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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곡유고 제2권 / 시(詩)○칠언 율시(七言律詩) 32수
동주(東州)이자시(李子時)의 송행운(送行韻)을 차운하다. 병자년(1636)
평생토록 가장 친한 나의 벗 이동주여 / 平生最愛李東州
그대 보면 마음 기뻐 자주 수심 사라졌지 / 每見欣然數散愁
술 마실 땐 바닷물을 들이키는 고래 같고 / 飮酒壯如鯨吸海
시 지음엔 호탕하기 가을 맞은 송골매네 / 題詩豪似隼迎秋
당년에는 금방에 장원 함께 하였는데 / 當年金榜俱爲首
오늘에는 서관에서 이미 머리 하얘졌네 / 此日西關已白頭
패강에서 기다림에 그대는 안 오는데 / 相待浿江君不至
저녁 구름 천리 멀고 먼 산은 빽빽하네 / 暮雲千里遠山稠
[주-D001] 이자시(李子時) : 자시는 이민구(李敏求)의 자이며, 그의 호가 동주(東州)이다.[주-D002] 당년에는 …… 하였는데 : 금방(金榜)은 전시(殿試)의 합격자를 게시하는 방이다. 이민구는 광해군 4년(1612)에 증광시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김육은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려 문과의 응시자격을 박탈당하였다가 인조 2년(1624)에 증광시문과에 장원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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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은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려 문과의 응시자격을 박탈당하였다가->김육은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하였다가 문과의 응시자격을 박탈당할 뻔하였다.
*辛亥(1611,광해군3)。怪鬼鄭仁弘螫晦,退兩先生。時公爲掌議。主削仁弘儒籍。光海大怒。令錮首議儒。大臣爭之強。事得已。甲寅(1614,광해군6)冬。吟北門雨雪詩。隱于嘉平之潛谷。<龍洲先生遺稿卷之十四 / 誌 / 領議政潛谷金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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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집 제10권 / 기(記) / 서유일기 기유년(1729, 영조5)〔西遊日記 己酉〕
기유년 4월 2일 병자일. 아우 무(珷)와 함께 송경(松京) 유람을 하였다. 재종형 국보(國寶) 씨가 처가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 먼저 장단(長湍)의 세곡(細谷)으로 향했기에 3일에 송도(松都)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벗 김성지(金誠之)가 우거하고 있는 파주(坡州) 시곡(柴谷)에 미리 서신을 보내 만날 약속을 하였다.
이날 새벽에 돈의문(敦義門)을 나갔는데, 가랑비가 이따금 흩뿌리고 구름이 점철되어 있어 기뻐할 만하였다. 오래 가물어 단비가 적셔주기를 바라던 때라, 내가 동행에게 말하였다.
“하늘이 만약 비를 내린다면 비록 우리들이 비에 젖어 고생하더라도 농가에는 참으로 큰 다행일 것이요, 또한 폭포를 구경하는 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걸세. 다만 유의(油衣)가 없어 걱정일 뿐이지.”
그러나 비는 결국 내리지 않았다.
벽제(碧蹄)에서 점심을 먹고 25리를 가니 시곡(柴谷)이었다. 큰길에서 몇 마장(馬塲) 떨어져 있는 김지돈녕(金知敦寧) 어른댁에 들어가 찾아뵈었는데, 이민(而敏)도 있어서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지도 이미 행장을 꾸렸으므로 마침내 함께 말을 타고 30리를 가서 화석정(花石亭)을 방문하였다. 화석정은 강 언덕에 임하여 매우 높고 상쾌하였으며, 진달래가 언덕을 끼고 숲을 이루었는데 시들었어도 아직 볼만하였다. 사이에 배나무와 능금나무가 섞여 있었고, 철쭉도 바야흐로 활짝 피기 시작하였으며, 소나무, 전나무가 푸른빛을 보태어 꾸며주니 자못 그윽하고 고아하였다.
강은 북쪽에서 흘러와 정자 아래에 이르러 휘어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갔는데, 흘러온 곳과 가는 곳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고, 흰 모래는 강굽이에 평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눈앞 멀리까지 바라다보여서 천마산(天磨山)의 여러 봉우리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주인인 이환(李綄) 노인이 나와 보았다. 그의 아들 순익(舜翼)은 바로 진사 족숙(族叔)의 사위였으므로 족자(族姊)를 찾아가 만났다. 성지가 술병을 가지고 와서 조촐하게 한 잔 마셨다. 해가 지자 배를 타고 임진(臨津)으로 내려가 마을의 집에 투숙하였다.
3일. 날이 밝아서 나루를 건넜다. 안개가 강에 가득하여 하늘과 물이 서로 닿았으니, 또한 기이한 볼거리였다. 배 안에서 술을 조금 마셨다. 강을 건너 20리 가서 오목(梧木)의 객점에서 아침밥을 먹고 20리를 갔다. 판적교(板積橋)에서부터는 송경 땅이었는데, 산천이 밝고 곱기로는 한경(漢京)과 막상막하였다. 천수원(天壽院)의 옛터를 지나갔는데 계단의 주춧돌이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취적교(吹笛橋)와 남조원(南朝院)의 옛터를 지나서 탁타교(槖駞橋)를 거쳐 동현(銅峴)에 이르렀으니, 여기가 바로 부(府)의 남쪽으로, 국보 씨와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형의 종을 만나 형이 이미 도착한 것을 알고 마침내 숙소로 들어가 만나니, 서로 매우 기뻐했다.
점심을 먹고 남쪽으로 1리를 가서 경덕궁(敬德宮)에 들어가 숙묘어제비(肅廟御製碑)를 우러렀는데, 경덕궁은 땅이 평평하고 반듯하였고, 산줄기가 빙 둘러싸고 있었으니, 참으로 하늘이 낸 땅이었다. 뒷산 기슭에 올라가서 멀리 부내(府內)를 바라보니, 누대가 조밀하게 이어져서 작은 틈도 없었다. 저지교(猪支橋)를 지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사방 시골 마을을 바라보니, 경덕궁에 비교해서 보이는 것이 배나 많았다. 누각에는 숙묘의 어제가 있고 옆에는 큰 종이 있었는데, 가정(稼亭)이 명(銘)을 지었다.
한참을 바라보고서 연경궁(延慶宮) 옛터로 향했는데, 무너진 담과 부서진 주춧돌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황폐한 옛터가 몇 리에 이어져 있어서 당시 건축 구조의 거대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동쪽 못은 비록 논이 되었으나 지금도 알아볼 수 있었고, 서쪽에 치우쳐 있는 석대(石臺) 하나는 바로 이른바 간의대(簡儀臺)였다. 궁전 터는 저절로 매우 거대한 하나의 동부(洞府)를 이루고 있었고, 좌우에서 옹위하는 것들도 평온하게 둘러있었으며, 이 동부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없고, 송악(松岳)의 웅장하고 빼어남이며 용수(龍峀)의 밝고 수려함이며, 참으로 이른바 천연의 요새였다.
오래도록 배회하며 감개하다가 가장 높은 궁전터에 올라갔다. 부중(府中)의 노인 최군 수화(秀華)ㆍ수태(秀泰) 형제가 그 아들과 조카인 창복(昌福)ㆍ창조(昌祚)ㆍ창우(昌祐)를 거느리고 술을 가지고 와서 몇 잔 권하였다. 궁전 뒤의 언덕에 오르니 언덕 뒤가 높고 가파른 것이 천연의 요새 같아서 매우 기이하였다. 해가 이미 기울어진 가운데 동남쪽으로 가서 관덕정(觀德亭)에 올랐다. 관덕정은 바로 부의 사람들이 활쏘는 곳으로, 지대가 매우 높고 상쾌하였는데, 온 마을을 내려다보니 남문루에 비해 보이는 것이 또한 배나 되었다. 꽃 피고 버들 늘어진 누대는 그 경관이 매우 웅장하였다. 부의 사람 김첨지(金僉知) 여채(麗彩)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와서 성지에게 권하고 아울러 나에게도 권하였다. 정자 동남쪽의 산기슭은 ‘잠두(蠶頭)’라고 부르는데, 마을 위에 높이 군림하고 있어 그 경관이 정자보다 훌륭하였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1리를 내려가서
숭양서원(崧陽書院)을 찾아보았다. 서원은 바로 문충공(文忠公)의 옛 집터로, 화담(花潭)ㆍ청음(淸陰)ㆍ
잠곡(潛谷)ㆍ포저(浦渚)가 배향되어 있다.
잠시 배회하다가 남문 안 설선달(薛先達) 창후(昌垕)의 집에 가서 잠을 잤는데 대접이 매우 극진했다. 그 아들 보신(寶臣)은 업유(業儒)로, 더불어 얘기할 만하였다.
홍교수(洪敎授) 하제(夏濟)가 동현(銅峴)으로 보러 와서 낮에 머물다가 저녁에 다시 와서 만났다. 배천 군수(白川郡守) 이병연(李秉淵) 어른이 마침 이곳에 들르셨기에 우리가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더니, 또한 사람을 보내어 술과 게를 보내주시고 반드시 영통사를 보라고 권하셨다.
4일. 해가 뜨자 길을 떠났다. 주인 설보신과 최생 수태, 그리고 그의 조카 창우와 김군 여채가 함께했다. 남문을 나가 동쪽으로 선죽교에 들러 말에서 내려 한참 방황하며 강개하여 충렬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다리 옆 작은 비석에 쓰인 ‘善竹橋(선죽교)’ 석 자는 한호(韓濩)의 글씨였고, 성인비석(成仁碑石)이라고 적힌 작은 글씨는 매우 졸렬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을 지나 탄현(炭峴)을 넘었다. 여기서부터 장단(長湍) 땅에 속한다고 하였다.
귀법사(歸法寺) 옛터 앞으로 샘과 바위가 매우 맑고 상쾌하였다. 하얀 너럭바위와 평평한 못이 굽이굽이 앉을 만하였고, 물을 따라서 올라가니 나아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다만 수목이 무성하지 않고 바위 봉우리가 빙 둘러싼 듯한 모습이 적은 것이 흠일 뿐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곳을 골라, 늘어 앉아 유상(流觴)의 음주를 하면서 “귀법사 냇가에서 술잔을 보내던 일이라네[歸法川邊踞送巵]” 시를 읊으며 오래도록 돌아가기를 잊었다.
절에는 황폐한 터만 있었을 뿐인데, 시냇가에 한 쌍의 석당(石幢)과 그 동쪽의 탑 하나만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곳은 부내(府內)에서 10리 떨어져 있고, 동쪽으로 화곡서원(花谷書院)까지 채 몇 리 되지 않는다. 화곡서원은 바로 화담(花潭)의 옛집으로, 사암(思菴)ㆍ초당(草堂)ㆍ습정(習靜)을 배향하였다. 자리한 곳이 극히 그윽하고 고요하였으며 빙 둘러 안은 산봉우리들이 점철되어 매우 생기가 있었으니, 실로 하늘이 큰 사람을 위하여 〈고반(考槃)〉의 땅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서원의 뒤 바위에는 선생의 의관을 보관한 곳이 있었고, 약간 서쪽으로 수십 보 되는 곳에 서사정(逝斯亭)이 있었다. 정자 아래가 곧 화담(花潭)이었으니, 시냇가에서 발을 씻으면서 술을 가져오라 하여 서로 권하였다. 시내와 못은 굽이지고 꺾여서 자못 그윽하고 오묘하였으며 너럭바위는 매우 기이하였으며, 시내 남쪽 푸른 절벽은 꿈틀거리는 듯하여 완상할 만하였다. 초목이 우거졌어도 아직 남은 꽃이 있었으나 가뭄 끝이라 물이 적은 것이 흠일 뿐이었다.
날이 정오가 되어 말을 타고 시내를 따라 올라갔다. 한 굽이를 돌아서 짧은 폭포를 만났는데 매우 아름다웠고, 옆에는 너럭바위가 매우 맑고 깨끗하여 앉을 만하였으므로 말에서 내려와 앉아 폭포를 즐겼다. 위의 못에서 물이 떨어져서 아래 못이 되었는데 제법 깊었다. 바위는 하얗고 물은 맑았으며, 폭포 바닥엔 모래며 자갈조차 없어 부딪히며 흐르는 모습이 마치 구슬을 흩고 눈을 뿌리는 듯 매우 기이하여 이를 즐기느라 떠나는 것을 잊었다. 또 술을 조금 마시며 최생 등 여럿에게 물었는데, 말하기를 여기에는 붙여진 이름이 없다고 하기에 매우 애석히 여겨 이름을 지어주기를 ‘수옥담(漱玉潭)’이라고 하였다.
길 동쪽 봉우리 정상에 두 바위가 서로 겹쳐 있었는데, 그 위의 것은 위태롭게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북을 걸어놓은 것 같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고암(鼓巖)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산길이 자못 그윽하고 깊었는데, 몇 리를 가자 영통동(靈通洞) 어귀가 나왔다. 너럭바위가 가지런하여 계단과 같았으며 표면이 네모반듯하였는데, 폭포수가 그것을 덮으며 떨어져서 못이 되었다. 사면 바위에 앉을 만한 곳이 많았으므로 말에서 내려 잠시 쉬었다.
서로 이르기를, “여기가 참으로 아름답고 묘하기는 하나 바위가 그다지 희지 않은 것이 흠이구나. 생각건대 이 상류에 반드시 진경(眞境)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리쯤 가니 과연 바위가 점차 깨끗해지고 물이 점차 맑아지며, 산봉우리가 더욱 그윽하고 깊어졌다. 성지가 앞에서 이르기를 “진경이 과연 여기에 있도다.”라고 하자 사람들도 마침내 말에서 내려 시내를 따라가 보니, 물이 바위 위로 흘러가며 부딪혀서 도지개를 이루었고 구불구불 격하게 쏟아져서 몇 장의 와폭(臥瀑)이 되었다. 형세가 이미 기이한데, 물이 떨어지는 곳에 배 모양의 석담(石潭)이 이루어져 물이 가득 고인 뒤에야 바야흐로 흘렀다.
그 남쪽 너럭바위는 매우 평평하고 맑고 반지르르해서 앉을 만했다. 바위 병풍이 그 뒤를 지켜 서 있었는데 네모반듯한 것이 마치 먹줄을 사용한 것 같았다. 높이는 몇 자 됨직하고, 그 위도 평평하고 드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하였으며 빛깔은 또한 매우 희었다. 무릇 그 상하좌우에 널린 암석 중 단정하고 깨끗하여 앉을 만한 것과, 물 중 맑고 소리가 영롱하여 즐길 만한 것들이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서로 쳐다보며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배천이 참으로 사람을 속이지 않았구나.” 하였다. 바위 위에 앉아 잔을 씻어 함께 술을 마시다 여기에도 이름이 없는 것을 애석히 여겨 못은 옥병(玉屛), 폭포는 와룡(臥龍)이라 이름 짓고자 하였다.
사람들이 영통사(靈通寺)가 앞에 있다면서 우리 보고 어서 가라고 재촉하기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영통사에 올라가도 여기보다 나은 곳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한참 있다가 말에 올랐는데 몇 리 안 가서 영통사가 나왔다. 영통사에 백 무(武)쯤 못 미쳐서 한 굽이의 수석(水石)을 만났기에 내려가 앉으니, 또한 맑고 상쾌하여 기뻐할 만하였다. 생각건대 이곳이 바로 ‘흙다리[土橋]’이며 시내 서쪽에 있는 오래된 섬돌은 필시 채수(蔡壽)의 기(記)에 나오는 ‘서편의 누각’일 것 같아서, 절의 승려에게 물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조금 있다가 절로 들어갔다. 뜰 앞에는 세 개의 탑이 있고, 그 동쪽으로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가 있었는데, 비록 전란을 겪으면서 벗겨지고 파손되었으나 파손되지 않은 곳은 자획과 돌의 결[石理]이 새것 같았다.
절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절의 승려 탄기(坦璣)와 더불어 옥병담(玉屛潭)의 승경을 이야기하다가 아직까지 아름다운 이름이 없는 것을 애석해하자 탄기가 말하기를, “이곳 이름은 백석담(白石潭)으로, 바위 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못 보셨습니까?” 하였다. 우리들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아까 한참 동안 즐기며 놀았는데, 만약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면 어찌 보지 못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그곳에 빠뜨린 승경이 있지 않을까 싶어 돌아오는 길에 성지와 더불어 다시 못가로 향하였다. 사람들은 곧장 백화담(百花潭) 가는 길로 향하였고, 오직 최군 창우만이 따라왔다. 못 가까운 곳에서 말을 내려 시냇가 길을 따라 내려가노라니 구경하지 못했던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 폭포 위에서 옥병담을 보니 과연 ‘白石潭(백석담)’ 석 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비바람에 닳고 씻기어져 분명치 않은 탓에 처음에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또 잠시 시내를 따라가며 희롱하다가 동북쪽으로 백화담 길을 따라갔는데 백화담은 여기서 겨우 3리 떨어져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숲과 바위가 수려한데 사람들이 시냇가에 흩어져 앉아 있었으므로 그곳이 백화담인 것을 알았다. 얼른 내려가 보았더니, 바위 형세가 자못 웅장하였고 경사진 데가 많았다.
폭포 위는 유달리 빼어났으나 다만 휘감아 안은 그윽하고 오묘한 정취가 없었다. 폭포 위 너럭바위에는 뚫린 흔적이 예닐곱 개 있었는데 기둥을 세웠던 흔적 같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붙들고 잡아당기며 한 층을 내려가니 바위 형세가 들쭉날쭉하고 여러 갈래 물길이 그 사이로 흘러서 참으로 유상(流觴)에 합당하였으므로 마침내 다시 술잔을 흘려보내며 술을 마셨다. 옆에는 자못 숲이 우거지고 주위가 평온하여 상류보다 훨씬 나았다.
여기서부터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다시 시내를 버리고 나무꾼들의 길로 내려갔는데, 길이 험난하여서 걷다가 말을 타다가 한 2리쯤 가서 구동현(嫗洞峴)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대흥동(大興洞)의 큰길을 만났다. 여기서부터 두 산이 길 양편에 서 있었는데, 숲의 나무가 자못 무성하고, 옆에 오래된 석벽과 층층의 바위가 많아서 볼만하였다. 그늘진 곳에 핀 진달래는 아직 시들지 않아서 여린 잎과 사이사이 섞여 있었는데, 선명하고 고와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말에서 내려 괴정(槐亭)에서 쉬었다. 기이한 바위들이 길 왼편으로 우뚝하고, 꽃나무가 그것을 덮고 있는 광경이 기뻐할 만하였다. 김군이 오매차(烏梅茶)를 권하였다. 무릇 7, 8리를 가서 남문(南門)에 올랐다.
앞서 큰길에서 남문을 바라보았을 때 매우 위태롭고 가팔라서 부여잡고라도 따라갈 만한 지름길조차 없고, 길을 한참 우회해 올라가야 할 것 같기에 마침내 말을 탔다. 남문루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창해는 끝이 없었고 운무는 드넓고 아득했다. 동쪽에 있는 인달봉(仁達峰)과 금신봉(金神峰)은 성거산(聖居山)에 속하고, 서쪽에 있는 자라봉(者羅峰)은 천마산에 속하는데, 모두 더위잡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그 높이를 가히 알 수 있었다. 성지가 이르기를, “어제 인달봉을 보았을 때 마치 하늘에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어느새 이 가운데 앉아있으니, 사람의 힘이란 참으로 이르지 못할 곳이 없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이 덕을 증진시키고 학문을 하는 데 보탬이 되기에 어찌 부족하겠는가.” 하였다. 북쪽으로 성안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니 오직 동장대(東將臺)와 정광봉(淨光峰)만이 마주하여 우뚝 서 있었는데, 그 사이에 박연폭포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엔 그길로 박연폭포에 가보려고 했는데, 대흥동에 이르러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도 저물고 말도 지쳐서 가기 어렵다고 하기에 절 앞의 기담(妓潭 일명 석문담(石門潭))에 앉았다가 이윽고 또 한 굽이를 내려와서 청심담(淸心潭) 가에 앉아 조촐하게 술을 마셨다. 해 진 후 돌아와 대승당(大乘堂)에 잠시 앉았다가 약사전(藥師殿)에서 잤다.
영통사에 수백 보 못 미쳐 있는 시냇가에 커다란 바위들이 쌓여 있었는데, 마치 독[甕]을 늘어세워 포개놓은 것 같았다. 물이 그 사이로 흘러 혹은 폭포를 이루고 못을 이루었는데 그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매우 웅장하였다. 폭포 아래 바위 사이로 10여 자나 되는 틈이 있어 물이 자못 깊이 고여 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여긴 용이 누웠던 곳이라 용암(龍巖)이라고 이름하였다.”라고 했으나 믿을 수는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말을 내려 내려다보니 오싹하게 사람을 두렵게 하였다. 탄기는 영통사에서부터 따라와 대흥동의 숙소에 이르렀다가 다음 날 새벽에 하직하고 돌아갔다.
5일. 새벽에 일어나 보니 하늘빛이 어두컴컴하여 비올 기미가 있었는데, 동행자들도 모두 분명 비가 내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서울을 출발한 뒤로 여정 내내 말한 것이 모두 비를 바라는 말이었으나, 가뭄이 너무 심해 끝내 감히 바라지는 않았다. 어제 성지와 말하기를, “우리들 중에 만약 한이부(韓吏部)와 같은 자가 있다면 어찌 천마산(天磨山)의 신령을 감동시켜 한 차례 비를 청해 얻지 못하겠는가?” 하였는데, 오늘 아침 보슬비가 내렸어도 또한 가문 하늘의 예삿일로 여기었다.
시종을 시켜서 관음사(觀音寺)에 아침밥을 차리도록 하고, 술을 조금 마시고 철쭉 지팡이를 들고 걸어서 석문담(石門潭)과 청심담(淸心潭)을 지나갔다. 청심담에서부터 아래로 백여 보 되는 곳에 마담(馬潭)이 있었다. 폭포가 거의 몇 장이나 됨직한 석벽에서 떨어져 석담(石潭)이 되었는데 자못 깊고 푸르렀으며, 쌓인 모래며 자갈도 없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용마(龍馬)가 여기에서 나왔는데, 지금도 신물(神物)이 있을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바위에 앉아서 폭포를 보니 매우 상쾌하고 바위도 평평하기에, 잠시 앉았다가 말에 올라 다시 2리쯤 갔다. 길 왼편으로 낚시터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가 물가에 있었는데, 너무 미끄러워 발을 딛기가 어려웠으니, 여기가 바로 태종대(太宗臺)였다. 바위 좌우로 작은 돌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왼편 바위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른편 바위 위에는 진달래가 한창이라 또한 볼만하였다.
관음사와 구담(龜潭)을 스쳐 지나 곧장 박연폭포로 달려가니 겨우 1리 밖에 되지 않았다. 상담(上潭)에 잠시 앉아 있다가 북문을 나와 범사정(泛槎亭)에 이르렀다. 가뭄 뒤라 폭포가 아직 공중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것을 보고 서로 돌아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함께 마셨다. 한참 앉아 있다가 유의를 걸치고 돌아왔다.
관음사에서 아침밥을 먹고 관음굴을 구경하였다. 바위 봉우리 밑이 움푹 패여 마치 집 같았고, 처마를 덮어서 세 석불(石佛)을 안치하였다. 옆에는 여러 나한(羅漢)들이 새겨져 있었고, 굴 위에는 진달래가 한창 만발해 있었다. 비가 퍼붓듯 내리므로 내가 동반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비는 진실로 산신령이 지각이 있음이니, 한이부가 형산(衡山)의 구름을 걷히게 하였다는 말도 참으로 빈말이 아닐세.” 하였다. 빗줄기가 종일토록 거세어지기에 저녁밥 들이기를 재촉하여 비를 무릅쓰고 박연폭포를 구경하려고 하였으나, 승려들이 말하기를, “비가 지나간 후에 폭포의 기세가 바야흐로 웅장하니, 잠시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우리는 “그럴 리가 있겠나. 산의 물은 쉬이 빠지니, 비가 그치기 전에 가야 한다.”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유의를 걸치고 말에 올라 북문을 나섰다.
물이 없던 시내가 지금 모두 크게 불어나니, 온 골짜기가 시끌벅적 요란하여 마치 사방에서 뇌성벽력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내가 국보 형에게 소리쳐 말하기를, “박연폭포는 안 봐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진흙탕 길을 넘고 건너 폭포 아래에 이르자 국보 형과 무(珷)가 먼저 말에서 내려 크게 외쳤다. 나 또한 뒤따라 이르러서는 다른 말이 나올 겨를이 없이 다만 연이어 외치기를, “이 무슨 장관인가! 이 무슨 장관인가!”라고 할 뿐이었다. 대개 폭포는 - 몇 줄 결락 -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졌으므로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함께 마시며 저녁때까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시냇물이 불어 다리가 무너질까 염려하여 마침내 돌아오는데, 말에 오르기 전에 서너 번이나 돌아보니, 잠깐 새 그 웅장함이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밤에 들어도 빗소리는 한결같더니 한밤중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쳤다. 다들 폭포 구경한 일을 떠들어대며 천하제일의 기이한 일로 여겼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지역의 사람들도 이와 같은 때를 보기란 쉽지 않다고 하였다.
이날 식후에 교영(喬營)에서 서찰이 왔는데, 일행으로 하여금 후서강(後西江)을 따라와서 만나고 가라는 것이었다. 대개 송도는 교영에서 하루 여정을 넘지 않으나, 나는 기제사(忌祭祀)가 있어 장차 헤어져야 했기에 매우 섭섭했다. 당숙이 술과 꿩을 보내주어서 꿩고기를 굽고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함께 마셨다. 북문을 나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낭떠러지가 손바닥처럼 가팔랐는데, 그 아래로 곧장 떨어지는 물은 마치 수백 자의 하얀 비단 폭을 걸어놓은 것 같았다. 이 또한 아침에는 보지 못하다가 비 갠 후에야 보게 된 것이다.
6일. 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오다 그치다 하였다. 급히 말을 타고 박연폭포로 가니, 어제에 비해서 다소 줄었으나 폭포는 하얗고 못은 맑아서 어제보다 훨씬 뛰어났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바위와 나무의 기색이 더욱 싱그러웠다. 한참 있다가 말에 올라 돌아오자니 마음이 망연하여 돌아보며 차마 작별하지 못하였다. 상담 가에서 잠시 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더욱 오싹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걸어서 구담을 찾아갔다. 구담은 관음사 앞에 있었으니, 바로 박연폭포의 상류였다.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 내려와서 못을 이루었는데 자못 깊고 넓었다. 못 아래에는 거북과 매우 흡사한 모습의 바위가 있었는데, 머리가 담을 향해 있으므로 이로써 이름한 것이다.
관음사에서 아침밥을 먹고 드디어 산을 나왔다.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려 거의 지척도 구별할 수 없었고, 시내 다리가 물에 잠겨 매우 위태로웠으므로 여러 번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갔다. 마담에 이르니 맹렬하게 뿜어내는 폭포의 기세가 매우 웅장했는데, 바위를 온통 뒤덮으며 물거품을 날리고, 부딪쳐 튀어 오르며 온 못이 다 용솟음쳤기에 그곳이 못인 줄 거의 알지 못할 정도였다. 못 아래 폭포와도 서로 접해 있어 그 기세가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였다. 나와 사람들이 큰소리로 통쾌하다 외치며 말을 멈추고는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길 가는 내내 물소리가 우레 치듯 울려 속이 무척이나 후련하였다.
석문담(石門潭)에 이르니, 폭포가 가로로 뻗어 흐르며 거대한 바위 위를 내달리는데, 그 웅장함은 마담보다도 더하였으나, 다만 기세의 빼어남이 다소 덜할 뿐이었다. 안개가 짙게 끼어 말 위에서 술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남문에 이르니 뿌연 안개가 시야에 가득하여 천지가 아득히 하나가 되었다. 내가 웃으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어제의 비는 대해(大海)가 불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관음사의 승려 준찬(俊贊)과 정택(貞澤)이 중영(中營) 앞에 이르러 하직하고 돌아갔다. 오도현(吾道峴)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부터 구동(嫗洞)이 대로와 만난다. 대로를 따라 내려가니 길 양편으로 돌을 깎아 만든 길이 매우 가지런하였고, 시내를 가로질러 이따금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런 길이 몇 리 되었으니, 이곳은 분명 전조(前朝)의 연로(輦路)였을 것이다. 인력의 극심한 수고로움을 함께 개탄하고, 사치와 황음의 무도함을 탄식하였다. 성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전조가 망하려 할 때 만든 것일 게다.” 하였다.
여기서부터 백화담(百花潭) 동구를 지나 멀리 영통동 어귀를 바라보니 모두 길 왼편에 있었다. 오도현에서부터 수옥담(漱玉潭)까지는 겨우 10리 길이었다. 수옥담에 못 미쳐 길 왼편의 석벽은 평평하게 깎이어 가히 수백 보는 됨직하였는데, 모두 갈라진 틈이 있어서 마치 층지어 배치하고 줄지어 세운 것 같기에 이것이 바로 추암(皺巖)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전에 영통동에 들어갈 때 또한 여기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수옥담에서 비를 만났다. 옥 같은 물이 온 바위를 뒤덮으며 흘러내리는 모습이 수옥(漱玉) 아님이 없었으므로 도리어 그리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을 멈추고 한참 있었더니 마음이 매우 상쾌하였다. 서사정(逝斯亭)에 이르니 시냇물이 온갖 바위들을 다 덮어 흐르고 있었으며 낚시터 아래 맑은 못은 평평하고 넓었으니, 웅덩이를 가득 채운 승경은 앞에 본 것보다 몇 배 이상 더 뛰어났다. 바위 위에 한참 앉아서 술을 몇 잔 마셨다.
귀법천(歸法川)을 지나가는데 물이 평평한 못에 가득 차고 폭포는 하얀 너럭바위를 덮어서, 경색이 그 경계에 걸맞았다. 말에서 내려 전날 유상(流觴)했던 못 옆에 앉았는데, 늘어앉아 유상하던 바위는 이미 큰 물결 속에 잠겨 있었다. 바위에 앉아 조촐하게 술을 마셨다. 평야를 지나가면서 최변(崔弁)에게 앞으로 가서 말을 달리게 하니, 이 또한 멋진 볼거리였다.
성균관(成均館)으로 돌아와 말에서 내려 명륜당(明倫堂)으로 들어가니, 건물의 밝고 고움과 뜰의 숙연하고 통창함은 태학(太學)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동부(東部)에 있는 김첨지의 집에 들어갔는데 골짜기 이름이 어은동(於隱洞)이라 하였다. 점심을 먹고 길을 떠나 남문 밖에 이르러, 국보 형 및 아우 무와 헤어졌다. 판적교에 못 미쳐서 이슬비를 만나 유의를 걸치고 몇 리를 갔다. 염현(拈峴)의 발막(撥幕)을 지나 15리를 가니 오목점(梧木店)이 있었는데 들어갔을 때는 해가 이미 진 뒤였다.
이날 송도 사람 김광침(金光琛)과 최창우 등이 화장사(華藏寺)로 가려고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우리가 애초에 박연폭포에서 화장사로 가서 패엽(貝葉)과 전단(旃檀)을 보기로 계획하였기 때문이었으나, 아침 비가 개지 않자 김첨지 등이 길이 험하고 시내가 깊다며 만류하는 탓에 가지 못하였다. 성지가 이를 자못 한스러워하기에 내가 풀어주며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일이란 원만하기가 매우 어렵다네. 우리들의 오늘 유람은 설령 우리에게 그 땅을 직접 만들어보게 했더라도 이처럼 되었다는 법은 없을 것이네. 원컨대, 화장사 하나쯤은 보류하여 하나의 결점으로 남김으로써 조물주의 질투를 풀어준다고 해서 해될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성지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 말이 옳다만, 이제 와 이런 말을 들으니 더욱더 못 본 것이 한스럽네. 또 여러 사람이 우리들 때문에 괜히 오가게 된 것도 한탄스럽다네.” 하였다.
김여채(金麗彩)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오목점에 투숙하였는데, 가는 길에 이슬비를 만났다.
7일. 흐림. 새벽에 출발하여 임진강을 건너 화석정에 올랐다. 비 온 뒤의 강산은 더욱 아름다웠으니 철쭉이 만개하였고 녹음이 이미 우거져 있었다. 주인이 술을 준비해서 대접하였다. 풍계사(豐溪祠)에 들러 배알하였다. 풍계사는 파주 향교 옆에 있는데, 바로 돌아가신 조부 및 이공(李公)과 박공(朴公)을 함께 제향하는 곳이라, 그날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옷소매를 적시었다.
정오에 시곡(柴谷) 김장(金丈) 댁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성지와 작별하였다. 창릉점(昌陵店)에서 말을 먹이고, 도성 서쪽의 종갓집에 돌아오니 해가 막 진 때였다.
[주-D001] 기유년 : 작자 오원이 30세 때이다. 오원은 이해 3월에, 정언으로서 이광좌(李光佐)의 죄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특명으로 삭직되었다.[주-D002] 아우 무(珷) : 오원의 서제(庶弟)이다.[주-D003] 국보(國寶) 씨 : 국보는 오박(吳璞)의 자이다. 오박은 오원의 6촌 형으로 좌승지를 지냈다고 한다. 그 아들 오재희(吳載熙, 1727~1813)는 무과 출신으로 황해도 병마절도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이재(李縡)의 《도암선생문집》 권14에 〈답오국보박(答吳國寶璞)〉이 실려 있다.[주-D004] 김성지(金誠之) : 김치일(金致一)의 자가 성지인 것 같다. 김재로(金在魯)의 장자로 인천 부사(仁川府使)와 장악원 정(掌樂院正), 제조를 역임하였다. 이천보(李天輔)의 《진암집(晉菴集)》 권1 시에 〈연경으로 가는 김성지 치일을 보내며 전겸익의 목재집을 사오기를 부탁하다[送金誠之 致一 燕行 乞購錢牧齋集]〉에 그 이름이 나온다.[주-D005] 마장(馬塲) : ‘리(里)’와 같은 뜻으로 10리가 안 되는 거리를 이를 때 쓴다.[주-D006] 김지돈녕(金知敦寧) : 김재로(金在魯, 1682~1759)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ㆍ허주자(虛舟子)이다. 김극형(金克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징(金澄), 아버지는 우의정 김구(金構)이다. 지돈녕(知敦寧)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돈녕부(敦寧府)의 정이품 벼슬이다. 조선 시대 때,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관청이다. 수장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정일품의 명예직이며 주로 국구(國舅)나 왕비의 형제들이 맡았다.[주-D007] 이민(而敏) : 김약로(金若魯, 1694~1753)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민,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다. 할아버지는 김징(金澄), 아버지는 대제학 김유(金楺)이며 동생이 김상로(金相魯)이다. 김재로와 사촌간이다.[주-D008] 화석정(花石亭) : 지금의 파주시 파평면(坡平面) 율곡리(栗谷里)의 임진강변에 위치한 정자이다. 1443년(세종25)에 율곡의 5대조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건립하였는데, 기화요초와 소나무와 괴석들을 많이 갖추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피폐해졌는데 뒤에 율곡이 중수하고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이곳에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피난가던 선조(宣祖)가 한밤중에 강을 건너기 위해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는데, 그 후 80여 년간 빈터로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14)에 율곡의 종증손(從曾孫)인 이후지(李厚址)ㆍ이후방(李厚芳)이 중건하였다. 《宋子大全 卷145 坡州花石亭記》[주-D009] 천마산(天磨山) : 송도(松都)의 진산(鎭山)인 송악산(松嶽山) 북쪽에 있는데, 여러 봉우리가 높이 하늘에 솟아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엉겼기 때문에 천마(天磨)라 이른다고 한다.[주-D010] 이환(李綄) : 화석정(花石亭)의 주인으로 율곡의 후손이다. 《국역 국조인물고》 제51권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의 ‘이경진(李景震)’에 의하면, 율곡 이이의 종증손(從曾孫)인 이후방(李厚芳)의 아들로 백부인 이후지(李厚址)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주-D011] 족숙(族叔) : 유복친에 들지 않는, 같은 일가의 아저씨뻘 되는 남자를 말한다.[주-D012] 족자(族姊) : 족숙(族叔)의 딸로서 작자 오원보다 손윗누이가 되므로 이른 것이다.[주-D013] 한경(漢京) : 한강이 있는 도읍으로 서울을 가리킨다.[주-D014] 천수원(天壽院)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지명으로, 천수사(天壽寺)가 있었던 곳이다. 천수사는 고려 숙종 때 지은 숙종의 원찰로 예종 때 크게 중창되었다. 고려의 왕들이 자주 행차하였고, 주변의 풍치가 아름다워 놀이터나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는데 고려의 패망과 함께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조선 시대에는 역원(驛院)을 만들어 천수원이라 하였다.[주-D015] 취적교(吹笛橋) : 취적봉 기슭으로 흐르는 용둔개울에 있는 다리로, 천수사 서쪽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김진사라는 사람이 피리를 잘 불어 달 밝은 밤에 뱀 모양의 두건을 쓰고 피리를 불다가 뱀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주-D016] 남조원(南朝院) : 미상.[주-D017] 탁타교(槖駞橋) : 개성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이다. 본래의 이름은 만부교(萬夫橋)였는데, 고려 태조 25년(942)에 거란이 고려와 수교하기 위해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내자,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교린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를 이 다리 밑에 매어 놓아 굶겨 죽인 데서 유래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上》[주-D018] 경덕궁(敬德宮) : 개성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잠저(潛邸)로, 즉위 전에 살았던 사저(私邸)이다. 개성 중부 남계방(南溪坊), 속칭 추동(楸洞)에 위치하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경덕궁이라 하였다. 태종도 이곳에서 살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주-D019] 숙묘 어제비(肅廟御製碑) : 1693년(숙종19)에 숙종이 송도에 행차하여 직접 비문을 짓고 이를 구궁(舊宮)에 세우도록 명하였다. 《林下筆記 卷13 文獻指掌編》[주-D020] 저지교(猪支橋) : 저우교(猪友橋)인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에 저우교(猪友橋)로 나와 있는데, 남대문 밖에 있고 물은 흑천(黑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풍우교(楓友橋)는 남대문 밖에 있는데, 물은 백천(白川)이라 한다고 하였다.[주-D021] 숙묘의 어제 : 남문루의 어제(御製) 현판(懸板)을 말한다.[주-D022] 가정(稼亭) : 이곡(李穀, 1298~1351)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이다.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고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여,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치고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고려에 돌아와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지내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주-D023] 누각에는 …… 지었다 : 《해동역사(海東繹史)》 권32 〈석지(釋志)〉에 의하면, 송도 남문루의 종은 연복사(演福寺)에 있던 종으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모르며, 종의 윗부분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명이 새겨져 있는데 자획이 뚜렷하여 판독할 수 있다고 하였다.[주-D024] 연경궁(延慶宮) : 개성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있었던 고려 시대의 정궁(正宮)으로, 명당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정전(正殿)인 건덕전(乾德殿)을 비롯하여 중광전(重光殿)ㆍ천복전(天福殿) 등의 전각과 구정(毬庭)으로 불리는 넓은 뜰이 있었다. 1171년(명종1) 화재로 소실되었고 몽고의 침입으로 재차 소실되었다가 충선왕 때 중수되었으나,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소실되었다.[주-D025] 간의대(簡儀臺) : 천문관측기구의 하나인 간의(簡儀)를 설치한 관측대를 말한다. 간의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 기구이다.[주-D026] 동부(洞府) :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선경(仙境), 별천지를 뜻한다.[주-D027] 송악(松岳) : 고려의 옛 도읍인 송도(松都)의 진산(鎭山)이다. 산 남쪽 기슭에 고려의 왕궁터인 만월대(滿月臺)가 있다.[주-D028] 용수(龍峀) : 용수산(龍首山)이라고도 한다. 개성부 남쪽 2리에 있는데 외성(外城) 터가 있다.[주-D029] 관덕정(觀德亭) : 사정(射亭)으로 활터에 세운 정자 이름이다. 관덕(觀德)은 활쏘기를 뜻하는 말이다.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활쏘기는 진퇴(進退)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禮)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안정되고 든든하며, 이런 다음에야 과녁을 맞힐 수 있다. 이래서 덕행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주-D030] 온 마을 : 원문의 ‘萬井’은 만리(萬里)로, 넓은 땅을 말하는데, 고대에 지방 1리(里)의 땅을 1정(井)이라 하였던 데서 유래하였다.[주-D031] 김첨지(金僉知) : 첨지(僉知)는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주-D032] 숭양서원(崧陽書院) : 정몽주(鄭夢周)를 제향하는 서원이다. 1573년(선조6) 개성 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을 기리기 위해 개성(開城) 선죽교 위 정몽주의 집터에 서원을 세우고 문충당(文忠堂)이라 하였다. 1575년에 숭양(崧陽)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1668년(현종9) 김상헌(金尙憲), 1681년 김육(金堉)과 조익(趙翼), 1784년 우현보(禹玄寶)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에 공헌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로, 개성을 대표하는 서원이었다.[주-D033] 문충공(文忠公) : 정몽주(鄭夢周, 1337~1392)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공이다.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였고 명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예문관 대제학, 문하 시중을 역임하였다.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되었다.[주-D034] 화담(花潭) : 서경덕(徐敬德, 1489~1546)으로,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ㆍ복재(復齋)이다. 개성 출신으로, 1519년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의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1531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송대의 주돈이(周敦頤)ㆍ소옹(邵雍) 및 장재(張載)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제창하였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다. 1575년(선조8)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ㆍ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주-D035] 청음(淸陰)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동생이다. 1596년(선조29) 과거급제하였고, 1611년(광해군4) 동부승지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 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 때 파직되어 안동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이조 참의에 발탁되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폈고, 1639년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간 억류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등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청음전집(淸陰全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주-D036]
잠곡(潛谷) : 김육(金堉, 1580~1658)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ㆍ회정당(晦靜堂)이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1609년(광해군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린 것 때문에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자, 경기도 가평의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 이때부터 호를 잠곡이라 하였다. 서인의 반정 후에 등용되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영의정을 지냈다. 저서에 《잠곡유고(潛谷遺稿)》 등이 있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 등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37] 포저(浦渚) : 조익(趙翼, 1579~1655)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ㆍ존재(存齋)이다.[주-D038] 설선달(薛先達) : 선달(先達)은 조선 시대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주-D039] 업유(業儒) : 유학을 닦는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적자(嫡子)는 유학(幼學), 서자(庶子)는 업유로 구별하였다. 업유는 손자나 증손 대에 와서야 유학(幼學)이라 불리게 된다. 숙종 22년(1696)에 정하였다.[주-D040] 홍교수(洪敎授) : 교수(敎授)는 조선 시대에 한성(漢城)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鄕校)에 파견되어 유생(儒生)들을 가르치던 종6품의 관직을 말한다.[주-D041] 배천 군수(白川郡守) 이병연(李秉淵) : 배천은 황해도 배천군을 말한다.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槎川)ㆍ백악하(白嶽下)이다. 시에 뛰어나 영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며 김창흡, 정선(鄭敾), 조영석(趙榮祏) 등과 함께 진경시(眞景詩) 문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배천 군수, 삼척 부사 등을 지내고 한성 우윤으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사천시초(槎川詩抄)》가 있다.[주-D042] 한호(韓濩) : 1543~1605.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峰)ㆍ청사(淸沙)이다.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 현령(歙谷縣令)과 가평 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경기도 고양의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 개성의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평양의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의 글씨를 썼다.[주-D043] 성인비석(成仁碑石) : 선죽교에 세워진 비석으로, ‘고려 시중 정선생 성인비(高麗侍中鄭先生成仁碑)’라고 씌어 있다.[주-D044] 성균관(成均館) : 탄현문(炭峴門) 안에 있다. 대성전(大聖殿)에는 오성 십철(五聖十哲)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전 앞에 명륜당(明倫堂)이 있다. 《東國輿地勝覽》[주-D045] 장단(長湍) : 경기도의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로 개성의 동쪽, 파주의 북쪽에 위치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2》[주-D046] 귀법사(歸法寺) : 963년(광종14)에 왕이 대원(大願)을 발하여 창건한 국찰로, 송악산 아래에 이 절을 짓고 친히 승려들을 공양했으며, 균여(均如)를 초대 주지로 삼았다. 당시의 실력자 최충(崔冲)은 이곳에서 예비 등용문인 하과(夏課)를 베풀었으니, 매년 여름에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한 선비들을 모아서 구경삼사(九經三史)를 강의하는 한편, 시로써 서로의 실력을 겨루게 하였다. 이 절은 광종 이후 목종ㆍ선종ㆍ의종 등 여러 왕의 행차가 잦았으며, 중요한 법회의식이 거행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국찰이었다.[주-D047] 유상(流觴) : 유상곡수(流觴曲水)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주-D048] 귀법사 …… 일이라네[歸法川邊踞送巵]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후집》 권1 〈옛 서울을 생각하며 세 수를 읊다[憶舊京三詠]〉 4수 중 ‘귀법사의 냇가[歸法寺川邊]’ 시의 구절이다. “황량한 옛 서울 차마 생각할 수 있으랴? 차라리 잊어 바보 되는 것만 못하리, 오직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귀법사 냇가에서 술잔을 보내던 일이라네.[故國荒涼忍可思? 不如忘却故憨癡. 唯餘一段關情處, 歸法川邊踞送巵.]”라고 하였다. 주에 의하면, 귀법사는 매년 학자들이 여름 공부를 익히던 곳으로, 여러 유생들이 자주 냇가에 모여 물에 발을 담그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주-D049] 화곡서원(花谷書院) : 경기도(현재의 개성직할시) 개풍군 영남면 현화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1609년(광해군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경덕(徐敬德)ㆍ박순(朴淳)ㆍ민순(閔純)ㆍ허엽(許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같은 해에 ‘화곡(花谷)’이라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693년(숙종19)에는 숙종이 친히 행행(行幸)하여 치제(致祭)하였고, 1740년(영조16)에는 영조가 행행하여 친림(親臨) 치제하였다. 1871년(고종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주-D050] 화담(花潭) : 서경덕(徐敬德, 1489~1546)으로,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ㆍ복재(復齋)이다. 개성 출신으로, 1519년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의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1531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송대의 주돈이(周敦頤)ㆍ소옹(邵雍) 및 장재(張載)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제창하였다. 저서로는 《화담집》있다. 1575년(선조8)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ㆍ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주-D051] 사암(思菴) : 박순(朴淳, 1523~1589)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牧使) 박상(朴祥)의 조카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53년(명종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였다. 그 뒤 대사헌ㆍ우의정ㆍ좌의정을 거쳐,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 등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思菴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주-D052] 초당(草堂) : 허엽(許曄, 1517~1580)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이다.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아버지이다. 서경덕의 문인으로 1546년(명종1) 급제하였다. 1562년 동부승지로 경연(經筵)에 참석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허자(許磁)ㆍ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8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와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1575년 동서인(東西人)의 대립 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주-D053] 습정(習靜) : 민순(閔純, 1519~1591)으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ㆍ습정이다. 어려서는 신광한(申光漢)의 문하에서, 장성한 뒤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경덕으로부터 주정(主靜)의 설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처하던 재(齋)의 이름을 습정(習靜)이라 하였다 한다. 1568년(선조1) 효행으로 천거되어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고, 곧 학행이 알려져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되었다. 토산 현감(兎山縣監)ㆍ사헌부 지평ㆍ청풍 군수(淸風郡守) 등을 지낸 뒤 향리인 고양에서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행촌집(杏村集)》이 있다. 개성의 화곡서원,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54] 고반(考槃) : 《시경》의 편명이다. 고(考)는 이룬다는 뜻이고 반(槃)은 한가히 노닌다는 뜻으로 은거(隱居)를 말한다. 시에서는 “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훌륭한 분이 태연히 거처하네. 홀로 잠을 자고 깨어 길이 잊지 않으려 맹세하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寂寤言, 永矢弗諼.]”라고 하여, 현자의 은거를 찬미하였다.[주-D055] 진경(眞境) : 선경(仙境)을 말한다.[주-D056] 도지개 : 뒤틀린 활을 바로잡는 틀로 완만하고 둥그스름하게 구부러진 모양이다.[주-D057] 와폭(臥瀑) : 누운 폭포라는 뜻으로, 경사가 완만한 폭포를 말한다.[주-D058] 영통사(靈通寺) : 고려 왕실에서 중요시한 절로, 재(齋)나 기신도량(忌晨道場)을 많이 베풀었던 곳이다. 고려 현종(顯宗) 18년(1027)에 창건되었으며 정종 2년(1036)에는 왕자가 4명 있을 경우 한 명의 출가를 허락하는 법을 제정하여, 이 절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공부하여 시험을 치르는 곳으로 삼았다. 이곳에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출가하였고,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와 동서삼층석탑(東西三層石塔)이 있다. 1901년 화재로 전소된 것을 복원하였는데, 현재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오관산 기슭의 영통동에 있다.[주-D059] 채수(蔡壽) :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반정 공신이다. 1469년(예종1)에 장원급제한 후 대사헌,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고 중종반정 후 분의 정국 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 즉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김종직(金宗直)과 종유(從遊)하였으며,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1703년(숙종29) 함창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어 표연말(表沿沫)ㆍ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주-D060] 이곳이 …… 같아서 : 채수(蔡壽)의 기(記)는 《유송도록(遊松都錄)》을 가리킨다. 《유송도록》에, “절 앞에 흙다리의 유지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술가(術家)의 말을 존중하여 지맥(遲脈)을 연결시키고자 하여 시냇물 위로 쌓아 올린 것이다. 서편에 누각이 있는데 돌을 쌓아 올려 기초를 만들었다.[寺前有土橋遺址, 高麗時崇信術家言, 欲連地脉, 故跨澗築之也. 西偏有樓, 累石爲基.]”라고 하였다. 《續東文選 卷21》[주-D061] 대각국사비(大覺國師碑) : 고려 천태종의 개조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의천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하여 송나라에 유학하였고,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 발전을 도모하였다. 의천의 입적 후 1125년(인종3)에 건립되었는데, 김부식(金富軾)이 글을 짓고 오언후(吳彦侯)가 썼다.[주-D062] 대흥동(大興洞) : 개성의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박연폭포, 관음굴, 귀담, 마담, 대흥사(大興寺) 터 등이 있다.[주-D063] 오매차(烏梅茶) : 말린 매실로 만든 차이다. 매실을 짚불 연기에 그을려서 말린 다음 그 과육을 끓여서 설탕, 계핏가루, 생강가루, 정향가루를 넣어 달인 차이다.[주-D064] 자라봉(者羅峰) : 미상.[주-D065] 동장대(東將臺) : 산성이나 성곽의 동쪽에 만들어 놓은 누대로, 장수가 지휘하던 곳이다.[주-D066] 한이부(韓吏部) : 당나라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낸 한유(韓愈, 768~824)를 말한다. 자는 퇴지(退之)이며, 선조가 창려(昌黎) 출신이므로 한창려(韓昌黎)라고도 한다. 고문(古文)을 창도하였으며 중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이루었다. 시호는 문(文)이다. 문집으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전한다.[주-D067] 우리들 …… 못하겠는가 : 한유(韓愈)가 영정(永貞) 원년(805) 가을에 형주(衡州)의 남악(南嶽), 즉 형산(衡山)을 지나가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 형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되자 묵묵히 기도하니 구름이 걷혔다고 한다. 이 일은 그의 시 〈형악묘를 찾아보고 형악의 절에서 자며 문루에 쓰다[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에, “내가 찾아온 날 마침 가을비 내리는 때라, 어둔 기운 컴컴한 채 맑은 바람 불지 않네. 마음 차분히 묵도하니 감응이 있는 듯, 어찌 정직한 마음이 능히 감통함 아니랴. 잠깐 사이 운무 걷혀 뭇 봉우리 드러나니, 바라보매 우뚝 푸른 하늘 버티고 섰구나.[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靜掃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3》[주-D068] 관음사(觀音寺) : 태조 이성계의 잠저 시절의 원찰(願刹)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기(記)를 지었다고 한다. 《東文選 卷21 遊松都錄》[주-D069] 태종대(太宗臺) : 태종이 와서 놀았던 곳이라 하여 일컫는 이름이다. 《월사집》의 〈유박연기(遊朴淵記)〉에 의하면, 태종대는 관음굴 위에 있는 반석으로 백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고 하였다.[주-D070] 상담(上潭) : 박연폭포 위에 있는 못을 말한다. 옛적에 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못 위에서 젓대를 불다가 용녀(龍女)에게 끌리어 못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아내가 부르짖으며 울다가 언덕에 떨어져 죽었다. 그 때문에 위는 박연(朴淵)이라 하고 아래는 고모담(姑母潭)이라 한다고 한다. 《續東文選 卷21 遊松都錄》[주-D071] 범사정(泛槎亭) : 박연폭포 아래에 있는 정자이다. 《중경지(中京誌)》에 의하면 1700년(숙종26)에 건물을 짓고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주-D072] 관음굴 : 관음사 뒤에 있는 바위굴로 관음보살 석상(石像)이 안치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에 의하면, 관음굴 안에 관음불 두 석상이 있으므로 그대로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주-D073] 교영(喬營) : 강화도 교동(喬桐)에 설치되어 있었던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을 말한다. 삼도수군통어영은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의 삼도 수군(水軍)을 통솔하였다.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당시 오원(吳瑗)의 당숙이 이곳에 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주-D074] 후서강(後西江) : 예성강(禮成江)으로 개성 서쪽 30리에 있다. 예성강은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할 때 이곳에서 배를 띄우기 때문에 예성(禮成)이라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上》[주-D075] 중영(中營) : 중군(中軍)의 영문(營門)이나 진영을 말한다.[주-D076] 전조(前朝) : 고려를 말한 것이다.[주-D077] 연로(輦路) : 임금이 거둥하는 길을 말한다.[주-D078] 추암(皺巖) : 주름 바위라는 뜻이다. 송경 도성의 동북쪽 2, 3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위가 시냇가에 서 있어 병풍 같고, 모두 가로 결이 있기 때문에 추암이라 이름하였다. 고려 때 최당(崔讜)이 항상 소를 타고 와서 여러 노인들과 여기서 놀았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12 長湍都護府》[주-D079] 수옥(漱玉) : 샘물이 돌에 부딪혀 마치 옥이 부딪치는 듯 맑은 소리가 나는 것을 말한다.[주-D080] 서사정(逝斯亭) : 서경덕이 세운 정자로 화담(花潭) 못가의 바위 위에 있다.[주-D081] 태학(太學) : 여기서는 국가의 중앙교육기관인 서울의 성균관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주-D082] 동부(東部) : 개성의 행정 구역을 다섯으로 나눈 오부(五部) 중의 하나이다. 오부는 동부(東部)ㆍ서부(西部)ㆍ중부(中部)ㆍ남부(南部)ㆍ북부(北部)이다.[주-D083] 발막(撥幕) : 발군(撥軍)이 교대하거나 말을 갈아타는 역참을 말한다. 발군(撥軍)은 파발군(擺撥軍)으로 역참에 소속되어 중요한 공문서를 변방에 급히 전하던 군졸로 보발(步撥)과 기발(騎撥)이 있었다. 발점(撥店), 발참(撥站), 발소(撥所)라고도 한다.[주-D084] 오목점(梧木店) : 오목(梧木)의 객점이다. 오목은 장단(長湍)에 있는 지명이다.[주-D085] 화장사(華藏寺) : 경기도 장단의 보봉산(寶鳳山)에 있는 절로,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다.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373년(공민왕22) 옛날 계조암(繼祖庵) 터에 중건하였다. 중요 문화재로는 7층탑을 비롯하여 지공화상탑, 각종 불보살상과 탱화,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 지공이 가지고 온 우두전단(牛頭栴檀) 및 패엽(貝葉)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의 상황은 알 수 없다. 《기언》 권27 하편 〈산천 상(山川上) 성거산과 천마산 고사〉에, “오관산 동쪽은 봉악(鳳嶽 보봉산(寶鳳山))이며 그 아래는 화장사(華藏寺)이다. 화장사에는 공민왕(恭愍王)의 도상(圖像)이 있다. 고려의 유민(遺民)이 비용을 모아 진전(眞殿)에 제사한 것이 수백 년이나 이어졌으니, 유민의 풍속이 오히려 대국의 유풍(遺風)이 있다. 승려가 전하여 지켜오는 인도 산스크리트어로 된 패엽경(貝葉經)이 있는데, 지공(指空)이 쓴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또 지공의 등신불(等身佛)이 있다.” 하였다.[주-D086] 패엽(貝葉)과 전단(旃檀) : 서역승 지공선사(指空禪師)가 서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화장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패엽은 패엽경으로, 인도에서 패다라수(貝多羅樹) 잎에 쓴 불경을 말한다. 전단은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인도에서 나는 향나무로 만든 향이다. 《농암집》 권23 〈송경유람기〉에, “절의 중이 함(函) 하나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는 패엽서(貝葉書)와 전단향(栴檀香)이 들어 있었다. 글은 모두 범자(梵字)라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향은 《능엄경(楞嚴經)》에서 말한, 한 대만 태워도 40리까지 일시에 향기가 퍼진다는 것이었다. 지공이 서역에서 가져온 것을 지금까지 보관한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87] 주인 : 화석정(花石亭)의 주인 이환(李綄)으로 율곡의 후손이다. 《국조인물고》 제51권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의 ‘이경진(李景震)’에 의하면, 율곡 이이의 종증손(從曾孫)인 이후방(李厚芳)의 아들로 백부인 이후지(李厚址)에게 입양되었다고 한다.[주-D088] 풍계사(豐溪祠) : 작자의 조부인 오두인(吳斗寅, 1624~1689)과 박태보(朴泰輔, 1654~1689), 이세화(李世華)를 함께 제향하는 사당으로 파주에 있다.[주-D089] 돌아가신 조부 : 오두인(吳斗寅, 1624~1689)으로,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이다. 1648년(인조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공조 참판ㆍ경기도 관찰사ㆍ형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 도중 파주에서 죽었으며, 그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주-D090] 이공(李公) : 이세화(李世華, 1630~1701)로,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ㆍ칠정(七井)이다. 황해도ㆍ평안도ㆍ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15)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이세화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다음 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대사간ㆍ호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 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 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ㆍ세자 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그 후에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풍계(豊溪)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쌍백당집(雙栢堂集)》이 있다.[주-D091] 박공(朴公) : 박태보(朴泰輔, 1654~1689)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이다. 1677년(숙종3) 알성 문과에 장원하였고, 예조 좌랑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했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서인들의 요청으로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고 이후 이천 현감(伊川縣監)ㆍ이조 좌랑ㆍ호남 암행 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여 주동적으로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珎島)로 유배 가던 도중, 5월 5일 노량진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저서로 《정재집》이 있다.[주-D092] 그날 : 1689년(숙종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오두인과 박태보 등이 친국을 받고 유배 가던 도중에 죽은 그때를 말한 것이다. 기사환국은, 서인이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축출 당한 정국을 말한다. 숙종이 노론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의 장씨의 소생 이균을 원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으며, 송시열을 유배하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키는 등 노론계는 축출되고 남인계가 대거 등용되었다. 이어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김만중 등을 유배하였으며, 중전 민씨를 폐비하려고 하자 재야의 서인 오두인(吳斗寅) 등 86명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상소하였고, 숙종은 주동자인 박태보ㆍ오두인 등을 신문한 뒤 유배했다.[주-D093] 김장(金丈) : 김재로(金在魯, 1682~1759)를 가리킨다.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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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린 것 때문에 문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자->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하였다가 문과의 응시자격을 박탈당할 뻔하자
*辛亥(1611,광해군3)。怪鬼鄭仁弘螫晦,退兩先生。時公爲掌議。主削仁弘儒籍。光海大怒。令錮首議儒。大臣爭之強。事得已。甲寅(1614,광해군6)冬。吟北門雨雪詩。隱于嘉平之潛谷。<龍洲先生遺稿卷之十四 / 誌 / 領議政潛谷金公墓誌銘 幷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