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앞에 직원들이 아침이나 저녁을 먹는 식당이 하나 있다. 내가 그 집을 우리들의 단골식당으로 정하기 전에는 그 나마 이 동네 몇 되지 않는 뱃사람들의 썰렁한 술청이거나, 주말이나 되어야 간신히 바지락 칼국수 먹으러 오는 여행자들 대여섯 명쯤 들렀다 갈 뿐,
평일엔 그저 그 가게 위로 까마귀나 깍깍 하고 지나다니는 형편없이 외지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하루 10명도 채 오지 않는 그 식당을 우리가 단골로 정한 그날 이후부터는 갑자기 밥 때마다 20명 정도 단골이 늘어나더니 다른 업체들도 뒤이어 들어오면서, 갑자기 늘 40~50명 붐비는 큰 식당이 되어버렸다.
밥이야 기껏 한 그릇에 몇천 원짜리라 늘푼수 있을 턱이 없지만, 일꾼들이 원체 밥 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는 관계로, 요즘 뚱뗑이 주인 아줌마 취미는, 별로 무겁지도 않은 소주 빈 궤짝을 끙차 들어내 식당 입구 앞에 자랑처럼 덜커덕 내 놓으면서 뉘 집 똥개 부르듯 핸드폰으로 술도가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네 다 들리게 아주 큰 목소리로 소주를 또 5짝씩 부르는 일이다.
만성적인 일손 부족에 시달리던 이 시골구석 식당도 결국 예외 없이 어느 날 문득 보니 식당 보조로 옌벤족 하나를 데려왔다. 나이는 방년 18세+20세 쯤에 ^^ 동글납작한 얼굴, 뒷머리 잘끈 묶고 왔다갔다 설레발을 열심히 치고 있다. 아가ㅡ 여개 쐬주 하나 다구. 잽싸게 한 병 가져오긴 했는데, 차후가 여엉 가물치 콧구멍이다.^^
기다리다가 목이 타서 지나가는 옌벤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잔은?
잔? 잔은 언제 시켰어? *.*
흐흐. 보니 말도 짧고, 일머리도 짧고, 저 번잡스런 설레발 모두가 다 온통 초짜배기란 얘기다. 뚱뗑이 주인 아줌마를 실내가 왕왕 울리는 거룩한 목소리로 불렀다. 갑짜아앙~ (그 가게 주인 아줌마가 나랑 동갑인 처지다) ㅋㅋ 내가 그새 노망이 들어갖고 잔을 그만 안 시켜 부럿네 그랴~^^ 빨리 잔 하나 가져오라구, 내 오늘 그 눔의 잔 걸리기만 혀 봐라. 본 즉시 내가 고 눔을 빵게 씹드끼 오도독 씹어묵고 말텡게~ㅎ
짐짓 화난 체 자기를 고용한 사장에게 말을 퍼부으며 했더니, 옌벤이 눈이 동그래 가지고 그 자리에 딱 얼어붙었다.^^ 그라고, 어이~ 옌벤! 잔 안 시켜서 무척 미안혀잉? 담부터는 꼭 안 잊어 불고 시킬텡게..., 자, 허기진께 오늘 야그는 여그 꺼지만 허고! -.-
난 늘 저녁 밥시간이 늦다. 현장 사람들 하나 둘 들어와서 시부리는 오만 소리 다 들어줘야 허고, 들은 얘기 목록별로 엮어 일을 맹글어야 허고, 일의 취사선택, 요점정리, 순서정리 해야 허고, 체질 상 그걸로 내일 아침에 필경은 치르지 않으면 안 될 전쟁 중에, 다문 작업방법, 인원배치, 자재준비 정도까정은 개략 찜해 둬야 밥이 넘어가지, 그러지 않으면 밥맛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예외 없이 9시경 식당에 들어가니 옌벤 혼자 물끄러미 연속극을 보고 있다. 옌벤~ 맛있는 거 많이 다구~ 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밥을 한 상 차려서, 그게 뭐 맛있는 거라고 계란 프라이를 3개나 부쳐서 큰 접시에 내왔다. 어이~ 엔벤. 계란에 무신 원수진 일 있냐? 이걸 다 우짜라고...
근디 느그 뚱뗑이는 어디 갔냐?
시장 갔어.
이 심야에 시장엔 뭐 하러?
몰라~
근데 인마, 너 왜 아저씨한테 계속 반말이야? ^^
밤말? 밤말이 모야? 몰라~ *.*
그 밤 말고 인마, 반말. 말을 낮춰서 하는 거~
바안말? 나쳐서? 나 그런 거 몰라~
에이~ 이 뚱뗑이는 여적지 뭐하고 있다가 이제사 시장 갔다냐? ^^
근데 너 네임이 뭐냐?
네임? 네임이 모야? 몰라~
이 녀석이 모르는 것만 알고 다 모른다는 얘기네?ㅋㅋ 그러다가 난 결국 걔 이름을 '몰라'로 부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어느 날은 현장에 문제가 있어 조금 더 늦어 문 닫을까봐 전화를 미리 걸어놓고 상당히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몰라'가 나를 보더니 대뜸 입을 삐쭉 내밀더니, 아저씨 나빠. 그런다.
얀마~, 뜬금없기는... 내가 손만 들면 부천디 뭐시 나빠?
아저씨는 깜깜아저씨야.
깜깜아저씨?
아저씨는 맨날 아주 깜깜해야 오잖아~
오홍~ 그래서 깜깜아저씨? 흐흐. 근데 말이다. 환할 때 여기 와서 밥 묵는 아자씨들은 말이다. 사실 부지런한 사람들이긴 하다만은, 솔직히 까놓고 보면 2% 부족한 농땡이들이란다. 자기 먹고살기에만 바쁘고 남이사 굶어죽든 말든 상관을 안 하지. 너는 남들 먹여서 너 벌어먹고 사니까 그 농땡이에서 빼 주지. 어때? 맘에 드냐?
그래도 빨리 와~
나 빨리 오면 넌 뭐 헐라고?
일찍 집에 가서 쉬면 좋잖아~
그래? 그럼 차려놓고 가. 난 식은 밥이래도 배만 부르면 그만인 스타일인께, 차려 놓구 신문지로 덮어놓고 집에 가면 뒤야. 갑장ㅡ 얘 보고 낼 부텀은 내 밥 차려놓고 가라고 그랴~
그래서 쓰나? 고객인디... 게다가 올여름부터 갑째기 장사 잘 되게 해 준 은인인디, 소는 못 잡아 믹여도 밥은 따신 밥 줘야지~
워따메~ 따신 밥! 소는 못 잡아 믹여도! 속에서 맘에 전혀 없던 감동의 쓰나미가 일어나 콧물로 나올라 그런다.^^
그리하여 어느 날 상당히 늦은 밤, 간신히 밥 한 상 받은 그 깜깜아저씨가, 낮에 욕이나 퍼붓고 돌아다닌 죄로 그만 입맛을 잃어 밥상 고대로 물린 다음, 그의 갑장이자 그 동네 가장 뚱뗑이 아줌마인 그 식당 주인을 앞에 두고 가운데 '몰라'가 앉아 좌우로 쐬주를 번갈아 열심히 치며 간략하게 입 소독을 시키고 있는 풍경이다.ㅎㅎ
하루종일 깐깐하게 굴던 깜깜아저씨도 지칠대로 지쳤고, 평수 넓은 뚱뗑이 주인은 종일 손님 치느라 더 지쳐, 뒷전의 상을 당겨 허리에 괴고 쐬주랑 뽀뽀를 하고 있는데, '몰라'가 내 턱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나에게 아주 은밀한 목소리로 묻는다.
소주 맛있어?
…… ……. 홀짝~
맛없어?
…… ……. 홀짝~
소주 많이 먹으면 일찍 죽어~
'몰라'의 뜬금없는 '일찍 죽어~' 때문에, 뚱뗑이가 갑자기 펄쩍 뛰며 반문한다. 왜 일찍 죽어? 스트레스 풀고 오래 살라고 먹는데?
아니야. 우리 아빠도 깜깜아저씨처럼 소주 먹고 안주는 잘 안 먹었는데, 일찍 죽었어. 그리고 죽으면 뎁혀야 돼. 그거 얼마나 불쌍한데... 갑자기 '몰라'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뎁혀?
이번엔 내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반문했다.
응. 뎁혀~ 죽은 사람을 연탄 같은 데 올려놓고 뎁히는 거야.
윽! 가만 말 내용을 추측해 보니 아마 화장하는 것을 얘기하나보다. 불에 이렇게 이렇게 그슬려서 이렇게 콩콩 빻아서 재 만드는 거?
응, 그래! 맞아. 그거~
'몰라'의 표정을 미루어보아 그 일은 분명 슬픈 일이었으나, 들은 즉시 뒤로 발랑 뒤집어져 주었다. 으헤헤~ 킬킬킬, 뎁힌대. 아이고, 그래. 그런데 듣고 보니 정말 사람이 죽으면 뎁혀야 되는구나. 근데 발써 뎁혀져선 안 되지. 어이 뚱뗑이 사장~ 암만 그래도 우리가 아직 뎁힐 나이는 아니잖아? 야~ '몰라'야. 큰일 났다. 우리 안 뎁혀질라면 우째 쓰가나 잉?
냉장고에 좋은 거 있어. 쫌만 기다려. 맨 소주만 그냥 마시지 말고?
우리는 진득하게 기다렸다. 달그락 달그락. 부엌에선 너무나 일찍 이 세상이 불쌍한 우리를 뎁히지 않게 하기 위하며, 다른 그 무언가가 뎁혀지고, 드디어 우리의 씩씩하고 아름다운 '몰라'는 자기가 해 먹는 돼지고기에 양파랑 버섯 양배추 조금 더 넣고, 우리는 들어도 이름 외우기도 힘든 닝닝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국인지 찌갠지 분간도 안 가는 허여멀건 기름이 지천으로 둥둥 떠 다니는 중국음식을 큰 대접으로 한 대접씩 받았다.
먹어 봐. 정말 맛있어. 식당을 스쳐지나는 이 눔 저 눔 왼갖 잡눔들 갖은 시달림에 늘 주눅들어 살던 '몰라'는, 간만에 올곧은 자신의 힘으로 다 죽어가는 두 사람을 뎁히지 않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에 무척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후루룩 쩝쩝...
맛있어? 이게 맛있는 거 맞아?
첫 숟갈 들다 말고 뚱뗑이 사장이 나에게 물었지만, 암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정말 빈 말이 입에서 안 나온다.ㅋㅋ
'몰라'야. 여기다 소금, 고춧가루하고 양념 쬐끔 끼얹으면 안 되까나?
안 돼.
왜 또 안 돼?
짜고 매우면 또 뎁혀ㅡ *.*
뎁혀지기 싫어서 그냥 먹었지만, 맛이 딱 사람 돌아가시게 생겼다. 비위 약한 뚱뗑이 사장은 세 숟가락 들고 나더니 차라리 뎁히는 게 이거 보다사 쪼까 나을 거라고 숟가락을 놨지만,^^ 나는 숟가락을 놓현장 골병만 들고 어디 따순 자리 놀러가도 못하며 살았는데, 벌써 뎁혀진다는 소리 들으니 억울하기도 해서 한참을 더 먹었다.
깜깜아저씨는 뎁히지 말어~ 응? 뎁히면 나빠.
알었어. 근데 너두 이 따우 기름진 음식 많이 먹지 마라. 자꾸 이런 거 자주 먹다가는 우리 뎁히고 며칠 안 되서 바로 너두 뎁히게 생겼다야~ㅋ - 音 알 그린 '상심한 마음을 어떻게 고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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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뎁히는게 죽음을 이야기 하나보다.
뎁히지 말고 오래살어~ㅎ
뎁히지 않을 재주가 우리에겐 없지.
그 잘난 정주영이도 이건희도 못 부린 재주를
뻘밭에 처박혀 사는 이 범부가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