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넓은 강이 도심에 흐르고 있는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좋은 자연 자산을 갖고 있습니다.
이 한강에 꽃잎이 되어 날리는 사람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습니다. 우리 민요에도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노들강변의 3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노들강변 푸른물 네가 무삼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한강이 한이 많아 아까운 사람들을 데려갔다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노들강변은 1934년에 만들어진 신민요입니다. 작사는 당시 만담가였던 신불출 선생이 했습니다. 이름도 독특하네요. 불출의 우리말은 못난이입니다. 선생은 못난이가 아닌데요. 재주가 많았는데요.
잠시 1절로 돌아가 볼까요? 가사를 음미해보면 재미있으면서도 시적입니다. 차원이 높습니다. 신불출 선생은 시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볼까
노들은 노량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삼남으로 내려가려면 노들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야 됩니다. 푸른 강물을 보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과거에 내리 낙방하고 고향에 내려갈 면목이 없어서...
실연을 당한 여인이 아픈 가슴을 안고...
범죄를 저지르고 쫓겨다니다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어서...
사연은 구구하게 많았을 겁니다.
한강수타령 2절에도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한강수야 네가 말을 하려마
눈물 둔 영웅이 몇몇 줄을 지은고
대역죄에 엮이어 결백이 통하지 않아서...
고관으로 있다가 당쟁에 휘말려 유배 가다가 비관해서...
왜란 때 왜놈들의 손에 능멸 당하느니 차라리...
한강수타령에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 위에 뗏목 위에 노래도
에루화 처량도 하다
넓은 한강물 위에 떠 있는 뗏목을 보면 참 외로워 보였겠습니다. 고향의 처자식 생각이 간절하겠습니다. 그 외로움을 달랜다고 정선아리랑과 한강수타령을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낭만으로 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사람과 눈과 비는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고 합니다.
또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멀리 뵈는 관악산 웅장도 하고 돛단배 두서넛
에루화 한가도 하다
강원도 정선에서 뗏목을 타고 보름 동안 노를 저어온 긴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종점은 마포나루입니다. 웅장한 관악산과 서울이 눈에 들어오니 참 마음이 벅차고 한가했겠습니다.
뗏목은 강원도 소나무의 운송수단입니다. 서울까지 오는 동안 뗏꾼들은 급류에 휩쓸리거나 암초에 부딪쳐 사망하는 사고가 빈번했습니다. 아침밥이 사자밥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뗏꾼들은 보수를 두둑하게 받았습니다. 생명수당입니다. 정선 군수 월급이 5원인데 떼질 한 번 하면 15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해마다 여러 번 나가면 떼돈입니다. 떼돈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정선에서 마포나루까지 오는 동안 숙식비로 선금을 받습니다. 그 돈으로 저녁마다 포구 술집에서 주색잡기를 했습니다. 뗏꾼들을 깎듯이 모셨습니다. 뗏꾼들은 호갱이었습니다. 작부들은 뗏꾼들의 기분을 맞춰준다고 정선아리랑을 많이 불렀습니다. 강원도 오지 산골 민요인 정선아리랑이 널리 전파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포나루에 가서 운송비 나머지를 결제 받지만 그것마저도 주색과 노름으로 다 날립니다. 허기를 참아가며 초라한 몰골로 정선까지 터덜터덜 걸어갔습니다.
정선뗏목아리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천질에 만질에 떼품을 팔아서
술집 갈보 치마 밑으로 다 들어갔네
한강수타령에는 이런 가사도 있습니다.
양구화천 흐르는 물 소양정을 감돌아
양수리를 거쳐서 노들로 흘러만 가누나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치는 그림은 장엄합니다. 두 강이 합쳐서 한강이 됩니다. 남한강이 북한강보다 훨씬 넓습니다.
내가 2015년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면 수안보, 충주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부산 동래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14일 걸렸습니다. 충주에서는 음성, 안성, 용인, 양재동 말죽거리로 4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쪽이 너무 도시화되어 걷는 맛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충주에서 남한강과 한강을 따라서 동서울로 걸어갔습니다. 7일 반이 걸렸습니다. 충주에서 이틀, 여주에서 이틀, 양평에서 하루 반, 모두 5일 반을 남한강을 따라 걸어왔지만 남한강의 몸집이 이렇게 큰 곳은 보지 못했습니다.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험준한 지형과 협곡 사이를 돌아오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체구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양수리를 지나면 팔당이 나옵니다. 팔당댐 앞에는 좁은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 양쪽에는 수직의 절벽입니다. 이 협곡에는 물살이 셉니다. 팔당댐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서 나룻배와 뗏목들이 전복되어 인명사고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망자의 재를 올려야 되기 때문에 당집들이 많았습니다. 여덟 당집의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지명이 팔당八堂이 되었습니다. 60년대에 팔당댐이 생기고 나서는 물길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뗏목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팔당이 정선에서 서울까지의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팔당을 무사히 지나면 미사리, 천호동을 지나 마포나루까지는 편안하게 갔습니다. 뗏꾼들은 마포나루에 가서 저녁에 작부들과 질탕하게 술판을 벌일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