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이따금 푸른 기별 ●지은이_윤백경 ●펴낸곳_시와에세이 ●낸날_2020. 12. 21
●전체페이지_136 쪽●ISBN 979-11-86111-89-5 03810/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0,000원
시인에게 있어 시는 살아 있음의 존재 이유
윤백경(본명 박미경)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이따금 푸른 기별』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윤백경 시인은 ‘시’를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삭막한 도시에서 찾아낸 풀포기 피어 있는 몇 평 땅과 어린아이가 흙장난을 하며 놀듯 주저 없이 언어로 유희하는 놀이가 시라고 한다.
하루 내
지끈지끈한 잠으로 보낸 저녁
꿈속에서도 두드림 소리는
칭얼거리며 들려오고
이러다가 병이 들고 말지
머리를 붉은 목도리로 친친 두르고
불현듯 나선 동네 한바퀴
어쩌다가 마주친 갈망이
너로 피어나던 날
그대가 못내 그리운 날
생각나고 또 생각나고
이렇게 지겨운 사랑앓이를
또다시 해야 하나
내가 잠 깨운 그 오지의 나날 또한
네 것이려니
―「시여」 전문
시인은 꿈에서도 “두드림 소리”로 상징되는 대타자와 싸우고 이렇게 지겨운 사랑앓이를 또 해야 하나 투덜거리면서도 “붉은 목도리로 친친 두르고” “어쩌다가 마주친 갈망”(이때의 ‘갈망’은 시적 에스프리 또는 영감(靈感)으로 표현할 수 있다)으로 끝내 시라는 꽃으로 피어나고자 한다.
나이가 드니
신발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신발이 나를 선택한다
스팽글 반짝반짝
신데렐라 유리 구두도
우아한 가죽코 슬며시 내민
코가 도도한 성수동표 수제구두도
다 무슨 소용
발에 안 맞아 신발이 날 싫어해
신어보면 알아
발을 옥죄어오고
발등을 짓눌러오고
피곤이 몰려오고 나면 알아
그냥 발일 뿐인 걸
당신들 날 그렇게 만만히
보지 말아
평생 당신들을 떠메고 다녔으니
나도 편안한 발을 선택할 거야
메롱메롱메롱
오늘도 웃고 있는 피에로처럼
오늘도 가장 편한 나의 집에
발을 담그고 탐험을 시작한다
―「구두」 전문
시인의 시는 안식처에 쉬고 있는 게 아니라 가장 내 몸에 맞는 신발을 신고 세계를 향해 “탐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시란 양식은 살아 있음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의 가장 큰 특색은 자아 속에 갇혀 있었던 시적 자아가 대타자에게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무성한 빛」, 「소녀들의 저녁 식사」, 「무연고 행려병자의 최후」, 「봄 바다, 파도 그리고 4월 16일」, 「가난한 자는 복이 없나니」, 「악몽」, 「한밤의 봄꿈」 등의 작품과 소외되고 버림받은 여성에 관한 시들(「혐오스런 마츠코를 위하여」, 「마츠코를 위한 전상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걸음」, 「세상 모든 혜경에게」)이 그것이다.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과 아버지에 관한 애정도 묻어난다. 존재를 무화시키고 덜어내고자 하는 시도 보인다. 이전 시집들과의 변화된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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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시인의 말·05
제1부
생의 항해·13
강진만 분홍나루에서·14
나의 사계 그리고 겨울·16
즐거운 늬우스·18
다시 꿀 수 있는 슬픈 꿈이기를·20
화려하나 쑥스럽지 않게·21
꼭 눈물처럼은 아닌·22
키덜트를 위한 제안·24
환상 신체·26
혐오스런 마츠코를 위하여·28
혐오스런 마츠코의 걸음·30
슬픈 제 그림자·32
정읍행 기차·34
지난여름뿐이어서·35
타임 찬스·36
제2부
하여 군산의 일이란·39
가난한 자는 복이 없나니·40
24시간 셀프 빨래방·42
소녀들의 저녁 식사·44
그것은 인생·46
그물망의 피그말리온·48
지난 시절의 수첩·50
무성한 빛·52
목포·54
차갑고도 쌉쌀한 저녁 내음·56
마츠코를 위한 전상서·58
눈 오는 밤 투썸에서는·60
동작 구름 카페에서·62
봄 바다, 파도 그리고 4월 16일·64
차마가 차마를·66
제3부
코로나 코리아 코로나19·71
오래된 슬픔·72
오늘 저녁 하얀 방을·74
자작나무숲에 가면·76
대반동의 대 반동·78
소녀시대·80
악몽·82
옥탑방 전설, 기다리는 자세로·84
시여·85
평론가에게·86
무연고 행려병자의 최후·88
구두·90
버려진 개 앞에서 슬픔이란 명사를·92
진저리쳐지는 생의 연습 같은·94
제4부
됐어·99
너를 만날 때·100
이사 ·102
그 푸른 골목길·104
보통저수지에서 보통으로·106
마침내 신포동·108
앗싸 호랑나비의 전언·110
모도에서·112
내 사랑 란희·114
한밤의 봄꿈·116
존엄한 가벼움 ·118
환상 기차 ·120
세상 모든 혜경에게·122
확진·124
시인의 산문·125
■ 시집 속의 시 한 편
얼떨결에 너를 내 것으로 갖게 된 순간부터 나의 고통은 시작되었어 이를테면 세상은 고해의 연속이라는 등 참는 게 인생이라는 등
거짓 소리, 거짓 역사, 트라우마에 노출된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재판하지 아니 재편이라고나 할까 번번이 새 방으로 갔다가 항의와 질시와 지적 탓에 그 여자 아나운서는 반쯤 얼이 나갔는데 놀랍게도 어떠한 사람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만의 이득을 취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잔인하게 보일러 소리 나는 뒷방으로 몰아넣어 가만히 있으라 그랬지 밤에 훌라후프를 돌리면 어떡해? 시끄럽잖아 너의 남자친구는 몇 번째냐? 친구야 오래된 흑점 위로 너의 확대된 동공이 보여
동생의 새 연애는 삼 년을 끌었지만 갈수록 태산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주로 모난 경계가 원인이었어 원통도 모르고 원망도 모르고 소문난 그녀에게 고민은 별로 없었어 애초부터 생각이 없었으니까 모욕이란 말도 나는 몰라 얼굴을 가리고 생식기를 밖으로 뾰족 내민 꽃처럼 나를 보아줘 아래에서 위로 휙, 휙 던진 꽃들이 날아가도록
나쁘다고 말하지 말아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이곳은 마침내 천국이야 목재가 잔뜩 쌓이고 더미 옆에서 작아지지 않는 네가 양말을 신고 있어 무채색이 좋아 무채색 빨주노초파남보 말고 하양과 검정으로 단순하게
음전하게 타오르는 불빛 생은 어느덧 고요하게 저물고 있어 어처구니들이 모여 사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악동 같은 처키가 기우뚱기우뚱 서로의 성감대를 훑는 능숙하고 우스꽝스러운 연애를 하고 있어 돌려먹기 혹은 돌려막긴 무슨 말이고? 전혀 아니지 아암 아지트가 된 우리 창고가 불타며 날아가고 있어 괜찮지 딸 몸을 작게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영문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저 기우뚱한 모자를 쓴 파리의 구두닦이 소년 같은 이따금 푸른 기별을 기다리며
―「즐거운 늬우스」 전문
■ 시인의 말
길게 침수되었다가
마침내 살아난
종이가 말한다.
이미 예전의 향기는 잊었다고
하지만 적막해도 그게 나았다.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
감사해.
2020년 초겨울
윤백경
■ 표4(약평)
매우 사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윤백경 시인의 이전 시집들을 읽었던 나로서는 그녀가 새 시집 원고라며 내 손에 턱 쥐여주었을 때 나는 지레 ‘오올!’ 하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탄성을 먼저 지르고야 말았다. ‘미성년자 출입금지’나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문고리를 이미 잡아버렸을 때의, 뭔가를 와락 저질러버리고 싶은 흥분에 안달하는 아이가 되고 마는 까닭은 그녀의 불량기랄까 엉뚱 발랄 카니발의 언어들이 이번에도 나를 꼼짝없이 유혹해버리고 말 거라는, 그래서 속수무책 또 그 모꼬지에 빠져버리게 될 거라는 굴복적 기대감 때문이었다. 과연 그녀는 이번에도 나의 방심한 의식의 허구리를 짓궂으면서도 넉넉한 입담 펀치로 쓰다듬듯 질러주었는데, 어째서 그것이 아프지 않고 울컥 위안이 되는가 했더니 실은 바람의 생채기를 깊이 입고도 눈물 맛 따위 까짓거 별로라는 듯 툭툭 털고 쑥쑥 자라나 버리는 해빈식물의 쿨함이 그녀 시의 주성분이었기 때문이다._구효서(소설가)
윤백경 시인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의 외면을 둘러싼 강고한 공간과 내면을 흐르는 완고한 시간으로 철저히 무장한들 소용이 없다. 그는 알싸한 스스로의 혀로 제 상처에 도취하여 평생 가여운 사랑법을 그러안고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의 벽에 갇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따금 푸른 기별”로만 온다. 곡두처럼 온다. 시인은 밤을 새워 운다. 누군가 옆에 있을 때에는 늑대 울음으로 울고 혼자 있을 때에는 슬픈 개처럼, 숨죽여, 운다. 마음을 온통 사랑 쪽으로 떨궈놓고. 그에게 사랑은 불가항력이다. 거부하고 저항해도, 눈물의 기억을 안고 돌아가는 곳은 또다시 사랑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다. 그렇게 뿌리치던 사랑으로 다시 되돌아갈 때, 그의 사랑은 가벼워진다. 사랑에 흔들리는 그가 이제는 흔들리는 사랑을 한다. 흔들리지 않으면 사랑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흔들린다. 모든 사랑의 고통이 그의 시에게 와서 포르르 마른다. 호흡과 완급의 미학적 사랑이 탄생한다. 마침내, 그의 사랑이 벽을 뚫고 나온다. 힘센 사랑이 벽을 뚫고 나온다. 벽 밖의 벽, 사랑의 또 다른 벽을 향하여._김명철(시인)
■ 윤백경(본명 朴美瓊)
서울에서 태어나 2005년 『시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풀꽃 연가』, 『슬픔이 있는 모서리』, 『밤이면 거꾸로 돌아오는 흰 길』, 『이별의 매뉴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