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도적인 의지를 바꿔서 악의 사이클을 파쇄하고 의의 사이클이 형성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원파적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교인들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같이 진리가 선명하게 선포되는 곳에서는 교인들이 정말로 변화되기를 원하고, 그 방법을 알기 원하고, 기꺼이 적용하려 듭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다양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중 책으로 낸 것만 해도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목사님, 어떻게 해야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될 수 있나요?』,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종교개혁보다 나를 개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같은 진리!』에 이르기까지 5권이나 됩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많은 영혼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과 설교를 통해 변화되고, 다른 사람들은 저 책과 설교를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모든 설교를 듣고도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정말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일반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마십시오.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모두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분들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저도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싶어요. 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꾸고 변화되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이것은 실제적이고 사활적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주의해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런데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가지'가 '전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가 한 가지면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한 가지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가 한 가지라는 것은 일반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한 가지가 모든 것이 될 때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악의 사이클이 무너지고 의의 사이클이 형성되게 됩니다.
빌 존슨 목사님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는 굉장히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단 한 가지 일을 위해
우리는 지나치게 삶의 비전에만 몰두한 나머지, 과정은 놓쳐 버리기가 너무나도 쉽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여러 가지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분량까지 성숙해가는 것,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 우리의 권세와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곳을 변화시키는 것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종종 이 모든 임무들이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 사실 우리 힘으로는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임무들은 특정한 단 한 가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경우에 한해서는 가능해진다. 이 '한 가지'는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제부터 나의 설명을 들어보기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 수 있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위에 임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버릴 수 있는 온갖 일들은, 바로 이 한 가지 특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다윗 왕은 이 개념에 관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자들보다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가리켜 '한 가지 일'(one thing, 시27:4)이라고 표현하였다. 삶 전체가 이 한 가지 일, 곧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해야 잘 모실 수 있을 것인가에 수렴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돌보는 것, 주님의 임재를 모시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불가능한 꿈들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실제로 이 모든 꿈들이 실현되는 것은, 주님을 잘 모심으로써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패트리샤 킹 목사님도 "친밀감을 위한 전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감을 위한 전쟁이야말로 저는 가장 큰 전쟁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는 삶은 친밀감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 원수가 우리에게서 주님과의 친밀감을 앗아간다면, 그는 모든 것을 앗아간 셈입니다. 친밀감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다윗의 생애입니다. 다윗은 아버지나 형제들이 왕 이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사무엘이 왕이 될 사람을 선택할 때 이새는 아예 그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은 형제들 중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막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위대한 시인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시들은 유대교에서 대표적인 찬송가로 쓰였습니다.
다윗은 또 위대한 음악가였습니다. 왕 앞에 불려갈 정도로 뛰어난 연주가였습니다. 다윗의 연주는 특별했는데, 그가 수금을 타면 악신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찬양이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왔기 때문일 것입니다(시22:3).
다윗은 또 위대한 용사였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으로서 적장 골리앗을 쓰러트려 나라를 구한 용사요 국민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왕이 되었는데,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성군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에 다윗의 별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그는 오늘날도 대표적인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개 목동이었던 다윗이 이런 대성공을 거둔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가 추구했던 한 가지가 바로 그 비결입니다.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목적으로 추구하는 데서 다윗의 시가 나오고, 노래가 나왔습니다. 골리앗을 대항할 수 있었던 용기도 한 가지를 추구하여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다니엘 11:32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또 한 가지를 염원하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했기 때문에, 그는 왕으로 선택을 받았고 결국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이룬 것들은 모두 한 가지에서 기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윗이 다윗 된 것은 모두 한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한 가지'가 '전부' 혹은 '모든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고 했습니다. 불평하는 형에게 한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는 말이 탕자에게도 해당됩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탕자가 한 일은 이 한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가지로 인해 모든 것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윗이 원했던 한 가지에 집중할 때 우리에게도 모든 것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한 가지가 전부입니다!
시편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이제 한 가지가 전부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한편, 구약뿐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다윗처럼 한 가지를 추구한 사람이 나옵니다. 물로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입니다.
새번역 빌립보서 3: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라는 말씀에 비추어볼 때 바울이 추구한 한 가지도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저는 마리아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녀에 관해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다윗처럼 마리아도 한 가지를 택했습니다. 마리아는 왕도 아니고 남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그리워하셨듯이, 예수님은 마리아 가족을 사랑하셨고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처럼 마리아가 원한 것도 한 가지였고 그것은 바로 주님 혹은 주님과의 교제였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마리아처럼 우리도 한 가지를 원해야 합니다. 전에는 간헐적으로 하나님을 구하다가 지난해 말 저는 한 가지를 온전히 추구하기로 결단했고 공개적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단 누명을 벗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그것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김옥경 목사님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귀히 여겨왔습니다.
그러다가 요즘 영으로 밝히 깨달았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단 누명을 벗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김옥경 목사님도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고 지혜이시고 능력이시고 전부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다른 것은 덜 중요해집니다.
그 무엇이나 누구에게도 의존적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다시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떻게 제가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았는가를 통해, 여러분이 비결을 깨닫게 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한 가지가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런 깨달음이 저를 강타했습니다.
'다윗이 말한 한 가지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헛되게 되고 만다!
한 가지를 추구하면 확실히 천국에 들어가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불투명하다. 또, 한 가지를 추구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어둡고 미래가 없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패자가 되고 말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은 나의 생명이시고 지혜와 능력이시고 복이시며 전부가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앞으로 평생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찾고 또 찾으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을 찾고 구하다가 죽을 것이다!'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으려면,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7:10-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근심이 그들을 간절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사모하게 하고, 열심을 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주도적인 의지를 바꾸는 데 꼭 필요한 근심은 편지가 아니라 저를 강타했던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옵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도 있고, 인생의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고, 밝은 미래가 없으며, 설사 성공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자각을 통해 가능케 됩니다. 그런 근심은 우리를 간절하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만들고, 사모하게 만들고, 열심을 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자가 되십시오. 근심하되, 마치 자신이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사람의 반응에 비할 수 있는 그런 근심을 하십시오. 병을 알기 전에, 그 사람은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으로 근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을 알게 된 후 더 이상 그런 것들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치고 살 수 있을까?' 이 한 가지 근심만 할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한 가지를 추구하지 않는 결과의 참담함 때문에 '한 가지'가 한 가지 근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 한 가지 근심 속에서 하나님을 절박하게 그리고 평생 찾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도적인 의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뀌게 되며, 우리가 변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