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의 고래/ 서기묵
오존층의 처녀성을 잃은 빙하가 녹는다 눈물이 자라는 고통이 하얀 핏줄에 스며들어 균열을 퍼트린다
은산철벽이 무너진다 사방으로 흰 핏방울을 튀기며 흩어지는 조각들. 만삭인 빙산에서 물의 한 살인 포유류로 태어나 사생아로 묶인 탯줄을 끊는다
유빙에 청색 반점이 찍힌 흰 고래가 지느러미를 펼친다 바다에 잠긴 폐 속에 공기를 채우는 호흡법으로 생을 연다 그린란드 해海에서 새로운 세계로 뛰는 심장을 띄워나간다
해수면에 떠오른 가련한 등이 눈부신 은빛을 반사한다 만 년에서 생년월일을 사주로 풀어 꿈꾸는 아름다운 미래
해류에 얽힌 미로에서 초음파로 점자를 읽듯 바다의 서사를 엮어간다 한 치 눈앞을 가로막는 수압을 가르며 자맥질한 몸을 수평선 위로 솟구친다
심연을 끌어올린 눈길에 태양의 흑점이 번진 하늘이 캄캄하게 덮친다 파랑을 일으키며 팽창한 허파를 휘파람으로 풀어놓는 선율에 플라스틱이 검은 음표로 걸려든다 숨길을 따라 빨려드는 쓰레기들. 내장에 내생의 그림자가 쌓여간다
얼음에 울음을 삼킨 목숨이 물거품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빙점에서 녹아내리는 눈물로 바다의 수위가 높아진다 점점 뜨거워지는 피부로 시나브로 줄어드는 부피. 부력에 가벼워진 몸으로 북극해를 유령처럼 유랑한다
직사광선에 살결이 부서진다 생명을 다 살아내지 못하고 멈추는 심장. 빙하의 혈통인 흰 고래가 흘리는 한 방울 눈물로 물살에 마지막 얼굴을 묻는다
고래좌가 눈꺼풀을 감겨주는 영혼으로
- 제8회 평택 생태문학상 당선작
■ 서기묵 시인
- 1950년 서울 출생
- 동서문학상 입상. 세계 평화안보 문화축전 시부문 입상. 시흥시문학상 동상
[심사평]
- 배두순 시인
자연생태계의 가치와 중요성은 아무리 부르짖어도 부족한 부분이다. 생명의 순환과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함은 인간들이 지녀야 할 덕목중의 덕목이다. 문명의 고속발달은 자연의 균형을 깨트리며 위기상황으로까지 몰고가려한다. 이런 때일수록 자연생태계의 보존과 유지에 한층 더 관심을 기울여야하는 것이다. 제8회 생태 문학상 공모전에도 많은 문학인들의 응모가 심사위원들을 기쁘게 했다. 생태문학이라는 한정된 조건하에서도 저마다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빙하의 고래’ ‘점박이 물범’ ‘종의 기원을 찾아서’ 3편을 응모한 서기묵의 생태시가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이견 없이 대상으로 확정 되었다. 3편 모두 높고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생태시의 가치를 더하게 해주었다. ‘오존층의 처녀성을 잃은 빙하’가 녹아내리며 사생아로 태어난 흰 고래, 얼음에 울음을 삼킨 목숨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빙점에서 녹아내리는 눈물로 바다의 수위가 높아진다는 자연파괴의 암담한 현실을 부각시키며 다 살아내지 못한 한 생명을 어루만지는 시적화자의 따스한 마음은 얼마나 고귀하고 사랑스러운가? 자연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시 편수마다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어 공들여 쓴 필력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 까지 거론된 작품은 ‘쇠뜨기 풀은 힘이 세다’ ‘진위 하수처리장에서’ ‘우유니 사막의 수태고지’의 세 분의 작품이 거론되었으나 대상에 버금가는 우수상의 범주에는 들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다음을 기대하며 당선자와 낙선자 모두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우대식. 진춘석. 김영자. 배두순. 한인숙
◆ 시창작 Tip
- 시의 형상화
*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체험을 상상력으로 종합하여 구상적 ‘이미지’ 형상으로 ‘묘사’한다.
* 시는 언어를 통해 상상력을 발동시켜 다양한 시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것을 가시적인 세계로 형상화 한다. 이러한 언어기능의 세계는 상상의 언어로서, 현실을 초월한 무한한 꿈의 세계이며, 상상의 세계 속에서는 언어가 감정을 지니고 생명을 얻는다.
- 송영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