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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張德震(1898 ~ 1924)】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운동계 통일운동 추진」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 출신이다. 아버지 장붕도(張鵬道)와 어머니 김현묘(金炫妙)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898년생으로 추정된다. 호는 운갑(雲甲)이다. 바로 위 형이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다. 그리고 둘째 형 장덕준(張德俊)은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일제가 서북간도의 한국 독립군과 한인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간도참변(間島慘變) 시, 참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아일보 기자로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에게 희생된 독립운동가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데다 7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높은 수준의 교육까지는 받지 못했으나, 유년기 둘째형 장덕준이 강사로 있는 진남포(鎭南浦)의 한 학교에서 셋째 형 장덕수와 하숙하며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으로 갔다. 그곳에서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의 주도로 성립된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의 단원이 되었다. 광제청년단은 만세운동 전후 국내외 애국청년들이 조직한 많은 청년단 중 하나였다. 침략자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치루기 위해 청장년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군자금을 모집해 무기를 구입하였다.
1919년 말, 광제청년단과 같은 목적으로 만주와 국내에 성립된 여러 청년단들을 연합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콴뎬현과 접해 있는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에 청년단 연합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가 성립되었다. 이 연합회는 다시 이듬해 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탁(李鐸)의 주도하에 서간도의 독립운동 단체들인 한족회(韓族會)·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과 통합해 콴뎬현에 본부를 둔 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光復軍)을 성립시켰다.
광복군은 부속기구로 참리부(參理部)·사령부(司令部)·군영(軍營) 등을 편성하고,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설치하였다. 광복군 참리부와 사령부는 조병준(趙秉準)과 조맹선(趙孟善)이 최고지휘관이 되어 이끌었고, 광복군총영은 오동진이 총영장에 선임되었다. 광제청년단부터 함께 하며 의기가 투합하였으므로 총영장 오동진의 부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복군총영이 성립되고 약 5~6개월이 지난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돌았다. 이에 총영장 오동진은 이 기회에 대규모 무장활동을 전개해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아울러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담은 호소문을 의원단에 전달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들이고자 계획하였다.
이 같은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광복군총영은 4개 조의 특파대를 편성하였다. 김영철(金榮哲)·김성택(金聖澤)을 비롯, 3명으로 구성된 서울방면으로 향하는 제1조, 박태열(朴泰烈)·안경신(安敬信) 등 5명으로 구성된 평양(平壤)방면의 제2조,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 등 3명으로 구성된 선천(宣川)방면의 제3조, 정인복(鄭仁福)이 김예호(金禮浩)와 함께 파견된 신의주(新義州)방면의 제4조였다.
평양 방면으로 향한 제2조의 대원이었지만, 오동진과 함께 총영의 모든 작전을 주관했으므로 각 조의 국내 진입을 일일이 점검하고 지시하였다. 특히 서울로 향하는 제1조가 국내로 들어올 때는 오동진과 함께 대원들을 인솔해 압록강을 넘어 평북 의주군(義州郡)에 있는 오동진의 고향 자택에서 1박을 시킨 후, 대원들은 서울로 출발하게 하고 두 사람은 관전현의 본부로 돌아왔다.
제1조를 배웅해 서울까지 출발시킨 후, 제2조의 대원들을 이끌고 평양으로 잠입하였다. 2조의 공격 목표는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 청사, 평양부청 및 평양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8월 3일 밤, 대원들을 나누어 각 목표물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자신은 여성대원인 안경신과 함께 평양경찰서로 향했다. 먼저 평남경찰부 청사에서 폭탄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가 났다. 다른 곳과 동시에 거사를 실행코자 했으나 폭탄도화선에 불이 붙지 않아 평양경찰서의 파괴는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거사가 끝나고 대원들 모두 본부로 귀환했으나, 여성인 안경신만이 함남 이원(利原)에 머물러 있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안경신이 일제의 법정에서 재판받을 당시 동지 박태열과 함께 궐석재판에 의해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국내에 파견되었다가 서간도로 돌아간 얼마 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 9월 15일에는 임시정부의 공채모집원에 임명되었다. 모집 목표액은 2만원이었고, 담당구역은 국내의 경기도 이천군(利川郡)·용인군(龍仁郡)이었으며, 1923년 12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상하이에 체재하는 청년학생들과 함께 재상해유일학생회(在上海留日學生會)를 조직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일본에 유학한 바가 있는 청년학생들이 조직한 단체인데 일본에 유학했는지는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형인 장덕수가 일본에 유학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다녔기에 그 관계로도 회원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단체는 얼마 후 2·8독립선언을 기념해 단체의 명칭을 28구락부(俱樂部)로 바꿨다.
1921년 10월 23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염수로(炎水路) 여수방(麗水防) 14호에서 소련의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극동혁명당대회(極東革命黨大會)’를 준비하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광복군총영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해 극동혁명당대회에 안건으로 올릴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제반 문제와 파견할 인물들을 선출하였다. 이때 파견 인물로 선출되었지만, 갑자기 병을 얻어 뒤늦게 이르쿠츠크를 향해 떠났다.
소련을 다녀 온 뒤, 1922년 6월 8일 상하이에 재류하는 젊은 동지들과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노선을 모색하기 위해 한구로(漢口路) 모이당(慕爾堂)에 모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앞으로 알력과 갈등·당파색을 없애고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35세 이하의 한인으로 그 취지를 실천할 단체인 유호청년회(留滬靑年會)를 조직하기 위한 발기회를 발족하였다. 이 발기회의 회원이 되었다.
유호청년회는 4일 후인 6월 12일 밤,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하였다. 참가자들은 발기회에서 나온 취지에 합당한 각 방면의 다양한 의사를 수집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그 일을 수행할 위원을 선정하였다. 정광호(鄭光好)·윤자영(尹滋英)·나창헌(羅昌憲) 등과 함께 9인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들 위원들은 6월 19일, 인성학교에서 제2회 임시대회를 열었다. 대회 참가자들은 조사된 여러 이견을 놓고 논의한 끝에 “공정한 입지에서 행동할 것. 어떤 명목(名目)이 있더라도 독립운동자들은 상호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번에도 이 결의 사항을 독립운동자들에게 홍보하고 지킬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한 9명의 실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6월 24일에는 프랑스조계 포석로(蒲石路) 신민리(新民里) 23호에 있는 임시의정원 청사에서 유호청년회 제3차 임시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향후 개최예정인 국민대표회의의 방향 선정이 집중 논의되고, 다음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5명의 위원이 선정되었다. 이때도 역시 김정목(金鼎穆)·곽영(郭英)·김보연(金甫渕)·윤자영 등과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와 같이 유호청년회를 통해 독립운동자들의 대화합에 노력했다. 그리고 1922년 8월에는 미의원단 방한 시 국내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태열을 비롯,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 등 9명의 동지와 함께 하루빨리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촉구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23년 1월 3일 프랑스조계 민국로(民國路)에 있는 미국인 교회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개최일에 참석한 독립운동 각계의 대표는 63명이었다. 이 회의에 양승우(梁承祐)와 함께 서간도 광복군의 대표로 참석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모여 그해 6월 초까지 약 5개월간 개최되었다. 하지만 참가 대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임시정부를 개조해 계속이어 가자는 주장과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수립하자는 일부의 세력이 합의점을 이루지 못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독립운동계가 통일되고 합력하는 면을 찾지 못하자, 침략자들의 본거지인 일본과 한국내에서 직접적인 무장활동을 벌이고자 시도했다. 그 계획은 1923년 11월 1일 상하이의 모(某)찻집에서 도모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장덕진을 비롯해 상해 고려공산당원인 윤자영·여운형(呂運亨)·조동우(趙東祐), 그리고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마쓰모토 아이케이(宋本愛敬)와 중국인 황개민(黃介民) 등 8명이었다.
이들은 그 해 9월 1일 일본 관동(關東)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일본 전체가 어지러울 때 일본과 한국 곳곳에 무기를 사용하고 폭탄을 투척해 일제수뇌부를 혼돈에 빠트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폭탄을 일반 소포로 가장해, 일본으로 보낼 때는 ‘K’자를, 한국으로 보낼 때는 ‘C’자를 표면에 써 동지들만 알아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계획이 세워지자 이들은 무기와 폭탄 구입에 나섰다. 그러나 이 무장투쟁 계획은 상하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밀정들에 의해 일제의 군경대에 포착되고 말아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말았다. 목숨을 건 무장투쟁을 계획했으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것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팔아먹는 일제의 앞잡이인 밀정들이었다. 밀정들은 독립운동 단체 내부뿐만 아니라 상하이 교민사회 곳곳에 박혀있었다. 이들을 척결하지 않고는 조국 독립을 위한 어떤 계획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깨달음에 무장투쟁계획이 무산된 직후인 그해 12월 26일 상하이 교민단에 의경대(義警隊)를 설치해 최천호(崔天浩)와 함께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친일파와 일제의 밀정을 적발해 처단하는 것이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의경대의 고문을 맡았다. 의경대원으로 활동하면서는 무장활동 경험이 많은 의열단(義烈團)과 관계를 맺어 상호 협력관계를 가졌다. 또한 남만주지역의 통합 독립군단인 통의부(統義府)에도 연락을 취하며 상하이내의 친일무리를 척결하는 한편 국내진입의 기회를 엿보기도 했다.
의경대의 업무는 1924년 6월 8일 교민단에서 임시정부 경호국(警護局)으로 이를 이관시키고 중지하면서 종료되었다. 이후 나석주(羅錫疇)·최천호 등 4명이 경호국의 국원(局員)이 되어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고 교민을 보호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한편 의경대 대원으로 이 같이 활동하던 1924년 2월 말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의정원 의원이 되어서는 1924년 7월 24일 여운형·엄항섭(嚴恒燮) 등 20명의 의원들과 ‘법제개정(法制改正) 및 정무쇄신(政務刷新)에 관한 특별연구조사위원 선정안’을 발의하고, 그 안(案)이 통과됨에 따라 윤자영·윤기섭(尹琦燮) 등과 함께 11명의 조사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12일에는 박정건(朴貞健)·김현구(金玄九) 등 7명의 의원들과 함께 독립운동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독립운동 단체 대표회의 소집 안’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관여한 이들 두 법안의 공통점은 국민대표회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연구하고 논의하자는 취지의 것이었다.
1924년 3월 21일에는 공창열(孔昌烈)·김상덕(金商德) 등 17인과 함께 상하이 거주 한인 남녀청년들을 모두 가입시킨다는 취지하에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발기회를 개최했다. 이어 4월 5일 창립총회를 개최해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 그리고 재무까지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다. 이어 참가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단결과 희생정신을 강조한 “독립운동의 기치아래 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자. 민족적 독립의 완성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분투하자”와 같은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인재의 양성이나 무기의 준비는 결국 자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24년 8월 18일 밤 동지 김종철(金鍾喆)·김명현(金明鉉)·김문희(金文凞)·이화익(李化翼)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프랑스조계 내 중국인이 경영하는 도박장을 습격하였다. 한 번의 작전으로 대금을 얻기 위한 대담한 기습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들 행동대가 채 목적을 달성하기 이전에 프랑스 경찰과 중국인 사장이 고용한 무장 고용인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결국 앞장서 공격하다가 목 부위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김문희와 이승춘은 붙잡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현장을 빠져 나가 도주하였다. 중상을 입고 프랑스 병원에 입원했으나 8월 26일 오전 6시 사망하고 말았다.
사망하기 전 병상에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에게 “친형 덕준이 수년 전 간도에서 일본군에게 참살당했으므로 나는 그 복수를 하기 위해 오늘까지 전력을 기울였지만 불행히 그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이제 천명을 마치려 한다. 바라건대 선생이 나를 대신해서 이 원수를 갚아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장덕진전』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동지 전동명(全東明)이 서(敍)를 부탁했을 때, “(상략) 장덕진군은 그의 철난 뒤 10여 년 동안은 그 어느 하루가 적(敵)과 싸우는 날 아님이 없었으며, 악사회(惡社會)와 싸우는 날 아님이 없었나니, (하략)”라고 써,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사망한 일생을 칭송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