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의 역사이해"
크리스챤 청년은 어떤 역사관을 가져야 하는가?(행13:13-23)
2002.6.23(서울제일교회 4부예배)
1. 역사관의 정의와 종류
역사관(歷史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다. E. H.Carr에 의하면, 역사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것을 기록하는 역사가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고, 기술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했다. 즉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하나의 사실(facts)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역사로서 남는 것은, 역사가의 해석에 의해서 기술되어질 때라는 것이다.
붉은색 안경을 끼고 역사를 보면, 온통 붉게 보인다. 파란색 안경을 쓰고 역사를 보면, 파랗게 보인다. 당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자리를 보아도, 당구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이 시대와 사건들을 볼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은 달라진다. 우리들이 기독교적인 역사관을 갖는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적인 역사관의 근간은 무엇인가? 이 점을 함께 나누기 원한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 즉 역사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인간중심의 역사관이다. 이것을 흔히 인본주의적 역사관이라고도 한다. 예컨데 민중사관, 왕족사관, 황국사관, 식민사관, 민족주의(Nationalism) 사관 등 인간이 주체가 된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수 많은 관점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인간중심(인간이 주체)의 역사관은 상황과 집단,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컨데 왕족들은 왕족의 사관을 가지고, 천황을 섬기는 일본사람들은 황국사관을 갖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유물론적인 역사관을 갖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역사관을 갖지는 않는다.
둘째로 신본적인 역사관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역사와 시간을 이끌어가는 주체라는 역사관이다. 다른 표현으로 신본주의적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유대교나 기독교의 역사관은 여기에 속한다.
2. 크리스챤 청년이 가져야 할 역사관
그렇다면 크리스챤 청년들은 어떤 역사관을 가져야 하는가? 두말 할 것없이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 중심(주체)의 역사관이다. 그러나 여기서 혼돈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이라고 해서, 무조건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중심의 역사관에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는 구심적(求心的)인 신본주의 역사관이며, 둘째는 원심적(遠心的)인 신본주의 역사관이다.
구심적 신본주의 원심적 신본주의
(유대인들) (사49:6, 신약적, 행1:8)
구심적 신본주의 역사관이란 하나님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의 역사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나와 우리 민족만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나와 우리'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애국심은 자기민족만을 생각하는 최종 종착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신앙생활은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삶과 관심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구심적인 신본주의 형태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역사과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인이라는 것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뱡향은 자신의 만족에 있다. 그래서 흔히 기복적인 신앙으로 오해될 여지가 많다.
반면에 원심적 신본주의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나와 우리 민족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다른 사람과 세상의 영혼'이다. 예컨데 사도 바울의 역사관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 청년들에게 원하시는 역사관이다. 우리들이 취해야할 것은 원심적인 신본주의 역사관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구속사적인 역사관'이라고 한다. 즉 인류의 역사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역사이며, 그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역사관이다.
예컨데 90년대 초에 공산권이 무너질 때, 세상 사람들은 민족주의와 경제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하고, 대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서 이해하고,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선교의 시각에서 해석하였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적인 역사관이다. 이처럼 원심적인 구속사적인 역사관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직업과 재능, 인생을 통로 삼아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룰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한다.
3. 바울의 하나님의 중심의 역사관
본문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자. 본문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은 다음에, 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하는 장면이다(행 13:13-23).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약 사백오십 년간)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 13:13-23)
여기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왕조를 세우시고, 다윗의 씨앗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을 증거한다. 여기에 보면 바울의 역사관이 분명히 드러나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해 가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역사관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의 주체이며, 본질이며, 주연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 끼어들 구멍은 없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다.
역사의 양태와 환경은 바뀌어도, 하나님이 친히 이끌어 가신 구원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예컨데 17절 이후에 보면,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나그네가 되게 만들기도 하시고, 또 출애굽을 시키시고, 때로 그 악한 소행을 참으시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이어서 그들에게 사사를 주시기도 하더니, 왕을 세우시기도 하신다. 이처럼 외형적인 형태가 변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친히 이끌어가 가시는 구원의 주체와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속의 역사 흐름에 인간들이 역행한다면, 하나님은 그 역행하는 행동과 환경까지도 변화시켜서,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4. 세계를 품은 사역자로 쓰임받으려면...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의 주체자로서 죄인들을 친히 구원해 가신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구와 통로로 삼아서 말이다. 지금도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전세계 곳곳에 수 많은 불신의 영혼들이 산재해 있다. 크리스챤 청년들이 이런 것들을 그냥 무심하게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러한 관점과 역사관을 갖고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더구나 우리 크리스챤 청년들이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이용할까'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은 인간적인 사업가는 되어도, 세계 영혼을 변화시키는 사역자는 될 수 없다.
우리들은 이 사건들과 사람들을 볼 때 인간중심의 관점에서 해석과 평가하기 이전에, 그 사건과 사람들의 배후에서 영혼구원을 친히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세계의 축구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만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영혼구원의 선교도구로 이용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기 원하시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원심적인 신본주의 역사관(하나님 중심의 구속사적인 역사관)이다. 이러한 사고와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세계적인 일군으로 쓰임받을 수 있다. 세계를 품는 월드(World)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