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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파랑새가 된 경춘
黃 源 甲
청령포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져 흐르며 삼면을 감싸 돌아 반도의 형상을 이루고, 뒤는 깎아 세운 듯한 험악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창살 없는 천연의 감옥이다. 어린 단종(端宗)은 이처럼 무서운 섬 아닌 섬 속에 갇혀 외로운 귀양살이를 했으니 그의 나날과 다달은 피눈물로 얼룩진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며 두고 온 왕비 송씨(宋氏)가 그리워 눈물과 한숨을 지을 때 멧새도 구슬피 알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강물은 오늘도 쉴 새 없이 흘러오고 또 흘러간다. 저 강이 서강이다. 서강은 오대산 서쪽 산기슭의 물줄기들이 평창 사천강이 되고, 다시 흘러 영월 지경으로 넘어와 주천강과 합류하여 청령포 앞을 감돌아 내린다. 그리고 합수머리 아우라지에서 정선 조양강이 흘러내려온 동강과 한 줄기로 어우러져 남한강 상류를 이룬 뒤, 고씨동굴과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 앞을 지나 충주호로 흘러 들어간다.
평강공주(平岡公主)와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은 극적인 로맨스로 풍운의 삼국 혈전사를 수놓았던 고구려의 용장 온달(溫達) 장군이 실지 회복의 한을 품은 채 전사한 아단성, 곧 현재 온달산성이 있는 영춘도 그 옛날 고구려와 신라가 피어린 사투를 벌일 때에는 영월 땅이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과 <신증 동국여지승람> ‘영춘현 조’에 이렇게 나온다.
- 내성군(奈城郡)은 본래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을 경덕왕(景德王)이 개명하였다. 지금 영월군이다. 영현(領縣)이 셋이다. 자춘현(子春縣)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 영춘이라 부른다. -
청령포가 한눈에 건너다보이는 영월읍 방절리 강언덕에는 1984년 11월에 세운 왕방연시조비(王邦衍時調碑)가 서 있다.
-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은 세조(世祖)의 명을 받고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왔던 금부도사였다. 그러나 그는 단종을 이곳 유배지 청령포로 호송해온 금부도사로 오랫동안 잘못 알려져 왔었다. 그는 단종의 참혹했던 죽음을 확인한 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강가에서 이처럼 처절한 심경을 읊었던 것이다.
1455년 6월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빼앗긴 단종은 그해에 사육신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듬해 6월 28일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관리 3명, 군졸 50명의 삼엄한 호송을 받으며 광나루를 건너 뒤에 여주 ․ 양평 ․ 원주 ․ 신림 ․ 주천을 거쳐 7일 만에 배일치를 넘고 서강을 오른쪽에 끼고 선돌 아래 실낱같은 강변 소로를 따라 이곳 청령포에 다다랐다. 청령포를 유배지로 추천한 사람은 전에 이곳 수령을 지내 청령포의 지형지세가 배가 없으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창살 없는 천연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신숙주(申叔舟)였다.
원손(元孫)이 태어났다고 할아버지 세종대왕(世宗大王)을 그지없이 기쁘게 했던 단종이었다. 세종대왕은 어느 날 저녁 어린 손자를 안고 집현전을 찾아갔다. 그때 집현전에는 성삼문(成三問)과 신숙주가 함께 숙직을 하고 있었다. 세종대왕이 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옛기록은 전한다. "내가 죽은 뒤에 너희가 이 아이를 잘 보살펴다오."
그런데 세종의 뒤를 이은 단종의 아버지 문종(文宗)은 병약한 체질 때문이었는지 재위 2년 3개월 만인 1452년 5월에 39세 한창 나이로 세상을 뜨고 불과 12세의 어린 세자 홍위(弘暐)가 조선왕조 제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곧 단종이다.
이에 앞서 문종은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및 집현전 학사들에게 여러 차례 세자의 뒷일을 당부했다. 이는 불과 50년 전에 자신의 할아버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비롯한 8명의 왕자가 왕위를 두고 처참한 골육상쟁을 벌이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종이 죽자 그의 염려는 이내 현실로 나타났다.
세종대왕의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소생은 죽은 문종을 비롯하여 8왕자였는데 세자로서 왕위를 이었던 문종이 죽자 단종보다 모두 나이가 많고 재주도 비범한 7명의 대군이 저마다 노골적으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큰 숙부 수양대군은 수하에 무인을 많이 끌어들였고, 둘째 숙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인을 많이 모아들였다. 나머지 대군도 각자 자기의 심복들을 요직에 중용하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이 터진 것이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었다. 수양대군이 선수를 쳐서 일으킨 이 쿠데타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말 위화도회군에 이어 일으켰던 쿠데타나 태종 이방원이 일으켰던 궁정 쿠데타인 왕자의 난보다도 훨씬 더 규모가 큰 유혈 참극이었다. 김종서와 황보인 같은 반대파는 물론이요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바로 밑의 아우 안평대군과 이들의 일가 식구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 ․ 이조판서 ․ 병조판서 및 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하여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인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에 임명했고, 쿠데타의 일등공신인 한명회(韓明澮) ․ 권람(權擥) ․ 홍달손(洪達孫) ․ 신숙주 등에게도 공신 호와 더불어 높은 벼슬을 내렸다.
권력을 독차지한 수양대군은 그 뒤 1년 반 동안이나 이름뿐인 임금인 어린 단종을 들들 볶다가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 이듬해인 1455년 6월에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종의 양위를 불법 찬탈로 보고 단종의 복위를 위해 충신들이 들고일어난 일이 벌어졌으니 곧 사육신사건이었다. 사육신은 당시 승지 성삼문을 비롯하여 그의 부친이며 도총관이던 성승(成勝), 형조참판 박팽년(朴彭年), 직제학 이개(李塏),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 사예 유성원(柳誠源), 동지중추원사 유응부(兪應孚) 등이었다.
이들의 거사 예정일은 1456년 6월 경복궁에서 귀국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성삼문은 무관인 부친과 유응부를 운검(雲劍)으로 추천했다. 운검이란 임금의 뒤에 칼을 들고 서 있는 경호관이다. 그런데 무슨 낌새를 챘는지 꾀많은 한명회가 운검을 들이지 말자고 졸랐고 세조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조짐이 불길하고 일이 묘하게 어긋나자 성승과 유응부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거사하자고 주장했으나 신중한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고 했다. 결국 그것이 화근이었다. 배신자 김질(金質)의 밀고로 계획이 탄로나 모두 잡혀들어가 세조의 친국을 당했다. 모진 고문 가운데 세조와 성삼문이 주고 받은 옛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너는 왜 나를 배반했느냐?”
“본 임금을 복위하려 함인데 어찌 배반이라고 하오? 나으리가 나라를 도둑질해 빼앗으니
임금이 쫓겨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한 일이오. 나으리는 평소에 주공(周公)을 자처했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했소?“
주공은 중국 주나라 성왕의 숙부로 어린 성왕을 잘 보필한 인물이었다. 또한 나으리란 임금이 아닌 대군을 부르는 존칭이니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화가 치민 세조가 발을 구르며 고함쳤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는데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본 임금이 계시는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로 삼을 수가 있겠소? 못 믿겠으면 우리 집에 가 보시오.”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다리를 뚫고 팔을 잘랐으나 성삼문은 굴복하지 않았다. 나중에 성삼문의 집을 조사해 보니 세조가 등극한 뒤부터 받은 녹미는 한 톨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쌓아두었을 뿐아니라 남은 것은 침실의 돗자리 하나밖에 없었다.
성삼문에 이어 박팽년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도 차례로 끌려나와 온갖 악형을 당했지만 아무도 굴복하지 않았다. 박팽년도 세조를 나으리라고 불렀으며, 유응부는 아예 당신이라고 호칭했다. 하위지가 "역적 누명을 씌웠으면 목을 베면 그만이지 이것저것 자꾸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오?" 하자 세조도 지쳤는지 마침내 고문을 그치게 했다.
이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한강변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성삼문은 죽으러 끌려가며 세조의 조정에 남은 옛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새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시오. 나는 저승에 가서 옛 임금을 모시려 하오."
당시 그의 나이 46세. 박팽년은 47세, 하위지는 70이었다. 이들 4명과 무관인 유응부는 함께 참수되고 머리는 모두 저자에 효수되었다. 유성원은 성균관에서 이 일을 듣고 집에 돌아가 부인과 마지막 술을 나누고 사당에 들어가 자결했다. 곧 이어 들이닥친 군졸들이 그의 시신을 끌어내어 사지를 찢었다. 이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들의 목 없는 시체는 누군가 밤중에 업어다 노들강변에 몰래 매장했는데 그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라는 설이 있다.
그날부터 무서운 검거 선풍이 불어 이들의 가족을 포함해 70여 명이 잡혀가 처형당했다. 남자는 모두 죽였고 여자는 모두 종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조의 불의에 꿋꿋이 맞서 싸우다가 죽은 이들의 충절은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실패로 끝난 반정운동(反正運動)이었지만 사육신의 충절사는 왜 사람이 짧게 살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하는가를 극명하게 일러주는 역사의 교훈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육신의 거사가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킨 실패로 돌아간 뒤 영월로 유배되어 청령포에 갇혀 있던 단종은 그해 늦여름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처소를 읍내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457년에 일어난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운동에 노한 세조는 아예 후환의 근원을 없애버리고자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보냈다. 그 사약을 가지고 영월로 내려온 금부도사가 바로 왕방연이었다.
10월 24일에 왕방연이 관풍헌에 다다랐으나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단종을 보자 차마 강제로 마시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헛된 공명심에 눈먼 하인 복득이란 자가 뒤에서 다가가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참혹하게 숨을 끊어버렸다. 그때 이 비운의 소년 임금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강물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후환이 무서워서 아무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에 단종의 시신을 합수머리에서 수습해 동을지산 오늘의 장릉에 모신 사람이 용기와 의협심을 갖춘 이 고장 호장 엄흥도(嚴興道)와 군위현감을 지낸 정사종(丁嗣宗)이다.
영월읍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동강 줄기가 금강(錦江:금장강)이다. 금강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금강정이 있고 그 위쪽에 낙화암에서 투신해 단종을 뒤따른 시녀들의 충성심을 기리는 민충사(愍忠祠)가, 금강정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落花岩’과 ‘殉節碑‘ 라고 새긴 비석 2기가 있다. 낙화암은 단종을 끝까지 모시던 시녀 6명이 가엾게 죽은 옛 임금을 저승까지 따라가 모시고자 차례로 몸을 날린 곳이다.
부여의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은 소부리의 여인들은 침략군에게 몸을 더럽히거나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했지만, 이들 단종의 시녀는 누가 따라 죽으라고 시키지도 않았고 생명의 위협도 없었는데 기꺼이 죽음을 택했으니 비록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녀들의 의기와 충절심은 사육신이나 생육신에 못지않다고 하겠다.
어쨌든 단종과 사육신 등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1681년(숙종 7년). 사육신의 관작이 복구된 데에 이어 숙종 22년에는 단종의 복위도 이루어졌다.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낙화암에서 금강으로 몸을 날려 먼저 가신 님을 뒤따라 저승길을 택한 지 3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의 임금은 영조(英祖)였다.
낙화암 바로 옆의 벼랑 위에 소복을 입은 여인 하나가 무섭도록 깊고 시퍼런 강물이 굽이져 흘러내리는 금강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슬픈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여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려 한 떨기 꽃송이처럼 떨어져내렸다.
이렇게 한창 아까운 나이에 짧지만 한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여인은 누구인가. 바로 영월의 명기로 소문난 경춘(瓊春)이었다.
경춘의 본 이름은 노옥(魯玉). 임진왜란 때의 유명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인 고순익(高舜益)의 딸이다. 영월읍내에서 살고 있던 고순익은 가난한 선비였는데, 평소 영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영월이 충절의 고을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곳이기 때문이었다. 영월이 충절의 고을로 이름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수양대군에게 왕좌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이곳 영월 땅으로 유배당했다가 짧지만 한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단종의 비극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 아닌가.
영월에는 하찮은 고을 호장에 지나지않았지만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며, 단종의 뒤를 따라 낙화암에서 몸을 날려 죽음을 택한 시녀들이 있었으며, 이들 말고도 사육신과 생육신과 금성대군을 비롯해 숱하게 많은 단종의 충신이 영월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순익의 가슴 속은늘 단종과 충신들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으니 그것은 단종이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을 당한 지 꼭 300주년이 되는 날인 1757년(영조 33년) 10월 24일에 딸을 낳은 것이었다. 태어난 시간도 단종이 비참하게 목숨을 빼앗기던 유시(酉時), 즉 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였다. 어쩌면 그것은 고순익이 평소에 단종의 비극적 죽음과 충신들의 절의를 너무나 흠모했기 때문에 단종과 그의 충신들이 저승에서도 그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어여쁜 딸을 점지해 주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고순익은 귀여운 딸의 이름을 단종이 영월에서 귀양살이할 때의 칭호였던 노산군의 노(魯)자를 따고, 구슬처럼 보배롭고 아름답게 자라나라는 뜻에서 옥(玉) 자를 넣어 노옥이라고 지었다.
이렇게 태어난 노옥은 건강하고 예쁘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게다가 머리 또한 매우 영리하여 세 살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하니 다섯 살부터는 혼자서도 책을 읽고 뜻을 깨우칠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성품이 밝아 목소리도 고와 말하는 소리가 마치 노래 소리와도 같이 듣기 좋았으며 춤도 예쁘게 잘 추어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고순익 내외의 기쁨은 노옥에 대한 그지없는 사랑으로 나타났고, 이웃 사람들도 “고 선비네 집안에서 여신동(女神童)이 태어났다” 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고순익은 딸이 평소에 흠모하던 단종이 세상을 하직한 바로 같은 날에 태어난 데다가, 자랄수록 머리가 영리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 기특하고 대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노옥이 말귀를 알아듣고 제대로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된 어린 시절부터 청령포와 장릉, 금강정과 낙화암과 금몽암, 창절사와 민충사와 영모전, 소나기재며 배일치며 군등치처럼 단종의 비극적 자취와 전설이 서린 역사의 현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단종의 비극사에 얽힌 숱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거기에는 영월 호장 엄흥도와 낙화암에서 투신한 시녀들의 이야기, 사육신의 충절사며 생육신의 이야기 등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하지만 즐거운 날들은 봄날 눈 녹듯이 이내 사라져버리고 불행이 찾아왔다. 노옥이 다섯 살되던 해 가을에 늘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던 어머니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졸지에 홀아비가 된 고순익은 어린 딸 노옥과 그 이태 뒤에 태어난 더 어린 아들 두 자식을 데리고 눈물겹게 살림살이를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과거 급제를 목표로 했던 글공부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루하루 세 식구 입에 풀칠할 일도 걱정인데 과거 급제니 입신양명이니 가문의 부흥이니 하는 일들이 모두 부질없는 욕망에 지나지않았던것이다.
이처럼 거의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만 유지하기를 삼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 동안 겹치는 생활고에 몸도 마음도 모두 황폐해져버린 아버지 고순익이 그만 자리에 벌렁 드러눕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노옥과 어린 오랍동생은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되고 말았다.
여덟 살짜리 소녀와 여섯 살짜리 소년 두 어린 남매는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며 심부름이니 집안 청소니 하는 따위의 허드레 일거리를 얻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동냥이나 거의 다름없는 일이었고, 또 사람들의 동정심과 아량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동네에 사는 추월(秋月)이라는 나이 많은 기생이 노옥에게 이렇게 타이르는 것이었다.
“얘야 노옥아. 너 내 말을 좀 들어보려므나. 내 그 동안 너희 남매의 딱한 처지를 가만히
지켜보자니 참으로 가여워서 목이 메이고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그래서 내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너희 남매를 모두 수양딸 수양아들로 삼으려고 작정했는데, 노옥이 네 생각은 어떠하냐?“
당장 끼니 걱정 때문에 부모와 더불어 살던 집마저 팔아버려 이젠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노옥 남매가 무슨 대답을 하랴. 노옥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추월의 호의를 고마워했다.
그날부터 노옥 남매는 추월을 어머니라고 부르며 이것저것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내기 시작했는데, 사실 추월의 살림살이도 그다지 여유로운 형편은 아니었다. 명색은 비록 아직도 기적(妓籍)에 올라 있는 기생이었지만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니 기생도 할머니 기생이었고, 따라서 관아나 양반네들의 잔치판에서도 일년내내 가야 한두 차례 불러줄까 말까한 퇴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수입이 변변할 수가 없었다.
노옥이 마침내 기생의 길로 들어선 것이 바로 그런 까닭에서였다. 양어머니가 되어 다섯 해나 먹어도 함께 먹고 굶어도 함께 굶으며 돌보아준 추월의 은혜를 갚고 양녀로서 효도를 하는 길은 그녀의 뒤를 이어 기생이 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노옥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안 추월은 할 수 없이 노옥에게 본격적으로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예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노옥이 본래 어여쁘게 타고난 자태에 서화며 가무에도 남달리 재주가 빼어난지라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터득할 만큼 기생 공부도 마치 순풍에 돛단 배와 같았다.
그렇게 해서 노옥은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본격적으로 기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니 그녀의 나이 꽃다운 열네 살이었다. 기명은 스스로 지은 경춘(瓊春)이라고 했다.
용모 빼어나게 아름답고 재주 또한 뛰어난 경춘이란 동기(童妓)의 등장은 이내 고을 안팎의 일대 화제거리로 떠올랐다. 영월읍내는 물론 이웃 정선․평창과, 강원도 경계를 넘은 충청도 제천의 한량들도 영월의 어린 기생 노옥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저마다 천하의 풍류객을 자처하는 어중이떠중이 젊은 선비며 한량들이 경춘의 자태와 가무 솜씨에 그만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가버리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저 먹음직스러운 풋사과 같은 어린 기생을 한 차례 깨물어볼 수 있을까 하여 너도나도 할것없이 앞다투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덤벼들었다.
하지만 경춘이 비록 팔자 기구하고 신세 가련하여 비록 천대받는 기생의 신분이 되었지만 단종의 충신을 자처한 고매한 선비 고순익의 딸 노옥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호락호락 아무에게나 정조를 바칠 턱이 만무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하는 자들에게 경춘은 이렇게 대답하여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녀는 술을 따르고 노래와 춤을 파는 기생이지 몸을 파는 창부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염치고 체면이고 가리지 않은 채 오로지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야욕을 채우려 드는 자들에게는 양모 추월에게서 물려받은 은장도를 빼어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정조를 지키기도 했다.
이렇게 빼어난 재주와 용모에 매서운 절개까지 갖추어 온갖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니 경춘은 영월의 명기로 소문나고 그녀의 명성은 날이 가고 달이 흐를수록 더욱 넓고 멀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때가 되면 꽃은 저절로 피어나고 밤송이도 저절로 벌어지는 법이 아닌가. 그토록 야무지게 정조를 지켜온 경춘이었으나 바야흐로 나이 열여섯 살이 되어 인생의 첫봄을 맞으니 아무 것도 아닌 공연한 일에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걸핏하면 마음이 들뜨는 것이었다.
경춘이 그녀의 길지 않은 한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던 이수학(李秀鶴)을 만난 것이 바로 열여섯 살이 되던 그 해 봄이었다. 이수학은 당시 영월부사인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이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아리따운 자태를 뽐내며 다투어 피어나고 앞산 뒷산에서 멧새 들새들은 즐겁게 지저귀던 어느 따스한 봄날, 경춘은 모처럼 동생을 데리고 봄나들이를 나섰다. 두 남매가 점심으로 주먹밥을 싸 가지고 찾아간 곳은 경춘이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자주 찾던 능말 장릉, 아버지처럼 평소에 추앙하여 마지않던 단종대왕의 능인 장릉이었다.
배견정 앞 연못을 지나 능원으로 들어간 남매는 동을지산 중턱의 장릉에 올라 참배를 마친 뒤, 이번에는 절골 금몽암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두 남매가 오던 길을 되짚어 능 입구를 빠져나와 이번에는 절골로 오르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여봐라. 거기 앞에 가는 처자가 혹시 경춘이 아닌가?”
경춘이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웬 미목이 수려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종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한 명을 거느린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다른 동행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방금 말을 건넨 사람이 그 젊은 선비가 분명했다. 그런데 경춘이 눈길을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차림새는 선비인데 나이는 아직 스물도 채 못 되어보이는 매우 젊은 도련님이었다. 경춘이 얼른 길가로 몸을 피해 다소곳이 돌아서며 대답했다.
“쇤네가 천기 경춘이 맞사온데, 도련님께서 저를 어찌 알아보셨는지요?”
“영월 땅에 와서 영월의 명기 경춘을 몰라본대서야 어디 말이 되겠는가? 그동안 말로만 듣다가 이처럼 가까이서 대하니 그대의 자태가 참으로 선녀처럼 아리땁기 그지없네그려!”
“아이, 처음 보시면서 그렇게 놀리시지 마셔요. 그렇게 놀리시니 쇤네가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닐세. 내 그동안 관아에만 들어앉아 글공부만 하던 차에 이렇게 바깥바람이나 한 번 쐬려고 나왔다가 그대를 만났으니 이것도 참으로 좋은 인연이 아닌가싶네!”
“관아에만 계셨다니, 그렇다면 도련님이 바로 과거 공부하신다는 사또 나으리의 아드님이시란 말씀이세요?”
“맞소. 내가 바로 이수학이요. 우리 이럴게 아니라 길동무가 되어 함께 금몽암으로 올라가기로 합시다. 어떻소?”
그렇게 해서 경춘 남매와 이수학은 함께 절골로 올라가 보덕사와 금몽암을 구경했다.
“금몽암의 본래 이름이 지덕암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가?”
이수학이 물었는데, 어느새 말투가 하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런 점은 개의치 않은 채 경춘이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아시는 대로 전에는 지덕사였다 합니다. 그런데 단종대왕께서 이곳을 와서 보신 뒤에 전에 궁중에 계실 때에 꿈속에서 자주 보시던 그 절과 흡사하기에 이상하게 여기셨다 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암자를 금몽암이라 바꿔 부르게 됐다고 하더이다.”
“그것 참 신기한 일이로군! 관아 안에 있는 자규루도 본래 이름은 매죽루였는데 단종대왕께서 누각에 올라 슬픈 감회를 시로 읊은 까닭에 자규루라고 이름을 바꾼 것과 같구나!”
“도련님께서 참으로 잘 아시고 계시옵니다!”
“단종대왕께서 자규루에 올라 손수 읊으신 시가 두 수라고 하는데 경춘이 너는 모두 외우고 있겠구나? 내게 한 번 들려주지 않겠느냐?”
“도련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신다면 한 번 읊어보겠나이다. 혹시 틀리는 구절이 있더라도 웃지나 마시옵소서.”
그리고 경춘은 단종의 자규루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되어 푸른 산속을 헤매누나
밤이 가고 또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또 와도 한은 그지없구나
두견새 울음 끊어진 새벽 멧부린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 지는 꽃만 골짜기에 붉구나
아아, 하늘도 귀가 멀었는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 하는지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
“아아, 참으로 선녀같은 자태에 꾀꼬리같은 목소리로다! 참 잘 들었다!”
이수학이 손뼉을 치며 칭찬을 하자 경춘의 얼굴이 이내 잘 익은 복숭아 빛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놀리지 마소서! 부끄러워 땅속으로 기어들고 싶나이다. 그 대신 이번에는 도련님께서 나머지 한수를 읊어주셔야 하옵니다.”
“오, 그러자꾸나! 나머지 한 수 자규사는 내가 읊어보마.”
-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이겨 누머리에 기대앉았어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근심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를 마오! -
“아아, 참으로 도련님의 음성도 절창이옵니다!”
이번에는 경춘이 박장대소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해서 경춘과 이수학 두 젊은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고 속깊은 정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창문이란 한 번 열리기가 어렵지 조금만 틈이 벌어지면 이내 활짝 열리고 걷잡을 수 없이 바람이 밀려들어가기 마련이 아닌가.
이튿날부터 이수학은 글공부가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아서 아침해가 밝기 무섭게 동헌을 나와 경춘을 찾았고, 경춘 또한 밤새 잠을 설친 뒤에 기방(妓房)으로 나가는 대신 전날 약속한 대로 이수학과 만나 영월 땅 곳곳에 산재한 단종의 유적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얽힌 내력이며 전설 등을 들려주었다.
경춘이 이수학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고 이어서 몸까지 아낌없이 바친 것은 만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서였다. 하루는 이수학이 경춘의 집을 찾아 채 어둠이 내리기도 전에 경춘의 양모 추월이 차려내 준 주안상을 받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만 한 이불 속에서 한몸으로 얽히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열여섯 해를 보내며 온갖 고초에도 꿋꿋이 지켜온 정조를 참으로 알아주는 정인 이수학에게 남김없이 바친 것이었다. 사또 아들과 천한 기생 사이면 어떠랴. 양반도 사람, 기생도 사람, 서로 사랑하는데 그 무슨 신분의 장벽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랑에 겨운 두 젊은이는 어둠이 가고 날이 밝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꿈결같이 달콤한 나날과 다달이 흘러갔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바깥은 꽃이 지고 녹음이 짙게 우거진 한여름이었다. 꿈같은 날들은 흐르는 강물처럼 떠내려가고 쓰라린 이별의 시간이 오고 말았으니, 돌이켜보건대 그 해 봄부터 여름까지가 경춘으로서는 태어나서 부모의 품에서 자라던 다섯 살 때까지 다음으로 행복한 한때였다. 하지만 그것은 금세 깨어버린 봄날의 꿈처럼 너무나 짧고 허망한 행복이었다.
두 사람이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해 7월 29일자로 이수학의 부친 이만회 부사가 서울로 영전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공부를 하던 그의 아들 이수학도 당연히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며 경춘을 꼭 껴안은 채 이수학은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
“경춘아. 앞으로 삼 년만 기다려다오. 내 그동안 꼭 과거에 급제하여 너를 데리러 오마.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를 아내로 맞아 백년해로를 할 것이야. 이 약속은 절대로 잊지 않고 틀림없이 지킬 것이야. 알겠느냐?”
“도련님만 믿겠어요! 저같이 천한 것이 도련님을 믿을 수밖에 더 있겠어요?”
경춘은 이수학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서글픈 목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이수학이 그렇게 서울로 떠나버린 뒤 경춘의 하루하루는 오로지 기다림의 나날, 기다리는 고통의 다달이었다. 정든 님을 떠나보내고 나니 입맛도 없어져버려 뽀얗게 탐스럽던 얼굴도 초췌해지고 몸도 수척해져갔다. 추월이 달래고 날마다 동생이 찾아와 위로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만회 부사의 후임으로 8월 2일에 부임한 구협(具挾)이라는 이가 병으로 9월 26일에 죽는 바람에 10월 21일자로 다른 사람이 영월부사로 부임했다. 그의 이름은 신광수(申光秀)라고 했다. 신광수는 부사로 도임하자마자 마치 <춘향전>에서 신관 사또 변학도가 그러했듯이 기생점고부터 했다. 한 줄로 늘어서게 한 뒤 한 명 한 명 살펴나가다가 마침내 경춘의 앞에서 그의 눈길이 떠날 줄을 몰랐다.
“네 이름이 무엇인고?”
“천기 경춘이라 하옵니다.”
“오호, 네가 바로 미색과 기예가 출중하다고 소문난 경춘이로구나! 과연 명불허전이 옛말만은 아니구나!”
경춘에게 첫눈에 반한 신광수는 그날 저녁 당장 경춘을 관아 내실로 불러 수청을 들라고 명했다. 경춘이 수척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리며 신관 사또에게 하소연했다.
“쇤네가 지엄하신 사또 나으리의 명령을 마땅히 거행해야 옳을 줄 아옵니다만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사오니 쇤네를 살려주시는 셈 치시고 굽어 살펴주소서!”
“그래, 그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뭐냐? 일단 한 번 들어나 보자꾸나.”
“참으로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쇤네에게는 혼인을 약조한 정인이 있사옵니다. 그런 까닭에 쇤네는 오로지 그 분만을 기다리는 중이오니 제발 하해같은 은덕을 베푸시어 쇤네를 가엾게 보아주시기 바라나이다!”
경춘이 이처럼 두 손을 모아 빌면서 전임 부사의 아들 이수학과의 인연을 설명하면서 기적에서 빼어 줄 것을 호소했지만 신관 사또 신광수는 아무리 사정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입술을 비틀어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 열녀가 따로 없구나! 기생 주제에 정절이라니, 게다가 뭐, 전관 부사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너를 불러 백년해로를 하기로 약조했다구? 이거야 말로 지나가던 당나귀가 듣고 웃겠구나야! 내 오늘은 첫날이라서 그냥 집으로 돌려보내 주지만 내일 저녁에도 수 청을 들지 않는다면 관장을 능멸한 죄를 물어 단매에 때려 죽이고 말 터이니 그렇게 알아! 알아듣겠느냐? 에잇, 발칙하고 고얀 년 같으니라구!”
경춘은 그렇게 해서 그날 밤은 신관 사또에게 정조를 빼앗기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토록 무섭게 색을 밝히는 사또에게 맞서서 언제까지나 정절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밤새 궁리한 끝에 경춘은 마침내 무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차라리 스스로 몸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어버리면 그 누가 또 다시 이 몸뚱아리를 탐내겠는가 하는 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요 해답이었던 것이다.
뜬눈으로 그 밤을 하얗게 지새며 사랑하는 이수학에게 남기는 유서를 쓴 경춘은 날이 밝기 무섭게 소복을 입고 대문을 나섰다. 그날은 바로 자신의 생일인 동시에 단종대왕이 승하한 날이었다. 아아, 이 년의 팔자는 왜 이리도 박복하단 말인가! 참으로 기구하고도 가련하구나! 단종대왕의 점지를 받아 단종대왕께서 승하하신 바로 그날 태어났다고 하는데, 바로 그날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동생을 데리고 함께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마친 경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동생의 머리를 정성껏 빗겨 준 뒤에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이 누나는 오늘 먼 길을 떠난 것이니 당분간은 너를 돌볼 수가 없겠구나."
"어디를 가는데 그래, 누나?"
"응, 이 시랑 님께서 한양을 한 번 다녀가라고 기별이 왔기에 다녀오려는 거야. 그러니까 그 동안 양어머니 말씀 잘 듣고, 밥 잘 먹고.... 흑흑!“
말을 마저 마치지 못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경춘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품안에는 이수학이 작별할 때에 손에 쥐어준 조그만 노리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푸르스름한 한옥(寒玉)으로 정교하게 깎은 한 마리의 파랑새였다. 이수학과 작별한 이후 경춘은 그가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마다 파랑새를 꺼내어 하염없이 들여다보곤 했던 것이다.
경춘의 발길은 금강 벼랑 가 낙화암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옛날 단종의 시녀들이 그곳에서 굽이져흐르는 시퍼런 강물에 저마다 꽃잎처럼 몸을 던져 먼저 가신 임금을 뒤따라갔듯이 자신도 깊고 푸른 강물로 뛰어들어 짧지만 한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낙화암에 이르른 경춘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구슬픈 목소리로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비록 서울까지 들리지는 않겠지만 혼잣말로 그리운 님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도련님. 부디 안녕히 계셔요.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도 빛내시고, 훌륭한 가문의 규수를 아내를 맞아 행복하게 잘 사셔요. 팔자 기구한 이 년은 도련님 곁을 떠나 먼저 저세상으로 갑니다. 제가 죽은 뒤엔 파랑새가 될 터이니 혹시라도 꿈에 파랑새가 나타나면 소녀가 보고 싶어 찾아간 줄 아셔요.”
그리고 나서 경춘은 치마를 뒤집어쓴 채 앞으로 달려나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말았다.
경춘이 행복한 시간보다 불행한 시간이 훨씬 길었던 한 삶을 이렇게 비통하게 마친 며칠 뒤였다. 서울에서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하고 있는 이수학의 집 처마에 난데없는 파랑새 한 마리가 나타나 구슬픈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종일토록 울어대는 까닭을 몰라 귀찮게 여긴 하인이 파랑새를 쫓아버렸다. 그날 밤 이수학의 꿈에 파랑새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저는 영월의 천기 경춘이랍니다. 피치 못할 곤경에 빠져 도련님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 하고 이렇게 먼저 죽고 말았답니다. 저승길을 떠나기 전에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하여 이렇게 파랑새가 되어 도련님께 호소한답니다. 도련님, 부디 몸 건강하시고 내내 행복하소서!”
깜짝 놀라 깨어난 이수학이 어찌 이처럼 괴이한 꿈이 다 있는가 싶어 의아해하는데 문밖에서 웬 새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어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처마에서 울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꿈에 나타나 경춘의 넋이라고 했던 바로 그 파랑새였다. 아하, 경춘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겼구나! 무슨 불길한 일이 생긴게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한 이수학은 부모의 허락을 얻어 이튿날 아침 일찍 하인을 데리고 길을 떠나 영월로 향했다.
그리고 영월에 다다라 경춘의 집으로 찾아가 보니 예상했던 대로 경춘은 보이지 않고 경춘의 동생과 추월이 서럽게 울면서 자초지종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경춘의 시신은 거센 물살에 이미 멀리 떠내려갔는지 건져 올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 길로 금강 변으로 나간 이수학은 애처롭게 죽은 옛 사랑 경춘의 고혼을 위로하고 한바탕 소리 높여 통곡을 했다. 그리고 동헌으로 찾아가 부사 신광수를 만나 그의 죄상을 추상같이 꾸짖었다.
하지만 이미 죽은 경춘은 되살려낼 길이 없었다.
경춘이 원통하게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773년 12월 어느 날 <승정원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올랐다.
-영월부사 신광수는 지난날의 속되고 모진 잘못으로 파직시켰다. -
그리고 다시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795년(정조 19년) 경춘이 순결을 지키고자 몸을 날린 낙화암 곁 벼랑에는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 라고 새긴 아담한 비석 하나가 세워졌다. 경춘의 매운 절개와 지조를 기리는 이 비석은 당시 순찰사와 영월부사 ․ 평창부사가 뜻을 합쳐 세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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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원갑(黃源甲)
wghwang77@hanmail.net
1945년 강원도 평창 출생 / 1966년 서라벌예대 졸업/1982년 동아일보신춘문예․신동아논픽션 당선 / 1982~2002년 한국일보 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저서 ; 소설집 <비인간시대><나를 여왕이라 부르라><불패><연 수영><황혼의 분기점>
역사서 <역사인물기행><민족사의 고향을 찾아서><고승 과 명찰><인물로 읽는 한국풍류사><한국사를 바꾼 여인들><민족사를 바꾼 무인들><부활하는 이순신><인물로 읽는 삼국유사><전쟁으로 읽는 한국사><한국사를 바꾼 리더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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