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구약성경 인용)
마태복음 26장 55-56절『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전이 무너질 것과 삼일 만에 성전을 일으킬 것을 말씀하셨다. 율법 시대에 옛성전(십자가의 죽음)은 무너져야 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성전(부활)이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며,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며,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누가봐도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유대지도자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왜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한 것인가? 그들이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하나님은 서로 다른 하나님인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메시야가 온다는 말을 알고 있었으나, 예수가 메시야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유대지도자들은 오직 율법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에 대한 죄는 형식적인 절차만 지키면 다 해결되고, 메시야는 율법에서 정해진 제사장 그룹에서 나올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제사장은 율법에서 정해진 바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 최고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유대지도자들은 사실상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며, 죄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칼을 드는 자들이었다.『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을 향하여 칼과 몽치를 든 강도로 비유했다. 강도는 남이 가진 것을 칼과 같은 무력(권력)을 동원하여 빼앗는 자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많은 목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와 같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그들의 입으로 칼날 같은 말을 쏟아내고 있는 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제도 아래 권력을 차지하고, 그 권력으로 참 예수를 칼로 죽이고, 그 자리에 자기들이 만든 가짜 예수를 앉혀 놓는 것이다. 십자가는 교회 공동체의 권력의 상징이 되고, 치장하는 보석처럼 권위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자리에 앉는가 아니면 회개하여 죄를 발견하고 예수와 함께 죽는가의 차이가 될 것이다.
요한복음 8장 19-20절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그의 때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십자가의 죽음이다. 요한복음 19장 10절에서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 나아가 온 인류를 향한 사랑을 자신의 아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를 짊어지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약점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에서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공격할 때,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부모가 그 자식을 싸안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영을 흙속에 가두고 회개하여 돌아오게 했으나, 인간은 끝없는 죄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인간들의 죄악을 자신이 손수 감싸 앉는 방법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미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는 일이며,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어 왔던 것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 출현을 예언해 왔으며, 특히 이사야나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의 죽음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다. 유대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단순히 영의 눈이 닫혀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으므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탐욕)을 가지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죄를 깨닫고 예수와 연합되어 죽는 자를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가 로마 시대 당시에 제사장 그룹에 항거하다가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이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유대지도자들 자신들 만이 하나님의 아들 자리에 앉을 수 있는데, 감히 보잘 것없는 나사렛 출신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예언은 이사야 53장에서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방 나라의 지배를 받는 황폐한 이스라엘에 평화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은 듣는 이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었다. 소식을 접한 이들을 침묵하게 된 이유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소식이었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보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벨론에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율법을 맡은 자라는 교만함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동안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우상에 젖어 살았으며, 영혼은 병들고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집스럽게 불순종하던 율법을 재해석해보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지난날의 역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매우 가슴 아프지만 타락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 그리고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린 것이다.
이스라엘은 힘없이 바벨론에 끌려간 상황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바벨론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혹독한 고통의 상황에서 깊은 숨 조차 쉬지 못하는 억울하고 답답한 때다. 그래서 기다린 메시야는 자연스럽게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가장 낮고 천하던 자를 가장 높이 들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힘 있는 메시야의 모습을 상상했다. 만국의 왕들이 경배하고 무릎 꿇는 상황에서 우쭐거리며 메시야와 걷는 것은 상상만 해도 지금의 고통을 반감시켜주는 쾌감이었을 것이다. 로마시대 제사장이나, 유대인들도 이와 같이 메시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그들에게 나타난 메시야는 아주 볼품없는 초라함 그 자체였다. 능력의 메시야를 기대하며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다른 메시야를 설명하고 있다. 이사야 52장 2-3절『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스라엘이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난날들의 죄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메시야임을 이사야는 증언하고 있다.
스가랴 13장 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이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하나님은 칼을 깨워서 그의 목자, 그의 짝된 자를 치라고 명하신다. 칼은 사법권의 능력을 표현하며, 또한 생명을 제거하는 수단을 대표하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죄에 대한 재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공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검이라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하나님의 칼이라는 상징으로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셨고, 메시야를 “나의 목자”라고 하심으로 그의 독생자를 향한 사랑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