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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묵상글 (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 우리 가운데 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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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의 질문에 주님께서 언제 얘기는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우리 교회는 말하지요.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고 하는 곳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다고 하는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있는 곳에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가 있는 곳 곧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저리 우왕좌왕하지 말고
줏대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쫓아 가지 말 것입니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확신과 줏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사랑만 있으면 그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그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오고 거기서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겠습니다.
아!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내게 달려 있고 우리에게 달린 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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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 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 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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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이 있으면 천국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예수님 안에 임하여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것, 영토확장, 세력 확장의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 통치 주권이 미치는 영역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종말에 완성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3,3).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에 가득 차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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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강의 중에 ‘가톨릭은 은총의 종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생명의 은총, 도움의 은총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소승불교는 그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였습니다. 대승불교는 그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넓게 개방하였습니다. 엄격하든, 넓게 개방하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은 ‘은총’의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 하느님께서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어디에나 햇빛이 비추듯이 그렇게 은총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강의 중에 ‘은총 생활의 장애’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는 모두 은총을 받아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장애물’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장애물은 대부분 밖에서 오는 줄 알았습니다.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대부분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의는 저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장애물이 밖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없애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장애물이 나의 마음에 있을 때는 하느님께서도 없애 주시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면 그때 비로소 장애물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토마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상처를 직접보고 만져 보아야만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니체는 그동안 우리들이 가졌던 신앙과 교리에 대해서 냉철한 비판을 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신은 죽었다.” 하느님 나라와 진리는 누군가로부터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와 인공지능이 알려 줄 수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볼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를 이야기 합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청원해야 하고, 하느님께 다짐을 해야 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과거의 먼 옛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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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유명한 신앙적 주제로 ‘이미’와 ‘아직’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하늘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는데 아직 우리는 그 하늘나라를 만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미 와계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늘나라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이런 부분이 생각납니다.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 주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병든 이들이 병이 났고, 굶주림에서 해방되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는 모습, 즉 너희들이 본 모습을 그대로 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요한은 이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요한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도 유효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서 계십니다. 그분에게서 희망을 얻고, 그분에게서 치유를 얻고, 그분에게서 기쁨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와 함께, 하늘나라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하늘나라를 하늘나라로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우리를 밝게 비추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본질과 지혜를 3문장으로....
1.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2. 카르페 디엠- 현재를 사십시오.
3.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오늘을 사십시오.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또한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일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 사입니다.
또한 우리 운명을 사랑하십시오. 우리 옆에 모든 운명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이 삶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본질과 지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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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은 어떤 경우에도 주저하지도 동요하지도 않고 늘 침착함을 유지하십니다. 우리는 욕지거리를 들으면 침착을 쉽게 잃게 됩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을 부풀려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와 달리 하느님께서는 늘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가지고 계십니다.
상대의 화에 화로 마주하려 하고, 상대의 부정적인 말에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는 우리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래야 세상 안에서 잘 사는 것처럼 또 약자가 아닌 강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침묵하시며 우리를 바라보고만 계시는 하느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화를 내지 않는 저의 친구가 있습니다.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화 안 나?”
친구는 자기도 사람인데 어떻게 화가 안 날 수 있냐면서, 대신 이것을 꼭 기억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하느님께서도 우리 입장에서 생각 중이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죄를 지어도 가만히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계속해서 말씀하셨듯이, 그 시작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일까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히 사랑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가득한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쫓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가득히 안고서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면서, 점차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입장에 서서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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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위로는 위로하는 자의 의도가 아니라, 위로받는 자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이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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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定住)의 지혜
-지혜 예찬(禮讚), 지혜를 사랑합시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삶을, 이웃을, 진리를, 지혜를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이 모두에 앞서 주님을 한결같이, 열렬히,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했습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사랑 부족일 것입니다. 잠자리 들기전 끝기도때 간절한 주님 사랑 고백의 찬미가 둘째 연은 늘 감동입니다.
“우리는 잠을자도 주님과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얼마나 절절한 주님 사랑의 고백인지요! 오늘은 서울 베네딕도 수녀원의 주보성녀이며 중세의 신비가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자 였던 성녀 대 젤투르다 동정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렸고, 예수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사도로 여겨집니다.
성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했고,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집니다. 성녀의 풍부한 신비체험으로 인해 ‘독일의 테레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1288년 심한 병을 얻게 된 성녀 젤투르다는 합병증으로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병상에서 누워있던 성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녀원의 시간전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젤투르다는 1302년 11월16일 바로 오늘 거룩한 임종어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때 성녀의 나이는 만46세 였고,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성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습니다.
이후 성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렌멘스 12세는 다른 젤투르다 성녀와 구별하고 성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성녀의 다음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위한 이 기도는 전통적으로 주님께서 성녀에게 주신 약속에 따라 이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많은 영혼들이 연옥을 벗어난다고 알려진 기도입니다. 11월 위령성월에 바치기에 적절한 기도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모든 곳의 죄인들을 위하여, 내 가족과 가정 안의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서 드리는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님의 가장 값진 피를 봉헌하나이다. 아멘.”
성인들의 위대한 특징은 아마도 지혜와 사랑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열렬히, 항구히 지혜를 사랑한다면 “진리의 연인”이라 칭했던 성 아오스팅처럼, “지혜의 연인”이 되어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지혜를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합시다. 지체없이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오늘 기념하는 성녀 대 젤투르다처럼 날로 지혜를 알게되고 계속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그대로 지혜에 대한 찬미이자 예찬입니다. 지혜서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귀한 내용을 만날 수 있겠는지요! 생략하기가 너무 아까워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문을 인용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대신 태초에 지혜가 있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이런 지혜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런 지혜자체이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지혜야 말로 하느님의 모두이자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며 그대로 주님의 현존인 성령이요 사랑이요 진리이기도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바로 이 지혜뿐입니다. 바로 이 지혜의 육화이자 결정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날로 지혜로워지는 지혜의 여정이며 성인들이 밟았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정주의 지혜에 대한 참 유익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에 있다.’
사막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함께 계신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여기서 정주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여 거짓 선동에 휘둘려 뿌리없는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떠돌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 이 삶의 자리에 정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 것이다.”
그러니 언제 주님께서 임재하실지 모르니 오늘 지금 여기 정주의 자리에서 지혜롭게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 모두 정주의 지혜를 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빛과 그늘의 공존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앞선 십자가의 고난과 배척입니다. 현세에서 주님과 함께 겪는 고난과 배척을 부활 영광의 희망으로 잘 견뎌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파스카의 은총이, 파스카의 기쁨이 능히 이런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지혜로 빛나는 삶을 살게 하시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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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6.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믿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바라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사랑하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보듬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내어주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섬기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북돋우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자비로운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평화로운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서로 살리는
우리 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우리 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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