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대학교 간호학과를 다니는 이학도 라는 청년은 군대를 제대하고 의미있는 유럽 배낭 여행을 꿈꾸워 왔습니다. 그는 제대하자 마자 망설임도 없이 배낭 하나를 메고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단순히 체험적 관광을 하는것도 있지만 바로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하여 피흘려 주신 참전용사들을 찾아뵈러 이 나라의 젊은이를 대표하여 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했던것입니다. <물론 무전여행이나 다름없는 여행이었지만, 그는 수없이 텐트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때론 노숙을 하면서 방문한 유럽 5개국에서 참전용사분들 15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만날때는 예의바르게 큰절을 올리고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우리나라의 발전한 사진을 보여주고 기념품을 전달하였습니다. 아직도 아주 힘차고 당당한 그분들에게 뺏지를 달 감사한 나라 이디오피아아 줄때는 너무도 떨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 젊은 청년이 감사하다고 하자 도리어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참전 용사분들은 자신들의 참전기를 한참이나 이야기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야기중 교전을 치열하게 치른 후 군화를 수거할때 어떤 군화속에는 잘려진 발도 들어있었다고 한 말에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의미있는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한국에서 참전용사 후원단체를 만드는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여행기 블러그 학도리에서 발취) 이디오피아는 우리나라가 6.25가 발발하자 제일먼저 미국을 압박하였습니다. 그것은 이태리가 1935년에 자국을 침범하였을때 다른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모두 거절하자 자신들의 힘으로 이들을 1941년에 격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반드시 도와 주어야 한다는 집단주의가 생겨난 발로였습니다.
당시 이디오피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황제 세라시에는 우리나라에 파병으로 갈것을 독려하여 6.037명이나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253회를 싸워 모두 이겼으며 포로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기거나 죽거나 하라는 세라시에 황제의 명령때문 이었습니다.
또한 받은 봉급을 본국로 소환하지 않고 보화원이라는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어려운 처지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도우며 함께 침낭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불행히도 전쟁이 끝난후 그들이 돌아갔을때 이디오피아는 7년동안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해에 100만명이나 굶어죽었습니다. 그때를 틈타 공산주의 군부 구테타가 일어났습니다.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 폭도들은 제일먼저 세라시에 황제를 죽여 화장실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참전한 6.25 참전용사들을 말할 수 없는 피박이 가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과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숨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민주정권이 바뛴지 19년이나 되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참전 용사분들을 정확히 찾아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무역상을 하는 어떤 한국인은 버스정류장에 '코리안 빌리지'라는 팻말을 보고 너무 반가워 찾아가 보았는데 이디오피아에서 제일 비참하게 따로 무리를 지어 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길로 자신의 사업을 때려 치우고 그들을 돕는 후원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그들 참전용사분들은 아직도 6.25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굶어죽지 않기위해 지금 생의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가닥의 희망인 이디오피아 산 커피를 마시면 이들을 돕는 결과가 된다고 합니다. 현제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사를 잊어버리고 수 천년동안 원망과 불평과 서로간의 싸움으로 얼룩졌습니다. 그 결과로서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크게는 나라와 작게는 개인도 감사를 잃어버리면 미래는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것이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피오피아산 커피를 많이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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