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암 고영화
2022년 9월 10일 오전 07:42 - 수정됨
<경남 함양군 안의면 ‘광풍루(光風樓)’ 한시(漢詩)편 1.> 해암(海巖)고영화(高永和)
광풍루(光風樓)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92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고 금호천(錦湖川)의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본디 안의현(安義縣)은 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서하면·서상면, 거창군 마리면·위천면·북상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로, 안음현(安陰縣)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별호는 화림(花林)이었다. 안음현은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의 두 현이 합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고종 32)에 진주부 안의군, 1896년에 경상남도 안의군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안의군이 폐지되고, 안의군의 서상면과 서하면은 그대로, 현내면·황곡면·초참면이 안의면으로, 대대면·지대면이 대지면으로 통합되어 함양군에 편입되고, 북상면은 그대로, 남리면·동리면이 마리면으로, 북하면·고현면이 위천면으로 통합되어 거창군에 편입되었다.
광풍루 누각은 1412년(태종 12) 이안현감(利安縣監, 안음현감) 전우(全遇)가 지은 것으로서 그 당시에는 선화루(宣化樓)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25년(세종 7)에 김홍의(金洪毅)가 현 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1494년(성종 25)에 현감이었던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하여 이름도 광풍루로 고쳐 불렀다. 그 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을 1602년(선조 35) 현감 심종진(沈宗진)이 복원하고, 조선 숙종9년(1683)에 현감 장세남(張世男)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잡한 유래를 간직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많이 퇴락한 것을 1980년에 단청을 새로 하고 주변을 정화하여 옛 모습을 되찾아놓았다.
1) 광풍루[光風樓] / 송내희(宋來熙 1791∼1867)
高樓縹緲與雲齊 우뚝한 누대가 가지런한 구름과 더불어 아득한데
踏盡欄頭十二梯 난간마루 모퉁이 열두 계단 사다리 밟고 올랐네.
歷歷長橋人影少 역력한 긴 다리에는 사람 그림자 드물고
蒼蒼平楚鴈聲低 창창한 평야에는 기러기 소리 아련하다
山形磅礴淸溪北 맑은 시내 북쪽에는 산의 형세 드높고
井落參差畫棟西 그림을 그려놓은 마룻대 서쪽엔 들쭉날쭉한 마을이 있구나.
徙倚渾忘歸路遠 배회하다 보니 돌아가야 할 길을 깜빡 잊고선
盡收風景入窮睇 풍경에 도취되어 모든 눈길을 다 빼앗겨버렸네.
2) 광풍루[光風樓] / 송병선(宋秉璿 1836∼1905)
山水中間此一樓 산과 물 가운데에 있는 여기 한 누각에서
光風千載想前遊 천년동안 따사로운 바람 맞으며 앞서 놀던 일 생각하니
不須簷外邀新月 처마 너머 초승달을 굳이 맞이할 필요 있으랴만
滿酌村醪意更幽 술잔 가득 시골 막걸리 따른 뜻, 더욱 그윽하여라.
3) 광풍루[光風樓] / 신좌모(申佐模 1799∼1877)
一般明月一般風 온통 밝은 달빛에 온통 바람 불어오니
光霽濂翁又蠧翁 염계(濂溪)와 일두(一蠹)의 광풍제월(光風霽月)일세.
竗契相符千載下 천년 후에도 묘하게 서로 어울리니
嘉名特揭一樓中 아름다운 이름이 누각 속에 특별히 걸려 있네.
長烟滿地春江碧 늘 안개에 가득 찬 땅에 봄 강물 푸르고
芳草連天夕照紅 향기로운 꽃 풀이 잇닿은 하늘에 저녁노을 붉어서라
遠客登臨如可挹 먼 길 나그네가 절로 이끌리듯 누각에 올라보니
頭流山色滿簾櫳 지리산 빛이 창틀에 가득 비춰주네.
[주1] 염옹(濂翁) : 염옹은 북송(北宋) 시대 학자로 호가 염계(濂溪)인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연(蓮)을 매우 사랑하여 애련설(愛蓮說)을 지어서 연을 극구 예찬하였다.
[주2] 두옹(蠧翁) :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말한다.
4) 광풍루(光風樓) / 조영석(趙榮祏 1686~1761)
逈臨平野望依依 넓은 평야, 시야마저 가물거려
去馬來牛所見微 오가는 말과 소도 희미하게 보인다
不斷源泉當檻過 근원 깊은 샘물, 광풍루 앞 지나고
有時沙鳥傍簾飛 물새는 대발 곁을 스치며 날아가네.
南方氣暖耕農早 따뜻한 남녘이라 농사일 이르고
峽縣春深訟獄希 산골 관아에 봄 깊어 송사도 없다
太守元來官不薄 태수님 목민이 원래 후덕하여
剩看山色一樓圍 누대 감싼 산빛 마저 여유로워라.
5) 광풍루[光風樓] / 심육(沈錥 1685~1753)
月從今夜好 달빛이 오늘 밤부터 좋아진다기에
虗閣坐來淸 빈 누각에 앉으니 맑은 바람 불어오네.
入檻溪流轉 난간 근처 시냇물은 돌아 흐르고
依簷嶺樹生 처마에 의지한 산의 나무 생기로워라.
樓高雲淡濕 누각 위에 높이 뜬 구름 습기 머금은 듯
村遠天孤明 멀리 마을에만 하늘에서 빛을 밝히네.
不省官居近 관청이 가까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人歸吏隱名 돌아가 하급관리로 조용히 살아가리라.
6) 광풍루[光風樓] 임상서에 차운(次林尙書韻) / 심육(沈錥 1685~1753)
灑落光風遠 쇄락(灑落)한 광풍루가 멀리 있는데
於焉舊迹存 어느덧 옛 자취 그대로 남아있네.
高臺猶矗矗 높은 누대가 가히 우뚝 솟아있고
流水自源源 흐르는 물은 절로 끊임없어라.
道在淵成默 도(道)는 묵묵히 만들어진 웅덩이에 있는데도
人方巧騁言 사람들은 사방에서 공교하다 제멋대로 말하네.
犂然意不盡 두려워하는 마음은 끝이 없으나
更欲滌煩襟 다시 번잡한 마음 씻고자 하노라. --이어 계속--
해암 고영화
2022년 9월 10일 오전 07:44
<경남 함양군 안의면 ‘광풍루(光風樓)’ 한시(漢詩)편 2.> 해암(海巖)고영화(高永和)
--앞글에 이어--
1685년 7월(음) 송시열(宋時烈)이 <안음현(安陰縣) 광풍루기(光風樓記)>에서 말하길, 1685년 올봄에 안음 현감(安陰縣監) 장세남(張世南)이 글을 보내와서 청하기를, “고을에 있는 광풍루(光風樓)와 제월당(霽月堂)은 바로 일두 정여창선생이 세운 것인데, 이 두 건물이 모두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보수(補修)해야 되겠습니다. 당(堂)은 상서(尙書) 박장원(朴長遠)이 이미 수리하였고, 누(樓)는 지금 재력(財力)을 모아서 수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전현(前賢)의 유적이니, 어찌 기(記)를 지어 빛내지 않으리까.”하였다.
또한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바로 황노직(黃魯直 황정견(黃庭堅))이 무극옹(無極翁 주돈이(周敦頤))의 기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 후에 두 정 부자(程夫子)가 말하기를, “주무숙(周茂叔 주돈이)을 재차 뵙고 바람 쐬며 시를 읊고 달 구경을 하면서 돌아오니 ‘나는 증점(曾點)의 생각과 같다(물욕에서 벗어나 순진한 인간의 본심)’는 뜻이 있었다.”하였고, 주자(朱子)도 말하기를, “바람과 달은 가없고, 뜨락의 풀은 한결같이 푸르다.”하였다. 그렇다면 이 한 구절, 두 마디 말이 비록 흔한 말 중의 하나인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도리(道理)가 무궁하고 그 지취가 실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느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경사(敬肆 공경과 방종)와 수패(修悖 바른 것과 어긋나는 것)의 분별을 명확하게 판별하여 도(道)의 본원(本原)에 통달하는 공부에 종사해서, 가슴속이 쇄락하여 털끝만한 인욕(人欲)의 속박도 없이 태극(太極)을 마음에 간직한 뒤에야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이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광풍루(光風樓)는 양류(楊柳)의 바람과 오동(梧桐)의 달처럼, ‘버들가지 사이를 불어 가는 맑은 바람과 오동나무 위에 비추는 밝은 달’처럼, 소옹(邵雍)의 기상을 표현한 것이다.
박공(朴長遠)은 효우(孝友)를 숭상하는 정사를 펴고 청정(淸淨)한 풍교(風敎)를 좋아하여 먼저 이 당(堂)을 수리하였으니 그 뜻이 심원하다 하겠고, 장후(張世南)는 마침 흉년을 당하여 우선 백성들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능히 여기에 유의(留意)하였으니, 참으로 어진 이를 추숭(追崇)하고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여 정사하는 근본을 얻었다고 하겠다. 누각 북쪽에 점풍대(點風臺)의 옛터가 있고 대 밑에 욕기암(浴沂巖)이 있는데, 장후(張世南)가 역시 수축하여 옛 모습을 되찾게 하고자 한다.
7) 안음 광풍루[安陰光風樓] / 이민구(李敏求 1589∼1670)
吾祖題詩處 나의 선조가 시를 지은 곳으로
樓高愜再過 높은 누각이 유쾌해 재차 지나간다.
遙岑靑不改 먼 산봉우리 푸른빛 바꾸질 않으니
列樹翠還多 줄지은 나무 푸른빛 되레 뛰어나네.
故國來如鶴 고향으로 학을 따라 돌아와 보니
流年逝若蛇 흐르는 세월이 뱀처럼 지나갔구려.
那堪懷往事 지난 일이 생각나 어찌 견디랴
騎馬已山河 산하를 말을 타고 달려볼 뿐.
8) 광풍루[光風樓] 안음에 있는데 아래와 같다(在安陰下同) / 윤선거(尹宣擧 1610∼1669)
第一嶺南勝 영남 제일의 명승지
花林官北樓 화림동 관청 북쪽 누각
山川元造化 산천은 조화가 으뜸이라
風月好分留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서로 나누어 머물기를 좋아한다.
大老百年跡 어진 노인의 백년 자취
芳名千古流 꽃다운 이름 천고에 흐르네.
臨軒獨長嘯 집에서 홀로 길게 휘파람 부니
苦竹動淸秋 대나무가 맑은 가을을 울린다.
9) 광풍루에 차운[次光風樓韻] / 익양연방집(益陽聯芳集)
別開亭觀此江潯 이 강 물가에서 별천지 정자를 바라보니
風月無邊入袍襟 바람과 달빛이 끝도 없이 옷깃으로 들어오네.
竹色拂雲連遠嶽 대나무 빛이 구름을 거슬러 먼 산과 잇닿고
泉聲帶雨出幽林 샘물소리가 비를 데려온 듯 깊은 숲에서 들려오네.
遼陽鶴去空留柱 요양(遼陽)으로 학 날아가니 공허한 기둥만 남았는데
彭澤人歸孰理琴 팽택(彭澤)으로 그 사람이 가버리면 누가 거문고를 치랴
無限夕陽無限景 무한한 석양이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라
獨憑危檻獨微吟 위태로운 난간에 외로이 기대서서 홀로 나직이 읊조리네.
10) 광풍루에 올라[登光風樓] / 김영수(金永銖 1862~1925)
昭州四月客登樓 소주(昭州)의 사월 달 나그네가 누각에 올라보니
樓外黃雲散不收 누각 너머 누런빛 구름이 흩어져 거둘 수가 없어라.
日翳綠陰張似蓋 무성한 녹음이 일산을 펼쳐 놓은 듯하고
風生畫閣泛如舟 바람이 채색한 누각에 생겨나니 배를 띄운듯하네.
意中朋舊皆靑眼 마음속 옛 벗은 모두가 반가운 사람들인데
座上官民共白頭 좌중의 관민들 모두다 백발이 성성하네.
南部主人斟北海 남부의 주인이 북쪽 바닷가 손님을 헤아려
餘流更欲向芳洲 나머지 시내를 보여주고자 다시 향기로운 물가로 향하려하네.
11) 광풍루[光風樓] / 조수삼(趙秀三 1762∼1849)
元龍豪氣像 원룡(元龍)의 호기(豪氣)를 닮고자
一蠧昔經營 일두(一蠹) 정여창이 예전에 경영했다네.
翠箔空中捲 푸른 발이 공중에 걸려 있고
雕欄水底橫 채색 난간은 물 아래로 가로지른다.
四山春滴瀝 사방의 산엔 봄철 물방울 뚝뚝 떨어지고
三洞夜虛明 삼면의 골짜기엔 한밤중 텅 빈 빛이 쏟아진다.
無限長林色 무한한 길게 뻗은 숲 그림자에서
開窓聽曉鶯 창문 열면 새벽 꾀꼬리소리 들린다네.
[주] 원룡(元龍)의 호기(豪氣) : 원룡은 삼국 시대 위나라 진등(陳登)의 자이다. 허사(許汜)가 일찍이 유비(劉備)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기가 한번은 진등을 찾아갔더니, 진등이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주인인 자신은 높은 와상(臥牀)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인 자기는 아래 와상에 눕게 하더라고 말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百尺樓) 위로 올라가 눕고, 그대는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다. 어찌 위아래 와상의 차이로만 대접하였겠는가.”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단지 큰 누각에 올라 풍류를 즐기는 것을 진등의 호기에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