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신암리 성당
간략설명: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교우촌
도로주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감악산로489번길 27-32
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 신암리 공소에는 3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고 있었고, 박성로 프란치스코가 공소회장을 맡고 있었다. 1924년 10월 27일 개성 본당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신암리 공소와 우고리 공소를 방문하였다.
성당 제대.그 후 1925년 3월 박원문 마르코 회장 시절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2년 후인 1927년 5월이 돼서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연천· 양주 · 파주 · 포천 · 가평 · 고양군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당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제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3년 뒤인 1930년 4월에 최문식 신부는 미리내로 전임되고 본당은 폐지되어 다시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때 당시 신암리 공소의 회장은 이재현 베네딕토였다.
1933년 9월 26일 신암리 공소에 새로 개축된 경당에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주례로 이하삼 회장 등 신암리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79위 순교복자 첨례 대축일 미사가 거행되었다.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5년 12월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명칭을 의정부 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 전쟁 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세례자 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2008년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건립한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구한말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된 신암리 신앙 공동체는 1909년 개성 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돼 본격적인 지역 복음화의 길을 걸었다. 1930년 다시 공소로 환원된 후 지난 1959년부터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2005년 3월 30일 본당 승격 80주년을 맞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도시 지역 신자들의 피정 공간으로 공소를 개방하는 등 공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섰다. 2008년 10월 5일 신암리가 고향인 서울대교구의 이경훈(李庚薰)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과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곳 출신 순교자로 전해지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22일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의 성상과 성물 등을 완전히 갖추고 2015년 10월 24일 이경훈 신부 주례로 준공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의정부교구는 2018년 8월 24일자로 신암리 성당을 이춘근 라우렌시오 순교자 기념 순례지로 지정했다. 이춘근(李春根, 1915-1950년) 라우렌시오 신부는 1915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태어나 1939년 6월 24일 명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사목활동을 하던 중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껴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여 1942년 첫서원을 했다. 1948년 10월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사제를 청하자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이춘근 신부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 서포 본당 주임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로 활동하던 중 공산당의 횡포가 심해지자 평양 외곽의 순안 공소로 피신해 신자들을 돌보았다.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춘근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체포되어 10월 5일 평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춘근 신부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의 일원으로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출처 :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 의정부교구 순례길 안내,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1월 15일)]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약전
덕원 수도원, 1915년 3월 8일 생, 경기 양주
세례명 : 스테파노
사제서품 : 1939년 6월 24일
첫서원 : 1942년 7월 26일
경력 : 사리원 본당 보좌, 장호원 본당 보좌, 덕원 신학교 사감 및 교수, 평양 교구 서포 본당 주임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원 지도 신부
체포 일자 및 장소 : 1950년 6월 25일, 순안
순교 일자 및 장소 : 1950년 10월 5일, 평양(추정)
이춘군 라우렌시오(李春根, 1915~1950) 신부는 1915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아버지 이공명(李公明) 바오로와 어머니 홍 베로니카의 3남 4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나 스테파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왜관 수도원의 이근재 부르노(李根宰, 1925-2006) 수사가 그의 동생이다. 그는 신암리에서 보통학교 4년 과정을 마친 뒤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1939년 6월 24일, 그는 명동 성당에서 경성대목구장인 아드리앵 조제프 라리보(Adrien Joseph Larribeau, 元享根, 1883-1974) 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라리보 주교는 그를 황해도 사리원본당 보좌신부로 발령했다가 1940년 7월에는 경기도 장호원(현 감곡) 본당으로 전임시켰다. 장호원에서 3년간 사목활동을 한 후, 수도생활에 매력을 느낀 그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의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z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입회를 청했으며, 1941년 허락을 받아냈다. 라우렌시오라는 수도명으로 수련을 시작한 그는 1942년 7월 26일, 첫서원을 했다. 덕원 수도원의 루치오 로트(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신부는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 이렇게 보고했다. “지금까지 한국인 수도형제 가운데 장엄서원을 한 사제가 한 명(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단순서원을 한 사제가 한 명(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까지 몇 년간 무슨 소임을 맡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46년 7월 성대 치료를 위해 서울에 머물던 때부터 그의 삶은 꽤 소상하게 추적할 수 있다. 그가 서울 주교관에서 그해 12월에 쓴 편지 사본이 영어로 번역되어 보존되어 있다. 이 편지는 해방 후 덕원 수도원이 처한 어려움을 그대로 말해준다. “작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다들 매우 기뻐했으나 지금은 이른바 삼팔선 때문에 아주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종전 직후 붉은 군대가 생필품과 가축, 작업장의 기계 등을 모조리 빼앗아 갔으며, 이른바 토지개혁에 의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도원 땅도 몰수당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1월 이후부터 먹을 게 전혀 없습니다. (중략) 덕원 수도원에서는 레오폴도 다베르나스(Leopold Graf desEffans d’Avernas, 羅碧宰, 1887-1944) 신부가 1944년 12월에 사망했고, 알프레도 푹스(Alfred Fuchs, 陳, 1905-1945) 신부가 1945년 3월에 그리고 비트마르 파렌코프(Witmar Farrenkopf, 朴偉明, 1906-1945) 신부도 1945년 8월에 피살되었습니다. 마르코 바잉거(Markus Bainger, 方仁建, 1891- 1945) 신부는 10월에 청진을 빠져나온 후 탈진하여 사망했습니다. 우리는 미사 예물과 의약품과 의복이 필요합니다. (중략) 이제 연길 수도원 소식을 몇 가지 전해드립니다.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신부, 수사, 수녀들은 1946년 5월,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남평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테오도로 주교 아빠스와 신부 두세 명은 1946년 9월, 질병 때문에 석방되었습니다. 연길 수도원과 딸린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습니다. (후략)” 1947년 봄, 그는 다시 38선을 넘어 덕원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소련 군정 아래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기라 이미 종교에 대한 박해가 예견되었던 상황이었다. 동료들이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지 “나는 오직 천주님의 안배에 따라 살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1948년 10월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洪龍浩, 1906-?) 주교가 사제들을 보내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하자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 서포 본당 주임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로 활동했다. 그가 서포로 부임한지 반년 후 북한 정치 보위부가 덕원 수도원을 폐쇄하고 독일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금하고 나머지 한국인 수도자와 신학생들은 쫓아냈다. 이 라우렌시오 신부는 본가로 돌아간 임근삼 곤라도(林根三, 1919-1986) 수사에게 전보를 쳐서 평양으로 오게 하여 극비리에 구금된 수도형제들의 행방을 파악하고 도움을 줄 방법을 모색했다. 또한 원산 수녀원 수녀들을 위해 주요 접선 장소를 제공했다. 평양 출신 박정덕 골룸바(朴靜德, 1906-1983)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1949년 7월 11일에 평양 인근에 흩어져 있던 수녀들이 기림리 본당에 모여 사부 성 베네딕도 축일미사를 드리고, 이 라우렌시오 신부 앞에서 수도서원을 갱신했다고 한다.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평양 인민교화소 의무담당 노재경과 이기호를 통해 이 라우렌시오 신부에게 비밀쪽지 편지를 보내 교화소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해주었다. 1950년 6월 16일자 쪽지에는 루치오 로트 신부가 자신이 덕원 수도원의 원장신부로서 주교 아빠스 사망 이후 전권을 위임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김 알로이시오 수사, 김용택 필립보(金龍澤, 1916-2011) 수사, 김삼도 마인라도(金三道, 1919-2004) 수사의 3년 유기서원 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동생인 이 부르노 청원자가 월남을 결심하고 평양으로 가서 형에게 같이 떠날 것을 권유했으나 “저 많은 양을 두고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며 거절했다.
1949년 5월 14일, 홍 프란치스코 주교가 체포되었고, 해가 바뀌자 공산당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신부들이 길에서 체포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는 본원으로 쓰고 있던 예전 메리놀회 서포 본부 건물을 양도하라는 북한 당국의 강요와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더 이상 공동생활이 힘들게 되자 수녀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 5월 14일, 수녀회가 해산되자 이 라우렌시오 신부는 평양의 외곽에 있는 순안 공소로 피신했다. 순안에서 신자들을 돌보던 그는 6월 25일에 체포되었다. 체포현장에는 임 곤라도 수사가 있었으며 그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임 곤라도 수사는 이 라우렌시오 신부가 10월 5일, 인민군이 평양에서 퇴각할 즈음에 평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증언을 남겼다.
* 자료 출처 덕원의 순교자들(분도출판사, 2012년), 북녘 땅의 순교자들(가톨릭출판사, 1999년), Necrologium(왜관 수도원), 평양교구사(분도출판사, 1981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가을호(Vol.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