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달립니다.
차창 앞엔
‘진도,
팽목항’이라는 행선지안내 전광판 글자가
반짝거립니다.
하늘이 너무나
푸르고 논과 밭이 풍요로워 하마터면 어디를 가는지 잊어버릴 뻔 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그곳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길가의 나무,
나무마다
달아놓은 노란 리본 때문이었습니다.
팽목항에 멈춰선 두 대의 버스에서
잠시 인원정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 분 중 몇 분이 전체 아이들을 인솔해서 한 버스로 모이고 나머지 어른들만 내려서 컨테이너 가건물로 들어갔습니다.
앞쪽
화이트보드에 붙어있는 세월호 3,4,5층 도면엔 수없이 썼다 지웠다 반복한
푸르스름하고 불그스름한 자욱이 있습니다.
실종자가족과
지금까지 함께 지낸 배의철 변호사가 수색여건과 이곳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이곳은 4월 16일을 158일째 겪고 있는
중이다”
매일 정부를 향해 외치고 싸우는
세월호 유가족들마저도 이곳 실종자가족들 앞에서는 어떤 말씀도 드리기 힘들다고 합니다.
세상에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이곳이 지옥이고,
고통의 가장
밑바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에 실종자 가족이 있습니다.
얼마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실종자 가족들이 이곳에 오셨다고 합니다.
34년 동안
매일 5.18을 겪고 계신 분들만이
158일 동안 매일 4.16인 분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죠.
얼마 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이곳은 더 힘이 듭니다.
진도체육관으로
몇몇 지역주민이 항의방문을 했다고 합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더딘 수색상황으로 지칠 대로 지친 분들에겐 엄청난 고통입니다.
실종자 가족의 하루는
7시 반 등대로 나가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9시
범정부사고대책본부회의에 들어가고 10시에 첫 배를 타고 바지선으로 가서
수색상황을 지켜봅니다.
수색구조실무자회의가 있고
5시에는 해경수색브리핑이
있습니다.
8시
범정부사고대책본부 정리회의에 참가합니다.
세월호
국조특위가 열렸을 때 배 변호사는 밤10시부터 국회의원들에게 상황 전달과
질의 응답 및 회의를 하고 실종자 가족들은 밤12에 불을 끈다고
합니다.
이곳은 세월호 침몰에 관한 증거도
수집되고 있습니다.
국정원
지적사항.hwp
파일이 있는
선원 노트북을 발견한 것도,
사고 직전
정전이 아닌 알 수 없는 이유로 일시에 꺼진 cctv
영상저장장치을
발견하여 증거보전신청을 하게 한 것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배의철 변호사는
말합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왜 급변침을
했느냐’라고...
3등 항해사는
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법원에서 증언했지만 작은 통통배조차 다 보이는 기록에서 세월호 앞에 배는 없었다고 합니다.
고의 급변침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철저히 진상조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한 달에 몇 번 안 되는
수색일,
물 때가
한밤중이나 새벽인 경우가 많아 그때는 아버님들이 해경상황실로 가서 수색상황을 찍고 체육관에 전달하며 지켜본다 합니다.
체육관에서는
수색시간이 되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그러다
실망하고,
실망하고,
실망했습니다.
태풍이나
기상악화로 수색 자체가 안 되는 날에는 병원으로 가십니다.
폐질환은
이곳의 고질병의 하나입니다.
폐의
3분의 2를 잘라낸 분도
계십니다.
각종
신경정신과 치료와 약 복용도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배 변호사가 방문객에게 부탁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보이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종자가족들이
아이들 보는 것을 너무나 힘들어 하신다고...
그래서 우리
일행도 들어오기 전에 아이들만 따로 버스에 남아있게 했습니다.
실종자가족들은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만나서 위로를 받을 여유조차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
변호사가 나서서 방문객들과 대신 이야기 하고 이해를 구하셨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에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제 인양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제발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실종자
가족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실종자 가족에게
‘일상'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입니다.
4월 15일 밤,
날씨가 좋지
않아 세월호가 출항을 못하고,
다시
인천집으로 되돌아온 이영숙님,
내일 비행기
타고 제주의 직장으로 출근하겠다 아들에게 전화하고 짐만 배로 보내고 나중에 제주로 찾아온 아들과 올레길 걷습니다.
아내와 혁규,
지연이와 다시
집으로 돌아와 피곤한 하루를 보낸 권재근 님,
이삿짐은 그냥
배에 두고 다음날 비행기 타고 제주 가자고 아이들을 달랩니다.
제주 도착해
새 터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새 삶을 시작합니다.
수학여행 갔던 남편 양승진 선생님이
딸기 한 상자를 사들고 집으로 오자 아내는 놀랍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실망한 아이들을 어떻게 달랠까 같이 고민하고 낼 아침도 학교 앞 교통정리 하러 나가야 하니 서둘러 주무십니다.
며칠 못 볼 줄 알았던 아빠가 밤중에
돌아오자 졸린 눈을 비비며 아내와 두 아들이 고창석 선생님을 맞이합니다.
그 고사리
손을 잡고 왼쪽엔 큰 놈,
오른쪽엔 작은
놈을 끼고 선생님은 잠이 듭니다.
배를 못 타고 돌아온
은화,
다윤이,
지현이,
영인이,
현철이...
집에 와서
여행가방을 던지고 투덜대며 친구들과 카톡으로 수다를 떨고,
제대로 씻지도
않고 잠든 후 아침에 일어나 뒤늦게 머리감고 씻는다고 부산을 떨고,
늦었다 밥 안
먹고 뛰쳐나가는 애들을 향해 엄마는 잔소리하고... 그런
평범함...
그런 별거
아닌 행복... 그런 일상...
언젠가 뉴스에서 실종자 조은화 학생
어머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살려달라 매달리고,
그 다음은 볼
수만 있게 해달라고,
그 다음에는
건져만 달라고,
이제는
뼈만이라도 찾아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이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소원은 “뼈라도 찾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에게
‘일상’을 돌려주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 하라
하지 마시고 이루어질 수 있는 소원을 이루게 해주세요.
팽목항 등대있는 곳에
갔습니다.
햇빛은 왜
이리 찬란한지 눈이 부십니다.
다함께 실종자
귀환을 위한 묵상을 하고,
음식을 난간에
차려놓고,
현수막을 달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올라가는 버스 안은
조용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은 더 깊어갑니다.
1박2일의 1진이 아니라 당일
2진으로 가서 실종자 가족에게 도움이
된 것은 없습니다.
한번 방문했을
때 최소 3일 이상 지속할 수 있는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당일
방문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잊지 않고
행동하려면 세월호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경험,
내 일이
되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단, 실종자 가족이나 배의철 변호사를 직접 만나려 하지 마세요. 우리는 한번 방문하는 것이지만 배 변호사님은 수 많은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해야 합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평생 국가의 부정한 일에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해 오신 한 어머님이 계십니다.
버스
옆자리에서 만난 이 어머님은 세월호 참사에도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광화문에서
삼천배를 하시고,
아들,
딸,
며느리,
사위에게 올해
추석은 없다 선언하신 후 추석 당일 집 밥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유가족과 함께 나누기를 하셨습니다.
친구들에게
밴드,
카톡을 통해
세월호 관련 바른 정보를 전해주고,
찜질방에서
특별법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친구와 일부러 통화하며 통화 끝난 후 그것이 진짜냐고 물어보는 사람들과 대화로 정보를 전한다고
합니다.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도 오늘 일을 SNS에 알리고 앞으로 해야할 일을 정리하십니다. 너무 멋진 어머님을 뵙고 바로 카스
친구가 되었습니다.
카스에 올리신
수많은 글과 사진을 보는 순간...
껴안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어머님과 그 자식들이 민주주의를 일궈온 것입니다.
그 분 카스 첫 화면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민주야~
어디에 꼭꼭
숨었니~”
돌아오는 버스에서 실종자도
찾고,
국민의 당연한
권리도 찾고,
숨은 민주도
반드시 찾으리라 다짐합니다.
어머님에게서
길을 보았습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첫댓글 아... 이 글은 정말... ㅜ ㅜ 더 열심히 뛰고 팽목항의 실종자 가족들도 잊지않고 응원하겠습니다
이미 열심히 뛰고 계시잖아요. ^^
저는 제 감정 추스리기 바빠서 못 적었는데 ㅠ 자세히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그곳 사정을 알릴 수 있으려면 좀 더 자세히 적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글이 많이 길어졌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다 담은것이 아닙니다. 못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