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고암(高巖)의 집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의 고향인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元村)의 집을 말한다. 조긍섭이 42세이던 1914년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 마을의 정산서당(鼎山書堂)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 암서집(巖棲集) |
2 | 긍섭은 …… 도착하였는데 | 조긍섭이 42세 때인 1914년 이후 정산(鼎山)으로 이사하여 은거했던 것을 말하는데,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이다. 이곳에 조긍섭의 정산서당(鼎山書堂)이 있었다. | 암서집(巖棲集) |
3 | 난곡(蘭谷)이 기문을 지었는데 | 이건방의 《난곡존고(蘭谷存稿)》 〈문록(文錄)〉에 〈정산서당기(鼎山書堂記)〉가 실려 있다. | 암서집(巖棲集) |
4 | 서당기(書堂記)는 …… 듯 | 이건방의 《난곡존고(蘭谷存稿)》 〈문록(文錄)〉에 〈정산서당기(鼎山書堂記)〉가 실려 있는데, 내용 중에 “내 이미 능히 책상을 지고 따르면서 그 스승과 제자들이 서로 즐기는 것이 어떠한가를 보지 못하였다.〔余旣不能負笈而從之, 以觀其師弟子之相樂爲何如也.〕”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어 말한 것을 지적한 말이다. | 암서집(巖棲集) |
5 | 심재(深齋) 조중근(曺仲謹)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말한다.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ㆍ암서생(巖西生)ㆍ중연당(中衍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圓村里)에서 태어났다. 1914년에 달성의 비슬산 정대로 들어가 정산서당(鼎山書堂)에서 15년 동안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1928년에 현풍의 쌍계(雙溪)로 이사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쓰다가 세상을 마쳤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두루 가르침을 받았고 특히 서산에게 의귀하였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곤언(困言)》, 《복변(服辨)》, 《암서집》 등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
6 | 심재자(深齋子)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말한다.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ㆍ암서생(巖西生)ㆍ중연당(中衍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1914년에 달성의 비슬산 정대로 들어가 정산서당(鼎山書堂)에서 15년 동안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1928년 현풍의 쌍계(雙溪)로 이사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쓰다가 세상을 마쳤다. 곽종석(郭鍾錫)ㆍ이종기(李種杞)ㆍ장복추(張福樞)ㆍ김흥락(金興洛)에게 두루 가르침을 받았고, 특히 김흥락에게 의귀하였다. 김택영(金澤榮)ㆍ하겸진(河謙鎭)ㆍ문영박(文永樸)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암서집》, 《곤언(困言)》, 《복변(服辨)》 등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
7 | 용문동(龍門洞) |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인흥(仁興) 마을 위쪽 큰 고개 아래에 있다. 용문동 계곡에서 산을 넘으면 심재의 정산서당(鼎山書堂)이 있는 정대리이다. 용문동 계곡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면 용문폭포가 있다. 달성십승(達城十勝)의 하나이다. | 암서집(巖棲集) |
8 | 정산(鼎山) | 조긍섭이 42세 때인 1914년 이후에 은거했던 곳으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에 있다. 이곳에 조긍섭의 정산서당(鼎山書堂)이 있었다. | 암서집(巖棲集) |
9 | 조군(曺君) 중근(仲謹)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말한다.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ㆍ암서(巖西),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인이다. 1914년 이후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정산서당(鼎山書堂)에 은거하여 저술과 강학에 힘썼다. 저서로는 《심재집》, 《암서집》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
10 | 조심재(曺深齋)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ㆍ암서생(巖西生)ㆍ중연당(中衍堂)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1914년에 달성의 비슬산 정대로 들어가 정산서당(鼎山書堂)에서 15년 동안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1928년에 현풍의 쌍계로 이사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쓰다가 세상을 마쳤다. 장복추(張福樞, 1815~1900), 김흥락(金興洛, 1827~1899), 이종기(李種杞, 1837~1902), 곽종석(郭鍾錫, 1846~1919)에게 두루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김흥락에게 의귀하였다. 김택영(金澤榮, 1850~1927), 하겸진(河謙鎭, 1870~1946), 문박(文樸, 1880~1930)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암서집(巖棲集)》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
11 | 조중근(曺仲謹)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말한다.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ㆍ암서생(巖西生)ㆍ중연당(中衍堂),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圓村里)에서 태어났다. 1914년에 달성의 비슬산 정대로 들어가 정산서당(鼎山書堂)에서 15년 동안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의귀하였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암서집》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
12 | 조중근(曺仲謹)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 호는 심재(深齋)ㆍ암서생(巖西生)ㆍ중연당(中衍堂)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圓村里)에서 태어났다. 1914년에 달성의 비슬산 정대로 들어가 정산서당(鼎山書堂)에서 15년 동안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의귀하였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암서집》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
13 | 조중근(曺仲謹)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 호는 심재(深齋)ㆍ암서생(巖西生)ㆍ중연당(中衍堂)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원촌리(圓村里)에서 태어났다. 1914년에 달성의 비슬산 정대로 들어가 정산서당(鼎山書堂)에서 15년 동안 은거하여 강학과 저술에 힘썼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의귀하였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암서집》이 있다. | 소호당집(韶濩堂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