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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조정의 옛이야기 1[歷朝舊聞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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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의 초기[國初]
해평(海平)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호)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세가 대족(世家大族)으로서 그 국가 운명과 시종을 같이한 사람이 어느 시대나 있지마는, 그 중에 선하고
선하지 못한 차이가 없을 수 없는데 둘러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 행사의 옳고 그름은 자세히 살피지 않고
다만 그 대대로 혁혁하게 벼슬과 부귀가 융성한 것만을 보고서, 선하지 못한 자까지 국가의 지주석 같은 신하
요, 심복인 신하라고 칭하여, 은연중 그 뽑을 수 없고 움직이기 어려운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믿고 있다.”고
하였다. 고려 말기에 염흥방(廉興邦)ㆍ임견미(林堅味)ㆍ지윤(池奫)ㆍ이인임(李仁任) 등이 함께 조정의 정권을
잡고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해독이 백성에게 흘러가고 화가 종묘 사직에 미쳤으니, 아무라도 다같이 죽여야
했고 반드시 천벌을 받아야 했는데, 최영(崔瑩)이 혁폐도감(革弊都監)을 설치하여 모두 죽이고 제거하자, 한
집에서 죽은 자가 10여 명씩이나 되었다. 그제야 상하가 통쾌하다 하였으며, 조야(朝野)가 서로 경축하였으나,
이후부터는 왕실이 점차 고립되고 우익(羽翼)이 꺾이고 약해져 마침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었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분들의 협조자들이 이숭인(李崇仁)ㆍ김진양(金震陽) 등 몇 사람의 초야(草野)에서
나온 백면서생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에, 일이 결국 성취되지 못하고 만 것이니, 이 점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인임으로 말하면 자신이 임금을 죽였으니 악의 큼이 염흥방ㆍ임견미와 비교할 바가 아닌데,
그 당시에 이인복(李仁復)ㆍ이숭인이 한 집안의 사람으로 이에 대하여 한 마디의 말도 없는 것은 또 무슨
일이었으며, 명 나라가 일어나고 망해가는 원 나라가 도망하여 흩어짐에 당해서는 그 존망ㆍ승패의 상황이
의리를 따질 것도 없이 분명한 것인데, 도리어 사신을 죽이게 하여 원 나라 조정을 위하여 충절을 다하는
사람같이 하였으니, 고려 말엽에 원 나라와 장인 사위의 집안이 되어 밀접하게 왕래한 지가 백여 년이 되므로
듣고 보는 데에 오염되어 천리(天吏)와 의주(義主)는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높여야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함이
아닌가? 나라가 바뀔 때의 국사(國史)에 전하는 것이 상세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증거 삼지 못할 것이 많으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태종
○ 세상에 전해오기를,
“헌묘(獻廟 태종의 묘호)가 상왕궁에 있고 심온(沈溫)이 국구(國舅)로서 수상이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시기에, 옥사가 크게 일어났다. 심온이 돌아올 때 압록강에 이르자 마자 붙잡혀 수원(水原)으로 귀양갔다가
이내 죽음을 받았다. 심온이 죽을 때에 가족들에게 이르기를, ‘대대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우리 선조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이 좌상으로서 그가 죽을 무렵에 힘이 있었기 때문에,
깊이 원망하여 이런 유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겼었다.
내가 일찍이 국사(國史) 교정에 참여하였는데, 바쁜 와중이어서 비록 그 전말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나
그 개요를 대략 알고 있다. 도총제 심정(沈泟)은 심온의 아우이었는데, 하루는 병조 판서 박습(朴習)과 서로
이야기하다가 자연 말이,
“요즈음에 호령이 두 곳(상왕과 세종)에서 나오므로 대단히 불편하여 한 곳에서 나와 전일한 것만 못하다.”
고 하였으니, 그 뜻이 대개 군국(軍國)의 대사는 반드시 상왕께 여쭙게 되어 있으므로 두 곳에 거듭 여쭐 때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경연에서 강론이 끝나면 입시하였던 대신들이 모두 상왕궁에 가서 배알하고 경연 중에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아뢰고 더욱 세밀히 조사하였으며, 비록 경연에서 모시는 신하가 아닐지라도 재상의 반열에 드는 종관
(從官)은 모두 들어가 일을 논하는데 참여하게 하였으므로 바깥의 크고 작은 일과 오고가는 말을 아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심정의 말도 나오게 되었던 것인데, 그 말을 아뢴 사람의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병조 정랑인 듯하다.
상왕이 벼락같이 노하여 드디어 국문하라 하였으나, 죄인들이 서로 전가하고 끌어들여 경대부 10여 명에게
까지 연루되었는데, 죄를 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다 장차 ‘함께 모의하여 난을 꾸미고, 알면서 고하지
않은 죄’로 논하기로 하였다. 상왕은 생각에,
“이것이 어찌 심정 혼자서 한 말이겠는가? 반드시 심온의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집 사람들이
모두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여겼고, 우의정 유정현(柳廷顯),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등이 모두 심온의 평소에 좋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으며, 좌우의 사람들도 각각 그의 허물을 말하였다. 평도공도 말하기를,
“심온이 국구(國舅)이므로서 의당 수상이 되어야 하는데, 수상은 직위만 높았지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은 으레
이조ㆍ예조ㆍ병조 판서를 겸임하며, 우상은 으레 호조ㆍ형조ㆍ공조 판서를 겸임하므로, 심온이 권세 없는 것을
꺼려 꼭 좌상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니, 권세를 탐내 법을 무너뜨리려는 뜻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인정에 누가 권세 잡기를 마다 하겠소. 좌상의 이 말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박습 등은 지금 마땅히 처형하겠지마는 저 심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니, 누군가가 말하기를,
“심온이 만일 이 소문을 듣는다면 반드시 도망하여 숨어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혹은,
“중국에 무고하여 변란을 선동하여 화를 일으킬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하였고, 혹은 또,
“몰래 본국에 돌아와 붕당을 만들어 난을 일으키는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의주에서 압록강 위를 순찰하여
한 사람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고, 아울러 강계(江界) 이하 연변 일대에도 유시를 내리어 일률적으로
순찰하게 하소서.”
하였다. 유정현이 말하기를,
“박습 등이 이미 자백하였으니, 하루도 그의 처형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박습ㆍ심정이 죽으면 심온이 변명하여 증거댈 길이 없게 될 것이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여, 중론이 일치하지 않아 분분하게 일어났고, 평도공이 말한 것은 비록 유정현이, ‘단연코 박습의 처형을
보류하지 말자.’고 한 것과는 같지 않았으나 또한 결정적인 말이 없었다.
상왕이 마침내 의금부의 의론에 따라 박습 등을 베이고, 심온이 수원에 귀양간 뒤에 상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곡절을 묻자, 심온이 대답하기를,
“이런 말은 모두 신이 중국에 간 뒤에 나온 말이니, 발언한 사람과 대면하여 밝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왕이 또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박습이 이미 죽었으니 무엇으로 밝힐 수 있겠는가? 경은 왕비의 아버지이므로 죽음을 내리는 것으로 그치니,
경은 나의 뜻을 알라.”
하였다. 이런 사실로 보면, 깊이 원망한 데는 유정현에게 있을 것 같고 ‘혼인하지 말라’는 유명은 박씨 가문에
대해서였다. 아니면 깊은 원한이 유(柳)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 그 중에 있으면서도 다만 한 집안에만 전해오
고 국사(國史)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알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지금 1백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심씨 가문에서 대대로 지켜 감히 박씨와 혼인하지 못하고,
다만 현령 심융(沈嶐) 한 사람만이 박씨 집안 사위가 되었는데 또한 자녀가 없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 도은(陶隱) 선생은 문장과 절의가 있는 분으로 목은(牧隱)ㆍ포은(圃隱) 여러분과 함께 위태롭고 어지러운
조정에 서서 한 마음으로 나라에 헌신하여 험난한 일을 주선하기를 거의 수십 년을 하다가, 나라가 이미 바뀐
뒤에는, 포은의 당이라 하여 영남으로 유배되었는데, 황거정(黃居正)이 사자로 영남에 가서 하루 동안에 공을
곤장 수백 대를 때리고 묶어서 말에 싣고 수백 리를 달리므로 드디어 공이 문드러져 죽었으니, 이것은 윗사람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태종 때에 황거정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어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상왕께 아뢰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랑하고 사모하는 바로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그를 죽인 것이
과연 이 놈의 소행이었구나.”
하고, 드디어 훈호와 벼슬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보내어 거기에서 죽게 하였다.
목은(牧隱)도 임신년(1392)에서 을해년(1395)까지 한산(韓山)ㆍ여주(驪州)ㆍ오대산(五臺山) 등지에 왕래하며
지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써 대접하여,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 5월에는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에 피서하러 가다가 배에 올라 갑자기 죽었다. 태조가 뒤에 그가 죽은 까닭을 의심
하여 당시의 안찰사(按察使)를 죽였고, 오랠수록 더욱 한탄스럽게 여겼다.
두 임금(태조ㆍ태종)의 충성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방식이 동일한 법도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훌륭하다
하겠다고 해평(海平)이 말하였다.
○ 지중추원사 이순몽(李順蒙)이 여주ㆍ이천 사이에서 농사에 힘써 생활하였다. 어느 날 들에서 김을 매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크게 일면서 커다란 항아리 같은 불덩이가 멀리서부터 굴러 오는데 그
소리가 와글와글 울리므로 말이나 소가 놀라 도망쳤다. 순몽이 호미로 그 불덩이를 쳤더니, 누른 털이 이마를
덮고 파란 눈이 반짝반짝 한 어린 아이가 손에 칼을 쥐고 있는데, 가운데가 꾸부러져 마치 짧은 낫과 같았으
며, 땅 위에 거꾸로져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순몽이 호미로 긁어당겨 일으키자, 하늘이 또 캄캄해지고
비바람 치더니, 마침내 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실지(李實之)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것은 즉 우리 외가의 선조이다. 대대로 그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하였다. 필부로서 하루아침에 발탁되어 일어나 나라의 명장이 되었으니, 어찌 이런 기이하고 뛰어난 징조가
없었겠는가.
세종
우리 나라의 예악 문물이 세종 때부터 융성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크게 갖추어졌으며, 여러 임금들이 잇달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일찍이 세종 때의 주서(注書)의 《일기초(日記草)》를 보니, 상감께서 친히 양성ㆍ진위ㆍ용인ㆍ여주ㆍ이천
ㆍ광주 사이를 사냥 다녔는데, 때로는 한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하였다.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참외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드리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반드시 술과 음식으
로 답례하였다.
《일기》책머리에는 여섯 사람의 대언(代言)과 두 사람의 주서의 성을 죽 써 놓으면서도 그 이름은 쓰지 않았고,
좌대언(左代言) 밑에는 진한 먹으로 크게 써 놓기를,
“종일토록 취해 누워서 인사불성이니 우습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푸른 참외와 보리밥이라면, 봄 가을로 정상적으로 사냥할 때가 아니요, 중요한 정무
를 맡은 승지는 취해 누워서 일을 폐하는 직책이 아니니, 대개 태평 무사한 성덕(盛德)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그 군신간에 협조하여 서로 닦고 서로 경계하는 데에 있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조
○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洪允成)은 힘이 세고 방략(方略)에 능하여, 승문 정자(承文正字) 때부터 광묘
(光廟)의 신임을 받아 여러 차례 훈부(勳府)에 오르고,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세조 또한 그를 심복
으로 믿어 정중한 대우가 융숭하였다.
일찍이 도순문 출척사(都巡問黜陟使)로 기내의 고을을 순행하다가 양주(楊州)에 당도했는데,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어, 그 깃발을 휘날리며 벽제 소리 요란하게 전후에서 호위하여 행차하는 모습을 보느라고 텃밭과 길거
리에 나와 늘어서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이 17ㆍ8세쯤 보이는 한 처녀가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 틈으로 내다
보고 있었는데 공이 그 처녀가 자태 있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속에 그 집을 기억해 두었다가 관아에 돌아오자
마자 물어보니, 바로 좌수(座首)아무개의 집이었다. 드디어 불러다가 이르기를,
“네집 딸을 내가 오늘 저녁에 첩을 삼을 터이니, 속히 돌아가서 술자리를 준비하라. 만일 지체하면 네 집을
젓담겠다.” 하였다.
좌수가 급히 돌아가 그 말을 하니,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울면서
“따르자니 사족(士族)으로서 남의 첩이 되어 가문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요, 안 따르자니 위력과 권세 아래
생명이 가엾게 될 것이다.”
하며, 서로 통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그 처녀가 말하기를,
“부모님들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처리할 터이니 맞아 오십시오.”
하였다. 부모들이 그의 말대로 가서 맞아오니, 공이 반갑게 그 집으로 가,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니, 그 처녀가
앞으로 다가서 그의 소매를 잡고 한 손으로 장도칼을 뽑아 들고
“공이 한 나라의 대신으로서 명을 받아 지방을 순찰하면서, 한 가지 일도 칭찬할 것은 없고,
먼저 불의를 행하면서 권세를 믿고 사대부집 여자를 욕보이려는 것은 무슨 짓입니까.”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그러면 네 요구가 무엇이냐?”
하니, 처녀가 말하기를,
“공이 꼭 저를 아내로 맞아 들이려고 한다면, 저 역시 사족(士族)이온데, 어째서 물러가 채단을 갖춘 다음에
혼례를 올리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는 헛되이 살아서 가문에 욕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좋다하고 이튿날 예를 갖추어 거행하니, 마침내 두 아내를 두게 되었는데 숭례문 밖에서 살았다.
세조가 어느날 그 집에 갔는데 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정중하게 맞아 중당(中堂)에 모시고 그 아내로 하여금
술잔을 올리게 하면서 그 아내를 맞아들인 사연을 아뢰었다. 상감이 흐뭇하게 여기면서,
“이도 또한 나의 제수니라.”
하고 ‘제수’라고 불러주며 실컷 즐겁게 놀다가 돌아갔다.
성종 때에 이르러 인산(仁山)이 죽자 두 아내가 적통을 다투어 서로 소송하게 되었는데, 세조가 ‘제수’라고
부른 일을 끌어대어 증거를 삼으므로 성종이 사관(史官)의 기록을 조사시켰더니, 과연 그런 사실이 있으므로
특명으로 둘 다 부인을 삼아주고 가산을 반분하게 하였는데, 두 부인이 모두 아들이 없고 가산만 있었다.
그의 손녀가 향화 군수(向化郡守) 고헌(高巘)의 아내가 되었는데 우리 집과는 먼 친척의 분의가 있으므로
우리 부모 앞에서 그 일을 매우 자세히 말하였고, 나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인성(仁城)은 성질이 몹시 모질고 사나웠다. 공을 믿고 사람을 멋대로 죽이고, 문 밖 냇물에서 말을 씻으면
즉각 사람과 말을 모두 죽였으며,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은 귀천을 묻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언젠가는 또 남의 논을 빼앗아 미나리 논을 만드니, 늙은 할미가 울면서
“늙은 몸이 가난한데다 홀로 되어 일생 동안 믿고 생활을 부지해 가는 것이 이것인데, 그대로 순종하면 굶어
죽을 것이요, 항거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나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그 집에 가서 하소연하여
만일을 바랄 수밖에 없다.”
하고, 드디어 문서를 가지고 갔었는데, 공이 한 마디 말도 건네보지 않고 바로 그 할미를 돌 위에 거꾸러뜨리
고 모난 돌로 쳐부수어 그 시체를 길 옆에 버려 두었으나,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이러므로 그의 종들
이 멋대로 행패를 부렸으나 관에서도 금하지 못하였다.
포도부장 전임(田霖)이 어느 날 당번으로 도적을 잡으려고 재인암(才人岩) 곁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공의 집
근처에서 대여섯 사람이 어두운 밤중에 갑자기 덤벼들면서 자칭 아무개 집 사람인데 우리를 어떻게 할터이냐
고 하였다. 전임이 그들을 손수 잡아서 묶으면서,
“공이 어찌 너희들을 풀어 관법을 범하게 했겠느냐.”
하였다. 그 무리들이 마구 욕지거리를 하여도 대꾸하지 않고 더욱 심하게 결박하자 한참 만에야 비명을
지르면서 조금 늦추어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끝내 용서하지 아니하였다.
날이 밝자 그들을 몰고 가서 공을 뵙고,
“이놈들이 세력을 믿고 망령된 행동을 한 것이지 참으로 도둑질 한 것은 아니니, 바라건대 이후로는 잘 단속
하여 주십시오. 공에게 누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공이 크게 기뻐하며 뜰에 내려와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런 좋은 사람을 어찌 서로 알게 되기가 늦었을까. 자네 술은 얼마나 마시며, 밥은 얼마나 먹는가?”
하였다. 전임이 대답하기를,
“오직 공께서 명하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하니, 곧 밥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비빔밥과 같이 만들고 술 세 병들이나 되는
한 잔을 대접하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우고 단숨에 그 술을 들이켰다. 공이 더욱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자네가 무슨 벼슬에 있는가?”
고 물으므로,
“벼슬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내금위에 보직되어 있습니다.”
하니, 공이 드디어 임금께 아뢰어 선전관에 발탁시켰다. 이로부터 왕래하기를 친밀하게 하여 거리낌없이
드나들었다.
어느 날 전임이 찾아가 공의 문 밖에 당도하였는데 공이 마침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어린 계집종을 뜰 아래
나무에 거꾸로 묶어 놓고 활을 가득이 당기어 막 쏘려하고 있었다. 전임이 꿇어 앉으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한번 불러서 대답을 하지 않기에 쏘아 죽이려 하는 참이다.”
하였다. 전임이 공수(拱手)하면서
“죽이는 것보다는 소인에게 주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니, 공이 웃으면서 그러하라 하고, 곧 주어 버리므로 전임이 종신토록 데리고 살았다.
○ 공이 언젠가 달밤에 홀로 앉아 있다가 이웃 사람이 말재주가 있어 익살을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곧 불러다가,
“지금 달은 밝고 바람은 고요하며 안석도 서늘하여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는데, 자네가 무슨 말을 가지고
나의 심심함을 풀어주고 내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이 두서너 번 굳이 사양하므로 공이 뒤따라 말하기를,
“말해 보라. 내가 담 밖에 있는 조그만 집을 너에게 줄 터인데, 자네가 종신토록 편안히 지낼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이 사양하고 한참 있다가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이 말은 소인이 지어낸 것인데 속되어서 대인께서 들을 만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공이
“너무 사양하지 말고 빨리 말해 보라.”
하니, 그제야 꿇어 앉으며,
“못가 수양버들 대여섯 그루가 2,3월이 되자 긴 가지가 휘늘어져 초록 장막을 두른 것 같고, 4,5월에는 붉고
흰 연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6,7월에는 수백 개의 수박이 푸른 구슬이나 조롱박처럼 주렁주렁 매달리는데,
찌는 듯한 여름날에 따다가 쪼개면 빛깔은 주홍 같고 물은 찬 샘물 같으며 맛은 꿀 같도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이 손을 저어 말리면서,
“말하지 말게, 말하지 말어. 입에서 침이 질질 나와 못 견디겠다.”
하면서, 급하게 아이를 불러 그 문서를 가져다 주었다. 그 사람이 돌아가 문서를 보니, 장획(臧獲)과 재산이
그 속에 가득하였다.
대개 공의 천성이 엄하고 혹독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는 일이 많았으나 가끔 하는 일이 기발하기가 이와
같았다. 청파(靑坡) 동리 사람들이 지금도 공의 전해 오는 사적을 말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 이시애(李施愛)가 사변을 일으킬 당초에 그 도당을 보내어 투서하여 밀고하기를,
“한명회(韓明澮)ㆍ권람(權擥)ㆍ신숙주(申叔舟)가 모두 내응한다.”
하였다. 세조가 세 사람에게 이르기를,
“경 등은 곧 나의 심복 대신이다. 만일 뜻밖의 변이 있게 되면 큰 일은 그만이다.”
하였다. 그 사람들이 모두 후원 서총대(瑞葱臺) 근처에 입직한 것이 사실은 그들을 가두어 둔 것인데,
매일 저녁 반드시 술과 음식을 가지고 친히 가서 보살피고 위로 격려를 극진히 하다가 시애가 패망한 뒤에야
그만두게 되었는데, 오성(鰲城)의 말이《국조보감》에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 세조가 시애의 반란을 듣고 깊이 걱정하고 염려하여 귀성군(龜城君) 준(浚)을 도원수, 조석문(曺錫文)을
부원수로 하고, 또 장수의 지략이 있는 문무관 남이(南怡)ㆍ강순(康純)ㆍ허종(許琮) 등 28인을 엄선하여
참모관으로 하고, 모두 조석문의 막하에 예속시켜 먼저 영흥(永興)으로 가게 하였다. 준(浚)이 10만의 대병을
거느리고 뒤에 출발하였는데 준의 나이 18세였다. 임금을 하직한 지 닷새 만에 양주에 도착하고, 10일 만에야
철원에 가니, 세조가 크게 노하여 발을 구르며,
“창졸간에 큰 일을 어린애에게 맡긴 것이 나의 실수이다.”
하고, 엄하게 꾸짖어 빨리 진군하기를 독촉하였으나 준이 오히려 말하기를,
“철령은 길이 험하여 빨리 진군할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죄는 강원 관찰사가 길을 닦지 않은데 돌려 그를 끌어다가 목을 베었다. 15일 만에 회양(淮陽)에
이르렀는데 역적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 왔다. 그때 석문(錫文)은 이미 대병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였고, 준이 또 뒤따라 출발하게 되니, 나라 안이 텅 비었고 양남(兩南) 지방에 유언비어가
또 일어나므로 준이 떠날 때에 특별히 성명(聲明)을 한 것은 실제는 뒷 걱정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
면, 어찌 대장의 몸으로 중대한 명령을 받고서 길에서 머뭇거려 나아갈 계책을 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것은 아마 임금의 비밀지령을 받았던 것이다.
○ 서평군(西平君)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는 유항선생(柳巷先生) 문경공(文敬公) 수(脩)의 손자요,
정승 문간공(文簡公) 상경(尙敬)의 아들이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계미(繼美)의 아우요, 상당부원군(上黨府院
君) 명회(明澮)의 재종형이다. 대대로 공이 있고 덕을 쌓아 부귀가 혁혁하였으나 공은 홀로 청렴결백한 지조가
있어 봉급의 수입도 꼭 친척 중의 부모 없는 사람과 홀어미 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문에 집안이
가난하여 아침 저녁을 나물에다 거친 밥으로 지냈는데 늙어가면서 더욱 힘썼다.
서원(西原)이 민망히 여겨 때때로 보태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어느 날 상당(上黨)의 집에서
문중 모임을 열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서평의 나이가 이미 높은 데도 생활이 너무 검소하고 모든 범절이 초라하여, 보기에 몹시 미안하니
어찌 대책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있느냐?”
고 하였다. 상당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책임이오.”
하고는 곧 아이를 불러 종이를 가져오라 하여 한 장의 문서를 작성하되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의 이름을
연명하고 위에는 공의 청렴 간소한 덕을 서술하였다. 다음에는 문중에서 그를 받들지 못하였던 실수를 적고,
끝에 변변치 못한 것이라 마음에 맞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뜻을 말하고서 곧 흥인문 밖 고암 밑에 있는
논 열섬지기를 바쳤는데, 공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당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잇달아
일어나고 잇달아 절을 하며 소리를 모아 찬성하여 사세가 중지하지 못하게 된 뒤에야 비로소 받았다.
그러나 조심조심하여 불안해 하는 기색이 완연하였다. 그리하여 늙은이나 젊은이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취한 몸을 부축하여 밤에야 돌아 왔으니, 온 문중의 충실하고 순후한 좋은 일이었다. 우리 선대부 외조모가
곧 서평의 손녀인데, 우리 종가의 고암(鼓岩) 밭이 또한 그때에 나누어 받은 것이라고 했다.
○ 오성(鰲城)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오례의(五禮儀)》가 그 규모와 절목이 광대하게 구비되어 곡진하고 자세하게 되어 있다.”
하였다. 그것이 모든 예에 있어 비록 낱낱이 고례(古禮)에 맞는지 알 수 없으나 흉례(凶禮)로 말하면 반드시
창졸간에 생기는 것이니 만약 오례의가 아니었던들 다급할 때에 있어 무엇으로 절충(折衷)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좋은 데가 극히 많아 상식으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가 있다. 따라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는 뛰어나고 비상한 인물이라 하겠다.
성종
○ 성묘(成廟)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가 계시므로 여섯 승지들이 각기 소속 관아의 공무를
휴대하고 그 해당 관원들을 인솔하여 상감의 앞에 나아가 바쳤다. 그리하면 상감께서 반드시 해당 관원 및
승지와 더불어 사리를 연구하고 따지기를 되풀이하여, 만일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론하게 하고,
옳게 되었으면 반드시,
“이것이 당상관의 의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
하고 물었으며, 만일 해당 관원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극진히 칭찬하고는 그 이름을 기록하여 훗날
승진하는 전형 자료를 만들었다.
심지어 수령ㆍ첨사ㆍ만호들이 부임하려 하직할 때에도 반드시 일일이 불러 보아 그 사람의 출신한 근거를
묻고 다음으로 씨족 관계와 교우 관계를 물었으며, 그 다음에 공사 처리와 부하 통솔, 백성 다스리기와
적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 보아 잘한 사람은 극진하게 칭찬하고 또한 따라서 등급을 뛰어 승진시켰으며,
잘못한 사람은 바로 파면하되 아울러 천거한 사람까지 죄주어,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이렇게 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비록 시종하여 직접 받드는 사람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들이 그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짐작하면 어쩔 수 없이 병을 핑게하고 감히 부임 인사를 가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이 사실을《승정원일기》에서 보았다.
○ 성종 때에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상소한 사람이 있었다. 상감께서 이 상소를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사인(士人) 강신(姜信)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바로 불러다가 해서와 초서를 써서 올리게 한 뒤 상감께서
보시고 말하기를,
“해서는 이 사람에게 비길 사람이 없다.”
하고, 드디오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座)를 시켜 불러서 보았으며, 또한 그가 쓸 만한 인물임을 알아주어 두어해
동안에 판결사(判決事)에 뛰어 올랐는데, 또한 그 직책에 맞게 일하였으니, 성종께서 한 사람의 인재라도
빠트리지 않는 성덕은 천고에 뛰어났다고 하겠다. 강신은 첨정 강한(姜韓)의 조부이며 그의 집이 소격서동(昭
格署洞)에 있었다. 내가 장인이 수집한《고서첩(古書帖)》에서 강신의 글씨를 많이 보았는데, 해서ㆍ초서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달했었고, 오성(鰲城)도 또한 해서가 초서보다 더 낫다고 말하였다. 강한(姜韓)의 호는 금재(禁
齋),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으며,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외증조이다. 나이 17세에 이웃
사람의 상소문을 썼는데 성종이 기특하게 여겨 불러보고 벼슬 주었다.
○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한 동서가 있었는데, 그 장모가 외출하는 것을 보고 그 가마 뒤를 따라가
가마의 동쪽을 부축했다가 서쪽을 들었다 하면서 소리를 높여 교군들을 단속하여 장모가 가마에서 내린 뒤에
야 그만두었다. 훗날 문익공이 또한 그 장모의 행차를 따르게 되었는데, 가마가 옆으로 기울어도 내버려 두고
적적하게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가마에서 내린 뒤에 장모가 아무개만 못하다고 꾸짖었으나, 공은 역시 노하는
빛도 없이 다만 ‘예, 예’ 할 뿐이었다.
또 판서 한형윤(韓亨允)ㆍ대사헌 성세순(成世純)과 동문학우였고, 진사 초시에도 같이 합격하였으며 함께 문과
초시에도 합격하였는데, 같이 산골 절에 들어가서 약속하기를,
“대과를 해야지 진사시 같은 것은 하러 갈 것 없다. 만일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같이 공격하기로
하자.”
하였다. 어느날 공이 말하기를,
“내일이 내 생일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와야겠다.”
하므로, 같이 있는 분들이 허락하고, 또한
“전의 약속을 잊지 말라.”
하므로, 공이 그런다 하였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 왔더니, 부모가 권유하기를,
“내일이 바로 회시 날이다. 시험지와 붓과 먹도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된다.”
고 하였다. 공이 약속한 일이 있는 것을 말하여도 또한 꾸짖으므로 공이 마침내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 갔다
나와서는 바로 절로 올라갔더니, 같이 있는 분들이 크게 떠들면서 약속대로 달려들어 치기를 요즈음의 이른바
거풍(擧風 사지를 잡고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공이 천천히 일어나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하기
를,
“약속은 저버린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기에 아무렇게나 써서 꼴찌를 한 것인데, 어찌 꼴찌하고도 이 괴로움을
당할 줄 알았느냐.”
하였다. 그 해에 그분들과 공이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명신(名臣)들의 으뜸이 되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대현(大賢)은 어리석은 것 같고, 대덕(大德)은 어설픈 것 같다.”
하였는데, 공이 이와 근사하였던 것이다.
○ 성종 때에 최부(崔溥)가 사간이었고, 정광필(鄭光弼)ㆍ남곤(南袞)은 좌ㆍ우 정언이었다. 최부가 계축(契軸)에
시를 지어 썼는데 그 끝 구에
뒷날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고 어루만질 적에 / 後人指點摩挲處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되다 할는지 모르겠노라 / 不知某也回某也忠
하였다. 최공의 이 글귀가 비록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겠지마는 그 글뜻을 음미해 보면 오로지 충성된 정광필
과 간사한 남곤 두 분의 훗날 행사를 가리켜 말한 것 같다. 군자의 한 마디 말은 충성된 사람이나 간사한
사람의 거울삼는 경계가 되는 것이니, 참 두려운 일이로다.
○ 대사헌 홍흥(洪興)은 충정공(忠貞公) 응(應)의 아우요, 곧 우리 선대부의 외증조이다. 과거는 거치지 않고
승지ㆍ방백을 역임하여 나아가서 도헌(都憲)까지 되었는데, 임사홍(任士洪)은 간사하니, 오래두면 반드시 나라
에 화가 될 것을 극력 논하였으며, 또 한명회(韓明澮)가 공을 믿고 권세 부리는 꼴을 탄핵하였다. 풍채가 늠름
하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공이 이육(李陸)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매우 친하였는데, 이육이 한참 새로 집을 짓는데, 주춧돌에
기둥을 정연하게 다 세웠다. 공이 출근길에 그 집 사람을 불러 이르기를,
“가서 너희 주인에게 말하라. 나라에 떳떳한 제도가 있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제도에 어긋난 점이 있으면
마땅히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고, 퇴근하면서 보니 모두 헐고 기둥은 잘라 감히 한 자 한 치도 어기지 않았다. 그 정직하고 엄격함이
이러하였으되, 또한 속은 꿋꿋하고 겉은 부드러워 비록 지극히 천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즐겁고 흐뭇하게
대하였다.
일찍이 가뭄이 들어 민간에 술금지가 엄한데 술에 취한 할미 7~8명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난잡하게
춤을 추면서 다가와 공의 초헌(軺軒)을 가로막고,
“나으리 나으리, 이보십쇼, 좋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술을 금합니까.”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좋아 좋아, 금주령을 늦추어 줄 터이나 당신들은 지나치게 술을 마셔 재산을 축내지 말도록 하오.”
하므로, 그 소문을 듣고 온 장판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후 전임(田霖)이 판윤으로 있을 때에, 왕자 회산군(檜山君)의 집을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그 역사(役事)를
주관하는 사람을 불러 이르기를,
“집을 짓는데 있어 칸수의 많고 적음과 칫수의 놓고 낮음의 법이 있는 것이니, 네가 죽기를 꺼리거든
조심하여 지나침이 없도록 하여라. 오늘 저녁에 다시 지나가겠다.”
하였다. 저녁 때가 되자 그 사람이 말 앞에 나와 마중하면서,
“칸수가 많은 것은 헐어버리고, 치수가 높은 것은 잘라 내어 감히 법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공이 고함치며 천천히 말하기를,
“애당초 제도를 어겼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다만 이미 제도대로 준행하였으니 우선 기다려 보겠다. 훗날
다시 범하면 전의 죄까지 합쳐서 다스릴 것이다.”
하니, 그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어 ‘예, 예’ 하면서 물러갔다.
홍공(洪公)은 위인(偉人)인지라 비록 말할 수 없거니와, 전공(田公)은 일개 무부이면서도 관직에 임하여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 강한 자를 겁내지 않고 약한 자를 무시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 당시 조정의 기강이 존엄하였
고 인물의 기상이 거대하였던 것을, 요즈음 세상에서 하늘에 솟은 듯이 집을 지어 온 동네를 차지하고, 큰 길
을 깎아 먹으며 담장에 나무를 둘러 심어 주택을 지어도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관리들이 감히 단속하
지 못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어떻다 하겠는가.
○ 찬성 손순효(孫舜孝)가 성종 때에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소박하고 정직하여, 임금도 그를 몹시 좋아하였
다. 어느날 상감께서 느지막히 두 사람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남산 기슭에
두어 사람이 수풀 사이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것이 손공(孫公)임을 짐작하고 바로 사람을 시켜 가 보라고
하였다. 과연 손공이 두 사람의 손님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 위에 누런 오이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상감께서 바로 말 한 필에다가 술과 고기를 잔뜩 실어다 주게 하고 이어 경계시키기를,
“내일 사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다른 신하가 알면 반드시 공을 편애한다고 싫어할 것이다.”
하였다. 공과 손님들이 머리를 조아려 감격하고 넘치도록 배불리 먹고 취하게 마셨으며, 이튿날 이른 아침에
또한 사례하려 갔었다. 상감께서 불러 보고 그 당부한 경계를 지키지 않은 것을 나무랐더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다만 은덕에 감사하려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공의 옛 집터가 지금 명례방동(明禮坊洞) 위쪽에 있었다고 함.
절효(節孝) 손공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쇠와 돌을 꿰뚫을 정도였다. 그가 경기 감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한 가지 채소나 한 개의 과실이나 한 가지 맛진 것이라도 입에 맞는 것이 있게 되면 바로 가져다가
봉하여 임금께 바쳤었다.
연산군 때가 되면서 흥청(興靑)의 말을 전적으로 신임하여 시기의 조만(早晩)과 생산물의 풍흉을 묻지 않고
문부에 의하여 독촉함이 바람에 일어나는 불길같이 급하게 하므로 백성들은 안심하고 살 수가 없게 되어,
고을이나 마을들이 모두 쓸쓸하게 되었다. 중종 반정 후에 모조리 삭감하고 개혁하였으나, 또한 미처 못다한
것이 있어 비록 한두 가지 대수롭지 않은 물건일망정 지금까지 백성들의 큰 폐단이 되고 있는 것이 있다.
옛사람들이 오직 정상적으로 바쳐야 하는 것 이외에는 함부로 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그 뜻이 진실
로 깊고 원대하여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손공이 찬성으로 있을 적에 큰 가뭄을 만나 그가 파견되어 명산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쨍쨍 쪼이는 햇
볕 아래 공수(拱手)하고 서서 한걸음도 감히 움직이지를 않았다. 날은 이미 저물었으나 하늘에는 한 점의 구름
조차 없으므로 공이 홀(笏)을 안고 고개를 숙이면서 탄식하기를,
“하늘이 어찌 정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필연코 그런 정성이 없는 것이다.”
하고, 자신을 허물하며 졸지 않았는데, 향불을 피우고 술잔을 올리자,
“큰 비가 내릴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나는 것 같더니, 이튿날 큰 비가 흠뻑 내려 흡족하지 않은 데가 없게 되고 개었다.
자신의 정성을 다하고 나서 보답을 하늘에 돌린 것을 옛사람들에게 찾아본들 어찌 흔히 볼 수 있겠는가?
‘지성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런 분이 그 사람 아니겠는가?
○ 근세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그 선조는 바로 도순문사(都巡問使) 함부림(咸溥霖)의 막내아들 우적(禹績)의 아들로서, 부림(溥霖)의 맏아들
우치(禹治)의 뒤를 이었으나 성종 때에 비로소 승습(承襲)하여 충의위(忠義衛)에 소속되고, 대대로 녹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년의 변란 통에 관자(官資)가 분실되었는데, 바로 구전을 받지 못하여 매우 애통스럽고
민망하다.”
하였다. 해평(海平)이 말하기를,
“부림이 개국공신이었고, 그의 아들 우공(禹功)도 정난공신에 책훈되었으나 모두 후손이 없었다. 어
떻게 개국공신이면서 성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승습할 리가 있었겠는가? 절대로 그러 이치가 없다고 핑
계하여 구전을 허락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연릉(延陵 이호민(李好閔))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해평이 장고(掌故)에 해박하면서도 어찌 이 일만은 몰랐을까? 부림의 나이 100세가 다 되어서 자손이 다
없어지고 종들이 모두 흩어져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가다가 세조 때에 죽었다.
맏아들 우치는 후손이 없었고, 둘째 아들 우공 또한 후손이 없었으니, 막내아들 우적의 아들이 우치의 후손이
되는 것은 원래부터의 관례이다. 하물며 양녕대군이 나이가 90세가 넘어 성종 말년에 죽었으니, 우적의 아들
이 성종 때에 승습한 것이 또한 무슨 의심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세조 때에서 성종 때까지의 사이가 20년도
채 못되니, 승습이 늦어져 성종 때에 이른 것은 사리에 당연한 일이다.
홍유손(洪裕孫)이 추강(秋江 남효은(南孝溫)ㆍ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나이가 비슷한 사이었는데,
그의 아들 지성(至誠)이 죽은 것은 겨우 20년 남짓하였다. 해평이 유독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 진사 전언경(全彦慶)이 스스로 말하기를,
“세상에서 말하는 장옥(張玉)의 〈시상리부(柴桑里賦)〉라는 것은 바로 나의 할아버지 전영(全英)이 지은 것이다.”
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의 증조부가 홍문관사로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밑에서 거의 20년이나 일하였는데, 하루는 종이에
글을 써서 종을 시켜 서거정에게 올렸더니, 서거정이 다 읽고 나서 ‘어디에서 난 것이냐’고 묻자, ‘서리 전(全)
아무개가 주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즉시 불러 묻기를, ‘이것은 누가 지은 것이냐’ 하니, 꿇어 앉으면서 ‘소인의
아들이 나이가 열 여덟이온데 글을 좀 배웠습니다마는 그 문장이 과거에 합격하게 될는지 몰라서 한 번 시험
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극구 칭찬하면서 ‘네게 이와 같은 아들이 있었으면 왜 진작 우리집 애들
과 한 곳에서 같이 학습시키지 않았느냐. 빨리 불러 오너라. 내가 직접 가르치겠노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올라가 뵈니, 서공이 그의 용모와 풍채가 뛰어나고 묻는 말에 또렷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극히 사랑하여,
그의 자제들과 사랑방에 함께 거처하게 하면서 매우 부지런히 공부를 시켜 날로 성취되었고, 오랫동안 서공의
곁에 있으면서 글씨 쓰는 일을 전적으로 맡아 보았다. 이 때문에 서공이 친구들과 글을 논하고 시를 강론하는
말을 모두 들을 수가 있었다. 오랫동안 장옥(張玉)과 같이 공부하는 친구가 되었고, 일찍이〈시상리부〉를 지었
는데, 제목이 바로〈시상리(柴桑里)〉였다. 장옥을 시켜 대신 그의 이름을 써서 올렸는데, 시관이 극히 칭찬하여
장원을 시켰었고, 장옥이 회시에 갔을 때에도 장옥의 지은 글이 일등에 참여 했었는데, 그때의 시관이 마침 또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시상리부〉를 지은 장옥인데, 문장이 장원할 사람이지.’ 하면서 이내
10여 구를 외니, 여러 시관들이 들어보고 칭찬하여 드디어 장원으로 뽑았다. 우리 조부는 중시의 다른 과는
합격하였으나 끝내 상상(上庠)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훈도로 세상을 마쳤다.”
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오성(鰲城)이 직접 들었다고 한다.
예종
남이(南怡)의 옥사에 중추원 영사 강순(康純)이 관련되어 심문을 받았다. 남이가 형벌을 받아 종아리뼈가
부러지자, 마침내 자백하기를,
“강순이 나를 시켰다.”
고 하자, 강순이 말하기를,
“나이가 70이 넘고 지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르렀는데,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남이를 시켰겠습니까?”
하였다. 남이가 탄식하며,
“내가 자백하지 않은 것은 훗날에 공을 세울 것을 바랐던 것인데, 이제 종아리뼈가 다 부러져 이미 덩치만
남은 쓸모없는 병신이 되었으니, 산들 무엇을 할 것인가? 나 같은 나이 젊은 사람도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
머리가 허연 늙은이는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러므로, 내가 증명하는 것이다.”
하였다. 예종이 묻기를,
“병조 판서 허종(許琮)도 역적 모의를 아느냐.”
하였다. 이때에 허종이 입시하였다가 황공해서 땅에 엎드렸다. 남이가 말하기를,
“허종은 충신으로 이 일을 모르니, 원컨대 의심하지 마시고 쓰소서.”
하였다. 남이와 강순이 함께 형을 받으러 가면서 강순이 남이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젊은 애와 서로 좋아했으니, 이런 화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하였다. 도대체 역적이란 것이 어떤 죄명인데, 이렇게 희롱을 한 것일까.
지금도 남이의 옛 집터가 있지마는 사람들이 감히 살지 못하고 넓게 남새밭이 되어 있는데,
대개 숫범과 같은 바탕이 있었다고 한다.
연산
○ 교동주(喬桐主 연산군)가 처음 정사를 맡았을 때, 수상 이극균(李克均)이 성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으로서
연산의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은 것이 많으므로 연산군이 크게 감정을 품었으며, 그의 아들 형조 판서 세좌
(世佐)는 연산군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 형방 승지로서 사약을 가지고 간 사람이다. 세좌의 아들들이
또한 이조와 옥당에 벼슬하고 있었는데, 임사홍(任士洪)ㆍ유자광(柳子光) 등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군
을 충동하여 기필코 옥사를 일으켜 모조리 죽이려 하고 나아가서는 조정의 사대부들에게까지 파급하여 죽이려
하였다.
어느 날 임금과 신하가 같이 즐기는 잔치를 정전(正殿)에서 벌리고 재상들이 모두 연산군의 술잔을 받아
마셨는데, 이세좌가 끝잔을 받았으나 마시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이튿날 연산군이,
“신하로서 임금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여 마시지 않고 또한 남은 술로 임금의 옷을
망쳤으니 불공(不恭)함이 막심하다. 임금 앞에서 불공한 행동을 한 것은 곧 크나큰 불경이요 무도한 짓이니
세좌를 옥에 가두라.”
하였고, 또한 세좌의 문서를 수색시켰는데, 크고 작은 사대부들이 그 집에 명함을 남겨 두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대개 설날 세배 인사를 하고 남겨 둔 것인데, 그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게 하니 내외의 모든
신하들이 하나도 면한 사람이 없었다.
은대(銀臺)에서는 승지로부터 주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옥에 들어 갔고, 가주서 이희보(李希輔)도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연산군이
“너야 소신(小臣)으로서 반드시 그 사정을 몰랐을 것이니, 남아서 승정원의 모든 일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수일 후에 여러 신하들이 점차 풀려 나왔다. 희보가 유독 5~6일 동안이나 남게 된 것은 대개 희보가
전에 궁인(宮人)의 만류하는 덕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라 하였다.
또한《승정원일기》에서도 보았다
○ 송당(松堂) 박영(朴英)은 양녕대군의 외손으로서, 천품이 뛰어났고, 집안이 또한 큰 부자였다. 나이 열일곱에
직접 요동까지 가서 비둘기와 할미새를 사오기도 하여, 하는 일이 활달하고 구애되지 않았다. 성종이 불러들여
훈계하자 곧 무술을 배웠고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좋은 말을 타고 화려한 의복으로 땅거미질 무렵에 남소문 어귀를 지나는데, 자못 아리따운 한 여인이
손짓하여 부르므로 공이 말에서 내려 하인더러 내일 일찍 오라 일러두고, 드디어 그 여인을 따라 갔다.
그 집이 깊숙하게 궁벽진 외딴 곳에 있었는데, 공이 당도했을 때는 날이 이미 컴컴하였다. 그 여인이 공을
대하여 갑자기 주르르 눈물을 흘리므로 공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바로 손을 들어 말리면서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건대,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말미암아 잘못 죽게 되었다.”
하였다. 공이 놀라며 다시 물으니,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다가 죽이고 그 옷과 말이며 안장들을 나누어 온 지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벗어날 것을 매일같이 생각해 왔으나 도적의 무리가 너무도 많으므로 잡혀서 죽을
까봐 꾀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공은 저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곧 칼을 빼어 들고 벽 위의 네 모퉁이를 살피면서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밤중이 되자 방 위
다락에서 여인을 부르더니 큰 밧줄을 내렸다. 공은 몸을 날려 벽을 차고 급히 그 여인을 업고 벽의 구멍으로
나와 몇 겹의 담을 뛰어 넘느라고 소매를 끊고 달려 나왔다. 이튿날 벼슬을 그만두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무인 노릇을 버리고 성현들의 글을 읽고 기질을 변화시켜 당대의 순화된 선비가 되었다. 평생 자리 옆에
소매 잘라진 옷을 놓아 두고 자제들에게 보이면서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 훈도 유우(柳藕)는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으며, 거문고와 그림 두 가지 다 잘하였다. 어느 날 연산군이 승정
원에 묻고 그를 시험해 보겠으니 대기시키라 하였다. 공이 부름을 받고 승정원에 가서 시험을 받고 나왔는데,
그 뒤에 다시 부르지 않았으니, 아마 잊어버린 것일 것이다. 공이 평생토록 이 일을 언짢아 여겨 거문고를
부수고 붓을 문질러 버리고서는,
“매양 시험보던 일을 생각하면 즉시 땅을 파 들어가 버리고 싶지 않은 때가 없다. 이미 시험해 보고서 또한
잊어버리는 것은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여, 자제들에게 거문고와 그림을 익히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 청성군(靑城君) 심순경(沈順經)은 사인(舍人) 순문(順門)의 아우요, 영의정 회(澮)의 손자인데, 심회는 윤씨에
게 사약을 내릴 때에 수상이었으므로 그의 관을 쪼개어 시체를 베었으며, 순문은 참소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공이 훈련첨정으로 내승(內乘)을 겸직하여 방금 입직하고 있었다. 연산주가 대궐문 처마
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다가 장차 탕춘대(蕩春臺)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여 마굿간의 말을 내어 오라고 독촉
하므로, 공이 급히 달려가 먼저 말을 끌고 와 보니, 비단 자리가 땅에 깔려 있고 술과 안주도 치우지 않은 채
있었다. 그 위로 지나가려고 하였으나 반드시 위엄스러운 노여움을 살 것이므로 얼른 꿇어 앉아서 두 손으로
그 자리의 이음매를 끊고 일어서 좌우로 잡아 젖친 뒤에 말을 끌고 나가니, 연산주가 그 창졸간에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켰는데, 그 세상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넘기었
다. 대개 천성을 상실한 사람은 기쁨과 노여움을 노출하기 쉬우므로 그 화주고 복줌을 헤아릴 수 없음이
이러한 것이다.
황형(黃衡)이 박평성(朴平城 박원종(朴元宗))을 대신하여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다. 임금에게 하직하던 날,
평성이 술을 가지고 동교(東郊)까지 전송나왔다가 손바닥에 여덟 글자를 써 술잔을 주고받는 틈을 타 몰래
보이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으니, 공이 잠깐 머물러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대개 반정의 큰 계책이 이미 결
정된 뒤인지라 황형이 취한 것을 핑계하여 못본 체하고 가다가 포천(抱川)에 이르러 반정된 것을 들었다.
[주-D001] 좌명공신(佐命功臣) :
태종 1년(1401)에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이저(李佇)ㆍ이거이(李居易) 등 46명의
공신에게 준 칭호.
[주-D002] 흥청(興靑) :
연산군 때 뽑혀 대궐 안에 들어간 기생을 흥청이라 하였는데, 임금을 가까이 모신 기생을 ‘지과흥청(地科興靑)’,
임금과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을 ‘천과흥청(天科興靑)’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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