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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실록 해군 159기 (유명을 달리한 159명 동기들의 명복을 빌면서)
묘지의 잔디는 한껏 푸르러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기일인 지난 2월만 해도 생기라곤 하나 없이 메말라 있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도 새 생명의 기쁨이 넘쳐있었다. 한낱 사세한 식물에게도 이처럼 해마다 소생의 순리가 주어지건만 어찌하여 한창 헌걸찻던 159명의 전우들은 삼십 팔년씩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을까. 말없는 전우들 앞에 묵념을 올리고 K중대장님 묘에선 큰절을 두 번 올렸다. 무척이나 날 아껴주셨던 분, 그러나 그분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만 남기고 어디론가 황망히 떠나시었다.
1974년 2월 21일의 저녁 한 때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훈련소에서 저녁 식사를 마차고 함대가 정박 중인 부두까지 행군하던 중 무슨 연유였는지, K중대장의 어린 아들 둘이 제 아버지를 부르며 우리 대열을 쫓아 왔다. 그런데도 행군을 멈추지 않은 체 내일이면 돌아올 테니, 엄마 속 썩이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며 한사코 따라오는 아들 둘을 꾸짖던 그분의 음성이 어제인 듯 귀에 쟁쟁하다. 어렸기에 맑은 영혼의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짧디 짧은 부자 지연을 안타까워하며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볼 아비의 뒷모습이나마 더 보려고 그리도 안타까이 소리쳐 부르며 따라왔었던 것일까. 내일이면 온다던 그 언약은 간 곳이 없고, 아비 없는 세상을 어찌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노라면 늘상 명치끝이 아려온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진 전우들의 묘역을 한 바퀴 돌다가 전우 희영군의 비문 앞에 발길이 멎는다.
사랑하는 희영아!
그처럼 빛나던 커다란 눈에 인정의 눈물을 지우던 눈망울은 하얀 비석과 함께 여기 자고 있구나. 막내인 네가 남기고 간 모습과 음성은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 생각날 때마다 비정한 눈물을 지우며 우리 가슴에 영원히 어리고 있다.
꿈도 정도 일렁이는 파도에 남기고 너는 갈매기가 되어 바다를 노래하겠지. 네가 보고 싶어 우리 여기 서 있다. 가족들의 애끓는 절규가 적힌 비문을 읽으며 만감에 젖어든다.
1974년 2월 22일의 오전 11시경, 그날따라 매섭고 거센 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충무공 사당을 참배한 삼백여 명의 해군 훈련병은 YTL 이라고 하는 군함 견인선에 마치 짐짝처럼 실려 기세 좋게 모함을 향해 한참을 달리고 있었다. 워낙 군함이 웅장하여 부두에 진입할 수 없는 관계로 외항에다 엥카를 이용해 정박하고 있던 LST(상륙 작전용 군함)가 아득히 시야에 들어오던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우리가 탄 선체는 느닷없이 뒤집혔다. 순식간의 사태였다.
배가 기우는 쪽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제일 먼저 한 겨울 바닷물에 내동댕이쳐졌다. 강가에서 자란 덕분에 개구리헤엄 정도는 가능했지만 날벼락 같은 사태엔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배가 뒤집힐 때는 그 부력에 의해 내 몸이 배 밑바닥에 깔리는 날에는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든 전복된 배와 멀리 떨어지려고 사력을 다해 반대쪽 바다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혔다. 해수를 정신없이 들이키는 순간, 바다 밑 개펄이 손에 닿았다. 일단 선체 밑을 벗어났을 거라는 안도와 더는 견딜 수 없는 숨 막힘에 수면 위로 급히 떠올라 보니 전복된 배 주위는 온통 지옥을 방불케 하는 아비규환 그대로였다. 어디에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구나 싶으니 짧은 순간이지만 온갖 생각이 교차했다.
죽는 것이 무슨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인생의 참뜻을 모른 채 무력하게 죽어야 한다는 건 좀 억울했다. 그 경황 중에도 고향생각이 간절했다. 연로하신 할머님을 비롯해 어린 아우들을 눈앞에 떠올리노라니 그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일념이 솟구쳤다.
그러나 두 발에는 묵직한 워커가 신겨져 있었고, 겹겹이 포게입은 물먹은 겨울 군복은 점점 지쳐가는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태풍권에 접어들고 있어 파도는 미친 듯 포효하기 시작하여 짠물이 연신 입과 코로 들어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구조선 한 척 보이지 않고 다 가라앉지 않은 배는 파도에 몹시 흔들리며 거기 매달리려는 참혹한 목숨들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끈질기고 다부진 몇몇 전우들이 뒤집힌 선체위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주변 일대는 수많은 목숨들이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리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엉겨붙어 몸부림치는 무리를 피하면서 가까스로 전복된 배를 향해 개구리 헤엄으로 다가가 날카로운 조개껍질이 무수히 붙어있는 스크류의 날개 한쪽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먼저 올라있던 전우가 손길을 내밀어 주어 간신히 배에 올랐다. 그러나 그곳도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물위에 남은 선체 여분이 파도에 흔들리면서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익사의 공포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젖은 몸에 엄습해 오는 칼날 같은 영하의 추위였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다시 바닷물에 뛰어들어 몸을 녹이고 싶을 정도로 극심한 혹한이 몸을 얼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우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침몰 중인 배의 운명에 명줄을 의지한 우리 역시 나을 것이 없었다. 경각에 이른 생존의 공포와 추위로 이젠 거의 실신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마치 신기루 같은 기적의 빛 하나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태풍 경보를 접한 고깃배들이 항구로 귀향하던 중 우연히 우리의 사고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어선을 조심스럽게 우리에게로 접근시켰다.
드디어 나와 전우 2명이 구조되었다. 우리는 염치불구하고 무작정 선실 안으로 달려 들어가 젖은 채 얼어붙은 몸에다 선장의 이불을 덮어썼다. 그제야 살았다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밖을 바라보니 함께 구조된 전우 한 명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눈물을 흘리며 차가운 뱃전을 움켜쥔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구조된 후 들은 애기로는 자기는 처자식이 있는 형편이니 행여 선실 안에 있다가 고깃배가 또 뒤집히면 그땐 끝장이 아니겠느냐고 하여, 그 와중에서도 한바탕 눈물 섞인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모함에 인도되자마자 물에 젖은 군복을 가위로 찢고 벌거벗은 몸에다 모포 한 장씩을 배당받아 식당 한구석에서 이승에서의 황송한 새우잠을 잤다. 나처럼 멀쩡하게 살아남은 전우는 몇 되지 않았다. 구조시 탈진이 되어 손으로 밧줄 잡을 힘이 없어 목에다 걸고 구조되어 실신이 되기도 했고, 이빨로 밧줄을 물고 안간힘을 쓰느라 치아가 몽땅 빠진 전우도 있었다.
초죽음에 이른 전우들은 병원으로 후송되고, 대체로 양호한 축들만 밤을 새워 진해로 향했다. 지긋지긋한 신병훈련을 견디다 못해, 제대하면 진해 쪽 방향으론 소변도 보지 않겠다던 맹세까지 했었는데…….
살아서 다시 밟을 수 있는 그 땅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먼동이 틀 무렵, 훈련소에 도착했다. 어느 새 보도를 듣고 달려온 가족들이 사색이 되어 정문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직 생존자 확인이 제대로 안 된 상황이었지만, 자식의 생사가 궁금한 가족들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우리가 탄 차는 그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을 따돌리면서 어느 캄캄한 막사에 수용된 후 밖에서 문이 잠기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혈안이 된 가족들은 잠긴 문을 부수었고 어쩔 수 없이 생존자는 가족들과 상면할 수 있도록 조치되었다. 사건의 후유증은 대단했다. 진해는 살벌한 전쟁터나 진배없었다. 수많은 유족들의 격렬한 행동으로 무법천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해군 장교들은 아예 정복을 벗고 사복으로 잠행해야 했고, 참모총장이 타고 가 던 승용차가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저 살았다는 안도감에만 젖어있던 우리들은 159명의 합동 장례를 치르면서, 비로소 살아남은 자의 비애를 절감하며 국립묘지로 향하는 전우들을 전송했다. 그 사고는 세계 역사상 비 전시에 가장 많은 군인이 순직한 사례가 되어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해군신병 159기 YTL사건`이라 명명된, 이 대참사는 우연이라 믿기엔 너무도 기이한 일치를 이룬 159명이라는 희생자를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졌다. 청청한 나이, 짧은 아침의 영광을 버리고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같은 날 같은 배를 탔던 나로선 여기 이 비석들 앞에 설 때마다 살아있는 자의 아픔과, 또한 무엇인가를 반납해야할 어떤 채무를 동시에 느낀다. 시간의 끈을 붙들고 이 세상에 나와 중도에서 그만 그 끈을 놓아버린 내 사랑하는 전우들, 지금쯤 이 시대의 주역들이 되어 있어야 할 그들이 못 다한 몫이 과연 무었일까를 생각케 하는 유월이다.
우연의 일치
‘정말 귀신이 있기는 있나보다.’ 위령탑을 세운이후 내리 5년간 날씨가 쾌청하자 동기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온 푸념이다. 위령탑을 세우기 전 부두 가에다 임시 분향소를 설치한 지난 20년간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나 눈이 내리고 광풍이 불어 행사집전이 어려운 때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 파도 때문에 전함이 출동을 못해 사고해역에 나가서 헌화하는 식순을 진행 못 할 때도 더러 있었다. 비 전시에 159명의 군인이 순직하여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 되어 있는 일명 YTL 대 참사는 우연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군신병 159기가 159명의 희생자를 낸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1974년 2월 22일 7주간의 전반기 훈련을 마치고 충무에 있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일어난 불의의 조난 사고였다.
당시만 해도 군의 식사가 부실하여 7주 동안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허리끈이 한 뼘이나 줄어들 정도였지만 내일이면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들과 중간면회가 이루어지고 부모님이 바리바리 장만해 오시는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터라 더더욱 안타까운 참변 이였다. 당시 신병훈련소는 훈병들의 돈을 영치시켜놓고 부대 내에서나 사용가능한 20원권 전표를 일주에 700원어치를 지급하였다. 자갈을 삼켜도 소화해낼 한창 나이에 감질 나는 군부대 식사론 혹독한 훈련을 감당하기가 어려워 배당금은 허기를 메우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100원씩(곰보빵 5개)만 아껴 쓰면 될 터인데 입성 당기는 데는 속수무책이라 어떤 전우는 하루 이틀 만에 빵 35개를 다 먹어 치우고선 전표 받는 날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곤 했었다.
참다못해 잔밥 통을 뒤져먹다 조교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기가 예사였고, 옆의 전우가 먹으려는 순간에 날치기를 하다가 격투까지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입대 바로 전 수행생활 중에 생식이나 단식으로 단련된 필자는 측은하고 딱한 전우들에게 내 몫의 전표 일부를 빌려주기도 했다. 훈련기간 7주 동안 무려 10명의 전우들에게 40원에서 많게는 300원씩 도합 1500원이나 변통을 해주게 되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나에게 전표를 빌려간 전우는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2명중 1명은 구조될 확률이 있었는데 주로 인내심이 부족한 축들이 희생을 당한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사업을 하는 와중에 필자에게 돈을 빌려간 자들이 셀 수도 없는데 단 한사람도 성공하지 못해 돈을 돌려받지 못한 것도 참으로 기이한 현상중의 하나다. 오래전 어느 역술인이 저더러 동자승이 환생을 했기 때문에 시주를 받아야지 누구든지 돈을 주면 받는 사람이 화를 입는다고 해서 묘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참으로 황당한 사건으로 채 피지도 못한 아까운 청춘들이 바다의 수중고혼이 되었지만 당국에서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사건이라 흔적을 지우려고만 전전긍긍했지 그 흔한 위령탑하나도 세우지 않았다.
필사의 노력으로 죽음직전에 살아남은 필자는 자괴감 속에서 비명에 간 동기들의 원혼이라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지만 별반 대책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뿐 이였다. 다 키운 자식을 가슴에 묻고 통한의 세월을 살아가시는 동기들의 부모님들이 살아계실 때에 위령탑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일념에서 늘 마음만 다급하였다.
우선 동기회 결성이 시급하였으나 필자가 군입대시에는 주민등록이 없던 시절이라 인적사항을 알 수가 없어 해군 출신 경찰관 후배의 도움으로 본적지를 추적하여 서신을 보낸 결과 생존한 동기생 100여명이 모여 동기회가 발족된 것은 90년대 초였다. 우리 동기회는 매년 충무항의 위령제와 6월 6일 현충일 행사 년 말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져 나갔다. 각계각층에서 중진 역할을 하는 동기들은 한 결 같이 비명에 간 전우들을 위한 산자들의 책무로 마음이 무거웠다. 잘못된 역사도 교훈적으로 남겨야 한다는 취지에서 위령탑 건립을 관계요로에 요구 했지만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해군병장 출신인 필자가 북핵문제와 효선이 미선이 사건으로 반미감정이 최고조인 2003년 초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우국충정에서 호국안보 단체의 심장부인 서울 향군회장에 필마단기로 도전하였다. 2003년 1월 1일 국립묘지 동기들 묘역에 가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향군서울회장에 출마한다는 신고를 한 후에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불과 한 달 만에 기적을 만들었었다.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서울 향군 회장에 당선된 것도 문무왕의 후예로 바다의 수호신이 된 동기들의 도움이라고 여겨진다.
승리의 축배를 들기도 전에 불같은 투지로 2003 3.1 시청 앞 광장을 탈환하는 우파운동의 신기원을 만들면서 모군의 관계자는 물론 역대 해군 총장님들과도 YTL 사건의 재조명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것이 여론의 반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울향군 해군부회장이신 노진덕 제독께서 동기생인 문정일 해군참모 총장을 비롯한 지휘부를 설득하여 실무적인 철차가 쉽게 이루어졌다.
특히 필자의 후임으로 동기회 회장에 취임한 장성일 동기와 집행부가 각계각층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줄기찬 노력을 경주하였고 사고 이후 부둣가에서 매년 위령제를 주관한 충무전우회의 역대 회장님들과 해군전우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등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뜻이 모아졌었다.
충무시의 배려로 위령탑 택지를 기증 받고 모군이 건설비 전액을 부담하여 사고해역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위령탑이 준공된 것은 33년 세월이 흐른 2007년 2월 22일이였다.
매년 진눈개비가 오고 광풍이 불던 예년과는 달리 그날은 화창한 봄날 이였다. 처음에는 우연의 일치라 생각했지만 내리 5년간이나 좋은 날씨로 이어지자 전우들과 유족들은 의아하게 생각 할 수밖에 없었다. 한생명의 가치가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는데 159명이라는 고귀한 생명이 원혼이 되어 날씨조차 바꾸었다고 믿기에 앞서 너무나 기이한 현상이다.
필자가 건강을 회복한 기념으로 제 2의 애국운동을 전개하려고 건강센터를 개설한 주소가 공교롭게도 강남구 논현동 159-11 번지다. 계약 시에는 전혀 의식을 못했는데 인테리어 업자에게 주소를 알려주려고 계악서를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시 신병 훈련을 해군 159기와 해양 전투경찰 11기와 함께 받았기 때문에 해군 109명 해경이 50 명 희생을 당했다. 그래서 우리 동기회 명칭이 해군 159기 해경 11기로 통칭되고 있다. 너무나 기이한 우연의 일치를 동기들에게 전하자 한 결 같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159명의 동기들이 자네를 크게 도우려고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 있나보다고 했다.
제대 후 36년간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넘어 오면서 누구한테도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생기면 국립묘지에 가서 동기들에게 그 때 함께 죽었더라면 하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필자를 괴롭힌 자들이 잘못되는 경우가 심성이 곱지 않기 때문이라고만 여겼는데 동기들의 원혼과 무슨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가 되었다. 1992년 구청에서 부페식당 허가를 해주지 않아 3년간이나 무허가로 운영하면서 수도 없는 고발과 수억의 벌금을 물고 2번이나 구속까지 당하게 한 공무원이 42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계장은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 필자가 대책 없이 무모한 도전을 수도 없는 하는 관계로 부도 위기를 100번도 더 넘어오면서도 기적과 같이 건재하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박세직 전회장님께서도 31대 회장 출마시에 필자가 상대후보 진영의 갖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을 누비면서 회장들을 설득하여 당선을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 인데 향군개혁을 회피하고 회관재건축 문제등 일파만파를 일으키는 것을 보다 못해 필자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달라고 건의 한바 있었다. 필자의 간절한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선되신 3개월 만에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돌아가신 것도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만약 사병 출신인 제가 60년만에 장군시대를 마감하고 향군 개혁의 선봉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 세웠더라면 폐족이라고 하던 좌파들이 권토중래하는 해프닝은 없었을 것이고 박 회장님도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께서 설하신 ‘이입사행(二入四行)론’ 중 보원행편에 의하면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이것은 아득한 전생부터 지말(枝末)을 따르고 미망의 세계를 헤매면서 업을 지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달가운 마음으로 감내해야지 원망을 해서는 아니 된다’ 고 하신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을 당해도 절대로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편인데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마다 늘 마음이 무거운 편이다. 세상만사가 필연이지 우연의 일치는 없다고 한다. 까르마(業)의 높낮이에 따라 되먹힘(feed back)이 있을 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먼저 간 동기들 보다 두 곱이나 더 살고 보니 인생에 대한 미련은 추호도 없다. 나로 인하여 국가와 민족이 잘되고 세상이 조금이나마 좋아진다면 기꺼이 이 한 몸 먼저 간 동기들과 같이 조국의 재단에 바친다는 각오를 다시금 해보는 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