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서는 ‘자비를 베풀다’라는 동사에 하느님(15회)과 예수님(12회) 그리고 인간(5회)이 주어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행위는 죄인들에게 하신 용서 또는 자격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로서 구원의 은총을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바오로의 부르심이 그 좋은 예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신 일은 치유 이야기에 자주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병자나 그 가족이 주님께 청원을 드리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 9,27; 15,22; 17,15; 20,30). 그들은 절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연민과 도움을 청했고, 주님께서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그들을 만족시켜주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마태오 복음은 이러한 장면을 중요하게 배치함(마태 4,23; 9,35)으로써 병자 치유가 자비로움의 표징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비를 베푸는 경우도 드물지만 나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 바오로 사도는 자비를 베푸는 일에 있어 자선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 12,8; 2코린 9,7).
마태 18,33은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인간의 자비로움이 확실하게 연결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대답하신 다음,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비춰 규정되어야 함을 채권자(하느님)와 채무자(인간)의 비유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용서는 자신에게 빚을 진 형제를 용서함으로써 완전함에 이릅니다. 하지만 매정한 종은 자신이 받은 임금의 자비를 잊고 무자비한 채권자로 돌변함으로써 그 완전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비유에서 자비와 용서는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부족함을 용서하시면서 당신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에 우리 인간도 자비의 실천으로써 용서를 실천할 과제를 지닙니다. 인간 행동과 하느님 행동의 상호관계는 주님의 기도에서도 드러납니다.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마태오 복음에는 용서와 자비의 상호연관성이 자주 발견됩니다.
[이승엽 미카엘 신부(선교사목국 신앙교육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