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소금언덕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밀양 명례성지
< 명례성지 야외성전. 십자가의 길 너머로 낙동강이 흐른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직각으로 내려다보는 ‘소금언덕’,
밀양 명례성지의 ‘성모승천성당’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순례객을 맞는다.
이곳 명례(明禮)의 옛 이름이 멱례(覓禮), 미례(彌禮)였다.
여기에 강 건너 김해를 오가는 나루가 있어 고대부터 낙동강 수운의 요충지였다고
전해지며, 돌무더기 나루터라는 의미로 뇌진(磊津)이라고도 불렸다.
‘밀주지(密州誌)’에는 용진(龍津)이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밀주지’는 밀양의 향토 인문 인물 지리지로, 원제목은 ‘밀주지리인물문한지’이다.
‘명레’란 이름은, 신라 법흥왕이, 마을 사람들의 예의가 밝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는 설이
『밀양지명고』에 있으며, 1431년(세종 13년)에 밀양에서 태어난 김종직(金宗直)이
마을 사람들이 예의가 밝음에 탄복하여 이름 붙였다는 설 등이 있다.
<디지털밀양문화대전>
변한(弁韓) 12 소국 중 하나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에 속했던 이 지역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했으며,
995년(고려 성종 14) 밀주(密州)로 승격되었다.
<삼국지> <삼국사기 지리지>
1276년(충렬왕 2) 삼별초 군에 호응했다고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
계림부(경주)에 예속되었고, 이후 밀성현으로, 다시 밀성군을 거쳐
밀양부(密陽府)로 승격시켰다.
1895년(고종 32)에 대구부 밀양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의 관할이 되고, 1931년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1988년 밀양시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성모승천성당>
정해박해(1827년)를 피해 고향을 떠난 천주교 신자들이 명례에 다다라
교우촌을 이루었다.
이들은 강 건너 김해시 한림면과 생림면에 살던 교우들과도 교류했으며
병인박해 때 많은 교우가 잡혀갔지만 박해 후 다시 모여들었다.
♱ 복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 3. 31.)
<부활경당 벽면의 복자 신석복 두상–임옥상 작> <제단 벽면이 된 신 복자 생가터>
명례에서 나고 자란 신석복(申錫福)은 천주교인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신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 행상을 하던 신석복 마르코는
1866년 병인년 정월 하순쯤, 누룩을 팔러 웅천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
해 질 무렵 명례리 근처 가산동(김해군 이북면 가동)에서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포졸들은 신 마르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고,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장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마침내 가산동에서 그를 붙잡아 밀양으로 압송한 것이다.
다음날 대구로 이송된 이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으나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고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9일간 감옥에 있었고 세 차례 형문(刑問)을 받았다.
마침내 1866년 3월 31일(음 2월 15일)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신 마르코와 함께 체포된 밀양 백산(밀양군 하남읍 백산리) 출신 오 야고보도
3월 15일 4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 연재 ‘80. 대구 경상감영-감옥 터-형장 터. 2023.06.26.’에 상술.>
그 후 그의 아들 신영순(이냐시오)이 대구로 가서 돈을 바치고
부친의 시신을 찾아 고향으로 운구해 왔으나
명례에 많이 살고 있던 전주 이씨와 신씨 가문의 반대로 안장할 수가 없어서
낙동강을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 노루목(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가매장했다.
신 마르코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는 영예를 받았다.
신 복자 순교 후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신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리에서 살았다.
아들 이냐시오에게 아들 4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막내가 신순균 바오로(申順均 1910~1948) 신부다.
♤ 명례 본당 초대 주임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
<1888년~1890년 사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우도 신부와 함께 촬영한 페낭 신학교 조선인 신학생들.>
경남 지역 첫 본당인 부산 본당 주임 죠조(Jozeau, 趙得夏 1866~1894 모세) 신부는
부산의 서쪽을 전담하는 목적으로 명례공소를 설립했다.
신자들의 열망으로 명례공소는 1897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강성삼 라우렌시오(姜聖參, 1866~1903) 신부가 임명됐다.
현재 마산교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본당이고 경상도 전체에서는
대구 본당(1886년), 가실(왜관) 본당(1894년), 부산 본당(1890년)에 이은
네 번째 본당이다.
강성삼 신부는 충청도 홍산(鴻山 부여 지방의 옛 이름)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내포에 살았던 외조부 신 베드로는 영세한 후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다가
병인박해 때 홍주읍 포졸들에게 잡혀 해미에서 85세로 치명했고,
외숙인 신 아우구스티노도 23세 때 해미에서 순교했다.
강 라우렌시오는 1881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나가사키에서
코스트(Coste) 신부의 지도로 1년간 예비 신학교육을 받고
1882년 말레이반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하던 중 1890년에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친 뒤
1895년 부산에 파견돼 부산본당 주임 우도(Oudot 吳保祿 1865~1913) 신부에게
사목 실습을 받았다.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민덕효)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레오와 함께 국내 최초로 약현(현 중림동)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수품(1845) 이후 50년 만이었다.
1896년 9월 강 라우렌시오는, 오늘날 성지가 된 소금언덕에 집 한 채를 장만했으나
판 사람이 집을 비우지 않아 이듬해 1월에야 명례로 옮길 수 있었다.
강 신부가 1898년 1월 13일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다.
"지극히 존경하올 주교님, 절영도(현 부산 영도)에서 밀양으로 이사 온 다음
곧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늦게나마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집은 120냥에 샀습니다. 방이 셋뿐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 새로 집을 한 채 짓기로 작정했습니다. 네 칸짜리 집입니다만,
아직 착수는 하지 않았습니다. 땅이(추위가) 풀린 다음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천주교 마산교구 40년사’>
<성모승천성당 성전, 맨 위에 장미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강 신부는 이후 6년간 명례본당에서 온몸을 바쳐 사목에 힘썼다.
페낭에서 얻은 풍토병에 시달리면서도 불꽃 같은 정열로
밀양, 청주(현 진양), 양산, 언양 등 14개 공소를 담당했고,
교우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1900년 초부터는 병이 깊어져 자주 크게 앓아 공소 순방도 어려운 지경이었다가
1903년 9월 19일 3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강 신부의 묘비는 삼랑진 성당에 있으며, 묘소는 부산 성직자묘역에 있다.
<강 신부 약전은 이 연재 ‘39. 강성삼 신부를 배출한 성지 - 부여 내대 교우촌.
2020. 01.24.’에도 기술돼 있다.>
강 신부가 죽자 명례본당은 공소로 격하, 마산 본당에 속했다.
1926년 5월 10일 권영조 신부(權永兆 1901~1965, 마르코)가 부임,
다시 본당으로 승격됐으나 1930년 본당 소재지를 삼랑진으로 옮기며
또다시 삼랑진 본당 소속 공소가 됐고,
이후 진영 본당을 거쳐 현재는 수산본당 관할 공소로 있다.
♣ 명례성당의 성역화
<신석복 기념성당 성전>
강성삼 신부가 1898년에 건립한 명례성당은 택지 688평에 건평 53, 성당 17평이었다.
권영조 신부는 1928년에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지었으나
이 건물은 1936년 태풍으로 무너져버렸다.
1938년, 파괴된 성당의 잔해를 모아 성당을 다시 짓고 성모승천성당으로 봉헌했다.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 (명례리 1122)
2008년에 순교자 신석복의 생가터가 발견되었다.
명례리 1209번지, 성모승천성당의 바로 옆이다.
2010년 천주교 마산교구청에서,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사가 있던
생가터 일대를 매입하고, 이제민 신부를 임명해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이제민 신부는 소금 장수 신석복의 영성을 따라, 녹아 사라지는 소금처럼
순례자들의 마음에 스며드는 성지를 조성키로 했고,
설계를 맡은 승효상은 '녹는 소금'을 테마로 2018년,
현대 감각과 옛 선조의 발자취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성지를 완공시켰다.
소요 경비는, 전국의 후원자와 순례자들의 희생과 기여로 충당되었다.
<야외 제단과 마주 보고 있는 신석복 기념성당 성당 지붕.
그 위에 놓인 육면체 조형물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녹아서 음식의 맛을 돋보이게 하는 소금 결정체를 형상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