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워킹앤 워킹데이
‘Good morning ladies and gentlemen now we are arriving perth international airport’
목이 약간 잠긴 듯한 중저음의 목소리. 그 와중에 통통 튀는 악센트. 잠이 오지 않아 오래 뒤척이다 막 깊은 잠으로 빠져들 찰나였다. 덜컹 약간의 충격과 역추진하는 엔진소리. 늘 듣던 익숙한 인사를 듣고서야 시작되었음을 인지했다. 얼른 잠을 깨려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고 준비한 서류와 여권을 다시 확인했다. 게이트를 나서고 수속을 통과하러 나가는 길, 심장박동이 크게 느껴져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요새는 통 느낄 수 없었던 그 느낌이었다. 예컨대 치과에 들어설 때, 여름방학 캠프에 혼자 버스를 타고 떠날 때, 좋아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 때와 비슷한 떨림이었다. 온라인으로 신청했던 비자 서류와 여권을 보여주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찾아든 배낭을 맨 뒤 불투명한 자동문을 나섰다.
어떡하지 뭘 하면 좋지. 쨍한 한낮이면 더 나았을 것을… 어슴푸레한 이른 아침의 조도가 나의 떨림에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괜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무사하다고 말해야만 할 거 같았다.
‘엄마 별일 없이 잘 도착했어’
‘응 다행이네 덥진 않아?’
‘날씨가 꽤 쌀쌀하네. 이제 숙소로 이동하려고'
‘그래 건강히 잘 지내다 와'
후우아 뭐 됐군. 통화를 마치자 더 이상의 물러설 곳이 없었다. 마땅히 더 할 말도 없었다. 괜히 공항 안을 몇 번이고 서성이다 커피를 한잔 사들었다. 커피 한잔을 마실 만큼의 시간을 유예받아 천천히 마셨다. 그리곤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려 탑승했다.
도심은 아침 출근길에 오른 이들로 분주했다. 그들 사이로 예약해둔 백패커를 향해 걸어갔다. 드높고 화창한 남반구의 가을 하늘만이 날 반겨주었다. 앞뒤로 맨 커다란 배낭이 앞으로 이곳에서 꾸려나갈 삶의 초석이자 현재의 무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행이었다면 달랐을까? 이상하리만치 걱정이 한가득 앞섰다.
비장함. 걱정의 이유는 나름의 비장함이었다. 퍼스에 오기까지는 앞선 여행이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과 유럽 일부로의 배낭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을 하며 새로운 도시에 갈때마다 사뭇 진지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늘 여행자라기보다 마치 이곳에 살아가는 한명의 주민이 된것처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래 역시 사람 냄새가 나야지. 먹거리가 너무 저렴해서 좋은걸. 아무래도 이렇게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어야 살만하지. 그렇게 나이로비의 커다란 빈민가와 말라가의 지중해를 마주한 언덕 동네, 엔테베의 복잡한 시장 골목, 파리의 밤거리를 서성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나의 출생지가 곧 내가 살아가게 될 거주지는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내가 살 곳을 찾아보자는데 까지 가 닿았다. 무엇보다 여행을 끝내기가 아쉬웠다.
이때만 해도 호주는 전세계 장기여행자들의 정박지 같은 곳이었다. 쉽게 발급받을 수 있는 워킹 비자, 높은 임금. 더불어 남반구, 오세아니아라는 지역적 특성. 여행하며 일하며 누구나 한 번쯤 선택지에 올려놓는 장소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호주로 결정했다. 그중 한국인이 가장 없는 곳. 현지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 여행자가 덜 찾는 곳을 찾아 다니는 것에 열을 올리는 내가 떠올린 첫번째 조건이었다. 거기에 적격인 곳이 서호주의 도시 퍼스(Perth)였다.
백패커는 자유분방했다. 자유분방이 과하다 못해 흘러넘친 게 문제였다. 같은 방 친구들의 침대가 딱 그랬다. 수건과 옷, 이불과 베개의 구분이 불분명했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물결을 이루었고 침대를 벗어나 바닥으로 흘러넘쳤다. 여행하며 이런저런 숙소 다녀보았지만, 이토록 혼돈인 곳도 보기 힘들었다. 집값이 비싸 장기투숙하는 워홀러들도 더러 있었고 도심에서 밤새 놀다가 들어와 잠을 청하는 친구들도 많은 탓이었다. 주방도 상황이 넉넉치는 않았다. 각자 재료를 사 와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구조였는데 식기들을 보면 그 마음이 싹 사라져갔다. 심란한 마음에 밤거리를 산책하며,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아침이 밝아옴과 동시에 곧장 집 구하기에 돌입했다. 퍼스 한인 카페에 가입했다. 호주의 중고나라 같은 사이트에도 가입했다. 차가 없어 도심과 도심에서 가까운 타운 위주로 올라온 방 가격을 비교해가며 메세지를 남겼다. 호주를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을 하우스메이트로 두고 나날이 발전하는 영어 실력을 꿈꾸었지만 해외 친구들이 올린 방의 가격은 한인들이 내놓은 방에 비해 비쌌다. 언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생활비를 아끼려면 저렴한 예산이 우선이었다. 먼저 도시에서 제일 가깝고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타운인 빅토리아파크 있는 집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호주 온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네…’'
‘여기 집 앞에 파킹 다 되고 방은 여기 혼자 쓰시면 되요. 6명이 같이 지내고요. 고기 공장, 돌 공장 다니는 친구들 있으니까 일 구하는거 정보 얻으실 수도 있어요.’
차는 필수고 공장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있겠군. 그러나 빅토리아파크는 차로 가까운 거리인데 비해 친절하지 못한 대중교통이 문제였다. 도심내에는 무료 버스가 3대나 다니지만, 도심만 벗어나도 큰길로만 다니는 버스 탓에 대부분 자가용을 사거나 카쉐어를 했다. 결국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 집을 보았다.
‘제가 집 마스터이고 학교다니고 있어요'
타운 형태의 3층으로 된 빨간 벽돌집의 1층. 2인 1실이지만 방 바로 앞 마당과 깔끔함. 도심이지만 집 근처에 있는 큰 공원. 룸메이트가 생긴다는 것 외에는 모든걸 충족하는 조건이었다.
‘혹시 계약하려면 언제까지 말씀드리면 될까요'
‘빨리 말씀해주시면 좋아요. 지금 다른 분도 연락오고 있어서요.’ 순간 눈앞에 백패커가 아른거려 바로 대답했다. ‘네 그럼 들어오는 걸로 할게요.’
집을 구한 뒤로 약간의 일상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은행 계좌를 개설을 하고 임금을 받기위해 납세자 번호를 신고하고 교통카드를 만들었다. 이런 일들을 조금 하고 나니 본격적인 이 도시의 일원이 된 거 같아 도시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다.
집을 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미국에 사는 이모로부터 연락을 왔다.
‘한국 사람 조심해라. 돈 같은 거 맡기지 말고, 너무 믿으면 안 돼'
‘그럼요, 제가 어린애인가요’
이모와 이모부도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스시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알기론 한국성당도 나가며 한국인 커뮤니티 안에서 잘 지내고 계신 이모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이유인즉 이모부의 조카도 호주에서 1년 정도 생활했더랬다. 1년여간 열심히 모은 돈을 누군가 맡겨놓았다가 받기로 하였는데 돈을 모두 떼였고, 설상가상으로 조카는 귀국 하루 전날 바닷가 나들이에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참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음. 먼 타지까지 와서 말통하는 이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해야한다니.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이 어색했다. 이모가 노파심에 걱정하는 이야기겠거니… 나의 한국 하우스 메이트들까지 의심해야하나 잠시 생각하고 말았다.
정보를 열심히 긁어모았다. 통장의 잔고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집을 구했다고 했으나 늘 마음한편에 자리 잡은 불편함은 일자리에 대한 걱정이었다.
‘형은 워홀와서 주로 어떤일 하셨어요?’
‘식자재 배달 일도 하고 소시지 공장에서도 하고 여러 가지 했던 거 같아요.’
‘다 오지잡만 하셨어요?’
‘네 저는 한인잡 안 해봤어요. 돈을 말도 안되게 줘서'
집의 마스터이자 룸메이트는 호주에 워홀을 온 뒤 영주권을 얻기 위해 호주에서 요리학교에 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이미 내가 겪은 일들을 모두 겪은 워홀 선배였다.
이곳저곳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모은 정보는 이랬다. 주로 이곳에서 전문적인 직업 갖지 않은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은 ‘오지잡’이라 일컫는 호주인들이 운영하는 공장이나 현장 가게였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영어로 기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갈 수 있는 곳들이었다. 대신 현지 임금 규정에 맞추어 주었다. 호주는 정규직이 아닌 일용직 워커에게는 20%의 시급을 더 높게 주는 규정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정규직에 주어지는 휴가가 없고 해고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돈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제도를 듣고 무릎을 탁 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당연히 이곳에 온 워커들은 되도록 오지잡을 얻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 일터로 가는 것이었다. 주로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시안들이 먼저 자리 잡은 이민자들 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의 경우 한인 식당이나 카페 혹은 한국인들이 주로 잡고 있는 분야인 사무실 청소, 공사 현장의 타일공 같은 일을 해야했다. 물론 대부분 임금은 규정보다 낮았다. 이를 ‘한인잡’이라고 불렀다. 더 나아가 그중에는 텍스 신고를 안 해주는 대신 임금을 더 낮게 주는 형태도 있었는데 이는 ‘캐쉬잡’ 이라고 불렀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생각해보았으나 우리의 고향 땅에도 팽배한 행태인데 어찌 타국이라고 없겠는가. 영주권과 같은 비자가 필요한 사람이나 언어가 부족해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의 필요를 교묘히 이용한 결과였다. 일부 사장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더욱 알뜰히 부려 먹고 있었다.
Abby는 대만에서 온 하우스메이트였다. 우리는 아침에 형광색 옷을 입고 출근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