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귀썰미]
'강철서신' 김영환,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에 증인으로 출석…
김영환과 이석기의 얽히고설킨 악연(惡緣)
김영환씨 헌재서 "통진당은 수구세력" 주장
"95년 지방선거, 96년 총선에 출마한 민혁당 조직원들에
내가 북에서 받은 밀입북자금 지원"
연(緣)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한 때의 동지가 후일 적이 되기도 한다. 인연엔 좋은 인연도 있지만 악연(惡緣)도 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씨는 1982년 같은 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그땐 좋은 인연이라 믿었을 것이다. 둘은 동지로 이 땅에 종북이라는 씨앗을 심으려 했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설립해 북한을 찬양하고, 주체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함께 뛰었다. 그러나 이 의원은 이 길을 계속 갔고, 김씨는 북한의 실상을 알고 사상 전향을 했다. 그로부터 32년. 인연은 악연으로 바뀌어 둘은 헌법재판소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됐다. 통합진보당의 해산 청구 사건과 관련해 21일 김씨가 헌법재판소에 법무부 측 증인으로 나와 RO(혁명조직ㆍrevolution orgarnization)활동 등에 대한 증언을 했다. 김씨는 헌재에서 증인으로 나선 이유에 대해 “위헌 정당은 사법 판단으로 퇴출되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이왕 심판이 시작된 상황에서 통합진보당처럼 여전히 폭력혁명과 종북노선을 추진하는 정당이 합헌 정당이라고 판단되면 국민이나 주사파, 진보당 일반당원들에게 잘못된 사인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영환과 이석기, 얽히고설킨 인연 둘의 인연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2학번인 둘은 그해 나란히 서울대 법대(김영환)와 한국외국어대 중국어통번역학과(이석기)에 진학한다. 먼저 세상에 알려진 것은 김씨였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인 1980년대 중반 ‘강철서신’이라는 제목의 글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전파했다. 학생 운동권은 이때부터 ‘주사파(主思派)’가 서서히 운동권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종북 세력’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단초가 됐다는 뜻이다.
김영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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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당을 만든 것도 김씨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서울 법대 동기인 하영옥과 이석기가 ‘반제(反帝)청년동맹’을 조직했고, 김씨가 1992년 2월 이를 민혁당으로 발전시켰다. 한참 활동할 당시 당원은 100명쯤이고, 산하에 RO가 17개 있었다고 한다. 보안을 위해 나눴을 뿐 RO조직원들도 거의 정당원과 같았다. 김씨는 이석기 의원의 RO도 여기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이 의원은 이 민혁당의 경기남부연합 위원장이었는데, 이때부터 조직을 관리했다는 것이다. 당시 권력 서열을 매기자면 김씨가 첫째이며, 이 의원이 다섯 번째쯤 됐다고 한다. 김영환·하영옥·박모씨 등 3인이 중앙위원이었고 그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가 있는 구조였다. 당시 둘이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민혁당이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지하당이었기 때문에 당원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쳐졌다. 다만 당수였던 김씨는 모든 보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의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김씨는 1991년 서해에서 북한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과 독대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실체에 눈을 뜨면서 사상적 혼란을 겪었고, 1997년 마침내 자기 손으로 민혁당을 해체한다. 사상 전향이었다. 해체에 반대한 일부 세력은 남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통합진보당의 전신이 됐다는 것이 당시 관련자들의 이야기다. 이 중심에는 하영옥과 이석기가 있었다. 김씨는 이와 관련, 헌재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김미희, 홍성규, 이상규씨에 대해 “민혁당 조직원이거나 민혁당 산하 RO조직원이었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민혁당 하부조직에 1995년 지방선거와 1996년 총선에 입후보하라고 지시해 성남에서 김미희 후보가, 구로지역에서 이상규 후보가 각각 지방선거에 출마했다”며 “한 명당 500만원씩 자금을 지원했는데, 내가 북한 밀입북 당시 지원받은 40만달러와 민혁당 재정사업으로 번 돈이 쓰였다”고 말했다. 이 의원이 NL 집단에서 현재의 위치를 차지한 것 역시 김씨와 관련이 있다. 민혁당 해체 후, 김씨의 사상 전향에 실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김씨를 배신자라 여겼다. 반면 이석기는 전향하지 않은 채 묵비권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면서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얘기한다.
김영환 고문사건 진상 규명안에 반대표 던진 이석기
통합진보당 이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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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맺어진 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2012년 김씨가 탈북자들을 교육해 북한에 들여보내는 행위로, 중국 정부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국회는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로 했다. 본회의를 열어 가혹행위 의혹의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촉구 결의안을 냈는데, 딱 4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 중 한명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나머지 의원은 통합진보당 김재연·오병윤 의원, 민주통합당 장하나 의원이었다. 당시 새누리당에선 “이들은 종북주의 자라는 것을 국민 앞에 선전하고 있다”고 맹비난했지만, 이석기 의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적의원 186명 가운데 찬성이 177명일 정도로 통과가 확실한 법안이었지만, 굳이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다.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의원은 그간 내란선동과 국보법 위반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고, 통합진보당은 위헌정당 해산 심판을 받고 있다. 김씨는 헌재에서 “민혁당 해체 이후 이석기 의원 등 통진당 주요 인사들이 민혁당 이념을 유지했느냐”는 물음에 “오래 못만나서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지만 3대 세습 논의 회피, 수령제 논의 회피, 정치범수용소 핵심 논제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사람은 거의 과거 생각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통진당에 대해 “스스로 진보세력 자임하는 활동했지만 주사파는 지금은 더더욱 폐쇄적이고 고루한 과거 노선에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진보세력보다는 수구세력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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