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정성일씨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이번 칸영화제에 가서 61편의 영화를 보았다.
하루에 6, 7편의 영화를 봤다는 말이다. 칸영화제가 고독하고 작가주의영화의 집결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거의 자기 학대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같은 영화를 그것도 영어자막으로 하루에 7편씩 본다고 상상해보라. 나도 영화잡지 만들어 먹고살지만, 이건 생각만 해도 얼굴이 일그러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 와중에 총 200매의 원고를 보냈다. 끔찍한 일이다. (잠 많은 박은영이 열흘 동안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며 전부 35편의 영화를 보고, 총 100매 정도의 원고를 보내는 가혹한 일정을 치러냈지만 너무 엄청난 강적이 옆에 버티고 있어 힘들다는 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고 한다. 안됐다.)
평론가를 비웃는 일이 이상하지 않는 세상이다. 평론가들은 별로 재미없는 영화에 거품 물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는 우습게 보는 사람이며, 쓸데없이 어려운 말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사람으로 종종 조롱당한다. 그 비웃음의 많은 부분은 평론가들이 자초한 것이다. 알아먹기 힘든 평론이라도 의미있다는 강변이 아니라 의미있게 소통되는 평론이 결국 그 부당한 폄하를 넘어설 테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정성일씨는 그의 몸이 영화를 원하는 사람이다. 몸이 영화를 원하지 않으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다. 누구나 영화를 평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만큼 영화를 욕망하긴 힘들다. 나는 한 영화에 대한 그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의 어쩔 수 없는 병적인 영화애는 웬만해선 똑바로 막을 수 없다. 평론은 거기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이 세계적인 석학이 쓰는 영화 에세이가 대체할 수 없는, 보통의 영화평론가가 쓰는 평론의 자리일 것이다.
2. 나는 유지나 교수를 이해할 수 없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일로 요즘 평론을 많이 안 쓰지만, 그는 견고한 페미니스트 평론가로 유명하다. 그가 <이도공간>에 별 다섯개를 줬다. 나는 그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사가 기록할 걸작일 가능성은 없을 것이며, 또 그가 옹호해온 페미니즘영화가 아닐 거라고 추측한다. 그런데 별 다섯개는 어떻게 된 일일까. 그의 20자평은 ‘기이한 아름다움, 파괴적 아름다움 속에 사라진 꽃 장국영에게’로 되어 있다. 해답은 장국영이었다.
며칠 전 황학동 도깨비 시장에 나갔다가 <영웅본색>과 <천녀유혼> 비디오 CD가 눈에 띄어 두장에 5천원 주고 샀다. 두 영화 모두 화질 나쁜 비디오테이프로 복사해 10번 이상 본 영화들이지만, 그냥 사고 싶었다. 두 영화에 모두 장국영이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귀신인 왕조현에게 선하디 선한 미소를 짓는 맑은 얼굴의 그 사람을, 우리가 한때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그날 밤에 여전히 나쁜 화질의 비디오 CD를 보며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억은 분석과 평가의 영역 너머에서, 어쩔 수 없는 원체험으로 남아 있다. 아마 유지나 교수도 그랬을 것이다. 그 영화가 훌륭하지 않은 영화여서 그의 평가에 반대할 순 있겠지만, 그 사랑의 고백에는 시비걸 수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장국영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애정의 대상이었던가 봅니다. 그를 이슈의 대상이 아닌 우리 유년시절의 기억의 한 자락을 장식한 배우로 평가해 준 그들이 고맙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유지나 교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이도공간에 별 5개를 준 그 속에 그런 의미가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레슬리는 그냥 배우로서 가수로서 우리에게 남겨준 의미도 크지만...그 보다 더 큰 의미는 내 기억속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속에 기억속에 추억속엔..."장국영"이란 이름이 있었다는게...
전 허문영님의 글이 너무 좋아요 예전 편집장이셨을때 그분이 쓰시던 칼럼들이 참 그립더군요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라는 것이 이럴때 쓰는 표현인가봐요
그냥 잊고 살아왔고 내가 장국영이라는 사람을 좋아했었는지도 잊고 살아왔었는데 그냥 내인생을 살아왔는데 2003년 4월1일 모든게 다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당신을 그렇게 잊고 살아왔을까......
그 당시 저 기사를 일고 눈물을 흘렸는데..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군요.. ' 선하디 선한 미소를 짓는 맑은 얼굴....' 누가.. 그런.. 그를.. 아프게 했을까요... 남은 인생을 살아 낼 수 없을 만큼 힘들게 한 걸까요... 너무 슬픕니다....
"어쩔수 없는 원체험"... 이건 유지나 교수님, 평론가들이나, 우리같은 사람들이나 다 마찬가지인가봅니다... 그가 준 행복한 체험들을 어떻게 함부로 차갑게 평가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