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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 안에서 눈에 띄게 우려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조직폭력배들의 삶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의리'니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미화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파괴를 일삼으면서 살육을 본업 삼아 무위도식하면서 동물처럼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정과 공동체, 이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폭들의 일상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무릎 꿇고 백배 사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9시 뉴스를 보다가 기가 차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현금지급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한 여성을 한 강도가 쇠파이프로 인정 사정 없이 휘갈기는 광경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더군요.
피해자는 너무도 많이 맞아 혼수상태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로 이 사회 안에 버젓이 그리고 당당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 앞에서
너무도 분노에 찬 나머지 할 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끝도 없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양상을 더해만 가는 하위 문화의 구조 안에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픕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안에서 빈자와 약자만을 골라 등을 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접대 문화 안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도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려고 이러나?"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은 뭐하나? 저런 *들 데려가지 않고!"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저런 *들 벌하시지 않고!"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앞에
예수님의 마음 역시 저 못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악도 타락도 어느 정도여야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극약 처방으로 '성전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비통한 심정, 애끓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대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최후의 경고마저 우리 인간을 향한 무한한 예수님의 자비, 아버지로서 애끓는 연민의 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시기에
죽어 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최후의 처방전으로 성전 파괴와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 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역시나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순례 다녀오면 좀 여유 있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그렇게 살 수는 없는 팔자인가 봅니다.
또 제가 할 수 있다고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그렇게 일거리를 주시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다시금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성지순례를 가면서 휴대전화 역시 가지고 갔습니다.
혹시 연락할 일이 생겼을 때 또 반대로 급한 전화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가지고 갔지요.
이스라엘에 도착한 뒤, 잘 도착했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당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역시 전화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문자 메시지로 전화 거는 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지요.
요즘 휴대전화는 일부러 로밍 신청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즉 자동로밍이 된다고 들었는데
왜 내 전화는 이럴까 하면서 계속해서 투덜댔습니다.
성지순례 마지막 날, 동창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만 제 휴대전화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전화 거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는데, 제가 이제껏 잘못했던 것이 판명 났습니다.
제 휴대전화는 지극히 정상이었지요.
문제는 제가 사용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용 방법을 알아야 전화도 제대로 걸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도 그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요즘 기계를 다루는 것처럼 어려울까요?
아닙니다.
그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 역시 사랑하며 살면 됩니다.
문제는 실천이지요.
이론으로만 그리고 말로만 ‘사랑’을 외쳐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시면서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하십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요?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들이 당할 고통을 보시고 무척이나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희망도 전해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은 베트남의 순교 성인이신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을 봉헌합니다.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은
바로 하느님께서 전해주는 희망을 간직했고,
그렇기 때문에 순교의 순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순교로 사랑을 실천했기에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모든 분들에게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징후(Ssymptom)>
저희가 살던 곳은 장마 때만 되면 물난리를 치러야하는 시골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도 물난리가 나서
저는 포대기에 쌓여진 채 집 지붕을 뚫고 헬기로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비행기를 타 본 것입니다.
좋은 것도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는 비만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냇가가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건너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학년 때는 개근상을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장마 때면 초긴장을 하셨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피난을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른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것보다도 냇가가 불어나서 그것이 제방을 무너뜨리면 큰일이었습니다.
지금 동네에 비가 그쳤더라도 그 물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 제방이 안전한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정이 넘었는데 제방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그 제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엔 제방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만약 제방이 터졌다면 마을사람들 모두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기 때문에 밤새 제방을 지켜보던 분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한 분이었는지 마을 분들이 돌아가면서 지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멋모르던 우리들은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사고가 예고 없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제방이 한 번에 터지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씩 물이 새어나오다가 그것이 더 커지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틈이 생겨 물이 새어나올 때 재빨리 대피하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징후’라고 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건물에서는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직원들은 그런 소리들을 이미 여러 번 들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 사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다리가 갑자기 내려앉을 리는 없습니다.
누군가 작은 문제점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면 큰 사고는 면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하십니다.
요즘 복음들이 자꾸 이런 종말론적 사건들을 이야기하는데
지금이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즉 종말로 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두고 감탄하자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날이 온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언제쯤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거짓 스승이 나타나 사람들을 속일 것이고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큰 지진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전쟁과 기근 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지진과 하늘의 표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바보들이라도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지 알 수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징조들’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있던 많은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그런 징조들을 잘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한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큰 죄부터 짓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죄를 짓고 기쁨과 평화도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잘 보고 빨로 돌아서는 사람은 큰 어려움에 떨어지지 않겠지만
방관하면 깊은 구렁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알기 위해 죄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병에 걸려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병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충분하듯이
우리도 교회의 가르침과 영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보면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 어금니에 자꾸 음식물이 끼어서 오른쪽으로는 음식을 잘 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들어가 예전에 금으로 때웠던 곳을 다시 하려고 떼어냈는데 그 안이 썩고 있었습니다.
치아가 썩고 있어서 아팠던 것인데 음식물이 끼어서 그런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마터면 치아를 다 썩힐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몸에 신경이 있어 통증을 느끼는 것도
느낄 때는 아프지만 더 몸이 나빠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삶에 있어서도 작은 아픔들이라도 그 원인을 찾아 잘 고쳐나가야 합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혹은 주위에 자신을 지켜봐주는 그런 파수꾼이 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어쨌든 매일매일 내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는 묵상이 없는 영혼은
‘갑자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하늘에서까지 굉장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은 미리 준비하라고 예고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들의 영혼도 작은 표징들이 있으면 방치해 두지 말고
그때그때 고치려 하는 민감한 의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로마 유학중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여러 예언자가 성전 파괴를 예고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절망스러울까?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곰곰이 잘 생각해 보면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아들을 무척 사랑하시어 그 속 깊은 비밀을 털어놓으시는 것 같다.
아하!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그 어른을 알아보는 일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내 작은 생명이, 생명의 원천이신 분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어서 당신께 돌아와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아직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운 심판이 닥치지 않도록 사랑을 향하여 어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면
영원한 죽음도 존재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유를 주셨다.
당신의 크신 사랑에 ‘예’ 또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우리 인간한테만 주어졌다.
나를 위한 영원한 삶은 전적으로 이 대답에 달려 있다.
최후 심판 때 사람의 아들이 왕으로 와서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아픈 사람, 낯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는지 물으실 것이다.
소외받는 노인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맞아들이고 베풀어 주는 이들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정신이 번뜩인다.
‘주님, 이 행복한 대열에 들게 하소서.’
- 성바오로딸수도회
- 성베네딕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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