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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마태복음 1:18~2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설에서 동지로 가는 절기 끝자락입니다. 대림절은 밝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절기는 어둠이 점점 짙어가고 있습니다. 날씨도 부쩍 추워졌고 눈도 제법 내려서 그런지 우리 마음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단계적 일상 회복에 대한 우리 꿈이 잿빛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고,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거라고 합니다. 마치 카프카가 묘사한 부조리한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카프카의 소설 『성』에 나오는 측량 기사 K는 성에 들어가려고 애쓰지만, 번번이 그의 시도는 좌절됩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성은 더 멀어져 있기 일쑤였습니다. 기껏 찾은 길도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곤 합니다. 우리 현실이 꼭 이러합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갇힌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야 할 때입니다.
이 암울한 시기에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말 우리는 기다리는 것일까?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은 어떤 분일까?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활동했던 펄 시스터즈의 노래 ‘커피 한 잔‘은 기다림의 안타까움을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8분이 지나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정말 그대를 사랑해 내 속을 태우는구려“. 1분이 지나면 정말 그는 자리를 떠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10분 더 연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것은 떨쳐버리기 싫은 달콤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약속 장소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곳이라 생각하여 거기서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히려 수화기 저 너머에서 화가 난 목소리로 ‘너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물을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기다리는 이들은 그가 오기로 한 자리에 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오시겠다 말씀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베들레헴 구유는 바로 그분이 오실 장소에 대한 일종의 암시입니다. 주님은 화려한 옷을 입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사람들이 깔아놓은 붉은 카펫을 밟고 우리 가운데 오시지 않습니다. 2,000년 전 그러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 아픔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 설움이 북받쳐 올라 피울음을 삼키고 있는 이들 곁으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주시지는 않지만, 그들 곁에 머물며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주님을 기다려야 할 자리입니다.
기다리는 이들은 만날 사람의 모습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공항의 입국장 게이트에 환영의 인사말과 손님의 이름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표식입니다. 성탄 무렵 우리도 손팻말을 들어 예수님을 영접하면 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최근에 ‘야시피케이션(yassification)’이라는 낯선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게 하려고 원본의 이미지를 많이 가공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모습도 ‘야시피케이션’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가공하여(yassify) 믿고 있습니다. 성화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예수님의 모습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콧날이 우뚝한 백인 남성입니다. 하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사람의 보편적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은 표지에 실제 예수님의 모습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되는 초상화를 게재했습니다. 초상화는 조금 어두운 피부색에 뭉툭한 코 그리고 곱슬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눈빛 맑은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낯선 이미지에 정서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된 예수님의 모습은 백인 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역사가 그분의 이미지만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교리로 박제화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고, 주류 사회가 만들어놓은 차별의 장벽을 철폐하기 위해 온몸을 바치신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건만, 우리는 따를 자신이 없기에 그분을 높은 곳에 올려놓고 경배하기만 하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나는 과연 그분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근본적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을 깨뜨립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마태는 그리스도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의 계보는 이러하다"(마1:1)라는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라는 구절이 지리하게 이어집니다. 족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마1:17). 사실 이 족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8절에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그사이에 아하시아-요아스-아마샤의 3대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류가 아니라 14대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한 의도적 편집으로 보입니다. 14는 완전수인 7의 배수입니다. 마태가 그런 왜곡을 가한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의 여정이 예수님에게서 정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절부터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요셉의 아들이 되어 다윗의 족보에 속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얽힌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소개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요셉'이라는 이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셉은 히브리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 갔고, 우여곡절 끝에 바로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고, 기근을 막아낸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야곱 일가가 애굽으로 이주했던 것도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과 장례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성경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짧은 서론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라고 하는 존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연결고리가 아닙니다. 출애굽이라고 하는 사건은 애굽의 전제정치로부터 새로운 역사를 열어간 위대한 여정, 노예살이에서부터 해방을 향한 위대한 여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 오시기 전과 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데 그 매개고리 역할로 요셉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에서 요셉은 오랫동안 중요 인물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도 그는 늘 나이 많은 노인의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것처럼 그려지는 마리아와는 대조적입니다. 저들을 부부라고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차이 나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림 시기에 요셉을 주목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는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전통에 따르면 약혼을 통해 두 당사자는 법적인 부부가 됩니다. 약혼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19) 이라 칭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혼한 사이라 해도 바로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신부는 일 년 동안 친정에 머물면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익혀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어떤 준비를 했을까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마리아는 성처녀의 모습으로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마리아의 모습이 그랬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마리아의 모습이 그럴 수 없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는 『예수복음』이라는 책에서 당시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을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양털에 빗질을 하고, 실을 잣고, 천을 짜고, 매일 아침 가족이 먹을 빵을 굽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커다란 물동이는 머리에 이고 다른 물동이는 등에 진 채 가파른 골짜기를 올라온다. 늦은 오후에는 샛길과 주위 들판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모으고 그루터기를 베고, 다른 바구니에는 쇠똥을 담고 나사렛의 위쪽 비탈에서 많이 자라는 엉겅퀴와 가시나무도 채워넣는다."(주제 사라마구, <예수복음>, 정영목 옮김)
참 고단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한미한 가정의 가족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곤고함 속에서도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마리아의 마음을 달뜨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또한 마리아와 함께 살게 될 미래를 그려보며 고단한 일상을 견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는 일체 그런 이야기 없이, 그야말로 다짜고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은 독자들의 당혹감을 자아냅니다. 세계의 여러 건국 신화는 나라의 시조나 영웅들이 거품이나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로마를 세운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대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시조이기에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도 그런 건국 신화의 맥락에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황제들을 신격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분열되었던 로마를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로마의 사제 계급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어머니 아티아와 아폴론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황제는 그로써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로마제국의 강압적인 통치와 대비되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신적 존재로 소개하기 위해 생물학적 아버지를 지우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이 갖는 중요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탄생 이야기에서 요셉은 처음부터 지워진 존재입니다. 탄생 이야기와 애굽 피신 이야기에 잠깐 등장할 뿐, 그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 심정의 쓰라림은 아마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을지 모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감정을 직정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라는 구절과 '가만히'라는 단어가 요셉이라는 사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상처를 두드러지게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의 마음이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떠벌려 망신 주려 하지 않고 ‘가만히’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는 그의 성숙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는 철저히 타자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의로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새로운 역사의 초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면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머지않아 아들을 낳게 될 텐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일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호세아를 아람어로 예수아라 하는데 그것을 그리스식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천사는 그 아이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는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곧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함께 계심 그 자체가 구원입니다.
임마누엘, 이 한 마디 속에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수난의 신비가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곤고한 생의 고빗길을 넘을 때,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다 떨어져 나가 지극한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도저히 살아갈 방도를 찾을 수 없어 자포자기적인 심정에 사로잡힐 때, 주님은 그때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저는 숙명여대의 김응교 교수의 책 제목인 '곁으로'라는 단어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는 문학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사유하면서, 문학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 곁으로 다가설 때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신학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의해 지워진 사람들, 투명 인간 취급받는 사람들, 죄인으로 규정되어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늘 다가서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저 번쩍거리는 백화점 아닙니다. 저 장엄한 찬양이 울려 퍼지는 예배 공간 아닙니다. 아픔의 자리, 눈물의 자리, 아우성이 들려오는 자리가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누구 곁에 다가서고 있습니까? 높은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높은 자리를 줄 수 있는 이들 곁에 다가서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은 저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요셉은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했던 마리아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15절에 나오는 "예수라고 하여라"라는 명령과 18절에 나오는 "예수라고 하였다"라는 실행이 서로 상응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눅1:38) 하고 간구했던 마리아가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이 순종의 모본입니다.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외투와 같은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의 품이 커져서 상처 입은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을 넉넉히 품어 안아 바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의로운 사람이라면!?
혹, 그럼 품위를 지키는 사람?
며칠 전..새벽에 제가 뱉은 말입니다
''.. ㅇㅇ이는 끝까지 품위를 지켰구나!''
제 친구가 있습니다 교회에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 안 되는데,
어쨌든 친구네 교회에 그런 일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친구는 교회 회계를 맡고 있다는 이유로 온갖 억측스런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친구는 침묵했습니다
계속 전화에 불이 납니다
양쪽에서 자기들의 편에 서야 하는 거 아니냐고
친구는 꼼짝 않고 자기가 맡은 일만 수행했습니다
사태는 해결의 가닥을 잡았습니다
친구가 전화해서 그래요
''수정아, 이제 회계 안 한다 나를 그렇게 상처내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계속 맡아달라고 사정한다..웃기지?
..나 그 동안 너무 추웠어..나..내 예배 회복할 거야''
예쁜 권사님도 품위를 지켰습니다
젊은 선생님과 서로의 양보를 기대하며 대치하는 상황에서..차마 시간이 지체되는 상황이 부끄러워서..먼저 통 크게 양보를 했었는데..
며칠 전 그래요.
''..불편하다는 건 우리의 영이 살아있다는 거겠지요? 그런데요 선의에 대한 열매는 내 몫인가 봐요 말하기는 조심스러운데..그런 일이 생겼지 뭐예요''
*의로운요셉을불러주셔서흐뭇했습니다
그동안 의롭다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칭의)'는 것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해왔던 것 같습니다.
이번 말씀을 통해서 위로 주님을 향하는 시선 뿐만이 아니라
아래로, 낮은 곳으로 향하는 시선도 의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의 행위를 통해서 지향해야 하고 지양해야 할 삶의 태도를 배웁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초라한 곳으로, 낡고 헐벗은 곳으로 향했던 주님의 시선과
他者 중심의 배려를 삶 속에서 실행했던 요셉의 태도를 본 받고자 합니다.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선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외투와 같은 사람이 되어
그들의 '곁으로, 곁으로' 다가가겠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설교로, 성극과 영화로 수없이 들었던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 뒤에 분노와 절망, 슬픔을 견뎌내야 했던 자기극복의 처절한 시간들이 요셉에게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못 했습니다. 요셉의 순종으로 우리는 아기 예수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처럼 의롭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 안아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