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43
7월6일[연중 제1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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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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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vmp9nAlhII
(김동주 카니치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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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내가 들고 가야 할 평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걷지조차 못하는 중증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중병 병자에게 평상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요즘으로 치면 휠체어나 이동식 침대일 것입니다. 그나마 환자가 드러누워 있을 수 있고, 이동 시에는 반드시 필요한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대상,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필요하기도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그런 대상! 그러나 언제나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대상!
그런 중풍병자를 가엾이 보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 9,6)
오늘 내 평상이란 무엇인가 묵상해 봅니다. 하루라도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내 열악한 환경,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혹독한 매일의 현실이 내 평상입니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이 오랜 악습과 반복되는 죄가 내 평상입니다. 내가 매일 마주해야 하는 못마땅한 주변 동료 인간들이 내 평상입니다.
그 평상들은 나를 수시로 힘들게 하고, 좌절케 하며, 무너지게 만들지만,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와 단절시키고, 멀리 던져버리고, 활활 불살라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집에 안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간직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구원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기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다면, 그게 과연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일상적인 고통과 십자가, 이 비참하고 혹독한 현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평상을 아버지 집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는 그것으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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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5hkfY3gG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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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함의 권과 기적의 힘이 하나라고?>
오늘 복음은 중풍 병자를 고치신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용서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병과 죄의 용서를 동시에 해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라고 하며, 예수님만이 아닌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 권한이 주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인간이 죄를 사해줄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악한 생각”입니다. 하느님을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병이 낫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옴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기적의 힘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인정하면서 죄의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기적의 힘을 주시는 분은 죄의 용서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에게 기적의 힘이 주어진다고 믿나요? 그러면 다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우리에게 기적의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 겸손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죄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는 이는 기적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곧 기적입니다.
신문 배달, 부두 하역, 탄피 수집, 고물상 등으로 시작해 지금은 커다란 부를 이룬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적을 일궈내는 분들은 믿음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어야 첨벙대면서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조차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게으른 이에겐 가난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부지런한 이에겐 돈이 밀물처럼 밀려온다는 말을 나는 믿어요”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세상적으로도 성공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용서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분은 한 해에 60여 명을 서울대에 보내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이사장이기도 합니다. 2010년 도산 위기에 놓인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인수하여 우리나라 예술계에 커다란 이바지를 하고 있습니다. 한 신문 배달부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또 하나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서울예고는 1987년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막내아들이 학폭으로 목숨을 잃은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를 인수할 때 가족의 많은 반대도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뉴욕 출장 중인데 비서가 전화했어요.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막내 대웅이가 선배들한테 맞다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에 실려 갔다고요. 병원에 전화를 걸어 돈은 원하는 대로 드릴 테니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지요. 그런데 이미 냉동실에 들어간 뒤였어요.”
그는 “가해자 학생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셨다고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학교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했지요. 회사 직원들이 학교로 몰려가 항의하는 바람에 교장 선생님이 도망갈 정도였죠. 그런데 막상 영안실에 평안하게 누워 있는 아이를 보니 눈물만 났어요.
내 죄와 업보가 많아 이렇게 된 건가 싶고. 복수를 한다고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난동을 피우면 아버지가 저러니 아들이 벌을 받았다 할 거고요.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아들을 위해서라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겁니다.”
담당 검사는 “검사 생활을 18년 넘게 했지만, 자식을 때려죽인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부모는 없었다며 절대 안 된다”라고 했지만, 이대봉 회장은 직접 구명운동을 해서 가해자가 공부를 계속하여 서울대에 들어가게 도와주었습니다. 이 회장은 이어 아들 이름을 딴 ‘이대웅음악장학회’를 설립하여, 35년 동안 3만여 명의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지금은 사비를 털어 서울아트센터를 개관하여 한국의 예술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용서의 힘이 복수의 힘을 앞섭니다.”
이대봉 회장은 용서를 위해서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힘은 음식을 먹어야 생기고 운동을 해야 강해집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의 힘도 용서의 힘도 다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분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기적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었으므로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는 이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성당 신부로 있으면 내가 원하는 사목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재정을 많이 할애하게 됩니다. 저는 이번에 첫영성체와 견진 아이들에게 많은 돈을 쓰고 소공동체를 위해서도 많은 재정을 할애하였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의 힘은 하느님 뜻에 더 순종하려고 하는 이에게 더 주어집니다.
이대봉 회장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기 때문에 그 힘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께서 기적의 힘을 주시는 교회에 죄의 용서 권한은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악한 마음입니다.
나라에서 무기를 나누어준다면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게 줍니다. 다른 용도로 쓰려는 사람에게는 줄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필요하면 자신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무기를 군인들에게 나누어준다면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무엇인들 주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죄의 용서 은혜를 저버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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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전에 성당에서 여름이면 학생들과 ‘신앙학교’을 갔습니다. 시설이 갖추어진 캠프장으로 가기도 했고, 산에서 텐트를 치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다고 하였듯이 ‘신앙학교’를 열기위해서 교사들은 몇 달 동안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저는 여름방학이면 교사들을 도와서 ‘신앙학교’에 함께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조’를 맡아서 학생들과 지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물품 준비를 하거나, 전례 준비를 도왔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추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추적놀이’였습니다. 조원들이 정해진 ‘미션’을 수행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었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였습니다. 추적놀이의 정점은 캄캄한 밤에 무서움을 참고 목적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 교사들은 몇 가지 장치를 해 놓았습니다. 무서운 소리가 나기도하고, 분장한 귀신이 나오기도 하고, 무덤을 있기도 했습니다. 담력이 약한 아이들은 울기도 하지만 모두들 조장을 중심으로 ‘추적놀이’를 잘 마치게 됩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옥수수, 수박’과 같은 간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추적놀이’의 시작은 ‘탄생’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태중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통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먹고, 자고, 놀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아기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좁고, 어두운 자궁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은 첫 호흡을 하면서 힘차게 울어 됩니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탯줄은 잘라지고, 그 흔적은 아이의 배꼽으로 남게 됩니다. 이제부터 아이는 스스로 숨을 쉬어야 합니다. 들숨과 날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는 나약한 몸입니다. 부모의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아이는 스스로 일어나고, 걷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에 비해서 가장 오랜 시간 ‘추적놀이’를 하면서 공동체에 적응하게 됩니다. 이런 추적놀이는 인류가 쌓아온 문화와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저 또한 29년 동안 ‘추적놀이’를 통해서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추적놀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추적놀이’를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도를 몰랐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미션’을 기꺼이 수행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제물로 쓰신다던 이사악을 대신해서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미션’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마련한 ‘추적놀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의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아니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 주실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의인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추적놀이의 관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하느님께서 거두심을 감사드렸습니다. 다른 하나는 ‘행동’입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이웃은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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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말씀하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가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것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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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2-8)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증언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또는 “나는 너를 구원한다.”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또는 그 병자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은 ‘병의 치유’만 원했겠지만, 병자 자신은 ‘병의 치유’도 포함해서, ‘죄의 용서’와 ‘영적 구원’을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병자의 병이 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용서’가 더 급한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선포’ 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선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선포’ 라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또 고해사제의 사죄경도 ‘선포’가 아닙니다. ‘전달’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또는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교 기준으로는 그들의 생각은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 기준으로는 ‘틀린 생각’이고, 또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생각’입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라는 말씀은, ‘중풍의 치유’와 ‘죄의 용서’가 모두 어렵다는 뜻으로, 즉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그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내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믿어라.”입니다.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이 이야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더 잘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한 배경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자 군중이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바로 그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에게’라는 말은, 군중이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내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모든 교리는 바로 이 믿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똑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있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안 믿는 종파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서 고요하게 만드셨을 때(마태 8,26), 제자들은 놀라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마태 8,27)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습니다. “이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과 같은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분이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이 고백은, 토마스 사도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이라는 신앙고백을 풀이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하느님에게서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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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마르코와 루카 복음서에 견주어 볼 때 마태오가 전하는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두 복음서에서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지붕을 뜯고 병자를 내려보내 치유받는 내용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야기는 중풍 병자의 치유를 배경으로 하지만 주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에 대한 논쟁으로 바뀝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말씀으로 중풍 병자는 낫습니다. 이미 ‘얘야’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중풍 병자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이 낱말이 어른에게 쓰일 때에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이를 선포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것은 누군가를 통하여 선포됩니다. 지금도 고해성사에서 사제의 입으로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 이야기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에 군중은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제자들도 이런 권한을 부여받습니다.(18,18 참조)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 안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요약하는 것처럼, 그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활동하시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치유로써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사람의 아들로 표현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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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여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이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된 사람들, 곧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당신께서 약속에 충실하신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중풍 병자 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 사고방식에 따르면 병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상태, 곧 죄의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은 그를 죄의 상태, 곧 병에서 풀어 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병 자체가 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중풍 병자를 치유하는 것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행위는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이, 곧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유다인들이 자기네 방식으로 깨닫게 해 주시려고 죄인으로 여기던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고 다시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고통만을 없애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과 화해하여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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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지난해 코로나19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사도, 성사도, 다른 이와의 만남도 모두 조심스럽고 위험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습니다. 자유로워져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이제는 해야만 하는 일마저도 귀찮아져 버렸습니다.
살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많습니다. 게으름과 귀찮음, 나약함 때문이거나,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경계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결과는 같다고 생각하며 먼저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패배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때때로 우리는 여러 핑계로 움직이지도 나아가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온몸이 마비되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평상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열정도 없이 그저 누워 있습니다. 그런 그를 위하여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합니다. 평상을 들고 예수님께 다가갔고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희망과 열정을 보여 주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패배감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자신이 더 피곤해지지 않기 위한 욕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까 염려하여 병자들을 멀리하였던 바리사이의 죄와 같을 것입니다. 나태함, 두려움, 절망과 포기 속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일어나 걸어가는 것’, 그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또 하나의 발걸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와 함께 내가 걸어 주겠다. 함께 일어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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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본 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안 되는 어느 날 밤, 본당 사목회의를 하고 있던 중, 교우 한 사람이 급한 전화라며 받아보란다. 받는 순간 수화기 저편에서 울음 섞이고 격앙된 음성이 들려온다.
"신부님, 세이지가 위독합니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와 있는데 의식불명입니다."
"천천히 침착하게 말씀하세요. 어느 병원입니까?"
내용을 들어보니, 남편이 장애인 모임에 참석했다가 점심 식사 후 경련과 함께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서 갔고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병원은 내가 있는 본당에서 백 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대학병원이었다. 전화를 끊고, 회의실로 들어와 사목회장에게 회의 진행을 부탁하고 수녀님께 병자 성사 준비를 서두르라는 말을 하고 곧바로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고속도로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달려 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실로 향했다. 전형적인 병원 특유의 냄새가 진동하고 여기저기 호흡을 돕는 기계 소리가 들린다. "메자끼 세이지(目崎 誠二)" 그는 18세에 친구와 씨름을 하다가 뇌진탕으로 반신불수의 장애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꾸준한 재활운동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들과 똑같은 직장을 다니면서 60세 중반을 살아온 형제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고통과 어려움을 감수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에게는 아내 "메자끼 사찌꼬(目崎 幸子)"가 있다. 그녀는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수녀 생활을 하다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수녀원 생활을 접게 되었고, 어느 분의 중매로 남편 세이지를 만났고, 결국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지금까지 신앙 안에서 남편을 도우며 살아온 여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구체적으로 들은 일은 없지만 이 둘은 정상적인 부부생활도 어려운 조건의 부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기도 한다.
내가 이 본당의 책임자로 온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미사를 참석하는 부부이다. 두 사람 모두 배운 자산도 경제적 자산도 넉넉하지 못한 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마음의 부부이다.
성당의 모든 일에도 늘 솔선수범이었다.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메자끼 할아버지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장애자 모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당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쓰러진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구 장애인 행사에 참석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메자끼 할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본다. 목에는 호흡을 돕는 관이 삽입되어있었고 알 수 없는 관들도 몸 여기저기에 꽂혀있다. 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듯한 상태였다.
답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 부딪히는 느낌이지만 철저하게 무능했다. 수녀님께 눈으로 병자성사를 드리자고 말한다. 옆에서 연실 아내 사찌꼬는 눈물을 훔친다. 마음을 집중해본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사를 집행한다. 수순대로 기도문을 읽고 기름을 바르고 안수를 하고, 주님 당신께 모든 것을 맡겨드린다는 기도를 바친다.
응급실 간호사들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손과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의식 잃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응급실을 조용히 나온다.
복도 벽에 붙어있는 긴 의자에 허리를 걸친다. 사찌꼬 자매는 주머니에서 의사 선생이 건네준 종이 한 장을 나에게 넘겨준다. 의사들의 소견서였다.
‘확실한 원인은 알 수 없음.’ ‘다만 폐혈증이나 심장 장애나 뇌의 혈관문제로 사료됨.’ ‘현재의 전체적인 상황으로 보아 사망의 가능성이 높음.’
이상이 내가 기억하는 내용들이다. 소견서를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무척 빨리 오간다. 일단은 사찌꼬 자매에게 마음 단단히 먹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자고 말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병인이 건강해야 하니 틈을 내서 눈을 붙이라는 부탁도 함께 한다.
시간을 함께 있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해달라는 부탁을 남겨두고 병원 문을 나선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동행한 수녀님께 조심스럽게 걱정을 내놓는다. “무엇을 바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원래 가지고 있던 장애가 있으니 아마 일어서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여생을 보다 심한 장애로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고, 여러 조건을 살펴볼 때 사찌꼬 부인의 고생이 말이 아니게 될 텐데…….”
삼 년간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셔야만 했던,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사제관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기도를 드린다. “주님, 데려가시려면 빨리 데려가시고 살려주시려면 최소한 쓰러지기 전의 모습으로 일어설 수 있게 해주소서.”
다음 날 미사시간에 신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다. 그리고 세이지 할아버지의 회복을 지향으로 두고 미사를 봉헌한다. 그다음 날, 오전에 전화벨이 울린다.
“신부님, 의식이 돌아왔어요. 아직 말은 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살아났어요. 의사 선생님들이 기적이라고 해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흥분된 상태에서 하는 전화 목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감사합니다. 계속 연락을 주세요. 기운 냅시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선생님, 세이지가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의사들도 의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회복이 빠르대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메자끼 세이지 할아버지는 퇴원했고 미사에 참석했다.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제 두 사람은 고해성사를 청하고자 나에게 찾아왔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나 자신도 신앙이 좀 더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기도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은총이다. 한 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을 우리는 과연 몇이나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수없이 많은 관계와 인연들 그들 중 당신을 위해서, 기도 중에 기억하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한다면 대게 자신을 중심에 놓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기도를 제법 열심히 한다는 이들을 보아도 가족이나 친구를 위한 기도 정도에서 머무르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참 복 받은 인간임에 틀림없다. 허물투성이더라도 단지 사제라는 이유로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서도 기도를 받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보여주셨던 일들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방을 들어가 보면 십자가 고상 밑에 숱한 이들의 이름과 본명이 적혀 있는 쪽지가 수없이 붙어있었다.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신 분이시니 그들의 이름을 기도 안에서 기억하셨음이 분명하다.
좀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이들을 몇 사람이나 만들었는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고 행복한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남을 위해 온 맘으로 기도하는 거다. 그리고 그 기도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다. 누구나 약한 존재이기에 타인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 기도로, 비록 죄 속에 있더라도 구령될 수 있다는 것이 교부들의 잦은 가르침이었다.
나는 확신한다. 메자끼 세이지 할아버지의 회복은 성사의 은혜와 아내의 눈물과 많은 이들의 마음 담은 기도의 덕분이었음을 말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새로 얻어진 삶은 보다 열심한 신앙생활로 이끌어 줄 것은 분명한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을 만들라! 이 말이 오늘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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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야기 읽어주심에 고맙습니다. 2003년의 이야기였습니다. 함께 병원을 갔던 수녀님께서도 삼 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메자끼 부부는 지금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제가 있는 본당으로 자주 들르십니다. 70세를 훌쩍 넘어선 연세이지만 아직도 변함없이 건강하게 열심히 살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를 해주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항상 기도하는 우리이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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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원을 치료하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외적인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병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근원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육의 치유를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외적인 질병의 치유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인을 다스리는 치유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지니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병의 치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는 표징일 따름입니다.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리킬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손가락’이 아니고 ‘달’인 것처럼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은 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지 병의 치유가 아닙니다. 물론 간혹 병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매달리는 것보다 언제든지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환자 자신이 갖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온 이웃의 믿음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이웃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의 행위는 소중합니다. 사실 중풍 병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무지와 껍데기 믿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미국 남북 전쟁시에 링컨의 참모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게 기도합시다.”라고 하였을 때 링컨은 “하느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편에 서기 위하여 기도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믿음의 사람은 생각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편이 되어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편이 되어주셨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마음의 자유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다지고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나에게 잘해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뽑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의 우둔한 믿음 탓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에 눈뜨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책’을 생각합니다. ‘주책’ 아시죠?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믿음으로 산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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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생 때 심부름을 많이 했었습니다. 막내인 저만 초등학생이고, 형과 누나들은 중학생 이상이라 학교 끝나고 늘 밤늦게 집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거의 모든 심부름을 독차지했습니다. 귀찮고 힘들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는 늘 보상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과자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 이렇게 먹을 것으로 보상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보상이 있어도 하기 싫은 심부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석유를 사 오는 일이었습니다. 20리터짜리 들통에 석유를 받아오는 것인데, 어린 제게 20리터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여기에 석유 가게까지의 거리도 상당했습니다.
이렇게 힘들어서 하기 싫은 심부름이었지만, 이 역시 제가 했습니다. 착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보상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장에서 닭 다리, 닭 날개만 따로 튀겨서 팔았는데, 이것을 사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석유를 받은 다음, 시장에 들러 닭 다리 한 마리를 주문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이상하게도 석유가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기쁨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또 힘이 세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글쎄 석유 들통에 구멍이 나서 계속 석유가 빠져나간 것입니다. 닭 다리 먹을 생각에 석유가 새는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인해서 영적인 마음은 빠져나가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빠져나가고, 평화로운 마음이 빠져나갑니다. 주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로 위로와 기쁨을 얻었는데, 어느 순간 함께 있음이 불편하다면 이 역시 영적 마음이 빠져나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보시고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병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모든 병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벌을 받는 중이었기에 치료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당시 시대의 상황을 보셨기에, 겉으로 보이는 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힘차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면, 절대로 예수님의 반대쪽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 몇 사람은 이를 하느님 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물론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의 기준으로만 보고 있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 안에 영적인 마음이 빠져나가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마음을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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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마태오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랑의 권한을 사람에게
그러니 사랑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의로움의 권한을 사람에게
그러니 의로움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자비의 권한을 사람에게
그러니 자비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용서의 권한을 사람에게
그러니 용서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살림의 권한을 사람에게
그러니 살림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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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과 맞짱을.>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아브라함이 복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오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 안에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원칙,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원칙이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란 모든 복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래서 행복을 원한다면 하느님께 복 주십사고 청해야 합니다. 내 행복은 내가 농사짓는다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있고 그래서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 순종이 오늘 아브라함에게 요구되는 그 정도의 순종이라면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순종할지 저의 믿음에 대해 생각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복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해도 자식이 나의 복이고 행복인데 그 봉헌을 요구하는 하느님이라면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분노할 것이고 그래서 불순종할 것입니다.
나의 행복인 자식을 내놔야 복을 주신다니!
이 말은 내가 움켜쥐고 있는 나의 행복을 내놔야 하느님의 행복이 주어지는 거라는 말이 아닙니까?
나의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행복이라! 내가 쥐고 있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행복이라!
아!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어려운 것을 넘어 분노가 치밉니다.
그래서 이런 행복을 구차하게 구걸하느니 차라리 행복을 걷어차고 내 행복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깔 있는 불순종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이런 맞짱도 뜰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맞짱을 뜨고 깨끗하게 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짱을 떠보지도 않고 승복도 제대로 하지 않을 바엔 맞짱을 뜨는 것이 낫습니다.
아브라함도 바로 믿고 순종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모리야 땅까지 가는 데 왜 사흘이나 걸렸겠습니까?
이 사흘이란 시간 동안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치열하게 싸웠을 겁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맞짱을 뜨고, 나의 행복보다 당신의 행복이 더 낫습니다. 라고 승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이 아니라 승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승복의 순종을 하는 데 사흘 걸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저를 생각합니다. 완전히 승복하고 순종하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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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믿음이 답이다!”-
얼마동안 휴양기간을 얻어 농사하며 충전중인 사제가 잠시 수도원에 면담고백성사차 들려 대화를 나눴습니다.
“밭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입니다. 풀뽑다가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삶도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믿음의 전쟁이요 우리는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Weeds never die!(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 잡초는 약치지 않아도 거름주지 않아도 잘도 자랍니다. 좋은 밭도 놔두면 순식간에 잡초밭이 되어 버리듯 마음밭도 그러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끊임없는 수행생활의 충실입니다. 잡초가 상징하는바, 죄, 악, 병, 전쟁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이들은 인류 역사와 끝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결국 답은 믿음뿐입니다. 하루하루 하느님의 자녀답게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 있음이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어 보속으로 참 많이 써드리는 말씀처방전을 주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임마누엘 사제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하두 많이 써드려서 성서가 빛이 바랬고 닳아 떨어져 나갔습니다. 말씀처방전에는 “웃어요!”스탬프도 힘껏 찍어 드렸습니다. 어제 저녁식사시 온종일 병원진료차 다녀온 수도형제를 위로하며 나눈 대화입니다.
“젊어서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니 삶은 전쟁이네요. 걱정, 근심, 두려움, 불안, 병고등 빼버리면 진짜 건강하게 젊음을,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인 것 같습니다.”
사실 미사대장을 보면 온통 세상의 축소판같습니다.
생미사, 연미사 정말 사연이 많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립니다.”(시편90,10)
오늘 말씀 주제도 믿음입니다. 복음은 중풍병자를 낫게 하시는 주님의 치유이적입니다. 치유은총에 전제되는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을 때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이들의 방향은 정확했습니다. 우리가 병고를 안고 찾아가야 할 분은 오직 하나 우리 삶의 중심인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눈에 이들 동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바로 진심으로 뉘우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께서 즐겨 자주 쓰시는 표현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교회공동체 믿음의 밭에 깊이 뿌리내려할 개인 믿음의 뿌리입니다. 영성체 모시기전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도 생각납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마음 속 악한 생각을 꾸짖으시고 재차 중풍병자의 온전한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입니다. 모든 병의 뿌리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병이 많다는 것은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통 병자요 죄인들입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죄인을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조화와 균형을 깨는 죄요, 주님은 죄의 용서를 통하여 영육의 조화와 균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죄의 용서와 더불어 저절로 치유가 뒤따릅니다. 죄의 용서와 치유에 앞서 중풍병자 동료들의 믿음이 주효했음을 봅니다.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니 하느님 찬양과 더불어 선사되는 믿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훈련입니다. 평상시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공동전례보다 더 좋은 믿음의 훈련도 없습니다. 믿음의 훈련으로 믿음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끊임없는 믿음의 훈련으로 믿음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창세기의 장면은 읽을 때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감돕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험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믿음의 어둔밤같습니다. 믿음의 유혹이 아니라 믿음의 시험입니다. 악마가 유혹하지 하느님은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시종여일하게, 믿음의 시험을 순종으로 통과합니다. 부를 때 마다 응답합니다. 하느님도 아브라함을 신뢰했지만 초조했던 듯 싶습니다.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이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죽이려 하자 재차 다급히 개입하신 주님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믿음의 시험에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시험, 믿음의 축복입니다. 하루하루 죽을 때까지 계속될 믿음이 여정에 믿음의 시험들입니다.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믿음의 시험은 죽음일 것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심기일전하여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 믿음의 훈련에 믿음의 공부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고백합시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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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c)
<두 부류의 사람들!>
오늘 복음(마태9,1-8)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중풍 병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너를 위한 나의 작은 기도나 행위가 결코 작지 않고 큰 기적을 낳는다는 깨달음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금방이라도 파멸에 이를 것만 같은 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18,20)
두 세 사람이면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제대로 믿는 의인 두 세 사람만 있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와 공동체를 위해, 그들의 부활을 위해 두 세 사람 안에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9,2c)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태9,6c)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자,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딴지를 겁니다. 또 한 부류는 평범한 군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기뻐 찬양하는 사람인가, 딴지를 거는 사람인가? 살리려고 하는 사람인가, 죽이려고 하는 사람인가? 순종하는 사람인가, 불순종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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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UpfnlP4u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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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 2)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용기와 용서가
필요한 여정입니다.
자기의
소중함을
회복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또한 용서입니다.
부끄럽고
뉘우치는
마음에서
용기와 용서는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이기심은
부자유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끌지만
용서는 평화로
우리를 이끕니다.
용서가 죽으면
사람도 죽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통하여 살리는
믿음을
다시 배웁니다.
관계를 살필 줄
아는 마음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소중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용기로 오시고
용서로 오시며
못난 우리들의
삶을 잡아 일으켜
세우십니다.
용서는 심판을
멈추는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죄가 사라지면
용서도 사라집니다.
허약한 우리의
모습을 용서로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용서로 돌아갈
우리의
관계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모든 길에는
용기와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굶주린
우리를 용서로
채워주십니다.
믿음의 길은
용기와 용서로
주님을 향하는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은
용서를 먹으며
자라납니다.
쓰러진 곳에서
일어나 용서의
제 평상을 가지고
용서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용서아닌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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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태 9, 2)
믿음은
용기와 용서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기에
다시 힘차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더 근원적인
치유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용서입니다.
용서는
용기로
구체화됩니다.
그 어떤
처지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하게합니다.
용기와 용서
믿음이 필요한
오늘입니다.
일어나 우리의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대상또한
우리자신입니다.
용서와 용기는
우리를 대신하여
줄 수 없습니다.
건강해지는
믿음이란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고
용서를
배워나가는
여정입니다.
모든 용서의
중심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이
중심이십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를 위해 오신
이 힘찬 사랑을
드디어
알게되었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모든 여정을
믿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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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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