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여지책
권 덕 봉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 만남에 저돌적으로 물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실체를 어떻게 한두 마디의 말로 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 차차 저에 대해 알아보시지요.”라고 권하며 당황스러운 상황을 피했습니다.
보통 자신을 처음 소개할 때는 이름, 하는 일, 사는 곳 등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말합니다. 함께하게 된 동기와 각오를 말하며 잘 부탁한다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관계가 조금 깊어지면 취미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합니다. 잘하거나 못하는 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들을 슬며시 풀어놓기도 합니다. 관계가 돈독해지면 생활 습관 또는 되고 싶은 사람 등으로 범위를 넓혀 자신을 알립니다.
언제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각자의 등에 운명이라는 딱지를 척 붙이고 나온다고 합니다. 운명이라는 말에서 명(命)에는 성격과 태도를 정하는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를 근거로 저의 성격과 태도로 저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운명을 거론한다고 비난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평생 점집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수 없이 이사 다녔지만, 손 없는 날을 꼽아본 적도 없습니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개인의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성정(性情)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자에 달렸다는 생각이나, 태어난 일시의 우주 기운에 따른다는 생각이나,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다는 관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일주(日柱)는 신축(辛丑)입니다. 차가운 기운을 뜻하는 신금(辛金)과 동토를 뜻하는 축토(丑土)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차갑고 매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신금(辛金)을 타고난 사람의 성향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의를 중요시한다. 원리원칙주의자다. 독립성이 강하다.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려고 한다. 정리 정돈을 잘한다.’ 축토(丑土)를 타고난 사람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소를 닮았다. 근면 성실하고 인내력이 강하다.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일을 끈기 있게 한다. 고집이 세다.’
일부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저의 성향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불의를 보면 화가 납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 만큼 용감하지는 못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싫어합니다. 공동으로 세운 원칙은 반드시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허락 없이 내 영역으로 넘어오는 건 참지 못합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오래 살펴본 뒤에야 마음을 줍니다. 그러나 오래 사귄 친구가 우정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고 떠나가도 붙잡지 않습니다. 감정을 감추기 위해 얼굴빛을 꾸미지 못하고 할 말은 해야 합니다. 책상 정리는 물론, 주고받은 문자를 자주 삭제하고 노트에 메모한 사항 중에서도 불필요해진 것은 주기적으로 없애야 마음이 편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면 오래 버티고, 두들겨 맞아도 좌절하지 않고 맞서 싸웁니다. 그러나 재빨리 포기해야 하는 때를 알아내는 감각도 지녔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느긋하지 못하여 일을 서두르는 편입니다. 성실하다는 평은 제가 가장 받고 싶은 선물입니다. 세상에 고집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편 일주도 알려주지 못하는 성향이 있으니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다. 상황을 객관적 합리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 비평의 재능도 있으며 다소 까칠하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것 같지만 속으로 단단하고 냉정하다. 현실적이나 실속은 없다.’
세상은 흥미로운 일들로 가득합니다. 여러 가지를 해보았으나 성과를 낸 건 별로 없습니다. 특정한 사람이나 사실에 열광하지 않아 숭상하는 인물이 없고 매몰되어 참여하는 단체도 없습니다. 너무 젠체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한마디 야유라도 던져주고 싶고, 점잖고 우아한 사람에게는 적당한 찬사를 보낼 줄도 압니다. 사람들의 평가표를 받아본 적 없으니, 지금까지 말씀드린 게 저의 성격이나 태도의 전부인지 혹은 참인지 거짓인지조차 확인시켜드릴 방법은 없습니다. 또 말로서 그 뜻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생명체의 복제를 넘어서 특정한 유전형질을 갖는 유전자를 삽입하거나 제거하는 조작을 통해 새로운 유전자를 만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지만, 저의 성격과 태도가 이러이러하다고 주장할 마땅한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궁여지책으로 일주를 가져왔습니다.
요즘 맹자를 듣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선하게 살면 복 받고 악하게 살면 화가 미친다는 선인의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불교학 교실 수업도 듣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모르는 것에 대하여 알아가는 일은 참 재미있습니다.
아름답거나 슬픈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하는데 딱딱하고 냉정한 성정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