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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의 시대, 배도의 길
[Ⅰ]
고신교단에, ‘배도’라는 용어의 등장과 함께 중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부터 고려신학대학원 홈페이지에 ‘배도’ ‘배도한 집단’ 등의 용어가 사용되며 몇몇 목회자들 사이에 심한 설전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단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대한 문제로서 결코 간단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누가 어떤 말로 해명을 한다 할지라도 고신교단 소속 목회자들 사이에 배도논쟁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필자 역시 강사로 초대받고 있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성경신학회’가 주관하는 세미나에서 있었던 한 강의로 인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필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환경조건 가운데서 그런 용어가 사용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논의의 과정을 지켜볼 때 그 세미나와 관련된 자리에서 ‘배도’라는 용어가 한국교회 및 고신교단과 연관되어 사용된 것 같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고신교단 소속 일부 목회자들의 자존심이 심하게 상한 것 같다.
‘배도’라는 용어는 ‘거짓교회’와 통하는 말이다. 즉, 고신교단이 배도한 집단이라면 고신은 외형만 기독교의 색깔을 지닌 거짓교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단소속 목회자들이 그것을 심각하게 문제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도리어 그런 논의가 진행중인 현재의 형편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단이 이상할 따름이다.
[Ⅱ]
이번 세미나에서 필자가 요청받은 강의 주제는 “개혁교회 성도의 생활과 한국장로교회”인데, ‘배도’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그렇게 한다해도 원래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배도와 관련된 이런 중대한 논의를 할때 마저도 우리는 교회의 유익을 기억해야 하는 기본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배도에 관한 용어 발설자의 책임을 묻는 일에 치중한다거나 누가 옳고 그름을 밝히려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면 상호 비방으로 비화될 위험이 있으며 자칫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를 배도의 대상으로 삼을 위험마저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논쟁을 위한 형식에 치우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공론화 되었다고 해서 이미 제기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거나 비껴가려고 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적극적 논의를 통해 교회의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 성경말씀과 올바른 신학을 통해 교회를 일깨우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현재 배도에 대한 논의에 나서고 있는 목회자들의 개별적인 신학사고나 그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들은 대개 한국교회와 고신교단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이들이다. 그런 선한 입장을 가진 목회자들이 진정으로 깨우치고 싸워야할 대상은 따로 있다. 교회를 어지럽히고 속이는 사악한 무리가 있다면 힘을 합쳐 그들과 대항해 선한 투쟁을 해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논쟁의 흐름을 볼 때, 따지고 보면 같은 편에 서있는 목회자들 상호간에 불신의 감정이 키워져 반목하게 될까 우려된다. 그러므로 논쟁에 나서는 분들이 보편교회의 입장에 서서 좀 더 냉철해지기를 원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위한 관심이어야 하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합리화하거나 강화하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Ⅲ]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지켜보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첫째, 우리는 과연 배도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둘째, 한국교회는 과연 배도의 길을 걷고 있는가?
셋째, 고신교단은 한국교회의 다른 교파, 교단들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우리는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고신 교단만을 염두에 두고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질문이다.
필자는 우리 시대가 배도의 시대이며 한국교회는 배도의 길에 들어서 있으며 배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한다. 과연 그러한 판단이 옳다면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책임한 감정적 발설 이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국교회가 배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단순한 윤리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문제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배도 여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교회의 표지에 대한 실천과 해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윤리적 저급성의 정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변질 여부이다. 교회의 표지는 교회의 실천적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그것이 무시되거나 가볍게 여겨진다면 결국 교회가 더럽혀지게 되어 거짓교회로 발전해 가게 될 수 밖에 없다.
교의학에서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올바른 말씀선포와 올바른 성례의 이행, 그리고 올바른 권징의 시행을 말한다. 위의 세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교회 가운데서 무시된다면, 그런 교회를 거짓 교회라 가르치며 배우고 있다. 하물며 세가지 모두를 무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필자는 대다수 한국교회가 위의 세가지 교회의 표지를 모두 버렸으며 그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과 실천이 이미 사라졌다고 판단한다.
현재 대다수의 한국교회에는 올바른 말씀선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즉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는 많이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말씀선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공예배 시간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도구삼아 자기의 종교적 주장을 펼치며 교인들에게 주입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봉독하고 성경을 도구삼아 설교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성경을 자기 주장을 펼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교회를 이용하는 악을 행하는 것과 같다. 목사는 결코 자기 목적에 따라 설교해서는 안되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가운데 드러냄으로써 자신도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 선포되는 말씀에 겸손하게 참여해야 한다.
목사는 자기의 성향이나 취향에 따라 윤리적 설교를 해서는 안되며 자기 혹은 교회조직이 목적하는 바를 호소하기 위해 설교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 목사들은 대개 그런식으로 설교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신학적인 건전한 비판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올바른 성례의 이행은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는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한국교회에서 세례가 분별력없이 남발된 지는 이미 오래다. 세례를 베풀지 말아야할 자들에게 무책임하게 세례를 줌으로써 교회가 타락해 가게 된 것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그런 자들이 중요한 직분을 맡게 되고 교회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교회는 급속히 세속화되어 간 것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에서는 세례를 베풀기 위한 장로회(당회)의 문답을 매우 중요시한다. 즉 엄격한 문답이 없는 상태에서 세례가 베풀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철저한 문답절차 없이 세례를 베푸는 것을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군에서의 집단세례 문제는 참된 성례의 이행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만들뿐 아니라 성례를 극도로 세속화함으로써 교회를 타락하게 만든다. 지속적인 성찬을 염두에 두지 않는 세례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군집단세례에서 그것을 용납할 뿐 아니라 도리어 교회의 중요한 사업으로 잘못 생각하여 활성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는 신학자가 전혀 없음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올바른 성례가 이행되지 않는 교회는 스스로 참된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한국교회에서는 참된 권징이 왜곡되고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한국교회에는 참된 권징 대신에 건전하지 않은 교권만 활발하게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 않은 교회와 목사들도 많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일한 치리회에 속한 교회와 목사라면 교단내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을 보고 알면서도 침묵할 수는 없다. 더구나 보편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남의 일로 생각지 않는다.
교단의 지도급에 있는 목사가 공금을 횡령해도 징계를 받지 않으며 공문서를 위조해도 권징을 받지 않는다. 총회나 노회에서 불법선거를 해도 권징의 대상이 아니며 심지어는 돈봉투를 돌리고 향응을 베푼 것이 드러나도 징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반면 교단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교권으로 교단소속의 목사를 제명출교해도 별 반응이 없는 것이 고신 교단의 현실이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동일한 일이 되풀이되어도 소수의 목사들만 그에 대해 힘없는 문제제기를 할 따름이지 신학교 교수들이나 교단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며 한결같이 모르는 척 외면해 왔을 따름이다.
교회의 표지가 무시되는 이런 현상은 배도의 길을 걷고 있다는 지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교단의 재산 문제나 행정적인 문제 등 윤리적인 문제와는 달리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즉 거기에 참된 교회냐, 아니면 거짓교회냐 하는 심각한 문제가 달려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대로 우리 시대가 배도의 시대이며 대개의 한국교회가 그런 형편에 놓여 있다면, 배도의 길을 걷지 않는 교회나 교단은 마땅히 그들과 같지 않은 구별된 신앙의 고백과 실천적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들은 각기 상이한 교리와 고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무관하게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즉 한국교회 가운데는 다양한 교파와 교단들이 있지만 종교적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말씀’(sola scriptura)를 외치는 보수주의 교단에도 불건전한 은사주의, 성장주의, 세속주의, 자유주의 등 온갖 잡다한 신학사상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특색인 것이다.
[Ⅳ]
우리가 이러한 배도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기억해야할 바는 우리시대의 교회가 과연 배도한 모습을 띠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을 신중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단순한 감정으로 “우리는 배도한 교단이 아니다”라 한다든지 “나는 그런 식으로 배도를 말하지 않았다”는 식의 자기방어는 교회를 위한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왜 그런 말을 했느냐?” 든지 “당신은 그 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는 식의 공격적 자세도 교회를 위해 유익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배도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참된 교회를 위한 유익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적 논의를 통해 우리는 참된 교회의 회복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고신교단에서 배도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일어난 것은 그럴만한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라 판단한다. 우리 시대와 한국교회 혹은 고신교단이 배도의 길에 접어들어 서있는데도 무조건 아니라 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성도의 자세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발생한 이 논의에 대해 말씀과 올바른 신학의 잣대로써 분명한 확인을 하며 대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논의는 도리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사변적인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우리 시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잘못된 문제를 발견했다면 재빨리 확인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아서야 하며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그것이 곧 개혁신학을 탐구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종교적 습성에 물들어 있는 처지에서는 배도의 길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이는 시대가 만든 종교적 타성과 상식이 본질을 꿰뚫어 보는데 방해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교회의 깨어있는 성도들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 적어도 다음의 세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현실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해석이 성경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성경말씀을 통한 조명이 없이 스스로 배도한 집단이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세상에는 배도한 집단들이 무수히 많지만 자기 스스로 배도자라거나 배도한 집단에 속해 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없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항상 배도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확인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이켜 사는 사람들이다. 참된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회들이 아니라 성경속의 참된 교회들과 동일한 신학과 고백을 가지는 교회이다.
둘째, 역사속의 건전한 신학과 고백들을 잘 살펴야 한다.
그들의 신학과 고백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보편교회에 관한 인식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상속해 가시면서 역사적 선한 간섭을 해오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교회들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참된 교회들과 동일한 신학과 고백을 가지는 교회이다.
셋째, 우리시대의 건전한 흩어진 교회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참된 신학과 고백을 소유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함께 존재해 있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국에 존재하는 교회라는 이유로 한국교회임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교회에 속한 교회로 남아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참된 교회는 한국의 여러 교회들이 아니라 세계에 흩어져 있는 참된 교회들과 동일한 신학과 고백을 가지는 교회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Ⅴ]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의 구원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회다움과 교회답지 않음에 대해서이야기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의에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는 필자의 배도논의에 대해 오해할 자들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이런 논의에 접근하는 것은 한국교회와 고신 교단을 위한 사랑과 충정 때문이다. 이번 배도논쟁을 통해 고신교단에 속한 모든 이들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선한 자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속히 상실당한 교회의 표지들을 실천적으로 회복하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의 위기 앞에서 ‘평화’를 외치는 자들을 주의하며 쓴 소리를 귀담아 듣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위기의 때에 평화를 외치며 그것을 믿음이라 호도하던 자들은 모든 시대에 존재했다. 그들은 항상 ‘문제없다’고 할 것이며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라’ 주장하며 성도들을 안심시키려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할 자들은 그런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배도에 관한 논쟁으로 인해 세미나를 개최한 고려신학대학원 성경신학회가 불필요한 심적 부담을 느끼지 말기를 바란다. 도리어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문제가 제기 될 때 주변의 따가운 눈총이나 비난이 따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개혁주의자들은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신앙 안에서 발전적인 마음자세를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서로간 자기의 주장을 하되 교회를 위한 자세를 견지하게 되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로는 서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필자가 진정으로 염려하는 바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참된 교회를 세우려 애쓰는 성도들이 적진 앞에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광호 목사(실로암 교회)/고려신학대학원 성경신학회, 200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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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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