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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21
11월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3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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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된 의미의 성전이란? 예수님 발치 아래 앉아,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충실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지속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는 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행동은, 가난하지만 착한 백성들에게는 꿀보다 더 단 말씀, 십년 묵은 체증이 순식간에 싹 내려가는 유쾌·통쾌·상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릴대로 구려터진 노회한 율법학자들과 이미 삯꾼으로 전락한 사제들과 지도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그야말로 쌍날칼이요 맵디매운 고추가루였습니다.
그들은 의기투합해서 조용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퍼져야 할 성전을, 장사꾼들과 사기꾼들, 야바위꾼들의 호객소리가 넘쳐나는 장터로 훼손시켜놓았습니다.
대사제들과 사제 가문의 귀족들은 성전 경내에서 이루어지던 매매에서 큰 수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사제는 당시 유다 최고의회인 산헤린의 의장이었으니, 그 권한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검은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있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발을 빼려고 해도 늦었습니다. 속화될 대로 속화된 성전 주변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모든 안타까운 현실을 당신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발견할수 없는 과격함과 뜨거움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시키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루카 복음 19장 46절)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초강력 펀치 앞에 백성들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반면에 구린 속을 들켜버린 적대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확한 지적이었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다만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없애 버릴까, 고민하기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는 그들의 사악한 계략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자리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백성들이 그분 주위에 뺑 둘러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정한 성전의 개념을 파악할수가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있는 말씀에 충실한 백성들! 그것이 바로 참된 의미의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 할지라도, 그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 받을 아름다운 성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도를 넘어서는 지나친 상거래는 하느님 집에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 하느님의 크신 업적을 찬미하는 집, 무한하신 그분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집, 형제적 친교를 나누는 집이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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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효도하는 자녀가 행복하다>
영화 ‘똥파리’(2008)의 주인공은 용역소에서 일하는 깡패입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가슴 한편엔 온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픔이 시리도록 서려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무한한 증오심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칼에 찔린 여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볼 때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의 가족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과 함께 그의 인간성도 거기서 끝나고 맙니다. 아버지만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14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한없이 두들겨 팹니다. 그렇다고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 아버지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마음 안에서 그런 아버지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미워할 수 있는 가족이라도 있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김희아씨는 얼굴에 큰 모반이 있다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고 다른 쪽 얼굴엔 암이 들어 뼈까지 다 깎아내어 얼굴 모양까지 변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녀를 보면 사랑은 노력하면 발견해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래도 자신을 뱃속에서 키워주시고 아픔을 감수하며 낳아주시고 다른 곳이 아닌 고아원에 버려주신 것을 감사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감사하려고 해도 그런 감사할 거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면 그녀는 똥파리의 주인공처럼 영혼 없는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내가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면 부모님은 나의 생명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 피 흘림을 묵상하면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도 감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모에게서 감사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증오하여 자신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행복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 감사를 찾아내고 못 찾아내고는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묵상하거나 그러기를 원치 않는 두 부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 지상의 부모가 자녀에게 생명을 준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상의 부모는 그 생명을 전해주어 창조에 협조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어떠한 감정을 회복해야 할까요? ‘감사’입니다. 감사는 김희아씨처럼 노력해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감사 없이 불평만 하며 영혼 없이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당신에게 감사할 위대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 흘림을 묵상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내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당신을 묵상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감사가 솟지 않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서 그 감사를 이끌어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이들이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마음에 감사가 솟아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감사가 솟아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면 자녀는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치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자신들을 꾸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느님 사랑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려 하지 않는 강도들의 소굴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 사랑이 기도하는 집인 사람들에게 감사가 솟구치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예수님의 희생을 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감사하여 그분 뜻대로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는 기도하는 집이 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닌 기도하는 집이 된 이들만을 당신 가족으로 여겨주십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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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의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미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갈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궁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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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마카베오와 형제들이 독립 전쟁을 치른 뒤 이민족들에게 더렵혀진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사건을 기념하여 여드레 동안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 축제’)를 지내는데,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며 빛을 밝히는 성전 봉헌 축제는 신약 성경, 특히 요한 복음에서도 이따금 언급되는 축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가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으로(마르 11,15-19; 마태 21,12-13; 요한 2,14-16 참조), 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성전 자체를 정화하시거나 부수어 없애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고치고자 하신 것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하느님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예배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보여 주던 행동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예배 행태를 비판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두 구절, 곧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7 참조)와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 참조)는 말씀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예언자적 비판은 그분을 죽음으로 내모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제물 판매로 많은 수입을 얻고 있던 당시 대사제들과 사제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합니다. 온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참된 성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성전에서 환전하고 물건을 사서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의 집인 성전, 곧 예수님이라는 성전 안에서 예수님을 제물로 봉헌하는 참된 제사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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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쫓겨난 장사꾼들이 아니라,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입니다. 이것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장사꾼들은 그 강도들의 하수인들이었을 뿐입니다.)
뒤의 20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일’, 그것이 곧 강도짓입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법률 상담 등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그것은 서민들을 착취하는 일이었고, 사실상 강도짓이었습니다. 사제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할 제물용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팔았고, 그 수익금을 자기들이 차지했습니다. 하느님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운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 라는 자들도 사제들, 율법학자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 때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일 수가 없으니 허물어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전 건물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인들의 죄가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종교를 개혁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돈을 섬기는 타락한 종교는 허물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참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하는 일의 일차 책임은 사제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구약성경 미카서에 나오는 다음 예언에 연결됩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돈에 팔려 재판을 하고, 사제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시온이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미카 3,9-12.공동번역)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성전이라고 해도, 그것이 종교라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옛날 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미카서의 예언을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언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중세 때에 심각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모든 악의 뿌리인 돈을 밝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죄를 짓는 일이 되지만, 더 큰 죄의 원인이 됩니다. 만일에 교회가, 또는 사제가 돈을 밝히고, 돈에 매이면 큰 불행이 시작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 구원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림돌로 추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3)라고 지시하신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열두 사도만 실천하면 되는 지시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하는 지시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일은 ‘돈의 힘’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돈이 없을 때에는 조금 불편하고 힘든 생활을 했어도 위기 상황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은 항상 돈이 많았을 때에 겪었습니다.
<돈과 재물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할 때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라고 말하면서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도 아니고, 뜬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말씀들도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생명의 말씀’입니다.(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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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이탈리아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서울교구의 사제들은 한인 신학원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한인 신학원이란 한국의 모든 교구의 사제들을 위해 설립된 곳으로 그들의 공부와 복지를 위해 애쓰는 교황청립 기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주어집니다. 한인 본당 신자들의 교리를 가르친다거나, 추기경님 혹은 주교님들을 수행한다거나, 그 밖의 행정 업무를 위해 운전을 해야 한다거나 등등 여러가지 일들을 돕게 됩니다. 물론 한국 교회를 위한 일이기에 이러한 일들을 맡게 되면 기꺼이 시작 하지만, 나에게 일이 몰리게 되면 아무래도 본전 생각이 나게 됩니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왜 항상 내가 많은 일을 도맡아야 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는지 화가 나기도 합니다. 다시 말 해, 나도 좀 편하고 싶다는 본전 생각이 나는 셈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사제직을 선택한 제 자신이 일거리 몇 개로 본전을 생각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미성숙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일보다는 내 일을 고집하는 자세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질 되었다고 심하게 질책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축제였던 무교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뤄진 그릇된 상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돈을 환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누구나 성전세를 지불해야 했는데,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돈이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성전세를 낼 때 부정한 돈을 내서는 안 된다는 규정으로 인하여 순도가 놓은 은화만 봉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순례객들은 성전세를 위해 다른 종류의 돈을 은화로 환전해야 했는데, 노동자의 하루 임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높은 수수료를 그 대가로 부담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번제물을 파는 행위였습니다. 순례객들은 성전에 들어가 살아있는 동물을 제물로 바쳐야 했는데, 밖에서 제물로 바칠 동물을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사관들에게 보여주고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성전세와 마찬가지로 제물 역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검사관들은 이런저런 트집으로 외부에서 가져온 동물은 불합격 판정을 내렸으며 이에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밖에서 구입하는 것 보다 열배 이상 비싼 비둘기를 성전에서 구입해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순례객들은 착취의 대상이었고 대사제들은 마음껏 이들을 착복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드실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는 물건을 파는 이들을 꾸짖고 쫒아 내십니다.
이에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21장 12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한 질책이 아닌, “목숨을 바친”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이로 인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강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커다란 수입원이 타격을 받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악이 자리잡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몰아내야 한다는 미움이 생겨납니다. 오늘의 이 복음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적인 마음,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본전 생각’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물질적인 욕심, 육체적인 편안함, 부담이 없는 일을 찾아 나서곤 합니다. 나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보이지 않으면 회피하고 싶고 타인을 위한 봉사는 사치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선한 일에 동참하고자 남을 돕기도 하지만,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심 앞에서, 우리들은 무엇보다 주님의 일을 앞서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마치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과 같이, 겸손한 자세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 즉 양심의 소리를 나도 모르게 없앨 방도를 찾고 있지는 않은지,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주인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끄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자녀를 포기할 수 없듯, 우리의 어버이이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목소리로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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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정애경 마리비안네 수녀님]
<나의 집>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호통 치시는 모습을 전해 준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는 동안 제물로 바칠 짐승한테 상처가 생기면 상처 나지 않은 짐승과 교환하기 위해, 또는 미처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로마 돈을 성전화폐로 바꾸어야 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환전을 시작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이익 때문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성소를 지배하게 되었고 성전에서 물건을 바꿔주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제사장과 짜고 물건을 파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제사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장사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좋은 마음과 선한 동기로 시작한 일을 이해관계로 그르친 적은 없는지, 탐욕에 눈이 멀어 더 큰 욕심을 부린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내 마음의 성전은 어떠한가? 나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사는가? 혹시 내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이기심, 명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이제는 주님께서 내 삶의 중심이 되도록 자리바꿈해야겠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신 후 백성들을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도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며, 악이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ㄴ)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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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의 고난 수도회 서현승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과의 소통>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할 때, 그 소통 안에는 입으로 하는 말뿐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몸짓, 분위기 등이 포함되곤 합니다.
실상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상대는 말 없는 것 자체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대화를 하지만 서로 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머무는 경우도 있을 테고, 혹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상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심전심의 소통 또한 있을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모든 소통의 관계 안에는 서로간의 마음이 열려 있느냐 없느냐에 있겠죠.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를 향해 열려 계신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고 그분의 사랑을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기도이겠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기도하는 집’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십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온갖 거래와 모략들을 일거에 제거하시는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얼마나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기도할 때는 사실 내 청을 아뢰는 것 못지 않게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성전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음을 열고 내 삶을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럼으로써 알아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그분의 ‘표현’들을 하나씩 내 삶 안에서 깨우쳐가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는 삶의 성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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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마르첼로 신부님]
<교회의 희망>
1998년 여름 파리 세계 청소년 대회 때 어떤 신문 기자가 한 젊은이에게 “당신은 왜 파리에 갑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젊은이는 “교황님을 만나러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는 “당신의 교황은 저렇게 늙고 지치고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매력 없는 사람인데 무엇 때문에 그를 만나러 갑니까?” 하고 묻자, 젊은이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갑니다. 교회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를 만나기 위해서 파리에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속화된 세상은 교회를 없애 버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교회는 생명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자신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내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교회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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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전에서>
루카 19,45-48 (성전을 정화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을 만나고
누구는 우상을 만난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을 드러내고
누구는 하느님을 밀쳐낸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께 무릎 꿇고
누구는 하느님을 무릎 꿇린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누구는 자신을 떠벌린다
성전에서
누구는 기도를 하고
누구는 혼잣말을 한다
성전에서
누구는 말없이 낮추고
누구는 요란하게 높인다
성전에서
누구는 한없이 비우고
누구는 한껏 채운다
성전에서
누구는 기꺼이 섬기고
누구는 섬김 받으려 한다
성전에서
누구는 모두를 살리고
누구는 자신만 살린다
성전에서
누구는 하느님이 되고
누구는 우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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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다독다독….>
제가 2002년도에 나주 노안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을 때, 한센인(나 환우)들이 모여 사는 현애원이라는 공소가 있었습니다. 1주일에 평일 미사 1번, 주일 미사 1번,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거동을 못 하시는 환우분들에게 봉성체를 갑니다. 두려웠지요. 한 할아버지는 입이 비뚤어지셔서 성체를 넣어드리면 흘러나와서 몇 번이곤 침이 묻은 성체를 영해 드려야 합니다. 또한, 다른 환우분들은 방에 각질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 갔다 오면 양말에 하얀 각질들이 묻습니다. 처음에 갈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봉성체를 갈 때는 양말을 10개씩 가져갑니다. 나중에는 안 가져갔지만요…. 그리고 정말 힘들었던 것은 환우분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입니다. 처음엔 상에 찌개가 하나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께 떠먹는 것입니다. 왠지 환우분들이 저를 시험해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찌개를 한 숟가락을 떠서 먹고 나니까 찌개와 반찬을 따로 갔다가 주셨습니다. 그런데 공소 어르신들의 말씀을 듣고 이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내가 내 손으로 묵주를 굴릴 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이요. 내가 내 두 다리로 성당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이 몸뚱이로 성체 앞에서 앉아 있으면 너무 좋아요!”
그 노안 본당을 떠나고 언젠가 오후 3시 좀 넘어 현애 공소를 지나갈 일이 있어서 빵과 우유를 사서 성당으로 가는데 환우 어르신들이 함께 모여 성체 앞에서 묵주 신공을 바치고 계셨습니다. 정말 천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상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사제로 살맛 나게 해주셨습니다. 나 환우 분들처럼 그 엉망진창의 몸뚱이를 가지고도 “주님 만나러 가야 한다.”라는 마음을 품고 기도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주님을 만나는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기도의 끈을 통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음을 믿고 기도하면서 영적일기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강도의 소굴이란? 항상 ‘부정적’이고, ‘할 수 없다.’ ‘네 탓이야!’라고 외치는 마음입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 상권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골리앗의 도전을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필리스티아 사람인 골리앗의 말을 듣고, 너무나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을 보자 너무나 무서워 도망쳤습니다. 다윗은 담담하게 사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도 저자 때문에 상심해서는 안 됩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인 골리앗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막대기를 손에 들고, 돌멩이 다섯 개를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손에 무릿매 끈을 들고 골리앗에게 다가가면서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음, 저렇게 크니 절대 빗맞을 일은 없겠다.” “주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십시오.” 즉,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에 할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제는 고운님들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 즉 주님을 소중히 모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마음을 청소하는 과정입니다. 기도 중의 분한 마음과 싸움은 내가 맑아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나의 힘, 나의 굳셈입니다. 기도는 무엇을 바라고 얻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피는 것이고, “괜찮아.” “할 수 있다.”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어떤 일을 이루는 복된 은총의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운님들에게 다윗의 돌팔매가 필요합니다. 주님만을 소중히 모시고, 주님만 그리워하며 살다가 주님께 가기를 희망하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도 굳세게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라는 기도로 다독다독 해 드립니다. 이제 고운님들은 할 수 있습니다. 고운님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만나러 갈 수 있는 큰 축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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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23)
♧♧ 시편 62편 9절….
"백성아, 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 쏟아 놓아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셀라."
* 백성아...
다윗이 하느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시편 62편에서 이처럼 백성들이 주의를 촉구하는 가운데 교훈을 베풀고 있음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희망하는 다윗 자신의 개인적인 일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모두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시편 130편 7절, 131편 3절. 참조)
* 늘 그분을 신뢰하여라...
여기서 ‘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콜에트’란 말은 ‘종종’ ‘자주’의 뜻이 아니라 ‘항상’ ‘시시로’ ‘때때로’란 의미입니다. 사실 어려울 때 또는 도움이 필요할 때만 일시적으로 하느님을 의지하는 신앙은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며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항상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며(시편 17편8절. 참조), 지키시기에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십니다.(시편 121편 4절. 참조) 따라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들인 우리 역시 우리의 삶 자체가 늘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 그분 앞에 너희 마음 쏟아 놓아라.
‘쏟아 놓아라...’라는 말은 ‘물을 쏟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물그릇의 물을 쏟아 그 그릇을 깨끗이 비워 버리듯이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선한 것들, 자랑스러운 것 들이나 부끄러운 것들 할 것 없이 하느님 앞에 모두 내어 놓으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처럼 ‘마음을 쏟는다(토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진실한 심정을 하느님께 말하고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며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온전히 의지하는 결단이 있을 때에 하느님은 마침내 저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저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 시편 62편 10절….
"진정 사람이란 숨결일 따름 그들을 모두 저울판 위에 올려놓아도 숨결보다 가볍다."
* 진정 사람이란 숨결일 따름...
‘사람’중에 ‘천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 아담’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사람의 아들’ 이란 의미로 인간의 나약성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민수기 19장 11절. 참조) ‘사람’ 중에 ‘높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 이쉬’란 말은 문자적으로 ‘남자의 아들’이란 의미로 여기서 여자에 대비되는 남자는 강건한 자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제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가운데 일반적인 측면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절대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는 부도덕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저울판 위에 올려놓아도 숨결보다 가볍다...
‘가볍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알로트’ 라는 말은 ‘들리우다.’ ‘너무 가벼워서 위로 올라가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인간이 공허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한 것이 못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느님의 이시지(9절)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님을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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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책을 애지중지 여기면서 보는 스타일입니다. 보는 책에 북 커버를 씌우고, 책에 밑줄은 물론이고 어떤 낙서도 하지 않습니다. 책을 접어서 표시한다는 것도 제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부분에는 북 클립으로 표시를 하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책에 직접 하지 않고 독서 노트를 책 옆에 두고서 메모합니다.
그래서인지 다 읽은 책이지만 완전히 새 책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은 책이 너무 새 책 같다면서 “신부님, 정말로 읽은 것 맞아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사실 책에 자기 생각을 남겨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어느 한 부분에 밑줄이 그어 있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밑줄에 눈이 가게 되었고 그 내용을 천천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왜 밑줄을 그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별 내용 아닌 것에 그어 있는 밑줄 때문에 괜히 시간 낭비만 했습니다. 책에 밑줄이나 메모를 할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 역시 그 밑줄이나 메모를 보게 되면 그냥 넘어갈 부분도 다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밑줄이나 메모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의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남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때가 참으로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소리를 키워서 힘차게 주장하는 것뿐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행동을 하는 것 역시 은연중에 남들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말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남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입니다. 성전이란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행동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더 소외되고 하느님의 돈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습니다. 문제는 당시의 사람들이 이렇게 장사하고 또 비리를 저지르는 행위를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도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쳤던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하는 곳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과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범이 아니라, 세속적인 욕심을 내세우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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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예민한 사람(소심하거나 내성적인)을 위한 Tip}
일자 샌드의 ‘샌서티브’라는 책을 보면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위한 팁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눈감기: 사람이 받는 자극의 80%는 시각을 통한 자극입니다. 그래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에서 자극을 받습니다. 따라서 감각이 예민해질 때 눈을 감아야 합니다.
2. 헤드폰: 청각 자극도 예민하므로 헤드폰으로 소리를 제한하면 좋습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5분 정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소리를 제한해 보십시오.
3. 설거지: 자신을 재정비하는 무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주 일상적인 활동, 예컨대 설거지하며 머리를 비우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닙니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다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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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이 오시면 찾아가는 곳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습니다. 문화와 도시를 좋아하면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 구경을 하러 갑니다. 새로이 명소로 등장한 허드슨 야드의 ‘베셀(Vessel)’을 봅니다. 기하학적으로 참 아름다운 구조물입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도시의 전망도 봅니다. 성 패트릭 성당에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배를 타고 강에서 시내를 봅니다. 저녁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봅니다. 뉴욕 시민들이 마음의 고향처럼 여기는 ‘센트럴파크’에서 도심 속의 숲을 걷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는데 손님이 오시니 길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산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면 차를 타고 근처의 ‘베어마운틴’을 갑니다. 아름다운 호수가 반겨줍니다.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등산하고 내려올 수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갑니다. 가는 길이 참 좋아서 조용히 묵상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돌아올 때는 7개의 호수가 있는 길로 방향을 잡습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못내 아쉬워 가지에 붙어있는 늦은 단풍을 봅니다. 물가에 비추는 여울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엄두를 못 내는데 손님이 오시니 때아닌 호사를 누리게 됩니다. 사과 몇 쪽과 커피는 산행의 즐거움을 더하는 덤입니다.
예전에 부르던 성가가 생각났습니다.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주님이 지었네. 온 세상 만민이여 주님을 찬양하라. 그분의 위대하심을 높이 받들어라. 해와 달과 별들이여 주를 찬양하라. 그분이 영원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눈과 비와 우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엄위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바닷속의 고기들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전능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높은 산과 언덕들도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오묘하심을 높이 찬양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넘치시고, 자비하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중요한 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뉴욕의 문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면 아름다운 자연의 속삭임도 듣지 못합니다. 2019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곧 대림 시기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셨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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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성전聖殿>
-끊임없는 정화淨化와 성화聖化-
말씀 묵상 중 문득 떠오른 아름다운 시편 135장이었습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에 성서의 시편들보다 더 좋은 시들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로 바치는 생명과 빛, 희망이 생동하는 시편들이 우리 모두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로 살게 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들하라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아, 우리 주님 궁 뜰에 시립한 자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 찬미 찬양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찬양이 울려 퍼지는 주님의 성전, 기도의 집입니다. 우리 삶의 가시적 중심인 주님의 집, 성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에서 오늘 우리는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3세기 중엽 로마 제국시대, 정말 꽃다운 나이에 하느님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으로 순교한 동정 성녀 체칠리아입니다. 체칠리아는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칠리아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참행복을 누리는 성인성녀들입니다. 천사들은 물론 성인성녀들과 함께 이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에서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순교자 감사송 내용 그대로입니다.
“복된 순교자 체칠리아는 주님을 현양하려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를 흘려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나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고해인생을 찬미와 감사의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는, 이 거룩한 주님의 집, 성전에서 거행되는 아름다운 미사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집 성전이 성전일 수 있음은 매일 거룩한 미사가 봉헌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성전 사랑으로, 미사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도대체 미사를 통한 하느님 맛이 없다면 이 삭막한 광야인생 무슨 맛으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오늘 마카오베오기 상권에서 유다와 그 형제들이 적을 무찌른후 우선 착수한 것도 이민족들에게 더럽혀진 가시적 삶의 중심인 성전의 정화와 봉헌이었습니다. 온 백성은 자기들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 친교제물, 감사제물을 드렸다 합니다. 바로 오늘날까지 유다인들이 지내는 하누카 축제의 기원입니다.
이런 거룩한 성전이,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와 같은 주님의 성전이 속화俗化되는 것보다 결정적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영혼의 고향, 영혼의 쉼터 같은 주님의 성전입니다. 하여 주님을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여기 주님의 집 수도원 성전을 찾는 무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성전정화는 너무나 자연스런 사건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성전을 정화하신후 주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온 백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매일 미사를 통해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공부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은총이, 생명과 빛의 말씀 은총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전은 물론 우리 각자의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이래야 우리 모두,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주님의 집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자작 좌우명 시 넷째 연이 이런 진리를 잘 표현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바로 끊임없이 거행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은총이, 기도와 말씀의 은총이 주님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하여 우리 모두 앞문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뒷문은 사막의 하느님께 활짝 열려 있는 성전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성전인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여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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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강도의 소굴>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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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 독서의 내용들은 성전 정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루카 19,45)
성전 정화 대목은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루카 19,28-40),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신 내용(루카 19,41-44) 뒤에 이어집니다. 우리는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그분이 이 성전의 주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하셨음을 감지합니다. "쫓아내는" 행위는 그저 잠시 들른 객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건 주인으로서의 권한 행사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성전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만큼 성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분 자신이 곧 성전이시니까요.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 머무르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는 장소입니다.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모든 존재도 성전임을 우리는 예수님의 계시(요한 2,19-21 참조)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1코린 3,16 참조)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루카 19,46)
예수님께서 율법과 거룩함을 빙자하여 기득권층의 이익과 영리를 창출하는 통로로 전락해버린 성전의 모습을 이 한마디로 표현하십니다. 안타깝지만 정곡을 꿰찌르고 계시지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기도의 집"과 "강도들의 소굴"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섬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예식과 제물과 직위와 계급이 발생하고, 인간들이 너무 똑똑한 탓에 남용과 오용이 교묘히 횡행하다가 또 다른 제도로 고착되면서 이익집단의 사유화를 낳지요. 그러니 결국 "강도들의 소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정면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시커먼 속마음을 들켜버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몹시 분노합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니 약점이 제대로 건드려진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꿋꿋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뇌관을 건드린 탓에 당신께 위험한 곳이 되어버린 성전에서 날마다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하느님 말씀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십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루카 19,48)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가난하고 배운 것 없고 권력에서도 소외된 소박한 민중이 예수님 곁을 지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흡수하는 스폰지처럼 온 존재로 경청하고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음식을 먹는 듯, 그들은 귀로 말씀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혼이 배부르고 피어나고 생기를 되찾는 흡족한 시간입니다.
제1독서는 유다 마카베오를 선두로 한 마타티아스의 아들들이 군대를 이끌고 이교도들에게 더럽혀진 성전을 탈환한 뒤, 정화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성전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긍심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이를 잘 아는 이교도들은 이스라엘이 혐오하는 방식으로 부정하게 성전을 능멸해 그들의 기를 꺾는 동시에 힘의 구심점을 파괴했지요. 그러니 적은 수의 군대로 온전히 하느님 힘에만 의지해 되찾은 성소는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보람을 안깁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1마카 4,55)
하느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거기에 머무르시다가, 모욕당하고 쫓겨나셨던 치욕이 말끔히 씻겨집니다. 백성은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며 새 희망으로 가득찹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단 봉헌 축일을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1마카 4,59)고 합니다.
하느님과 예배자의 관계성이 예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형식과 의미가 적절히 잘 조화된 예식은 그래서 더 아름답고 진실한 감동을 남기지요. 주님과의 관계가 뜨겁고 친밀하고 열렬할수록 "주님" 하고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 하나에도 둘 사이에서 오가는 온갖 사랑의 자취가 담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요한 4,23 참조)하는 이는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의무란 사랑밖에 없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하느님과 나누는 내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의무와 규정에 꽂혀 그분과 건조하고 미지근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 주머니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은 형식과 제도, 예식을 치장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자기와 더 깊이 만나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갈증과 허기를 물질과 예식으로 보상하려 들지요. 그러다 보니 성전과 예식이 화려하고 장황해져도 진정한 울림이 없습니다. 관계성 안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이 결여된 탓일 겁니다.
오늘 이 말씀에 머무르는 중에 마음과 영혼에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오갔습니다. 그래서 문득 멀리 갔다 싶으면 다시 되들아오길 반복하며 말씀하시는 주님 마음을 들으려 애써야 했지요. 이 기도의 과정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완벽히 깨끗하게 되면 그제야 사랑해 주시겠다는 결벽증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된 본연의 목적성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디 하느님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모습을 받은 존재니까요.
이 정화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일으키시는 은총입니다. 성전이 이미 일부분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면 내쫓고 뒤엎는 이 거룩한 손길이 더 불편하고 고통스럽겠지요. 완벽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기도의 집으로 가꾸며 지켜나가는 중이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나를 들쑤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께서 그것을 어떻게 쓸어내시는지 유심히 바라봅시다. 거기에 우리 각자에게 요구되는 정화의 포인트가 숨겨 있을 테니까요. 내적 외적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공동체와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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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누구인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란 자신을 내세워 두드러지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섞여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살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위대하다.”
예수님은 왜 위대하실까요? 하느님이 육화하여 사람이 되셨을까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필리 2, 7 참조) 사람들 속에 편입되고 죄인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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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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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5-46)
<거룩한 집>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 바라십니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루어지기 바라십니다. 주님의 행동에서 그대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본보기를 보십시오 ... 그분은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 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거니와, 돈 비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환전상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주님의 돈은 곧 성경입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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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과 한 집에>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
문을 열면 정돈되고
훈훈한 사랑이 느껴지는 집이 있고
어느 집은 어수선하고 냉기가 흐릅니다.
기도하는 집은 차분하면서도 환합니다.
나의 집은 어떤가요?
나의 맘은 어떤가요?
늘 정돈된 상태로 사는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있을 자리에 놓는 움직임이
기도화 되면 굳이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몸기도가 됩니다.
기도가 몸에 배이면 일상의 순간들이
기도로 가득차고 편안해집니다.
"예수님과 한 집에 사시죠?
당신에게서 그분 향기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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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루카 19, 47)
예수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됩니다.
성전은 매일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맡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들이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에서
우선적으로 우리가
해야할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성전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된 우리의
신앙을 아프게
질책하십니다.
기도는 비겁한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용기있는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전의 고유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우리들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깨어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성전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충만한
사랑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성전의 충만한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성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로 식별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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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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