파도와 해일을 막기 위해 방파제를 건설하는 것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는 노동쟁의도, 자본가들이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을 착취하거나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 모두 단재가 말한 '투쟁'의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투쟁은 모두 '이기주의'의 속성을 띤다. 모든 존재의 '이기'는 다른 존재의 '이기'와 충돌하게 마련이며, 이 지점에서 '아와 비아의 투쟁'은 필연이 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아’와 ‘비아’는 ‘자아(自我)’와 ‘비자아(非自我)’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심리학(Ego psychology)에서는 자아를 '지각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적응해 가는 기능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자아는 불안이나 심리적 갈등에 근거하여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생래적(生來的)·자생적(自生的)인 것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율적으로 형성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격리되고 적절한 자극을 받지 못해 가족 등 구성원과의 관계가 부적절하게 형성되면 자아는 발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아는 배척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대상이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아는 것이 곧 무아(無我)이고,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설파한다. 하지만 무아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自我)가 없다”는 뜻이니 공(空)이나 무상(無常) 사상과 긴밀히 연관되는 개념이다. 무아가 나를 부정한다고 해서 염세적 세계관이나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물의 이름이나 명칭은 그것이 변화하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고정된 사물로, 일시적이고 우연한 결합체가 아닌 실체라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고유명사나 보통명사로 지칭하더라도 그것들의 연기적(緣起的) 성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고통과 미망, 방황 등 인간이 경험하는 어리석음의 근원은 자아의식이 전체정신으로부터 분리돼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중적 인간의 나약한 자아가 만드는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은 대중인간이 주체적 존재가 되어 자아를 객관화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심리학의 관점인 것이다. 문학에 있어 최대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다. 특히나 시나 시조에 있어서의 서정주의는 대부분 자아와 관련된 문제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시스템에 갇혀 있는 불안한 자아를 그리고 있거나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자아 인식, 세계와 자아 간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기도 한다. 자아실현이니, 자아도취니 하는 말들이 유행병처럼 번지는 물질욕망의 시대, 지난 계절 시조 속에 투영된 자아의 모습은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명치끝을 파고든다, 하늘 가른 돌주먹이
선불 맞은 검투사가 날쌘돌이 패대기치다
휘도는 공중제비 발차기
하늘 한쪽 흐너진다.
#2 쇠그물 둘러친 거기 팔각 링이 난장이라,
체머리 흔들어대는 죽자 사자 격투기라,
피칠갑 밭은 숨 고르는
초열지옥 격투기라,
#3 옥죄고 메치고 글쎄, 이판사판 거품 물고
우리 겨운 한 살이는 엎·뒤치락 맞장 뜨기
거꾸로 곤두박이다 킁! 되우 서는 반전(反轉)이다.
-윤금초, 「유 에프 시(UFC)」 전문, 『문학청춘』(2016년 봄호)
집으로 가는 길엔 가시밭과 칼바람
뚝 끊긴 길 위로 어둠은 더 짙어져
눈물이 비명으로 번진 유년의 고샅길
피로 씻은 열다섯 살, 헝겊으로 닦아내며
허공을 떠돌던 소녀들이 집에 온다
“언니야 이제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부르며
-이송희, 「귀향(鬼鄕)」 전문, 『화중련』(2016년 상반기호)
시의 본질은 ‘자아’를 넘어서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다. 창작은 타자에 대한 감응의 표현으로서 자아에 국한된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갇혀 있던 하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인의 또 다른 세계와 만나고, 그곳과 교류하는 지점에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자아와 자아의 만남은 또 다른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자 세계인식의 새로운 통로가 된다. 이것은 일상에서의 단순한 마주침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타자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비실존의 실존이다. 인식의 주체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사유로 확장되고, 자아에 대한 성찰과 타자에 대한 감응은 상호작용을 통해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나’ 아닌 다른 세계와의 관계 맺기는 일상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특별한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윤금초 시인과 이송희 시인의 시편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윤금초 시인은 팔각의 링에서 벌어지는 피 튀기는 한 판 승부를 형상화하고 있다. UFC는 세계 3대 이종격투기 대회 중 하나이다. 개념적으로 프로복싱의 WBC나 WBA라는 기구(단체)를 떠올리면 된다. 시인의 눈은 바로 이 경기장을 향하고 있다. 자아와 타자가 서로 부딪치며 ‘이판사판’ ‘엎치락뒤치락’ 하는 격렬한 상황을 노골적이면서도 직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피가 튀고 관절이 꺾이는 원시적 쾌감(혹은 동물성 카타르시스)을 날것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그와 같은 직접적 서술의 이면에는 이종격투기 자체가 현대사회에 대한 메타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주먹이든 팔꿈치든 발이든 무릎이든 무엇이나 무기가 될 수 있고, 권투든 태권도든 유도든 레슬링이든 어떤 방식으로 싸워도 되는 ‘무규칙(규칙이 최소화된) 이종격투기’를 현대사회에 대입해보면 그대로 답이 나온다. “죽자 사자” 누군가를 때려눕히기 전에는 도망갈 곳도 없는 “피칠갑 밭은 숨 고르는// 초열지옥”에서의 한 판 싸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해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한경쟁시대의 축소판이다. “우리 겨운 한 살이는 엎·뒤치락 맞장 뜨기”라며 생존 본능과 직선적 욕망으로 상징되는 도시라는 링 위에서 펼쳐지는 현대사회의 극심한 피로감과 정신적 가치의 상실을 현장에서 중계하듯 서술하고 있다. 이는 공존이나 공생보다 자기중심적 가치우월을 지향하는 현대의 병리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종 자아 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송희 시인은 휴머니즘적인 연민과 참담함의 시선으로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鬼鄕)>에 대한 리뷰이자 영상언어의 문자변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되 르포르타주 식의 직선적 표현이 아니라 스크린 속 감정의 떨림을 섬세한 언어감각을 통해 그 울림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하고 많은 영화들 중 하필이면 이 영화에 주목하게 된 것은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우여곡절도 한 몫 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투자자도 정부조차도 관심을 두지 않는 바람에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나서 관객에게 선을 보이기까지 14년이란 시간을 허허로이 보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귀향’에서 ‘귀’는 돌아갈 귀(歸)가 아닌 귀신 ‘귀(鬼)’ 자이다.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한 피맺힌 ‘한’을 절규하듯 알리려는 것처럼, 시인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눈물이 비명으로 번진 유년의 고샅길”에서 시인은 적대적 타자(가해자)가 아닌, 머나먼 전장에서 외롭게 잊혀져간 “열다섯 살” “소녀들”의 자아를 감싸고 보듬어 안고 싶은 것이다. 감동의 전파가 아닌 관심의 환기라는 측면에서 시적 화자와 ‘소녀들’의 자아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아부지! 고생 끝났슈 떵떵대며 살아유 공단이 들어섭네, 골프장 개발됩네 자식들 쥐방구리로 소문 물어 나른다
이날꺼정 너그들 밥 멕이고 공부시킨 건 이 애비가 아니라 저 땅인그라 저 땅 땅에게 뭘 더 이상은 바라지도 말거라
소문은 잦혀지고 자식들 발길 뜸해질 쯤 떵떵대며 살길 바란 건 정작 나 아닌가벼 쓴 담배 뻑뻑 빨면서 망할 놈의 늙은이
-노영임, 「바랄 걸 바래야지」 전문, 『시조시학』(2016년 봄호)
별천지 가는 행렬 티켓 한 장 따내려고
사흘 밤낮 천막 치고 복부인 점쾌 본다
그 틈에 고개 들이민 암표 파는 도시들
갈매기 흠칫흠칫 고객번호 낚아챈다
내레이터 흥에 따라 마천루 자꾸 높아가고
추락한 무리를 딛고
떴다, 뜬다
프리미엄
-강지원, 「떴다방」 전문, 『화중련』(2016년 상반기호)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는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삶의 기본적 조건이자 터전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러한 문명적 조건을 문제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문제성이 해소된 어떤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한 상상은 실재하지 않는 판타지의 세계가 아니라 당장의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점철된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대부분 시적 화자가 추구하는 현실과의 대척점에 놓여있다. 시조가 현대적 삶과 무관하지 않음은 예전에도 언급하였다. ‘언어의 감옥’으로 치부되는 정형양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당대에 대한 인식의 장을 펼쳐놓을 수 있음을 수많은 작품들의 실례를 통해 이야기한 바 있다. 노영임 시인과 강지원 시인도 현대 도시사회의 근본 원리가 지닌 양면성, 자본주의적 욕망과 현대적 삶의 문제성 등을 이러한 시조 양식을 통해 예각화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개발시대에는 도시화라는 장밋빛 밑그림이 있었다. 논과 밭 위에 공장을 짓고, 산을 파헤쳐 아파트를 지었다. 도시 근교의 땅들은 시나브로 도시에 흡수되었고, 권력과 자본에 침식된 또 다른 땅들은 새로운 욕망을 삼키며 메트로폴리스로 변신해갔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는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양산형 주거 모델로 기능했다. 실제로 1970년대의 강남, 1980년대의 목동, 1990년대의 분당·일산 등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필두로 한 신도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분양가 상한제 덕분에 비교적 적은 비용을 지불했던 아파트는 1980년대 불어 닥친 부동산 가격폭등으로 인해 가장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일해서 버는 돈’보다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더 빨라짐에 따라 부동산 투기는 투자라는 인식의 합리화를 가져오게 된다. 조금만 눈치 빠르게 굴면 평생을 일해 벌 돈을 몇 년 안에 챙길 수 있다는 욕망의 화수분을 좇아 빚을 내서 투자를 하는 시대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한탕주의 식 욕망의 창에 비친 현대인의 모순적 자아를 노영임 시인은 소문과 진실의 상호작용을 통해 투영하고 있다. 시골 아버지의 농토에 개발이 진행될 것이라는 소문이 일자 ‘방구리’에 ‘쥐’처럼 드나들던 “자식들”은 그 “소문”이 “잦혀지”자 “발길 뜸해”진다. 반면 아버지는 “이날꺼정 너그들 밥 멕이고 공부시킨” “땅에게 뭘 더 이상은 바라지도 말거라”며 나무라지만 실상 그도 자식들처럼 “떵떵대며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자아와 본능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순적인 두 자아의 대립은 결국 스스로에게 “망할 놈의 늙은이”라는 꾸지람을 던짐으로써 종결된다. 실제로 일어나는 행위와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 사이에서의 모순적 상황은 정립(자아)과 반정립(비자아), 종합(자아와 비자아의 통일)의 변증법적 이성에 의해 반성과 성찰이라는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강지원 시인은 비슷한 맥락에서 부동산 투자의 허상을 짚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프리미엄”으로 통칭되는 ‘시세차익’에 대한 속물적 욕구를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센텀시티, 마린시티, 엘시티 등 “별천지 가는” 티켓을 따내기 위해 “사흘 밤낮 천막 치고” 있는 “복부인”에게 “암표 파는 도시들”은 “마천루 자꾸 높”이지만, 그 속에 끼지 못한 “추락한 무리들”은 “프리미엄”을 띄워주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들이 다량의 아파트를 소유하는 독점 시장에 의해 빚어지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이 부당 이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이 부동산에 대해 목말라 하는 것은 인간 주체 본연의 욕망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놓은 환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자(비자아)의 욕망에 좌우되는 현대인의 자아를 강지원 시인은 「떴다방」으로 포착해 낸 것이다.
모든 허물을 다 용서한다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띤 그 여자는 예뻤다 먼 데를 응시하는 눈 그 속에 들고 싶다
보풀이 일고 있는 시간을 유영하며 물방울 톡톡 튕기는 그대 손이 부럽다 자본의 중심에 서 있는 오만한 콧대까지
유리창 안에서 꿈을 꾸는 그대와 날마다 허둥대며 하루를 건너는 나 간격의 그 거리만큼 슬픔이 배어 있다
-서일옥, 「마네킹」 전문, 『좋은 시조』(2016년 봄호)
심리학 용어 중에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것이 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을 사랑함으로써 여인상이 생명을 얻게 된 것처럼,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해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서일옥 시인은 ‘유리창 안’의 ‘마네킹’을 통해 피그말리온의 여인상을 떠올린다. 한데 시인은 마네킹이 자신처럼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마네킹처럼 되고 싶어 한다.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먼 데를 응시하”며 “자본의 중심에 서 있는 오만한 콧대”를 가진 그 마네킹과의 동일시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리창 안에서 꿈을 꾸는” 마네킹과 “날마다 허둥대며 하루를 건너는” ‘나’ 사이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간격만큼의 “슬픔이 배어 있”을 뿐이다. 예쁘지만 생명이 없는 비자아와 하루를 허둥대는 자아 간의 거리는 유리벽으로 막혀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식할 수 있는 거리지만 결코 손을 맞잡을 수는 없는,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다. 1인칭의 자아는 이상세계와 대립하고,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따라서 「마네킹」은 지역과 세대, 계층과 성별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통 부재의 고독한 현실에 대한 은유이자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쓸쓸한 자화상인 셈이다. 결국 비자아가 자아를 호객하는 반전된 피그말리온 효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의 허상, 부조리한 현실에서 피어나는 신기루 같은 몽상에 대한 에피그램이라 할 수 있다.
바구니에 쩔겅, 비늘색 은전 몇 닢…
꺼멓게 이겨진 꼬리로 회벽(灰壁) 물풀을 가르며
사내는 오늘 하루도
잘, 살아 남았다
-류미야, 「도시의 인어(人魚)」 전문, 『문학청춘』(2016년 봄호)
류미야 시인은 도시의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사내를 따라간다. 그 사내는 자신의 물에서 추방당해-어쩌면 섞이지 못해 스스로 그 물을 나왔을 수도 있는-도시의 화려한 불빛과는 상관없는 철저하게 소외된 타자로서의 존재다. 잘 다려진 모직 바지나 발랄한 청바지보다 제 기능을 못하는 아랫도리에는 검은 고무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사람의 형상을 하였지만 온전한 사람도 아니고, 물고기와 같은 꼬리지느러미를 가졌지만 물고기도 아닌 존재가 생존을 위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는 “꺼멓게 이겨진 꼬리”로 도시의 길바닥을 쓸며 지나간다. 반짝이는 비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비늘색 은전 몇 닢”을 위해 힘겨운 하루를 유영할 뿐이다. 그런 존재의 하루치 감상은 “잘, 살아 남았다”는 안도감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하루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힘겹게 건너야 하는 태평양 같은 느낌이리라. 3인칭의 시점으로 걸을 수 없는 한 사내의 힘겨운 하루를 조명하지만, 그 3인칭의 시점은 사내의 자아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남의 눈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작중 화자의 시선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되 종국에는 그 내면으로 줌인(Zoom-in)해 들어감으로써 공감의 진폭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잘, 살아 남았다”는 독백체의 결구는 작중 화자의 격려이기도 하고, 타자로서의 존재가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이기도 하다. 시인은 한 편의 짧은 시조 안에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자아를 병립시켜 장과 장 사이의 거리를 극대화해 행과 행 사이의 의미망을 활짝 펼치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차려놓은 노을빛 그 밥상머리 창 할퀸 칼바람에 고개 숙인 한 사내가 굴곡진 시간의 잔금 수저 위에 펼친다
그럴 쯤 반려견이 식탁 위로 뛰어올라 주인도 뜨기 전에 국사발에 혀를 댄다 하늘 땅 출렁거릴 때 처방전을 구한다
저마다 가슴속에 멍울 짓는 도시에서 TV 앞에 무릎 꿇고 멍멍 경전 듣는 저녁 4월의 개 짖는 소리 여의도 벚꽃이 진다
-장은수, 「윤중로 경전」 전문, 『정형시학』(2016년 봄호)
현대는 수많은 가치들이 공존하면서 사회를 보다 역동적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만끽하며 자신의 개성을 즐기는 다양성의 시대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의 다양화는 개인의 정신 구조마저도 다양하게 유도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정신분석 정치이론가인 프레드 알포드(Fred Alford)는 이를 가리켜 '동시성적 자아(Synchronic self)'라고 불렀다. '동시 다중적 자아'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동시성적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서는 일정한 논리를 찾기가 어렵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양한 논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직 자기 입장의 변호나 변명의 말만 늘어놓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자기주장만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동시성적 자아의 무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당과 야당, 계파와 계파 간의 정치적 논쟁이나 갈등에 있어서 논리적 일관성을 깨뜨리며 말을 자주 바꾸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장은수 시인은 이러한 동시성적 자아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1번지로 통하는 여의도 국회의 모습을 저녁밥상에 뛰어오르는 애완견과 오버랩 시켜 보여준다. “아내가 차려놓은” 밥상머리에 “칼바람에 고개 숙인 한 사내”가 있다. “굴곡진 시간의 잔금”을 “수저 위에 펼치”는 그 시간은 신산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주인도 뜨기 전에” “반려견이 식탁 위로 뛰어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럴 즈음 TV에서 정치뉴스가 들리고, “4월의 개 짖는 소리”에 “여의도 벚꽃”이 지고 만다. 이 시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은유와 상징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팍팍해진 삶을 안은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과 그런 보통의 서민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놓은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주인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잇속만 먼저 차리려는 개의 모습은 일견 파렴치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의 심부름꾼을 자처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의식은 전형적인 동시성적 자아의 표본이다. 이리저리 말 바꾸기를 일삼는 정치인들의 언사를 시인은 그래서 ‘멍멍 경전’이라 칭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소리’라는 의미다. 그 ‘개소리’는 꽃을 피우기는커녕 꽃을 지게 만드는 원흉으로 작용한다. 금배지의 화려한 말잔치 뒤에 감추어진 위선의 실체를 반어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평론가의 평론을 시인이 띄워주고 시인의 시를 평론가가 띄워주다 어느새 한통속이 된 단란한 사이
뼛속까지 쓰겠다던 그 뼈가 무너지고 칼끝 같던 예리함도 무뎌지기 시작한 건
둘이서 술 한 잔을 기울인 다음 날부터였다
-이태정, 「전략적 동행」 전문, 『서정과 현실』(2016년 상반기호)
마지막으로 이태정 시인의 「전략적 동행」을 골랐다. 직설적 어법으로 창작과 평론의 ‘전략적’ 관계를 예리하게 찌르고 있어 긴 말이 필요치 않은 시편이다. 운문과 산문 등 문단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 퍼져 있는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시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나의 이 글 또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판단은 독자 제위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