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1시간 반 남짓, 울긋불긋 단풍 고운 강원 원주 치악산이 가을철 나들이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원주는 천혜의 자연경관도 멋지지만 쇠고기 특수부위 먹거리 골목이 있을 정도로 육질 좋은 한우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지난 반세기 동안 ‘말이고기’라는 독특한 쇠고기 메뉴로 인기를 끌어온 ‘산정집’이 있다.
1967년 원주교 오거리에 문을 연 산정(山井)집은 ‘치악산 아래 우물’이란 의미로 많은 사람이 모이라는 바람에서 지은 이름이다. 그 옛날 소내장볶음과 손맛 좋은 김치로 매스컴을 탈 정도로 유명했던 창업주 박순례씨(작고)는 어떻게 하면 건강한 쇠고기 요리를 낼까 고민하다가 신메뉴인 손말이고기를 만들었다. 기름기 적은 담백한 우둔살로 신선한 채소를 돌돌 말아준 말이고기를 메뉴로 걸자 손님들이 모여들었고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뒤로도 예약 없인 먹기 힘들 만큼 변함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산정집은 원주시 일산동 보건소 맞은편 아주 작은 골목 안에 숨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 입구에 작은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면 주택가 안쪽,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산정집이 나타난다. 안으로 들어서면 오랜 세월의 향기를 간직한 소박한 실내가 고향집처럼 푸근하다. 하얀 종이가 깔려 있는 테이블은 모두 좌식이다. 메뉴는 말이고기와 내장볶음, 냉면 등이 있는데 대부분 말이고기를 주문한다.
말이고기는 인원 수대로 한 접시씩 층층이 쌓아 나온다. 빨간 쇠고기로 초록의 신선한 채소들을 돌돌 만 모양새가 마치 꼬마김밥 같다. 언뜻 보기에도 육질이 꽤 좋아 보인다. 기대감에 군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이고기를 접시째 들고 오목한 무쇠팬에 살며시 밀어넣는다. 살살 돌려가며 고기가 익을 정도로만 구운 뒤 한 개씩 입으로 쏙 넣으면 입안에서 부드럽고 구수한 육즙과 아삭한 식감의 향긋한 채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살짝 숨죽은 채소가 고소한 쇠고기의 풍미를 더욱 살려준다고 할까? 달콤하면서 개운한 키위소스에 찍어 먹어도 좋고, 곁들여 나오는 생야채초무침과 함께 먹으면 더욱 깔끔하다.
마무리로는 이 집의 비법이 담뿍 담긴 된장찌개가 좋다. 뚝배기에 담아 나오는 된장찌개를 고기 구웠던 팬에 부어 보글보글 끓여준다. 1인분에 2000원으로 시래기 건지가 푸짐하게 들어 있다. 시래기가 얼마나 연한지 시래기에 말이고기를 싸서 먹으면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서 녹아든다. 된장찌개 국물에 밥 한 공기 말아서 죽처럼 끓이면 별미 중의 별미다.
더덕무침, 땅콩조림, 마늘장아찌 등 반찬들도 하나같이 맛깔스럽다. 흔히 맛볼 수 없는 정갈한 말이고기에 따듯한 된장찌개까지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해진다. 이래서 멀리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나 싶다.
“말이고기는 다른 사람 못 시켜요.”
이 집의 말이고기는 주인장 가족이 직접 매일 아침 하루 쓸 분량을 준비한다. 작업이 너무 힘들어서 직원들을 시키면 손사래 치기 일쑤라고 한다. 능숙한 솜씨로 시어머니와 함께 고기를 말아왔던 박영미(61)씨. 시어머니께 물려받아 딸 오지연(39)씨에게 대를 물려준 지금까지도 새벽 5시부터 나와 가족과 함께 하루 2000여개의 말이고기를 직접 말고 있다. 그녀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솜씨를 자랑하며 손끝에서 고기를 말아낸다. 앉아서도 해보고 서서도 해보고 별 자세를 다 해보았지만 온몸이 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더란다.
▲ 2대 대표 박영미씨
아침마다 2000여개를 말다
이 집의 비법은 입안에서 고소하고 잘 씹힐 수 있도록 한우 1+등급 이상의 우둔살을 쓰는 것! 도마 위를 우둔살로 채운 뒤, 일일이 하나씩 말아야 하므로 재단을 한다. 그리고 깻잎과 미나리를 하나씩 올려주고 마지막으로 정갈하게 자른 쪽파를 가득 넣어 우둔살을 돌돌 말아준다. 미나리와 깻잎은 향이 강해 하나씩만 올리고 나머지는 쪽파로 채워 신선하고 깔끔한 맛을 낸다. 미나리가 질기다 싶으면 길이로 가늘게 쪼개어 넣는 등 세심하게 정성을 들인다.
박영미씨는 소화를 돕도록 키위에 겨자를 넣어 달콤한 소스를 개발했다. 소스 맛이 순해서 고기의 풍미를 제대로 살려주는데, 그 비율은 아직까지 아들도 딸도 모른다고.
이 집의 찌개용 된장은 따로 간장을 빼지 않고 오래 묵혀 빛깔이 검고 구수한 맛이 특별하다. 시래기는 가을 김장철에 단무지용 무의 무청을 말리지 않고 염장해두기 때문에 연하고 부드러운 맛을 낸다. 염장한 시래기는 여러 번 씻어서 푹 끓여 짠맛을 뺀 뒤 구수한 된장과 끓여낸다.
예전 어려웠던 시절에는 내장을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 시절, 다른 집처럼 내장에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이 집만의 비법으로 하얗게 볶아내면 자주 와서 먹던 단골들이 많았다. 지금도 이 집 내장볶음을 꾸준히 찾는 매니아들이 있어 메뉴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 분점을 연 아들 오상현(41)씨도 아침마다 직접 400~500개의 고기를 말고 있다. 2010년부터 원주에서 어머니를 도와온 그의 말이다. “일본이나 독일은 가업을 이어가는 장인들이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도시가 개발되면서 오래된 노포들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쉬워요. 작지만 내실 있게 운영해서 100년 이상 가는 노포로 이어가고 싶어요.”
아들을 만류했던 박영미씨는 이제 원주에서 정성껏 준비한 소스와 재료들을 서울로 보내면서 아들을 돕고 있다.
예전에는 1년 365일 문을 열었지만 몇 년 전부터 일요일은 쉰다. 효율성을 생각해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브레이크타임도 만들었다. 술도 과하게 팔지 않는다. 예전에는 1인당 소주 1병 이상은 안 팔 정도였다. 지금도 좀 과하다 싶으면 술을 안 준다. 저녁 9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산정집은 오랜 세월 집이 낡아서 장소를 옮길까 했지만 추억을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오래된 흙집 한옥을 조금씩 손보면서 예전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유난히 외지 손님이 많은데, 10년 만에 오는 손님은 기본이고 20년, 30년 만에 오는 손님도 있다. 손님들이 하나같이 “맛이 똑같다”는 말을 한다. 웰빙식으로 각광받으면서 일본 손님들이 현지에서 국제전화로 예약해서 오기도 한다.
“원주에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이 어른이 되어 찾아오기도 하고, 부모님을 따라왔던 소년이 자신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해요. 다들 고맙다는 말을 하고 가지만 찾아주시는 손님들께 제가 정말로 고맙지요.” 이렇게 산정집은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