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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옥수
황 석 영
나는 파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오빠에게만 간단히 파혼하겠다는 뜻을 비쳤는테, 크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당연한 대답을 했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란 대답이었다. 가족들이 처음엔 당황하는 반응을 보이다가 어려서부터의 내 성미를 아는지라 묵묵히 허용하는 기색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지방 소도시에서 유지 노릇을 하는 흔한 부자였다. 흔하다고는 하지만, 극장과 백화점을 경영하는 성공한 실업가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의 내게 대한 기대와 관심은 대단했다. 한때는 내 훌륭한 약혼자였던 남자에게 나는 짤막한 편지를 써 보냈다. 불면으로 눈이 충혈된 그 남자가 새벽에 달려왔고, 나는 그를 집 안으로는 들이직 않기로 작정했다. 노여움에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아침 산책을 가는 사람들 틈에 끼여 걸었다. 나는 상냥하게 웃거나 그저 짤막하게 네, 아뇨, 하기만 했었다. 남자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했다. 여자에게서 미역국을 먹었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가 답답해서 나는 긴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 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이나 외출을 하지 않고 지냈다. 논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름이 갔으니 이젠 학교생활도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카들을 돌보기도 하고 올케 언니와 요리학원에도 나갔다. 아파트의 베란다에 서서 숲과 아랫동네의 지붕들을 별생각 없이 한참 내려다보는 적도 있었다. 시골서 어머니가 올라왔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그 무렵에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기름투성이의 검게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코끝과 뺨에 모빌유*가 검게 묻었고, 바닥이 시꺼멓게 더럽고 끝이 다 떨어진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오른편 눈썹 위에 길게 늘어졌는데 꽉 잠겨서 억지로 나오는 듯한 목소리가 듣기에 괜찮았다.
“파이프가 샌다면서요?”
내가 그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는 가져온 도구들을 타일 바닥에 벌여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저고리를 벗자, 소매 없는 러닝만 입고 있어서 둥그렇고 탄탄해 뵈는 어깨가 멋이 있었다. 남자가 일을 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나사를 틀고 구멍을 막고 파이프를 갈아 끼우는 동안 나는 그 남자 뒤에 서서 말을 붙였다.
“이건 뭐예요?”
“멍키스패너라구 합니다.”
“저건요.”
“줄톱하구 베비드라이버죠.”
내가 입고 있는 몸에 꼭 끼는 바지 차림이 남자를 거북스럽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눈길을 돌리려고 쩔쩔매며 애를 쓰는 남자를 관찰하기가 아주 재미있었다. 나는 자신이 그렇게 요사스럽고 음탕한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남자는 꺼칠했지만 자세히 보니 제법 잘생긴 인상이었다. 특히 눈이 크고 맑았다. 손은 무척 투박하고 더러웠다.
“전기에 대해서두 좀 아세요?”
“텔레비나 냉장고는 잘 모릅니다.”
“그럼 전기스탠드가 고장인데, 고쳐주시겠어요?”
“그 정도라면 해보겠습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닌 데요.”
내가 그에게 음료수를 만들어주었다. 내게는 그의 숙맥 같은 동작과 큰 덩치가 꼭 어릴적 시골집의 턱없이 양순하기만 하던 잡종개처럼 만만했다. 끈에 매어진 개의 코밑에 닿을까 말까 하는 거리에다 먹이를 던져주고 즐기던 놀이가 생각났다. 물론 나쁜 짓인 줄 알지만, 그런 놀잇감이 되려고 오히려 도발하는 듯한 그 온순하고 무방비한 덩치 때문에, 이쪽이 나쁜 짓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놀이의 피해자는 결국은 감정이 섬세한 쪽인 셈이다. 허사로 돌아가는 끊임없는 동작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즐거움이었다. 나는 그가 파이프를 고치다가 다친 손가락의 작은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의 넓적하고 두툼한 손에는 상처의 흠집투성이였다. 나는 그 남자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기쁨과 조바심으로 온밤을 새울 걸 상상하니 어쩐지 고소했다.
나는 식모인 순자에게서 관리실의 공인(工人)이라는 그 청년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나이는 스물여섯이고 이름은 상수라고 한다는데 아파트의 식모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심드렁하게 말을 꺼내자마자 그 애는 곧 열기를 띠고 지껄였다. 나는 그 남자에게 아무런 욕정도 품지 않았는데도 좀 수치스러웠다. 나는 다만 심리적인 놀이로서 실험을 해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종류의 무지스러운 남자가 나 같은 여자에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 같은 여대생을 본다는 것은 이미 약속을 깨뜨리기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약속인가 하면, 소가 닭을 보는 것처럼, 전혀 살아온 환경과 계층이 다른 사람들끼리 상대를 피차의 입장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쪽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시선은 벌써 약속을 깨뜨리기 시작했으므로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나는 방학 때 귀가할 적마다, 그 남자 또래의 시골 청년들이 무심히 지나가는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으로 벌거벗기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었다. 그들의 눈빛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내 얼굴부터 아랫도리까지 훑어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나 상수에게는 그런 식으로 한 수 접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제압해버렸다고나 할 것이다. 나는 무표정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생글생글 웃어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준비를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에서 적의가 사라지고 따라서 힘도 쪽 빠져서 이젠 어쩔 수 없이 내가 조작해내는 자동인형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부터 나는 파혼 뒤에 찾아온 들뜬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눈을 떴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잠자리 속에 퍼져 있는 체온을 즐기며 게으름을 피웠다. 바람이 몹시 불었던 요란스러운 밤이었다. 유리창 위에 비가 떨어져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휘파람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 소리는 가까워졌다간 다시 멀어지고 잠시 후에는 창 밑을 지나갔다. 나는 그대로 누워 있었으나 그치지 않는 휘파람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입바람을 내뿜고 웃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얼룩진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 댔다. 역시 상수가 자전거를 타고 창 밑 공터를 빙빙 맴돌고 있었다. 그의 젖은 머리털이 찰싹 달라붙었고 옷도 후줄근히 젖어있었다. 나는 가슴이 아프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상수가 두 손을 놓기도 하고 좌우로 지그재그 회전을 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렇지만 고개는 내밀어주지 않았다. 자전거 벨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어둔 채로 레코드를 한 장 골라서 얹었다. 쾌적하고 감미로운 아침이었다.
편지를 부치고 오는 길에 계단에서 상수와 부딪쳤다. 그가 큰 몸집을 조그맣게 우그러뜨리고 측계참 구석으로 피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남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층계를 올라갔다. 끝까지 올라가서 다시 구부러지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더니 상수가 낙망해서 고개를 푹 떨군 채 내려가려는 시늉이었다.
“상수씨.”
내 생각에도 제법 앙큼하게 그를 불렀다. 그가 흠칫 놀랐다. 뜻밖에 이름이 불리어지자 소스라친 모양이었다. 상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네…… 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요전번에 보니까, 자전거 잘 타시던데요.”
“아…… 뭐…… 그냥.”
“운동 좋아해요?”
“네…… 뭐…… 조금.”
“정구 칠 줄 알아요?”
“모릅니다.”
“낼 아침에 공원으루 나와요. 가르쳐주께.”
나는 낼름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아침에 상수는 공원으로 나오지 않았다. 며칠 지나서 관리실 앞에서 우리는 마주쳤다. 그가 몹시 우울하고 의기소침해 보였다. 의외에도 상수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나는 상수에게 스스럼없이 물었다.
“그날 공원에 갔었나요?”
“못 갔습니다.”
“왜요?”
“갈 수가 없어서요.”
“잘됐네요. 나두 늦잠을 잤는데…….”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여 발끝을 내려다보고 섰는 커다란 남자를 도전적으로 노려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저 사실은요…… 저…… 다른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상수가 진정이라는 듯이 말하고 나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디 수도가 새는 데는 없나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고장 나면 불러주십쇼.”
어라, 이것 봐라!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내가 너무 경솔했음을 뉘우쳐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존심은 상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 속에 뭔가 갈등을 일으킨 게 분명했다. 내가 막상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선 듯해 보이자, 이해할 수가 없는 그 남자는 너무나 불안해서 오히려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 일주일이 훨씬 넘어서도 그는 우리 동(棟)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은근히 초조해졌다가, 어이없이 코웃음이나 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동냥은 거절한다는 거지를 보낸 뒤처럼 얄밉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대로 나는 점점 놀이에 열이 났다. 어디 두고 보라지, 하는 오기까지 치솟는 것이었다. 나는 순자를 시켜서 상수를 불러다가, 베란다에 화분 받침대를 만들어주도록 부탁했다. 새 옷을 입은 순자는 망치질에 열중한 상수 곁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안락의자에 앉아서 그들을 관망하기만 했다. 상수가 가끔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상수와 순자의 사이에 뚫린 공간으로 지나가는 전깃줄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망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순자에게 외쳤다.
“얘, 나갔다 올 테니까 점심 대접해드려라.”
무엇에 기분이 상했는지 순자는 뾰로퉁해져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그럴듯한 화분 받침대가 세워져 있었다. 내가 물었다.
“그래, 갔니?”
“네, 방금요. 정말 껄렁한 자식 다 봤네.”
순자는 몹시 김이 새버렸다는 표정이었다.
“지가 뭐 도련님이라구. 기껏해야 고용살이 주제에…… 참 기가 막혀.”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나더러 글쎄 남자 같대요. 아휴, 정나미 떨어져. 사람은 사귀구 봐야 해. 저는 뭐 어디 세련된 데나 있나.”
순자의 연정을 위해서는 상수가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현장을 안보는 게 오히려 나을 걸 그랬다. 따라서 상수는 언제나 희게 빛나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깊은 사색에 잠겨 있거나, 책을 읽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책을 해야만 멋이 있을 것이었다. 순자가 생각하는 남자는 이미 상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상수의 그런 입장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호기심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였다. 또 그에 대한 감정을 내 임의대로 처리하고 즐길 수가 있었다.
내가 연극을 구경하고 늦게 돌아오던 날 밤이었다. 나는 극장에서 나와 급우들과 맥주를 조금 마셨기 때문에 기분이 나른해져 있었다. 연극의 줄거리도 당시의 내 심정과 비슷하게, 사랑의 무상함에 관한 것이었다. 사랑은 마치 시간을 잘못 정해서 어긋나버린 약속과도 같다는 애기였다. 맺어지거나 흩어지거나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한 약속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학생들은 말끝을 물고 이어지는 알쏭달쏭한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기분을 냈었다. 차에서 내려 가파르고 기다란 계단을 오르던 나는 섬짓 놀랐다. 계단 꼭대기에 검은 사람의 형체가 정면으로 서 있었다. 그는 꼼짝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내가 일부러 가녘 쪽을 택해서 피해 지나려 하자 그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왜 이래요, 누구시죠?”
“얘기 좀 합시다.”
그가 내 팔뚝을 단단히 죄어 잡았다. 상수였다. 어둠 속의 그 남자는 나를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하고 있었다. 폭행을 하려는 게 아님이 분명했지만, 나는 상수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몹시 위축되어버렸다.
“시간이 늦었어요.”
“오래 걸리진 않습니다.”
“이 걸 놓으세요.”
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상수는 곧 손을 놓았다. 내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상수 씨는 자기 처지를 잘 모르는 거 같은데…… 나는 순자하군 달라요. 이렇게 어둡다구 마구 그러면 못써요.”
“댁이 먼저 잘못했다구 생각합니다.”
하고 나서 상수가 한숨을 푹 내리쉬었다.
“저 오늘 여길 그만뒀습니다. 다른 일거릴 잡았습니다. 낼 아침에 여기서 나갑니다. 가기 전에 한 가지 꼭 물어보구 싶은 게 있습니다.”
나는 고가도로 위로 부산하게 오르내리는 자동차의 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어째서 이런 따위의 남자에게 이다지도 관대한가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수가 말했다.
“나를 놀리는 겁니까, 아니면…….”
“좋아해요.”
나는 거침없이 그의 말을 끊었다. 상수가 어리둥절해져서 말하기를 잊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에게 생글거리는 웃음을 보냈다.
“자, 그럼 됐죠?”
나는 그를 피해서 걸어 올라갔다. 상수가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로 나를 향해 말했다.
“댁에하구 자구 싶은데, 그냥 갑니다. 혼자서 기분 많이 내슈.”
나는 처음에 무심히 들어 넘겼으므로 어떤 얘기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상수가 감정의 억양이 없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예사롭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 방에 돌아와서야 그 말을 알아들었다. 나는 뭔가 잡쳐버린 느낌이었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음악도 듣지 않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상수의 말이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자기가 이미 그에게 능욕이라도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약혼자였던 남자와 가난한 사범대학생의 얼굴이 겹쳐져서 내 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두 남자의 얼굴을 또렷하게 생각해내지 못했다. 나는 거의 새벽이 될 때까지 침대에 멍청히 누워 있었다. 갑자기 어떤 충동이 일어났다. 상수에게 전화를 걸기로 방금 작정해버린 것이다. 나는 상수가 중얼거렸던 말을 그대로 두어둘 수가 없었다. 최소한 그것은 사실로서 아름다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교환을 불렀다. 잠시 후에 상수의 졸리운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는 그 남자의 물음이 재차 들려올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그가 뭐라고 투덜거릴 때에 재빨리 말했다.
“나예요. 이따가…… 마장동 시외버스 정류장으루 일곱 시까지 나오세요.”
“……”
“준비는 이쪽에서 모두 할 테니까.”
“어디 가십니까.”
“아무데나.”
나는 수화기를 탁 내던졌다. 얼굴이 화끈했다가 서서히 식어갔다. 이젠 좀 견딜 수가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갑자기 싱싱한 활기가 온몸에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스물세 살의 여자대학교 문과대학 학생이다. 나는 실업가의 외동따님답게 아무 불편 없이 자라났고, 얼굴도 남들이 말하는 대로 ‘드문 미모’에 속한다. 나는 지난봄에 어떤 장래가 유망한 청년과 약혼을 했다. 집에서 골라준 상대였다. 물론 내게는 남자친구가 많이 있었고, 그들과 연애 비슷한 일도 치렀지만 세상살이가 어떻다는 것 쯤 알고 있는 성숙한 여자로서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만오씨는 아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편안한 생활을 추구해갈 건전한 상식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공대를 나와 유학 가서 석사가 되어 돌아온 훌륭한 집안의 도련님인데 내 상대로 알맞은 청년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장애 없이 내가 졸업하자마자 결혼할 예정이었다. 한데 내게는 작은 골칫거리가 한 가지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얼굴이 예쁜 여학생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음직한 골칫거리였다. 즉 어떤 남자가 일방적으로 여자를 좋아해서 개인적인 생활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는 따위의 사건 말이다. 그가 직접 저돌적인 행동으로 나를 애먹이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약혼하고 난 직후부터였다. 나는 한 남자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참으로 지난 몇 달 동안을 진저리가 나도록 불안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자만심도 적당히 만족시켰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동정도 받긴 했지만, 나중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우리들의 순결하고 품위 있는 약혼에까지도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되었다. 그는 학교 교문 앞에서 나를 쫓아왔고, 그 무렵에 내가 들어가 있던 수녀회 부설 생활관을 지키고 서 있거나, 하다못해 밤중에 내 침실에까지 잠입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도무지 환상이라곤 없는 남자였다. 아마 연애를 학기말 시험이나 아르바이트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약혼자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야밤중에 생활관에 뛰어들었던 일 때문이었다. 낮에 뛰어들었다가 파출소에 잡혀간 게 두 번, 그리고 밤에 뛰어든 일은 처음이었다.
미리야, 미리야!
벽에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복도에 가득 찼다. 누군가 복도를 뛰어다니며 외치고 있었다. 방문마다 열고 들어가서는,
여기 박미리 없어요?
하고 떠드는 모양인데, 잠에서 놀라 깨어난 여학생들의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뒤숭숭해진 온 건물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건물의 층마다 불이 켜졌다.
미리야, 나와라!
나는 잠결에 내 이름이 갑자기 큰 소리로 들렸을 적에 이미 놀라서 깨어나 있었다. 그가 누구라는 걸 대뜸 알아차렸고, 일어나서 침착하게 옷을 입었던 것이다. 나는 방문을 걸고 문 옆에서 귀를 기울였다. 같은 방의 친구들이 깨어났다. 그들은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한 마디씩 했다.
널 부르잖니 얘. 또 왔어.
무서워 죽겠어 .
단단히 미쳤나봐.
장환이라는 그 남학생이 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지나갔다. 복도를 뛰는 여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사감 수녀와 관리인들의 흥분한 말들이 들려 왔다.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
이런 미친놈 같으니…… 새벽부터 함부로 들어와 난동이야.
이거 놓으쇼. 놓구 말하라구요. 미리야, 미리야!
나는 오가는 말들을 귓전으로 흘리며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여학생이 문을 따고 조심스럽게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저거 봐, 표정이 이상하다 얘. 제정신 가지구야 저럴 수 있겠니?
다른 친구들도 문턱으로 몰리며 말했다.
불쌍하다 얘.
사내 녀석이 저게 무슨 꼴이람.
기숙사 관리인 두 사람이 합세해서 장환을 질질 끌고 복도를 지나갔다. 잠옷 바람의 여학생들이 복도로 몰려나와서 키들대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놀라기는 했지만 재미있고 신나는 소동이라고 여기는 눈치들이었다. 어느 방에서는 끌려 나가는 장환을 박수로 환송했다. 층계를 내려가며 그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미리야, 나 좀 봐. 날 보라구.
나는 벽에서 미끄러져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오빠네 아파트에 있기가 불편해서 공부나 좀 하겠다고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분 있는 신부님의 추천 덕분이었는데, 이런 일이 거듭되다가는 자진해서 퇴사해야 할 형편이었다. 여러 방과 복도에서 웃음소리에 섞여 여학생들의 재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언니는 좋겠네.
미치도록 좋다니…… 아, 멋져!
사랑 한번 요란했어.
같은 방 친구들이 떠들면서 돌아왔다.
관리인들한테 끌려갔어. 파출소에 가면 요전처럼 따귀나 맞구 나올걸.
얘, 걱정 마, 네 탓은 아니잖니?
나는 쪼그리고 앉은 채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나는 밝는 길로 집에 내려가고 싶어졌다.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해주지 그랬어?
침대 속에서 몸을 뒤채던 친구가 나직하게 속삭였고, 나는 내키지 않게 대답했다.
말했어.
너 저 사람 좋아했던 거 아니니?
그 친구가 호기심이 가득 차서 자꾸만 나를 건드리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짜증이 났다.
너 라면 어땠겠어?
분위기두 없구, 서툴기만 한 남자, 취미 없어 얘.
친구는 웃음을 못 참겠다는 듯, 입을 막았다가 말했다. 사감 수녀가 나를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사감은 두 손을 가운의 소매 속에 찔러 넣고 나무십자가가 걸린 벽 아래 굳어져 앉아 있었다. 나는 가슴이 묵직해지는 느낌이었다. 사감 수녀의 눈초리가 냉정 했고 방 전체가 썰렁한 것 같았다.
이리 앉아요.
하고 나서 수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서성대며 말했다.
우리 기숙사의 규칙은 잘 알겠죠. 이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재단에서는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여학생들을 위해 예산을 들여서 이 기숙사를 운영하구 있어요. 여기엔 삼백 명이나 되는 여학생들이 있죠. 입사한 사람 모두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해왔어요. 우리두 부모님들께 그런 점으로 안심을 시켜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사감 수녀가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중단했다. 나는 그 여자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일…… 저두 전혀…… 죄송합니다. 퇴사하라시면 나가겠습니다.
퇴사하라는 얘기가 아니구, 어째서 상의를 하지 않는 거예요?
수녀가 이어서 말했다.
부모님들이 멀리 계시니까 그 대신에 우리가 여러분 의논 상대가 되어주잖아요? 그 남자 누구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나는 망설이다가 대답을 기다리는 수녀의 시선에 몰려 입을 뗐다.
작년에 미팅에서 만난 친구예요. 친구로 대한 적밖에 없는데, 저는 그 사람이 왜 저러는지 몰라요. 전혀 몰라요.
지금 졸업반이죠?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녀가 나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빤히 쳐다보았다.
누가 그러더군. 약혼했다면서요?
네, 지난봄에……
저 남자가 약혼한 사실을 아는가요?
알아요. 제가 수십 번 말해줬어요.
검은 천과 흰 칼라에 가리어진 그 여자의 조그만 얼굴 가운데서, 날카롭게 선 콧날이 새의 부리 같았다. 중년인 사감 수녀의 얼굴에는 나이의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여자가 냉정하게 거절하는데 저런 식으로 나올 남자는 없을걸. 약혼자에겐 알렸어요?
아뇨…… 그렬 수가 없었어요.
사감이 나를 비난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나는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직 예의를 서로 지켜 주고 있는 사이니까요.
약혼자에게 얘길 해야지. 남자들끼리 해결하라구 말이죠.
약혼자에게 내가 처한 입장을 자랑 삼아 지껄이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듣기에 따라서는 잘못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다든가, 내가 남자를 홀렸다는 식으로 상상함 가능성도 있었다.
수녀가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어요. 응접실에두 와서 기다리구, 낮에두 방을 열어본 적이 있다죠? 관리인들이 파출소에 여러 번 신고했었다는데……나는 오늘에야 알았군요.
다음번에는…… 제가 기숙사에서 나가겠습니다.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수녀가 말했다.
길 건너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좀 와달라는군. 그 사람두 학생이니까 가서 잘 얘기해줘요.
나는 가로등만 훤히 켜져 있는 한길을 건너갔다. 네거리 모퉁이에 파출소 건물이 보였다. 통금해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파출소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막상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장환과 얼굴을 마주칠 게 두려웠다.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과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차가운 타일 벽에 기대서서 한참 동안이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순경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놈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기집애들 꽁무니만 따라다녀 쓰겠어!
다시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구술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장환, 너 왜 자꾸 이러나? 기숙사에서 신고하니까 우리두 어쩔 수 없다만, 귀찮다 이거야. 남들은 너처럼 학교에 못 다녀서 야단인데…… 너 학교나 제대루 나가나?
나는 창문으로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끌려오느라고 뜯어진 작업복 소매를 한 손으로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은 수면부족으로 푸석푸석하게 부은 듯했다. 그가 머리를 들지 않았다. 높은 순경이 참을성 있게 그를 불렀다.
김, 장, 환, 학교 안 나가지?
휴학 중예요.
왜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그럼 뭐야, 경제적 사정이냐?
등록금은 제 손으루 벌어왔어요.
에이 답답해서 원, 도대체 너희들 정신상태가 썩었어. 공부하기가 싫어서 휴학했다는 얘기 아냐?
더 이상 공부할 생각 없습니다.
야, 요즘 세상에 대학이라두 나가는 게 얼마나 호강인지 아나? 아까 보니까, 여기 들어오기 전에 뱃지를 달던데요.
옆에서 급사가 참견했고, 경장이 말했다.
그래 이번엔 기숙사엘 침입해서 어쩔 작정이었나?
어쩌겠다는 생각두 없었습니다.
계획두 없이 새벽부터 뛰어들 리가 있나, 어젯밤에 어디서 뭘 했어?
소주 한 병을 마시구 여관에 들어가서 잤습니다.
취한 김에 객기를 부린 거라 그 말이지.
술은 완전히 깨 있었어요.
그가 잠깐 말을 끊었다가 글을 읽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곧 기숙사로 돌아가버렸으면 싶었다.
노력하면 꼭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 애는 곧 결혼하게 되거든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저는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상태를 진심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인마,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강요해서야 되겠어? 이왕 행동으루 나갈 바엔 아예 먹어주든지, 패버리든지 할 것이지. 자꾸 이래 봐야 너만 피 보는 거야.
말조심 하시죠. 내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새끼, 자신만만하기는…… 아내 좋아하네.
파출소 안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나는 더욱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너 고향이 원래 서울인가?
아뇨, 시골입니다.
여기 주소는 서울루 되어 있는데…… 게다가 좋지 않은 동네로군. 누구 집이지?
제가 자취 하는 뎁니다.
학교에두 안 나가는 녀석이 뭣 허러 이런 동네서 빌빌거려. 너 요새 뭘 해먹구 살길래 고향엔 안 내려가나?
집에서는 제가 학교에 나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심정으로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저두 이젠 서울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박미리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미리는 제 마지막 목표입니다.
시골집엔 누가 있나?
어머니, 할아버지, 또 동생 남매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안 계시는군. 집에선 뭘 해?
양조장을 하다가 망해서…… 지금은 남의 삼전(蔘田)을 매어 먹습니다.
너 박미리하구 데이트라두 해봤었나?
그런 것까지 대답해야 되나요? 요전처럼 자인서를 쓰게 하면 되잖습니까?
이 사람아, 사정이나 알자 그거지. 이봐, 경찰이 무턱대구 너 같은 사람을 경범죄루 잡아넣기만 해서야 쓰겠어? 우리가 듣고 나면 무슨 해결책이라도 나올지 아냐 말야.
신입회원 친목회 때에 저는 그 애하구 짝이 된 적이 있었지요. 아마 미리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전 똑똑히 생각납니다. 우리 번호가 십팔 번이었습니다. 숫자가 가보라서 약간 기대를 걸었는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 모두 탐을 내는 미인인 박미리하구 짝이 된 겁니다. 저는 넋이 빠져나갈 지경이었습니다. 음악도 들리고, 다른 자리에서는 웃음소리도 나는데 저는 연신 머리만 긁었어요. 저는 간신히 말했죠. 대학에 들어오면 모든 게 다 이루어질 줄 알았다구요. 하여간에 사랑이며 행복이며 빛나는 앞날이 코앞에 잡힐 듯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애는 제가 몹시 불만인 것 같았습니다. 그 애가 자리를 뜨더니 자기 친구하구 상대가 되어 있는 놈에게 가서는 아양을 떠는 겁니다. 그래 제가 찾아가 좀 와달라구, 이건 당당한 권리라구 그랬더니…… 싫어서 가는 건 자기 권리라면서 집으루 가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 애 하나만을 줄곧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애만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완전히 성공의 조건을 모두 갖출 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현될 수 없을 거리는 생각이 들수록 웬일인지 미리라는 여자가 아니면 저는 영영 행복을 얻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야, 간단히 말해서 박미리가 좋았다는 얘긴데 말야. 우리가 묻는 건 몇 번이나 데이트를 해봤냐 이거야.
그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듣기에는 그가 얘기를 해갈수록 능청스러워지고 자기 목소리에 도취되는 모양이었다.
중학교 때 저는 이미 시골을 떠날 것을 결심 했습니다. 저는 거기서 그냥 썩어질 사람은 아니라구 생각했죠. 저는 꼭 성공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서울 와서 야간부 학교를 다니면서 낮에는 신문배달이나 행상이나 급사 노릇을 했습니다. 저는 정말 고향의 누구에게나 떳떳했습니다. 그만큼 최대한으로 노력을 했으니까요. 누구나 저만 잘하면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실 그런 삼류 고등학교의 야간부에서 우리 대학에 들어가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야아, 집어쳐! 알겠으니까. 박미리는 벌써 약혼한 여자구 그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네가 속박할 이유는 없는 거다. 알겠나? 야, 서울 장안에 깔린 게 맨 여자라 그거야. 꼭 박미리만 된다는 건 미친 놀음 아니냐?
그 애는 제 행복의 열쇠입니다.
이놈아, 먹구 보면 다 그게 그거라니까. 그런 여잘 차지하려면…… 그럼 최소한 공부라두 열심히 해보란 말야.
저는 알았거든요. 제 성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으론 미리를 돌아오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진심밖엔 없으니까요.
인마, 그 진심 갖구서 즉결에 넘어가서 벌금을 물든지, 구류를 살든지 해라.
어이, 그놈 가방 좀 뒤져봐.
가만있어…… 책은 하나두 없구. 세면도구, 어휴, 냄새…… 빨랫감에다 이건 뭐야, 사랑과 죽음의 순간? 제목 좋다. 저금통장이 있는데.
얼마야?
웅, 총액 팔만 원에서 사만 오천 원이 남았는데.
너 이거 웬 돈이냐?
지난봄에 한 학기분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보내달란 편지를 고향에 썼습니다.
자식, 자금두 있어야겠지만,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안 드나?
여태껏 지내온 생활을 돌이켜본다면 오히려 떳떳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선 직업을 구해 고학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몸도 아프다, 이제 일 년이면 끝나는데 곧 월급을 타서 모두 갚게 된다, 집안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서울생활 중에서 단 한 번뿐이다, 할아버님께는 장환이가 병이 났다고 말씀드리고 어머니가 좀 어떻게 만들어줘야겠다, 하는 엄살조의 편지를 썼습니다. 의외로 어머니 쪽에서 풍족히 못 준다고 안쓰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편지와 함께 돈이 왔습니다. 여기서야 고향의 삼밭뙈기쯤은 금방 잊혀질 수 있었죠. 군대 삼 년 빼고 객지에서 보낸 칠 년간의 고되고 외로운 나날에 비한다면 이까짓 돈은 보상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살벌한 경쟁의 도시에서 지금처럼 절박한 때에 돈이 없이는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제 용기는 그 저금통장의 사만 오천 원이란 지참금에서 나옵니다.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고향에 내려가 논두렁에서 김을 매고 있는 옛날 국민학교 동창생을 만난다면 자신 있게 말을 해줄 것 같습니다. 나는 참 너 같은 입장에서 벗어 나와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다구 말입니다. 나를 질시와 반목의 눈으로 볼 것두 없다구 말입니다. 저는 정말 서울 와서 누구 못지않게 고생을 했으니까요. 저는 옆에 머리도 좋고 뛰어난 미인인 박미리가 아내로서 있게 된다면 이제는 완전무결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리가 약혼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저는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목표로 했던 것은 언제나 근면한 노력으로 이룩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저는 야간학교의 교실에서 다졌던 투지가 있습니다. 바로 미리는 저를 서울로 올라오게 했던 목적 그 자체입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내가 들어서자 이제까지 고요한 자세였던 장환이 벌떡 일어서며 내게 달려들었다. 순경들이 그를 붙잡았다. 지서주임이 상의를 입으면서 귀찮은 듯이 내밸었다.
유치시켰다가 본서루 넘기라구. 어디 한두 번이래야지.
미리 씨…… 미리…… 꼭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주임에게 말했다.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만, 저분이 있는 데선 저는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습니다.
곧 그를 유치실로 데려가도록 했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간단간단히 대답하고 되도록이면 이런 일이 경범이랄 수도 없는 개인적인 일임을 강조했다. 내가 장환과 비교적 친해졌던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변두리의 빈촌에서 야학할 때 같은 요일의 시간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약속을 걸어왔고, 나는 가볍게 웅했다. 그는 엉성한 신사복에 넥타이까지 맨 차림으로 나와 만났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자리를 뜨려 해도 장환은 일일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나는 얼마 동안 그와 함께 생각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써보기도 했다. 얘기 끝에 드디어 나는 당신처럼 개성도 없고 무취미한 사람은 싫다고 말해버렸다. 또한 나는 욕심이 많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에 내 꿈을 묻어버리고 싶지도 않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내게 열을 올려 귀찮게 했을 때마다 나는 그를 원망하지는 못했다.
상수는 작업복 차림 그대로 한산한 대합실의 나무의자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나는 홍천 가는 버스표를 두 장 샀다. 홍천엘 가겠다는 뜻이 없었지만, 내가 대합실에 도착했을 때, 그쪽 방면의 표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거스름돈을 받아 쥐고 돌아서니 상수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이윽히 내다보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려고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치면서 말했다.
“가요.”
그는 가랑이 사이에 모으고 있던 커다란 두 손을 주체하기가 몹시 거북하다는 듯이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우리들의 자리는 재수 없게도 해가 들이비치는 쪽이었다. 내가 안쪽에 앉고 상수가 바깥에 앉았다. 그는 신문지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기대앉아 있었다. 종이 뒤에서 상수가 말했다.
“잠을 한숨도 못 잤습니다.”
“저두 그래요.”
“홍천엔 뭣 하러 갑니까.”
“그냥요, 바람이나 쏘일 겸…….”
“심심한가요?”
“심심해요.”
“오늘 돌아올 겁니까.”
“글쎄요…….”
나는 그를 기대와 자만감 속에 잠겨 있지 못하도록 약을 잔뜩 올려놓을까 생각했다. 기분 내는 것은 오로지 나의 자유의사이고, 너는 그러한 운명의 횡포 아래 무력한 고깃덩이일 뿐이란 말야.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것에 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곧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이 들었다. 버스가 이제 붐비기 시작하는 시가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열었다. 습기 있는 바람이 들이쳤다. 그의 얼굴에서 신문지가 날아 떨어졌다. 그의 어린이 같은 방심한 얼굴이 잠깐 머물렀다가 곧 흩어지며 눈이 찡그려졌다. 상수는 나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좀 깔보는 표정을 하고서 말했다.
“누구한테 말하지 않았죠?”
“아뇨.”
긴 머리카락이 건장한 말의 갈기처럼 나부끼는 그럴듯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 쪽으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며칠 묵을 수도 있어요.”
그는 다시 눈을 감으면서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중간에 내립시다. 내가 잘 아는 데가 있으니까.”
나는 잠을 잤다. 미풍은 부드러웠고, 초가을의 햇볕도 그리 따갑지 않았다. 귓전에서 계속해서 그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넋을 가졌다고 상상되지 않는 듯한 더러운 훌쩍거림과 콧김이 끼쳐 왔는데, 나는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와 함께 편안한 심정으로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잠이 깼을 때, 버스는 소읍의 시끄러운 주차장 가운데 서 있었다. 상수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바지 단추를 잠그며 낯은 판자문 앞을 떠나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으나 나는 계속 자는 척했다. 그가 나를 힐끔 돌아보고 나서, 뭔가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나는 실눈을 뜨고 보았다. 실눈 사이로 명암이 분명해진 그의 억세게 생긴 옆얼굴이 보였다. 어떤 점이 이 남자를 잘생겼다고 믿게 했을까를 곰곰이 되새기며 관찰했으나, 역시 그가 내 눈에 얕보여졌다는 점밖에는 그저 평범하고 뼈대가 큰 일꾼의 모습일 뿐이었다. 비 오는 날, 순자 종류의 여자에게나 통할, 자전거 솜씨를 자랑할 정도 밖에 안 되는 연애심리를 가진 멍청이였다. 그런데 그는 화를 낼 줄도 안다. 자기를 뭘로 보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입장과 조건에 민감한 반면, 나 같은 여자에게는 일종의 경멸 비슷한 무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않겠다는 주의가 뿌리 깊이 박힌 데서 오는 무관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선뜻 그에게 허용한 것은 그에게는 뜻하지 않은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 떨어진 격이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감격할 줄을 모르는 게 아닌가. 내가 당장 마음이 변해 돌아가버린다 한들 그는 슬퍼할 리가 없다. 상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툴툴거리고 내 등 뒤에다 쌍소리 섞인 욕지거리나 지껄여 심사를 풀 것이리라. 처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속이 상해서 그를 골탕 먹이고 싶어 오기가 치밀었는데, 사실은 내 술수가 도무지 무능한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조바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가 나를 열망하는 게 사실인데도, 쉽게 포기해버리는 천부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심리적인 놀이라고 내가 작정했을 때, 그것은 곧 반웅 없이 나 자신에게 되돌아와서 오히려 스스로를 노리개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아래턱을 움직일 때마다 턱뼈가 솟아오르고 관자놀이까지 크게 오르내렸다. 상수는 싸구려 빵을 비닐봉지째 삼킬 만큼 열중해서 먹었다. 그가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하자 꿀럭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나왔다. 상수는 다시 한 번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실눈을 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배고팠어요?”
“네.”
“졸음은요?”
“한잠 자구 나니, 괜찮습니다.”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길 저 편으로 지나가는 어슷비슷한 산천을 내다보았다. 추수가 시작되었는지, 낟가리가 묶여서 논두렁에 일렬로 늘어놓아져 있었다. 버스가 어느 먼지 나는 신작로 위에 섰고, 상수를 따라서 나도 내렸다.
“이 부근서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저 너머루 가면 강나루가 있지요.”
신작로를 떠나 들깨의 밭고랑 사이를 지나며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역습했다.
“전화 받구 어땠어요?”
“뭐라구요……?”
“새벽에 전화했잖아요.”
“놀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왔어요.”
“안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요?”
그는 멋쩍은 듯이 씩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는 언제나 내가 던지는 것을 모조리 되돌려 보내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 좋아해본 적 있어요?”
“있습니다. 많지요.”
“어떤 여자들예요, 순자같이 얌전한가요?”
“왜 그런 걸 묻습니까?”
“여자들은 그런 일을 알구 싶어 하니까요.”
“순자 같은 애들 취미 없습니다. 남자가 조금만 친절히 대해주면 바보인 줄 알지요. 나는 그런 애들이 싫습니다.”
길가에 멋없이 줄기만 자라버린 코스모스가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상수는 잠깐 생각했다.
“여선생님이 좋았습니다.”
“그야, 어릴 때 얘기죠.”
“네, 하지만……그때가 진짜 좋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만큼은 못되지만, 좋군요. 나는 나하구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은 별루 좋아지질 않아요.”
“많이 알았다면서요.”
“뭐 장난이지요.”
“저런!”
“기술학관 친구 녀석들이 지금 나를 보면 놀랄 겁니다.”
“내가 뭐 별종이나 되는 거 같네요.”
상수가 나를 눈부신 듯이 보고 나서,
“댁은 여대생입니다. 우리 친구 놈들은 대학생 비슷한 여공 애들한테 몇 번이나 속은 적이 있습니다. 못생기구 안경을 쓰구 뚱뚱해두…… 뱃지만 달면 기가 죽는다 그겁니다.”
“상수 씨두 그래요?”
“저는…… 옛날엔 그랬습니다. 기술학원 나갈 때요. 어떤 일이 있었지요.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어떤 일인데요?”
“말하기 싫습니다.”
푸른색과 주황색으로 반쯤 익은 고추밭 가운데서 수건을 쓴 임신부와 노인이 일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열린 하늘 위로 고추잠자리가 우쭐거리고 있었는데, 나는 저 사람들을 넣은 주변의 경치를 사생하고 싶어졌다. 그림 같은 가을이었다. 그가 풀숲을 향해 돌아섰다.
“잠깐…… 먼저 가십시오.”
그가 소변을 보는 모양이다. 내가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까지도 그는 엉거주춤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수가 내 쪽으로 어슬렁대며 걸어왔을 때에는 나는 이미 얘기를 계속할 분위기가 잡쳐 있었다. 함석지붕을 올린 낮은 오두막과 물가에 매어놓은 나릇배가 보였다. 제법 큰 물이었다. 강변의 이쪽은 기다란 자갈밭이었고, 건너편은 물에서부터 키가 넘는 풀들이 계속되어 있었다. 아마도 왕골이나 갈대일 것이다. 그 뒤로는 아직 어린 소나무들이 빽빽해서 흙이 보이질 않았다. 모든 것이 내게는 제법 그럴듯한 영화의 무대장치로 보였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물었다.
“부근엔 인가가 없나요?”
“강변을 따라서 죽 올라가면 면이 나옵니다. 여긴 수몰지구죠. 이 물 밑에 마을이 있었어요. 저 건너편은 섬이나 마찬가집니다. 천렵하기에* 아주 좋지요.”
“거기 갈 거예요?”
“그럼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슬쩍 떠보는 식으로 말했다.
“둘이서 저길 간단 말이죠?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여기선 저기가 제일 좋습니다.”
“이만쯤에서 그냥 서울루 돌아가면 어때요?”
상수가 땅바닥에 침을 내쏘고 나서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놀리지 마쇼.”
그가 나의 팔을 끌어 잡고 성큼성큼 내려갔다.
“남자라면 몇 대 줘 팼을 겁니다.”
“화낼 건 없잖아요?”
“댁이 돈을 내구 날 부리는 거하군 다르다는 걸 아시오. 나두 감정이 있다 이겁니다.”
나는 창피했다. 비탈길을 재빨리 끌려 내려가며, 한편으로는 그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싶은 나른한 기분에 빠졌다. 잠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울창한 숲, 찢긴 옷, 상처난 다리, 달음박질, 짓눌림, 바람 소리.
사람을 부르자 사공은 없고 소년이 나왔다. 소년이 빙글빙글 웃으며 우리 행색을 살폈다. 상수가 말했다.
“얘, 건너갈 텐데 배 좀 내라.”
“낚시는 안 하세요?”
“보쌈하면 되잖아.”
“그러세요…… 어항 빌려드릴까요?”
“그래, 준비 해 다오.”
우리는 그 집에서 무뚝뚝하지만 솜씨는 아주 좋은 소년의 어머니가 비벼준 국수를 먹었다. 하도 매워서 잇몸이 아릴 정도였다. 소년이 신나게 배를 밀어내고 익숙한 솜씨로 배를 저어 나갔다. 뱃머리에 앉은 내게로 물냄새를 묻힌 바람이 불어와 머리털과 옷깃을 날렸다. 잘게 일어난 물결이 찰싹이며 뱃전에 부딪치고 있었다. 배가 길게 자라난 왕골 줄기를 좌우로 쓰러뜨리며 낮은 기슭으로 올라갔다. 뭔가 물탕을 튀기고 수초들 사이로 재빨리 사라졌다.
“야, 고기가 많겠는데.”
“뱀장어, 메기, 잉어, 없는 게 없어요. 어항으론 쪼무래기밖엔 못 잡아요.”
“이따가 해 질 무렵해서 오너라.”
“강가에서 부르세요.”
우리는 까치밥이며 억새가 휘감기는 왕모래 땅에 닿았다. 온통 갈대가 허리에까지 닿을 정도로 자라나 솔숲으로 이어져서 조금만 자세를 낮추어도 하늘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상수는 준비해 온 어항에다 짓이긴 밥에 섞은 된장덩이를 듬뿍 바르고서, 수초 틈에다 가라앉혔다. 바람이 불 적마다 기다란 풀들이 헝클어지며 흔들렸다. 나는 푹신하게 누인 갈대의 묶음 위에 앉아 있었다. 머슴과 아름다운 양가 처녀가 아무도 모르게 화전이나 일구며 살아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잠시 후에 그런 얘기가 깨어져버렸다. 자연은 그럴듯하지만 사람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았다. 한때의 바람기에 인생을 걸 만큼 자기가 어리석다고는 절대로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비눗방울처럼 들떠 있었다. 파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어쩐지 마음 붙일 데 없이 허전하고 시큰둥했었기에 파혼을 했던 것이다. 내가 천성적으로 바람등이는 아니지만, 욕심이 많은 여자이긴 했다. 분위기와 환상에 몹시 약했다. 막상 맞닥뜨리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았을 때의 고양감이 사라진다. 역시 즉물적으로 부딪치면 세상은 천박하고 피곤한 일투성이다. 결혼을 해서 남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눈앞에 닥쳐왔으나 그것은 너무나 맥 빠진 관계에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장환의 그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사랑이 무미건조한 일상생활로 직결되는 입구라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책도 읽히지 않았고, 학교도 다니기 싫었고, 친구들도 만나기 싫었던, 허탈한 상태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 겼던 모양이었다. 상수에게 새삼스럽게 자존심 따위를 들먹이기도 우스운 노릇이다. 나는 기다렸다. 머리 위로.새떼가 높직하게 날아 지나갔다. 가끔 그가 텀벙 대며 수초 사이를 걸어 다니는 물장구 소리가 들렸다.
말을 꺼내자마자 나는 곧 후회하기 시작했다. 만오의 귀가 시뻘게 지고 눈썹 사이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태까지 장환이 내게 귀찮게 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아주 당연한 행동이었다. 한편으론 그가 은근히 소유감을 확인하고 자부심을 갖게 되리라 예상했었다. 나는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당신의 것이에요, 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만오가 내 말의 첫마디에서 선입관을 가졌던 듯했다. 아마도 자기 손수건 위에 떨어진 흙탕물의 작은 오점이나, 팔목시계 유리 위의 흠집 정도를 고작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왜 진작 알리지 않았느냐면서 쓰디쓴 얼굴이었다.
만약에 내 친구나 친척들이 먼저 알았다면 뭐라구 오해했겠습니까?
제 잘못이 아닌데요 뭐.
그래두 체면이 서야 말이죠. 가령 길거리에서 옥신각신하는데 누가 봤다구 칩시다. 약혼은 타인들에게 공고되어 그 순결을 인정받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행위란 걸 모르십니까. 우선 학교루 찾아갑시다. 그 학생의 신상을 알아봐야겠으니까. 아주 광인이 아닌 담에야 그럴 수가 있나 참!
입맛을 쩝쩝 다시는 그의 눈길이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는 연신 조그마한 입을 벌리고 혀를 약간 빼내어 윗입술을 핥곤 했다. 그가 곤란해질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다. 나는 만오가 자기 입장에만 급급하는 처사가 미워져서 상대방의 얼굴이 꼭 치즈를 핥고 난 수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만오는 마치 내가 무엇이 부족하냐, 이렇게 훌륭한 남편감을 만난 네가 조신히 굴기는커녕 이런 짜증 나고 창피한 부담거리를 떠맡기다니一라고 나를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가 책이라도 들고 나가면 고개를 기웃이 기울여 제목을 훑고는,
아직도 이런 데서 못 벗어났군.
따위로 기를 죽이곤 했다. 그의 정결함과 조심스러움은 고만고만한 차이로 잘 조화되어 차가운 냉기까지 느껴질 만큼 체질화된 것이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는 대신 자상하게 굴기도 했다. 잔신경을 쓴다고나 할까.
아, 재스민을 썼군.
이라든가,
그 루주 레브론인가.
그뿐이 아니다. 내 양말에 담뱃불 자국이 생기자, 어느 틈에 슬그머니 나가서 치수가 맞는 걸로 사다 주기도 했다. 가끔 그가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자기 동료와 식사를 함께 했던 적이 있었는데 역학이 어떻고, 공간이 저렇고, 구조가 이렇고…… 딱딱 끊어지는 명확한 발음으로 전문지식에 관하여 주고받는 모습과 선명한 셔츠 칼라가 너무 멋이 있었다. 그가 건축잡지를 펼쳐 들고 책상 위에 눈을 모은 채 한 손으로 천천히 실수 없이 커피잔에 설탕을 넣을 때, 긴장이 풀려 넥타이를 느슨히 늘어뜨리고 빈 컵을 검지와 엄지 끝으로 돌리면서 시선이 먼 곳에 향해 있을 때, 비 오는 날 검은 바바리를 입고 머리에는 몇 점의 물방울을 얹고서 찻집 안으로 들어설 때, 등등 모두 좋았다. 정이 똑 떨어져버릴 정도로 싫은 모습도 있었다. 가령 장환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도 그랬지만, 내 눈화장이 어지럽게 번진 걸 보고는,
천박해 보이는군. 규수답게 단정히 화장할 수 없소?
나를 기숙사 앞에까지 바래다주고 가볍게 포옹해준 날이 있었다. 내가 문득 아뜩해져서 그의 어깨에 매달리며 기댔더니,
이 처녀가…… 날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하나.
나는 화가 나고 섭섭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좋으면 서툴러치는 법이고, 서투르면 곧 속을 내보이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 서투른 것을 싫어했다. 내가 뭔가 말하거나 행동하변 그것이 서투른 경우에 가차 없이 집어냈다.
내 생각에는 여자는 그럴 경우, 남자를 속였다구 생각하지. 따라서 당신이 지금 생각하구 있는 건 바로……
내가 그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아, 그랬던가 할 정도로 그는 헤집어놓았다. 사회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경우에 관한 그의 재빠른 판단도 싫었다. 누군가를 시켜서 시골의 아버지 사업에 관하여 소상히 알아본 것도 싫었다. 그의 집 응접실의 썰렁한 점잖음이 싫었고, 그의 젊은 모친의 하얀 치마저고리가 싫었고, 하와이 관광객처럼 요란한 무늬의 남방을 입고 파이프를 피우는 그의 씽씽한 부친이 싫었다. 싫고 좋은 점이 날마다 겹쳐왔던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김장환이 다니고 있는 명문의 사범대학 학생과로 찾아갔다. 만오는 자기가 나의 오빠라고 자처할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사실대로라면 쑥스러워 안 되겠다는 그의 주장이었다. 경찰서에 알아보니 장환은 벌써 즉결재판소에 넘어가버린 뒤였다. 순경들도 달리 그의 행동을 제재할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빨리 결혼하시는 게 상책일 거라고 빈정대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장환네 학교의 주임교수와 마주 앉아 선량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임을 과시했다. 만오가 그 학생을 벌주려는 게 아니라, 한참 중요한 때에 너무 낭비가 심한 것 같아 학교 당국에 선도를 요청하러 왔노라고 서두를 꺼냈다.
그 학생이 실성을 했다구 들었습니다. 동생이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학교에도 불안해서 못 나갈 형편입니다.
학생과 직원에게서 생활기록부철을 넘겨받은 교수가 그것을 들추면서 말했다.
사범대학에선 그런 학생이 해마다 몇 명씩 나옵니다. 나쁜 환경에서 성실하게 살아보려는 노력형들이 많으니까요. 한참 그럴 나이들이 아닙니까. 여자 쪽은 대개 대학에 진학했을 정도면 환경들이 좋은 편이니까. 실상 여학생과 남학생은 그런 점에서 조건이 다르죠. 군대문제, 금전문제, 취직문제보다도 연애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사회에서 속박당하는 면이 많은 그만큼 연애에 관해서도 자연스럽지 못한 겁니다.
보편적으로 그렇진 않겠지요. 그 학생은 좀 지나친 게 아니겠습니까?
예, 하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점두 있습니다. 김장환이는 친구도 없어요. 별로 생활을 안다는 동급생이 한 사람도 나서질 않습니다. 성적은 보시다시피 입학해서는 아주 우수했구요, 이 학년 이 학기에 입대할 때까지도 수석 이었습니다. 제대 뒤의 삼 학년 때엔 학점을 띠지 못한 학과가 거의 반 나마 됩니다. 그리고 올봄부터 아예 등록두 하지 않았군요.
외국에선 학생 개개인마다 카운셀링을 하고, 자상한 생활지도를 하던 데요.
여기서두 테스트를 합니다. 반응에 의하면 거의가 다소 차이는 있지만 욕구불만에 의한 신경불안 증세는 모두 나타내고 있습니다. 김군 같은 경우가 좀 지나친 편이고…… 그런데 사회에 대한 적응도는 아주 열성이란 얘기죠.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얘기가 몹시 상투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교수가 계속해서 얘기했다.
김군의 출신학교를 보세요. 세칭 삼류 실업고교의 야간부입니다. 그 학교에서는 개교 이래로 여태껏 한 사람도 우리 학교에 들어온 예가 없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보더라도 어린 나이에 얼마큼 발분의 노력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죠. 아마 이런 학생이었다면, 몇 년쯤 재수를 해서라도 입학했을 겁니다. 사실이…… 오 년쯤 연거푸 재수한 학생도 있어요. 아마 인생의 의미보다는 생존경쟁의 지름길을 찾게 되는 세태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여학생이 받게 된 여러 가지 피해두 요즈음 경쟁 풍속의 부산물이라고나 할까요?
교수가 안경을 위로 치키며 껄껄 웃어젖혔다. 만오가 중얼거렸다. 중학은 시골서 졸업 했군요.
한정된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끈기가 옛날 청년들보다 더하지요. 달라진 게 있다면 요샌 수단의 구별이 없어졌거든. 역사소설두 그런 거나 나오구, 아니면 재벌의 전기가 인기란 말입니다. 그나마 초라하지요. 기대와 현실의 엄청난 간격을 메우는 동안에 생각도 비뜰어지고 타협도 해가면서, 쥐어짜놓은 듯한 졸장부로 변해가는 청년들이 많지요. 그러니 누이문제에 관해선 도량 있게 이해를 하시오.
교수는 또 껄껄 웃었다. 내가 꼭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우리는 학생들이 군복을 입고 사열식 연습을 하고 있는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나섰다.
내게 방법이 있긴 있는데……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그냥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 얘기했는데 뭐.
가만있자, 내가 그 친굴 한번 만나지. 나중에 봐요.
만오는 그가 장환을 만났던 얘기를 내게 꺼내지 않았다. 둘 사이에 단단한 약속이라도 했는 성싶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못 되어 나는 교문 앞을 지키고 있는 장환과 또 부딪쳤다.
그는 때가 까맣게 낀 와이셔츠 바람에 여전히 매일 끼고 다니는 가방을 땅바닥에 깔고 앉아서 뭔지 종이쪽지에다 열심히 끼적이고 있었다. 내가 슬그머니 지나치려 했지만, 그가 본능적으로 느꼈음인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나는 안된 생각이 들었고, 죄를 지은 사람의 심정이 되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를 기다리셨어요?
어제부터 기다렸습니다.
어제는 강의가 없었어요.
당신 약혼자라는 사람을 만났었습니다.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많이 이해해주셨습니다. 당신을 다시는 안 찾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내가 그를 비켜 가려고 좌우로 걸음을 옮길 적마다, 그는 다급하게 가로막고 섰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멈춰 서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꼭 이번 한 번뿐입니다. 단 오 분이라두 좋습니다. 얘기를 하도록 해주십쇼.
무슨 얘기를요.
당신은 나에 관해서 아무것두 모르십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오해를 받구 있어요. 나를 무슨 방법으로든지 당신께 이해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단 오 분이에요. 일 분이라두 지나면 일어서겠어요.
좋습니다. 일생 중에 오 분이라면 너무 짧습니다만.
컴컴하고 음악이 나오는 다방보다는 밝은 제과점이 나을 것 같아 나는 그쪽을 택했다. 앉자마자 그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부러 벌금을 물지 않고 구류를 살면서 여태까지의 내 행적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역시 과단성 있고 신념이 강한 자가 최후의 승리를 차지하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미리 씨의 남편이 될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엔 없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장환 씨 혼자만의 생각이잖아요.
아뇨, 틀림없이 나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 나는 사업가가 되어볼 결심입니다. 내가 야학에 충실했던 것은 교육사업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경험을 쌓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설학원을 발전시켜 인가를 받아 학교를 세운다 그겁니다. 미리 씨는 제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싫어요. 그런 생각 전혀 없는데요.
나는 우리 둘의 관계가 숙명이라고 느끼구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여관을 전전하며 세웠던 여러 가지 계획의 종말은 미리 씨와 함께 댁에 찾아가서 승낙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내가 일어서자, 장환이 황급히 일어나서 통로를 가로막았다.
아직 삼 분밖에 안 됐습니다.
걱정 마세요. 백은 두고 갔다 올게요.
나는 백을 탁자 위에 남겨놓았다. 만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김장환 씨에게 잡혀 있어요.
그런 미친 자식! 어디요?
학교 앞, 알프스 제과점이에요. 늦으시면 그 사람께 끌려서 먼 데루 가버릴지두 몰라요.
아, 알았어. 내 이 망할 녀석을……
내가 돌아가자 장환은 아까부터 끼적이고 있었던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서 당신께 쓴 편지입니다. 말루는 못 할 얘기를 적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기표현입니다.
좋아요. 여기서 읽어야 되나요?
읽고 나서 결정을 해주십시오.
나는 시험지에다 깨알처럼 잘게 적어놓은 장환의 ‘자기표현’을 읽었다.
이 글을 적게 된 동기는 냉정하고 종잡을 수 없는 남의 도시인 서울에서 ˙내가 언제나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나는 일찍이 거름통과 뼈저린 고역을 버리기 위해 새벽차를 타고 고향에서의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우리 사정으로는 도저히 진학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만 어렸을 적의 어떤 일이 나를 자극했습니다. 방학 때마다 시골에 내려오는 서울 소녀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서당집이라고 호농이 있었는데 그 소녀의 외가였습니다. 그 애는 내가 늘 보아온 시골 계집아이들처럼, 아무 데서나 궁둥이를 훌떡 까고서 오줌을 갈기거나, 그 또래 남자애들에게 악다구니를 쓰거나, 코를 흘리지도 않고, 목에 때도 없는 정결하고 상냥한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하늘하늘한 꽃무늬의 간따후꾸*를 입고 긴 양말에 구두를 신었으며 기다란 머리를 지져서, 어린이잡지의 삽화에 나오는 왕녀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검은 빤쓰를 입은 벌거숭이에다 검은 고무신을 신은 꼴이었습니다. 머리엔 기계충이 옮아서 부스럼이 가득 났었죠. 그래도 학교에서는 똑똑한 우등생으로 알려졌던 나는 먼발치에서 그 소녀를 볼 적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나는 그때 전형적인 원주민이었을 것이고, 그 소녀는 먼 나라에서 날아온 본국인과 같은 차이였을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서당집의 삼밭을 매어주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소녀와 두려운 가운데 차츰 친해졌습니다. 소녀의 호감을 사는 짓이면 무엇이든 해냈습니다. 방죽을 열 바퀴도 넘게 송장걸이로 헤엄쳐 보일 수도 있었고, 송사리를 잡아주려고 한나절을 냇가에서 헤맬 수도 있었으며, 찐 옥수수를 사타구니에 숨겨서 갖다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소녀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흰 교복을 입고 왔을 때에는 나를 못 본 척했습니다. 이듬해부터 그 애가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중학교 삼 학년이 되었을 때에, 우리 할아버지와 면서기의 차이를 알았고, 읍내의 구제병원 집 아들과 내 차이를 알았고, 심지어는 교장 관사의 송아지만 한 셰퍼드와 우리 검등이의 차이를 알았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의 일을 거들면서 완전히 이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올라와서 고학을 하던 때에는 여자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범대학 정도면 내 힘으로도 충분히 졸업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취직이 보장되니까요. 군대도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새로운 사실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내가 어릴 적에 경험 했던 저 아름다운 사건이 이제는 현실성을 갖고서 나타났단 말입니다. 마치, 여기까지는 잘 추진해왔다, 그러나 그게 고작 뭐란 말이냐?고 물어오는 질문과도 같이 말입니다. 내가 달성 했으며 또한 곧 이루어지려는 목표에 관해서 나는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젊은 모임’회에서 미리 씨를 만나게 되었죠. 미리 씨를 아내로 갖고 싶다는 신념이 생기자마자, 여태껏 내가 잘해왔노라고 자부하던 목적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변해버렸습니다. 갖은 고생으로 바라온 게 겨우 학교 훈장이 뭐란 말이냐? 요즈음 여기서는 한 남자의 사회적 능력의 표징은 그가 거느린 여자의 됨됨이로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똑하고 아름답고 최고의 수준으로 교육받은 여자…… 그것은 바로 남자가 얼마쯤의 신분으로 직결되는 선을 통과했느냐 하는 물적 증거 자체입니다. 백 잡고 백, 오십 잡고 오십입니다. 그러한 엄정한 교환가치 앞에서 나는 차츰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게도 어린 결심 아래 집을 버렸던 시절의 패기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 만약 미리 씨가 내게 오신다면, 나는 이 한정되어 보이는 나의 미래를 뛰어넘을 자신이 있습니다. 미리 씨는 지금 이 교문을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는 수많은 여대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내게는 가장 가까운 가능성입니다. 어떤 때엔 이 거리를 걸어 다니는 싱싱한 말 같은 여자들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고, 저들도 모두 본성을 잃어 미쳐버린 껍데기가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도 듭니다. 나는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몫을 빼앗긴 것만 같습니다. 굶주림보다도 더욱 못 견딜 고통입니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서 종이를 탁 덮고는 눈을 감았다. 너무 각박한 표현이란 느낌도 들지만 어쩐지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장환에게 짜증이 일어나는 그만큼 너무나 자신만만해하는 만오가 얄밉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자, 이젠 가야겠어요.
말씀해주십시오.
뮐요?
내 아내가 되어달라구 그랬습니다. 못 하시겠다면 그 이유를 말해주세요.
세 가지루 말해드리죠. 첫째, 저는 약혼한 사람이에요. 둘째, 장환씨는 저하군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아요. 셋째, 지금 제게 낭비하시는 반만큼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충분히 행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실례지만, 박미리 씨죠?
잠바 차림의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청년 둘이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네, 그런데요……
밖에서 장만오 선생이 찾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해진 채로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나려는 장환을 한 사내가 눌러 앉혔다.
어, 형씨는 우리하구 볼일이 있수.
나가서 얘기 좀 하시까?
그들은 장환을 가운데 끼워 세우고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나가자마자 길 건너편에 만오의 회색빛 싱글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짚이는 게 있어서 그에게로 달려갔다. 만오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쩔 작정이세요, 저 사람들은 누구예효?
응, 우리 동창생 건축사무소의 현장 사람들이오.
그 사람들이 무슨 상관예요.
자, 우린 갑시다. 점심 먹었어?
그보다도 왜들 저러죠?
만오의 표정에 당황하는 기미가 스치고 지나갔다. 두 사내와 장환이 제과점 옆의 비좁은 골목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만오가 쾌활하게 말했다.
우리의 고민에 관해서 공개토의를 했었지.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군.
나는 갑자기 소리라도 꽥 내지를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개입이 지나치다고 느꼈고, 그 단정하고 빈틈없는 얼굴을 확 할퀴어주고 싶었다.
그걸 말이라구 하세요.
그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입술을 떨었다. 그는 곧 자제하고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내 기분이 어떨지는 당신이 잘 알리라구 믿소. 어쨌든, 나두 불쾌하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이 나야 할 거 아니오. 지금 저 친구는 넋을 잃었으니 제정신 돌아오라구 혼을 좀 내주자는 거요. 친구들과 의논했는데, 그 방법 밖엔 없다는군.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가 무슨 괴물처럼 보였다.
어딜 가는 거요?
그가 팩하는 음성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벌써 두 남자가 굳어진 표정을 하고서 나와 지나쳐갔다. 장환은 연탄재와 쓰레기에 쌓인 오물처리장 가운데 무릎을 꺾고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도 가방을 찾고 있는지 땅바닥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입술이 찢어졌고 코피가 터졌는데 몹시 다친 사람처럼 처참해 보였다. 막상 가까이 가니까 나는 장환의 상판대기조차 보기 싫었다. 흘러내린 피가 남방 위를 이상하게 고운 색깔로 적시고 있었다. 나도 그의 옆에 쪼그리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머리에 하얗게 뒤집어쓴 연탄재를 털었다. 나는 애써서 감정이 표백된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장환 씨 때문에 제가 괴로워서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저두 생각이 있습니다. 왜,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가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그러는 모습이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가방을 옆에 끼고 일어나면서 그가 내 부축한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는 얼굴을 위로 쳐들고 절뚝이면서 골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쓰레기를 타 넘고 골목 안으로 계속 걸어갔다. 아는 사람을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흘 동안 연거푸 기숙사로 전화가 왔지만,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따돌려버렸다. 만오에게 묵은빚을 갚는다는 심정이었다. 늘 그에게 뭔가 꿀리고 손해 보고 들여다보인다는 느낌을 한편으로 떨쳐낼 수가 없었는데, 이젠 후련했다. 그런 일로 서로 만나지 않게 되니 차츰 생각도 멀어졌다. 서둘러서 오빠네 아파트로 이사했다. 학교로 장환의 편지가 왔다. 몇 줄 안 되는 아주 짤막한 편지였다.
그날 멍청히 걷다가 학교에까지 갔습니다. 강의실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니까 어느 틈에 모든 일이 또렷해졌습니다. 쉬러 고향에 갑니다. 다시는 뵙지 못할 것입니다. 요전에 말을 잘못 썼기에 바로잡습니다. 목적 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상수는 바지 자락을 걷고 수초 속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 나를 불렀다. 나는 잠깐 묘한 상상을 했었다. 사방에 하얀 갈꽃을 묻히고 물가로 내려갔다. 상수가 입에다 손가락을 세워 흔들며 속삭였다.
“좀 보십시오.”
희끄무레한 유리어항이 들여다보였다. 고기떼가 모여들어 구멍 안으로 다투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어항 안에 고기가 빽빽해지면 상수는 들어내서 바구니 속에 부었다. 흰 배를 번쩍이며 고기들이 펄펄 날뛰었다. 고기잡이에 열중한 상수의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젠 고만 잡아요.”
“네, 그럽시다. 회 먹을 줄 아십니까.”
“못 먹어요.”
“내 가르쳐줄 테니 좀 먹어보슈.”
상수가 바구니에서 손가락만 한 고기 한 마리를 꺼내어 산 채로 양재기의 초고추장 속에다 푹 찍어다가 입에 넣었다. 입술 끝에서 고기의 꼬리가 세차게 파닥거렸다.
“하, 맛있다. 이게 얼마 만야. 어릴 때 개천가에서 먹어보군 처음입니다. 은어라는 고긴데 맛이 향기롭고 신선해요.”
그가 내장을 따내고 깻잎에 싼 고기를 내밀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으니까, 그는 자기 입속에 쑥 집어넣었다.
“나는 그냥 만져보구 싶어요.”
바구니 속에 손을 담그니 매끄럽고 부드러운 고기들의 몸이 그득하게 만져졌다. 손이 닿을 때마다 고기들이 물을 치면서 빠져나가고, 사로잡힌 놈은 온몸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 감촉이 좋아서 나는 고기들을 자꾸만 만졌다.
“이 많은 걸 다 먹어요?”
“웬걸요, 재수 없는 몇 마리만 맛을 보고는 버릴 겁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거죠.”
“그렇군.”
나는 고기를 한 마리씩 잡아서 물 위에 살그머니 놓아주었다. 또는 공중으로 던졌다. 고기가 물속으로 천연스럽게 헤엄쳐 사라졌다. 어떤 놈은 천천히 주변의 수면으로 유영을 해보고 나서 자유를 실감한 뒤에 멀리 갔다. 나는 한 마리씩 물에 던졌다. 상수는 갈대 사이로 가리어져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빈손이 되었다. 바구니엔 비늘 몇 점만이 남아 있었다. 상수는 왕골 줄기를 꺾어 질끈 물고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좀 떨어져 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아, 졸려.”
바람이 불었다. 솔숲을 지나 갈대 위로 휩쓸고 지나갔다. 아직도 해가 높다랗게 남아 있었다. 가끔 고기들이 뛰는지 투명 한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벌건 어둠과 갈잎의 서걱 이는 소리만 있었다. 참으로 아늑하고 짧은 잠이었다. 그렇게 축복받은 잠에 빠졌던 때가 평생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나는 관능의 입구를 활짝 열어놓고 내가 여태껏 잘못 길들여왔던 세상의 찌꺼기를 씻어낸 것 같았다. 그때에 그가 나를 안았다. 그의 입술은 서투르고 딱딱했다. 무미건조했다. 내 가슴 위에 얹힌 손과 머리 밑의 팔이 훨씬 가까웠다. 생선의 비린내와 왕골의 쓴맛이 감돌았다. 그의 손놀림은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이어서 청결했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 혼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차츰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일종의 감각의 결핍상태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물결쳐 밀려 오가는 번화가가 생각났다. 생각은 다시 단절되었던 요 조그만 물을 건너 신작로로 달려갔고 여러 가지 책무며 세상에서 내게 요구하는 사항들이 떠올라왔다. 나는 다시 찌꺼기를 주워 모아서 내 전신에 휘감았다.
나는 자기가 정말로 볼품없는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나의 속옷에까지 손을 댔을 때, 나는 서둘지 않고 그를 약간만 밀어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나 무심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시선은 낯설었다. 일어섰다. 아찔,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잠깐 뒤에 밝아졌다. 그가 얼결에 내 한쪽 다리를 잡았다. 운동화가 벗겨졌다. 나는 물가로 뛰어갔다. 배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멍청히 섰던 상수가 그제야 벗겨진 신발을 던지며 투덜거렸다.
“똥치 같은 게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구.”
『한국문학』 2호(1973. 12); 『황석영 중단편전집』 2권(청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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