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보호자 성령의 현존과 동반을 굳게 믿으십시오!
요즘 우리가 봉독하는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 용맹한 주님의 군사로 거듭난 사도들의 놀라운 행적을 계속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변화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이상 그 어떤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 어떤 박해나 위협에도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복음과 관련해서 한 번만 더 입 뻥끗했다가는 더 이상 안 봐주니, 입을 다물라고 해도, 사도들은 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참다못한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의 옷을 찢어 벗깁니다.
맨살 위로 엄청난 매질을 해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은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도망을 칠까봐, 발에는 차꼬를 채웠습니다. 그 처참한 모습에 간수는 혹시나 죽었을까봐, 가끔씩 이봐요, 살아있어요? 하고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이 될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지막지한 매를 맞아 정신이 혼미할 상태 속에서도 두 사람은 어떻게든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안간힘을 다해 주님을 찬미하는 송가를 불렀습니다. 큰 목소리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잠시후 주님께서 그들의 모습에 탄복을 하시고 응답을 주셨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사도들이 탈옥한 것으로 알고 품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바오로가 만류하였습니다.
놀라운 광경 앞에 넋이 나간 간수는 즉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사람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광경, 그 배경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성령의 굳건한 현존과 활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도 성령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한없이 나약한 우리들, 겁쟁이들인 우리지만,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두려움을 기꺼이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 할지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과 마음과 지성을 밝혀 주시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로움인지를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낸다>
복음: 요한 16,5-11
저는 본당에서 모든 일을 신자들이 알아서 하기를 바라고 큰 방향만 제시합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동안 일일이 지시만 받아오던 삶에 익숙해져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시해 달라고. 그러면 제가 하는 노력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무서운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무서운 아버지들 밑에 자라는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있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해서인지 아이가 엄마 젖처럼 부드러운 것만 찾아서 소의 등골을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밥은 먹지 못합니다. 혹은 돈은 벌어주지만, 아이들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아버지도 나옵니다. 아이들은 숨을 못 쉽니다.
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면 아이들이 엇나갈까요? 아버지의 관심은 엄마의 관심보다 아이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돈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돈을 버는 이가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말할 때 그 무게는 엄마가 하는 말보다 훨씬 큽니다. 아이들도 엄마가 자신에게 주는 밥이 아버지의 돈으로 차린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잔소리해도 어차피 같은 아버지의 돈으로 사는 사람으로 여기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사뭇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재정적 도움을 어머니는 자신의 것으로 녹여서 자녀들에게 줍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그것으로 성장합니다. 반면 어머니의 역할을 배제한 채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직접 관여하면 자녀들은 성장을 멈춥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땅에 살며 자녀를 키웁니다. 반면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 때 자녀들에게 평화를 주고 어머니는 땅에서 자녀들과 머물 때 평화를 줍니다. 평화를 빼앗기면 자녀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라는 어머니에게 우리를 맡기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사라져주는 것이다.”
히틀러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사랑의 마음은 자라지 못했던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을 때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였습니다. 엄한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자 숨어있던 예술 본능이 깨어났습니다.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어머니는 땅에 머물며 자녀를 키워야 하는 이 신비를 가정이나 성당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우리가 키우려는 자녀의 열매는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되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6,5-11: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슬픔에 잠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뵐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9절)이라 하시는 것은,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 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으므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고, 원수들의 죄는 단죄받을 것이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사탄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하에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이어나갈 수 있는 삶으로 언제나 성령 안에 잠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 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평범할 때 하는 백 번 감사보다, 힘들 때 한 번의 감사가 더 값지다(성 아빌라 데레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그리스도의 몸이 떠나고 나서야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의 영이 오셨네.
그리스도의 육체가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주시는
진리의 영이 오셨네.
주님의 영이 오시면
우리의 슬픔은 사라지고
용서와 자비가
우리의 근심을 없애준다네.
복음 말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