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신부
복음; 요한14,27-31ㄱ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 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앙꼬 없는 찐빵’이란 말이 있습니다. 겨울철에 많이 먹었던 찐빵에는 ‘팥과 야채’가 들어 있습니다. 팥과 야채가 없는 찐빵은 아무래도 맛이 덜할 것입니다. 추석에 먹는 송편에도 송편 안에 ‘밤, 콩, 깨, 팥’과 같은 것을 넣습니다. 송편에 이런 속이 없으면 송편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맛 집이 있지만 현지인들이 찾아가는 맛 집과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제주도에 여행 갔을 때도, 현지에 사는 신부님들은 제주도 도민들이 가는 맛 집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매일 봉헌하는 미사에도 매일 바뀌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론’입니다. 강론이 없는 미사는 어쩌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을 수 있습니다. 사제는 그날 전례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우들에게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시대의 징표를 말씀을 중심으로 설명해 줍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길을 설명해 줍니다. 사제는 울림과 떨림을 줄 수 있는 강론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시대의 징표를 찾고, 교우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강론의 내용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속 빈 강정’이란 말도 있습니다. 아무 실속도 없이 겉만 그럴듯한 것을 비유하여 우리는 속빈 강정이라 합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글을 보면 속빈 강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대는 강정이란 음식을 보았는가? 쌀가루를 술에 재어 누에만 하게 잘라서 기름에 튀기면 그 모습이 누에고치처럼 된다네. 겉은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 먹어도 배를 부르게 하기는 어렵지. 또한 잘 부서져서 입으로 불면 눈처럼 휘날린다네.”
저는 파티마에 5번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4번에는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가 멀기도 했고, 다른 일정이 있기도 했고, 바쁘기도 했습니다. 이번 5번째 순례에서는 교우들과 함께 묵주기도와 행렬을 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묵주기도를 하였고, 사제와 교우들은 성모상을 모시고 행렬을 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묵주기도를 하였지만, 기도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동은 같았습니다. 마치 사도들이 기도하였을 때, 성령의 감도로 각 나라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했던 것 같았습니다. 성모상을 따라서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파티마 순례를 가면 묵주기도와 행렬에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해결되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평화도 중요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고 있으며, 따뜻하게 몸을 감싸줄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으며, 많은 난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집이 없어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이루어 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주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성당/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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