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배낭을 메고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를 향해 걷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국립묘지 주소는 광주시 북구 운정동이지만 옛 지명인 망월동이 훨씬 귀에 익숙하다. 원래 망월동 묘지는 광주시립 공동묘지이다. 이 묘지 3묘역은 34년 전 5.18 당시 처참하게 훼손된 희생자들의 시신을 가족, 친지들이 손수레에 싣고와 분노와 공포속에 서둘러 매장한 곳이다. 특히 연고자가 곧 나타나지 않았거나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시청 쓰레기차에 실려 이곳에 버려지다시피 매장되었다. 지금의 국립묘지와는 다리로 연결되어 마치 한 묘역처럼 느껴진다. 5.18은 지금에야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우지만 내가 이민할 당시까지도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가슴 속으로만 앓아야 했던 불온한 단어였다. 따라서 나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지금까지도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잔상으로 남아 있다. 더구나 윤공희 대주교는 나에게 화해와 용서를 화두삼아 묵상하라 하셨는데 좀처럼 아무런 상념도 떠오르지 않아 막막했다. 나는 80년 5월 서울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빨리 광주의 소식을 접할 수있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두차례의 헌혈과 매일 새벽 미사 후 절두산 성지를 찾아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분향하기 위해 국립묘지 정문인 '민주의 문'에 들어섰다. 국립묘지는 경건하면서 포근한 분위기가 마치 성지처럼 보인다. 또한 5.18의 배경과 진행과정, 역사적 의미를 배우고 체험할 수있도록 추모관과 역사의 문, 숭모루, 헌수기념비, 야외공연장 등이 갖추어져 후세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는 문화해설자의 안내로 참배 광장에서 분향한 후 추모관을 둘러보았다. 추모관에는 당시 사진과 동영상 및 많은 자료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따로 안내자의 설명이 필요없었다. 나는 그곳에 전시된 묘비명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 슬프다. 아 슬프다.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었으니 가엾어라" "당신이 못이룬 민주주의 꿈 우리가 이루겠습니다." "이승에서 못이룬 꿈 천상에서 이루기를" 등 많은 묘비명 가운데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어느 남편이 죽은 아내에게 바친 글귀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내가 그 앞에 한참 서있자 뒤에 있던 문화해설자가 다가와 설명한다. 죽은 여자는 당시 임신 8개월 만삭으로 집 앞 골목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죽었는데 총소리에 놀라 식구들이 나가 보니 숨을 거둔 여자 배 속에서 아기 발버둥이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곳에 진열된 수많은 사연을 읽어가면서 속에서 치받치는 슬픔을 가눌 길 없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는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제각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었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더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밖으로 나와 다리건너 구묘지로 향했다. 이곳에는 이미 국립묘지로 이장된 묘 1백 60여 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5.18과 직접 관계없는 이한열, 강경대, 김남주 시인 등 민주와 노동운동 인사 39명이 '열사'라는 이름으로 잠들어 있다. 신묘역인 이웃 국립묘지 분위기와는 달리 '간첩조작 국정원 해체하라'는 등 반정부 플래카드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고 묘비마다 구호 띠가 둘러 있었다. 마치 죽은이들의 시위 현장처럼 보인다. 또한 묘지 길목에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기념'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바닥에 깔려 가는 사람마다 짓밟고 지나가게 해 놓았다. 이 비석은 전두환 내외가 5.18 몇해 후 인근 담양에서 하루 유숙한 것을 기념해 세워 놓았던 것을 퇴임 후 뜯어 옮겨 놓은 것이다. 어쩌면 이름이라도 마음껏 짓밟으며 그의 악행을 영원히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다고 맺힌 한이 풀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두 부질없는 짓 같았지만 심정만큼은 이해할 수있었다. 나는 이곳 묘비를 둘러보다 다시 국립묘지로 갔다. 그곳에는 5.18 사망자와 부상 후 사망자 그리고 5,18 희생자로 사망한 사람 690명이 안장되어 있다. 이날 나는 묘비명을 하나하나 읽어가다 근래 작고한 언론인 송건호 씨와 리영희 씨 묘를 발견했다.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한 리영희 선생은 우리시대 대표적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 5.18 당시 옥고를 치루었다. 나는 그의 군더더기없는 문체와 정연한 이론을 좋아한다. 특히 그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요즘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모든 것을 이념의 잣대로 편을 갈라 모든 분야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 지식인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으로 믿는다. 그의 묘비에는 "이성의 붓으로 진실을 밝힌 겨레의 스승 여기에 잠들다"라고 쓰여 있었다.
상념에 휩싸여 숭모루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길가 바윗돌에 글귀가 보인다. 전남 매일신문 기자들이 5.18 이틀 후 작성한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5.20 전남 매일신문 기자일동" 한때나마 글쟁이로 살았던 나는 죽비로 세차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들의 심정을 가늠해 보면서 글을 생활의 방편으로 줏대없이 살아왔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5.18 민주화 운동 25주기 때 광주시가 집계한 희생자는 사망 168명, 행방불명 166명, 부상 후 사망 101명, 부상 3,139명 구속 1,589명으로 총 5,189명이다. 또한 5.18 유족회 등 4개 단체가 합동으로 집계한 숫자는 이보다 조금 더 많다. 그러나 5.18 단체들은 많은 생존자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못하고 있다며 지금도 호소한다. 이날 나는 5.18 당시 금남로에서 죽은 아들 묘에 잡초를 뽑고 있는 노인과 이야기 나누었다. 그는 아들이 당시 고등학교 2학년으로 살았으면 50이 넘었을텐데 지금도 교복입은 어린 모습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미술과 음악에 재능이 많던 아들을 잃고 한동인 방황했는데 지금은 미움도 원망도 사그러지고 아들이 생각나면 여기 와서 손질할 것도 없는 묘를 쓰다듬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는 조심스레 이제는 그들을 용서할 수있지 않겠느냐며 슬쩍 이야기를 던져 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사람이 미워하고 한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쉬운 줄 아느냐고 되묻는다. 노인은 이제는 모든 미움과 원한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살고 싶은데 아직도 일부에서 틈나는대로 아픈 상처를 헤집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5.18을 북한 특공대 6백 명이 와서 저지른 일이라느니 고정 간첩들이 선동해 일으킨 사건이니 말도 안되는 주장을 펴고 있다며 흥분된 어조로 말한다. 또한 그는 보수 논객 조갑제 씨도 현장 취재 후 민주화 시위에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정의했다고 주장했다. 이와함께 노인은 5.18은 국가 지정 기념일에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정부 추도행사임에도 매년 노래 하나 때문에 여, 야가 따로 놀고 있으니 이것이 정상이냐고 반문한다. 그는 광주시민들이 즐겨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은 안되고 합창단만 노래할 수있다니 이런 괴상한 논리가 어디 있느냐며 목청을 높인다.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에 미국에 와서 올해 5.18 기념식 보도를 보니 과연 노인 말대로 시민들이 외면한 반쪽 행사였다. 관변단체에서 관중을 동원하고 아르바이트 합창단을 급조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게 했다는 기사를 보고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왜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는 되면서 참석자들이 제창하면 안된다는 것인지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뭐하는 짓들인가 싶었다. 도대체 무슨 노래기에 그럴까 궁금해 검색해 보니 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만일 이념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정부에서 합창단을 조직해 부르게 하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노인 말처럼 가슴에 증오를 품고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따라서 용서는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자식, 부부사이에도 어려운 것이 용서다. 상처가 깊을수록, 배신감이 클수록 용서는 더욱 어렵다. 1984년 5월 광주를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화해를 주제로 한 강론에서 용서는 가난한 마음보다 더 위대하며 오직 하느님만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가지 비극으로 마음과 영혼에 씻을 수없는 깊은 상처를 받은 광주 시민들에게는 용서가 더욱 어려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화해의 은혜가 내려지는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정신이 불안과 쓰라림으로 가득찬 상처입은 아픔을 달래줄 수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그분 말씀을 떠올리면서 용서와 화해는 결국 당사자들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광주의 아픔을 치유하고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는 희생자들보다 정부와 국민 모두의 진정어린 화해의 몸짓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희생자들의 상처를 더해주는 언동이나 당국의 속좁은 처사는 도움이 안될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용서와 화해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같은 민족으로 특별히 커다란 장애가 없는만큼 모두가 조금씩 마음을 열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대한민국 내부의 화해도 못이루면서 남북통일 하겠다고 나선다면 거짓말이다.
호남 시인 강인한은 5.18을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꿈입니다. 아득한 석기시대 야만의 꿈입니다." (강인한 시. 이것은 꿈입니다에서)
(2014.6.3 뉴욕 虛壙)